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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701
한자 尹伊桑
영어음역 Yun Isang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창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음악가
성별
본관 칠원(漆原)
대표경력 베를린음악대학 교수
출생 시기/일시 1917년 9월 17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6년~1932년 - 통영공립보통학교 재학
수학 시기/일시 1932년~1933년 - 통영협성상업강습소 수료
수학 시기/일시 1934년 - 오사카상업학교·오사카음악원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56년 6월 - 파리국립고등음악원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57년 8월~1959년 7월 - 베를린음악대학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통영 사립 화양학원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통영공립고등여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15일 - 통영문화협회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통영현악4중주단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부산사범학교 교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노래하자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부산대학교에서 강의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총체극 「처용의 노래」 작곡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전시작곡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서울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양정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서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강사로 출강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제5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67년 6월 17일 - 동백림사건으로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69년 2월 - 출옥하여 서베를린으로 귀환
활동 시기/일시 1970년 6월 23일 - 독일 킬 문화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2년 - 베를린음악대학 명예 교수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72년 - 오페라 「심청」 초연
활동 시기/일시 1981년 -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작곡
활동 시기/일시 1984년 - 윤이상연구소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85년 - 독일 튀빙겐대학 명예 박사 학위 취득
활동 시기/일시 1988년 - 독일 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90년 - 윤이상 관현악단 발족
활동 시기/일시 1993년 - 윤이상 음악당 건립
활동 시기/일시 1995년 - 독일문화원 ‘괴테 메달’ 수상
몰년 시기/일시 1995년 11월 3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9년 - 윤이상 음악제 개최
추모 시기/일시 2002년 이후 매년 - 통영 국제 음악제 개최
추모 시기/일시 2002년 이후 매년 - 윤이상 콩쿠르 개최
추모 시기/일시 2004년 - 윤이상평화재단 설립
추모 시기/일시 2010년 - 윤이상기념공원 개관
출생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통영시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거주|이주지 독일 서베를린
학교|수학지 통영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통영시
학교|수학지 통영협성상업강습소 - 경상남도 통영시
학교|수학지 오사카음악원 - 일본 오사카
학교|수학지 파리국립고등음악원 - 프랑스 파리
학교|수학지 베를린음악대학 - 독일 베를린
활동지 통영공립고등여학교 - 경상남도 통영시
활동지 부산사범학교 -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1-263지도보기
활동지 부산대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산30지도보기
활동지 전시작곡가협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양정고등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서울대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덕성여자대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베를린음악대학 - 독일 베를린
묘소 독일 베를린
기념시설 윤이상연구소 - 북한
기념시설 윤이상관현악단 - 북한
기념시설 윤이상음악당 - 북한
기념시설 윤이상평화재단 -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22-38
기념시설 윤이상 기념공원 - 경상남도 통영시 도천동 148

[정의]

부산·서울·독일 등지에서 활동한 세계적인 음악가.

[개설]

본관은 칠원(漆原). 아버지는 윤기현(尹基鉉)이고, 어머니는 김순달(金順達)이다.

[활동 사항]

1. 일제 강점기

윤이상(尹伊桑)[1917~1995]은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 살 때 경상남도 통영시 도천동 157번지 본가로 가서 호적에 올랐다. 5살 때 호상서재(湖上書齋)에서 3년간 한학을 공부한 후에 1926년부터 1932년까지 통영공립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에 인근 예배당에 다니며 찬송가와 풍금을 배웠는데, 그것은 훗날 음악가로 꿈을 키우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1932년 통영협성상업강습소에 입학하여 2년 후 수료하고, 1934년 서울로 올라가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崔虎永)으로부터 2년 동안 화성학 중심의 작곡 지도를 받았고, 1935년 초에 고향 통영으로 귀향하였다.

1935년 4월에 윤이상은 일본 오사카[大阪]의 상업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오사카음악원에 등록하여 본격적인 음악 공부에 매진하였다. 여기서 작곡·첼로·음악이론을 공부하였지만, 갑작스런 어머니의 부음으로 급히 귀국하였다. 이후 가세가 기울어져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서 일하다가, 1936년 11월 8일 새문안교회 차재명(車載明)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38년 윤이상은 통영 산양면의 사립 화양학원[현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생활하였다. 1940년 초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파리국립음악원 출신의 엘리트 작곡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오[池內友次郞]에게 작곡을 배우는 한편, 반일(反日) 지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하다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귀국하였다. 이듬해인 1942년 4월 아버지마저 여의었다.

1944년 7월 윤이상은 무기 제조로 독립운동을 꾀하다 체포되어, 통영에서 두 달 간 구금 생활을 하였다. 9월 17일에 풀려나 체포령을 피하여 서울로 탈출하였고, 서울에서 해방을 맞았다.

2. 해방~6.25

8·15 광복 후 귀향한 윤이상은 통영공립고등여학교[현 통영여자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일하며, 시인 유치환(柳致環)·김춘수(金春洙)·김상옥(金相沃), 작곡가 정윤주(鄭潤柱) 등과 함께 1945년 9월 15일 통영문화협회를 창립하였다. 이를 통해 한글 강습회, 정서 교육 강습회, 시민 강좌, 연극 공연, 음악회, 농촌 계몽 순회강연 등을 가져 지역 문화를 형성하려 하였다. 이 무렵 윤이상은 통영여자중학교·통영고등학교·욕지중학교·통영초등학교·충렬초등학교·두룡초등학교·진남초등학교·용남초등학교·원평초등학교 등 9개교의 교가를 작곡하였고, 1947년 통영현악4중주단[윤이상·정윤주·최갑생·최상우]을 조직하여 지역 문화의 저변 확대에 헌신하였다.

윤이상이 부산으로 옮겨 온 것은 1949년 부산사범학교[현 부산교육대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였다. 이 무렵 윤이상금수현(金守賢)과 함께 노래하자회를 조직하여 개창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49년 1월 21일 창립된 노래하자회는 매월 새 노래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지역 문화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여기에는 김호민(金皓民)·정복갑(丁福甲)·김상용(金相用)·박지로·김진안(金璡安)·김창배(金昌培) 등 당대 부산의 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노래하자회는 한때 참가자가 800명이나 될 만큼 성황을 이루었으나, 6·25 전쟁으로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부산에서 윤이상부산음악가협회 정회원이자 작곡부 간사, 주간 『소년 태양』의 편집장직을 맡았고, 1952년에는 전시작곡가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김세형(金世炯)·이흥렬(李興烈)·윤용하(尹龍河)·김동진(金東振)·김대현(金大賢)·박태현(朴泰鉉)·나운영(羅運榮) 등과 음악 활동을 벌였다. 이때 「백두산 행진곡」등 전시 가요와 「산 넘어 남쪽」·「간호 언니의 노래」 등 전시 동요를 지어 보급하였다. 이 무렵 관청이나 학교 등이 어느 정도 기능을 회복하게 되자, 윤이상은 다시 부산사범학교의 교사로 복직하였고, 부산대학교에서 서양 음악사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또 유치진(柳致眞)이 극본을 쓰고 연출한 「처용의 노래」의 음악을 작곡하여 공연하였는데, 한국 최초로 시도된 음악·연극·무용의 종합 공연물이었다. 또한 이은상(李殷相)의 시 「낙동강」을 합창곡으로 만들어 전쟁 속의 젊은이들에게 조국 수호의 의지를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1951년부터 1953년 사이에는 아동 문학가이자 동요 작가인 김영일(金英一)과 함께 문교부 검인정의 학년별 『초등학교 새 음악』과 전시 초등학교 노래책 『소년 기마대』를 공동으로 제작하고, 부산에서 발표회도 가졌다. 여기에는 「아기 방울」·「오리 병정」·「꼬마 위문대」·「따리아 아가씨」 등의 동요가 실려 있는데, 이는 전쟁 와중에서도 자라나는 2세들의 정서를 함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윤이상은 음악 비평 활동을 꾀하기도 하였다. 1953년 2월 11일자 『부산 일보』에 「빈사한 예술가-채동선씨의 작고에」라는 글을 기고하였는데, 당대 최고의 음악 엘리트였던 작곡가 채동선(蔡東鮮)이 경제적 곤궁으로 빈사(瀕死)한 것을 두고 한국 사회와 음악가들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5월 30일자 같은 지면에 기고한 「앤드슨 양에게-당신의 영가는 당신의 피」는 미국의 알토 성악가 메리 앤드슨의 독창회를 참관한 후, 그녀의 흑인 영가에서 묻어나는 슬픔과 6·25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슬픔을 일체화시켜 두 민족의 동질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는 이 무렵 윤이상이 민족상잔의 비극적 현실을 얼마나 고뇌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3. 휴전 협정 이후

1953년 휴전 협정과 함께 윤이상은 서울 성북동으로 이주하여, 양정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하는 한편 서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동시에 연주회와 창작 및 비평 등 활발한 음악 활동으로 한국 음악계에서 부동의 음악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불혹의 나이를 앞둔 1956년 6월 윤이상은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9년 7월 독일 베를린음악대학을 졸업한 뒤에 각종 음악제에서 잇단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윤이상은 1960년 4·19 혁명 시기에는 한국의 4·19혁명에 대한 독일 사회의 인식을 소개하는 글을 『국제 신보』에 게재하기도 하는 등 한반도의 정치 상황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국제적 명성을 쌓아가던 윤이상에게 뜻밖의 불운이 닥쳤다. 1967년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조작한 유학생 간첩단 사건인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납치된 것이다. 북한을 이롭게 하는 「국가 보안법」의 이적 행위라는 죄목으로 윤이상은 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결국 1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수감 중 가혹한 고문으로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주도한 외교적 압력과 독일 정부의 조력으로 1969년 2월 말 마침내 윤이상은 서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윤이상은 1970년 독일 킬(Kiel) 시의 축제 주간에 오페라 「유령의 사랑」을 성공적으로 초연하였고, 1972년 서베를린음악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뮌헨 올림픽에서 공연한 오페라 「심청」의 성공으로 동백림 사건을 극복하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보냈다. 1980년대에 윤이상은 5·18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광주여 영원히」[1981]를 비롯하여,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 협주곡 「견우와 직녀」[1982],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교향곡 제5번」 등을 통해 남북 화해의 길을 모색하고,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갈구하는 ‘실천하는 음악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유럽에서 현대 음악 기법을 익힌 윤이상은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어법을 창출해 냈다. 그것은 동아시아 음악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끊임없이 다원성을 지향하는 열린 음악관에서 기인하였다. 민족과 인류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모색한 윤이상의 세계관 역시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윤이상은 끝내 자신의 고향 통영을 다시 밟지 못한 불행한 예술가이기도 하였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은 꿈에도 잊지 못한 고향을 그리며, 1995년 11월 3일 베를린의 발트병원에서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윤이상은 평생에 걸쳐 가곡 5편, 동요 70여 편, 독창곡 4곡, 독주곡 18편, 실내악곡 52편, 협주곡 13편, 관현악곡 21곡, 칸타타 및 합창곡 10편, 그리고 4편의 오페라 등 총 190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1937년에 출간한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 1949년 발간한 가곡집 『달무리』[행문사]가 있다.

[묘소]

묘소는 베를린에 마련되었고, 묘비도 세워졌다.

[상훈과 추모]

1955년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 6월 23일에 독일 ‘킬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88년에는 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을 수상하였고, 1995년에 독일문화원의 ‘괴테 메달’을 수상하였다. 1999년 통영에서 윤이상을 추모하는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고, 2002년 이후 매년 윤이상 콩쿠르가 개최되고 있다. 2004년 서울에 윤이상평화재단이 설립되었으며, 2010년 고향인 통영의 생가에 윤이상 기념 공원이 조성되어 개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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