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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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春洙 |
영어음역 | Gim Chunsu |
이칭/별칭 | 대여(大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양왕용 |
[정의]
1950년대 부산에서 활동한 시인.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별칭은 대여(大餘). 아버지는 김영팔이고, 어머니는 허명하이다.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명경숙으로, 일제 때 경상남도 도지사를 지낸 명도석의 딸이다. 명도석은 1945년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마산지부장을 지냈다.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활동사항]
김춘수(金春洙)[1922~2004]는 1922년 11월 25일[음력 9월 24일] 경상남도 통영시 동호동 6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35년 통영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경기공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응을 하지 못해 졸업을 3개월 앞두고 자퇴하였다. 1940년 일본으로 유학을 가 니혼대학교 예술과에 입학하였다. 1942년 12월 일본 천황과 총독 정치를 비판한 혐의로 구속되어 요코하마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경찰성에 6개월간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는 바람에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1945년 광복 후 고향 통영에서 유치환(柳致環), 윤이상(尹伊桑), 김상옥(金相玉), 전혁림(全爀林), 정윤주(鄭潤柱)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여 문화 예술 활동을 하였다. 1946~1948년 통영중학교, 1949~1951년에는 마산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창작 및 동인 활동을 계속하여, 첫 번째 시집 『구름과 장미』, 두 번째 시집 『늪』을 발간하였다. 1951년 마산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시 창작과 시론, 시 비평 등을 하였다.
1954~1957년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시간 강사, 영도에 있던 연세대학교 부산분교에 전임 대우로 출강하였다. 1957~1960년 해군사관학교와 해인대학교[현 경남대학교]에 출강하였다. 진해의 해군사관학교 강사 시절 김춘수는 마산에 집이 있어 일주일에 3일은 부산의 친지 및 후배인 시인 강상구(姜尙求), 영화 평론가 허창(許彰)의 집에 기거하면서 문인들과 어울렸다. 특히 시작과 시 이론의 동반자였던 부산대학교 국문과 출신의 고석규(高錫珪)와 가까이 지냈다.
부산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고석규는 김춘수보다 열 살 어렸는데, 두 사람은 밤새워 문학과 철학에 관해 토론을 하고는 했다. 또한 고석규와 친한 부산대학교 재학생 손경하, 하연승, 『국제 신문』의 기자 조영서, 유치환의 맏사위이자 문학 평론가인 김성욱 등과 미화당 백화점에서 주 1회 정도씩 문학 방담회를 가졌다. 대학생 중심의 동인지인 『신작품』 제8집[1954. 12]에 기성 시인인 김춘수가 시 「꽃밭에 든 거북」과 시인 서정주(徐廷柱)에 대해 쓴 「서정적 인간」을 기고한 것도 고석규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김춘수는 1956년 나온 『시 연구』의 발간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시 연구』는 『신작품』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전국의 실력 있는 문인들을 끌여들여 종합 시 동인지로 만들자는 고석규의 제안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고석규는 김춘수에게 편집위원으로 참여할 것과 부산대학교에 재출강할 것을 요청하였다. 『시 연구』의 편집 위원은 김춘수, 김현승(金顯承), 김종길, 김성욱 등이고, 필진은 『신작품』의 동인들과 김현승, 김남조(金南祚), 신동집(申瞳集), 송욱(宋稶) 등이었다. 특집은 「모더니즘 비판」이었고, 권두 에세이는 유치환이 썼다. 표지는 통영 출신의 화가로, 당시 마산에 머물던 전혁림이 그렸다. 1958년 고석규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시 연구』는 창간호 한 권만 내고 폐간되었다.
김춘수는 1965~1978년 경북대학교 교수, 1978~1981년 영남대학교 교수를 거쳐 1981년 민주정의당 소속 제11대 국회 의원이 되었다. 1983년 문예진흥원 고문, 1986년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1991년 한국방송공사[KBS] 이사가 되었다. 2004년 11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김춘수는 1948년 자비로 출간한 『구름과 장미』를 시작으로 생전에 16권의 시집을 냈고, 유고 시집 1권이 있다. 그 밖에 시론집과 시 비평집을 출간하였다. 첫 번째 시 이론서는 오영진(吳泳鎭)과 박남수(朴南秀)가 주도한 문예 잡지 『문학 예술』 1955년 8월~1956년 4월호에 연재한 「형태상으로 본 한국의 현대 시」를 묶은 『한국 현대 시 형태론』[해동문화사, 1958]이다. 김춘수는 이 책으로 1959년 4월 문화교육부의 정교수 자격 심사를 통과하였다.
『한국 현대 시 형태론』은 신체시가 탄생한 조선 말기부터 1950년 6·25 전쟁 이후까지 씌어진 한국 현대 시의 형태적 특질을 밝힌 책이다. 한국 현대 시사에서 존재론적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김춘수는 광복 이후에 활동한 참여시의 선구자 김수영(金洙暎)과 대척되는 위치에서 순수시의 대변자 역할을 하였고, 1970년대 이후에는 무의미 시를 줄기차게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
김춘수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매산리 산17 광주공원묘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춘수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한 만큼 상도 다양하게 받았다. 1958년 제2회 한국 시인협회상, 1959년 제7회 자유 아세아 문학상, 1966년 경상남도 문화상, 1992년 은관 문화 훈장, 1997년 제5회 대산 문학상, 1998년 제12회 인촌상, 2000년 제1회 청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김춘수를 기리는 사업도 전개되어 2007년 11월 29일 경상남도 통영시 항남동에 「꽃」 시비가 건립되었고, 2008년 3월 28일 통영시 봉평동 451번지에 김춘수 유품 전시관 개관, 2010년 6월 통영시 항남동 오거리 쌈지 공원에 김춘수 전신상이 세워졌다. 2010년 10월 1일에는 통영시에서 김춘수 시문학상을 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