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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485
한자 金守賢
영어음역 Geum Suhyeon
이칭/별칭 김수현,낙초(洛初),가락(駕洛),호시 유메지[星夢二]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 2650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창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음악가
성별
본관 김녕
대표경력 한국작곡가협회 회장
출생 시기/일시 1919년 7월 22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7년 - 부산제2공립상업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40년 - 동양음악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부산좌에서 독창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김해·마산·삼천포·통영 순회공연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동래고등여학교 음악 교사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전혜금과 결혼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경남음악협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경남도립극장 극장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노래하자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새로이출판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경남여자중학교 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6년 - 통영고등학교 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문교부 편수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녹조 훈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63년~1965년 - 『국제 신보』 고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8년 - 금잔디유치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70년 - 음악 잡지 『월간 음악』 창간
활동 시기/일시 1972년 - 음악저작권협회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81년 - 외솔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82년 - 한국작곡가협회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82년 - 한성로타리클럽 회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92년 8월 31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 2월 21일 - 금수현 노래비 세움
출생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 2650 전금마을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학교|수학지 부산제2공립상업학교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 503-15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동양음악학교 - 일본 도쿄
활동지 동래고등여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3동 산7-1지도보기
활동지 경남여자고등학교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558지도보기
활동지 경남여자중학교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중로 142[수정동 365]지도보기
활동지 부산사범학교 -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1-263지도보기
활동지 통영중학교 - 경상남도 통영시 봉평동 196
활동지 부산좌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5가 18지도보기
관련 유적 금수현 노래비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지도보기

[정의]

부산 출신의 작곡자이자 음악 교육자.

[개설]

본관은 김녕. 호는 낙초(洛初)·가락(駕洛)이고, 창씨명은 호시 유메지[星夢二]이다. 아버지는 김득천(金得千)이다. 금수현(金守賢)[1919~1992]은 1919년 7월 22일에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 전금 마을에서 김녕 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의 26세손으로 태어났다. 정미업과 땅콩 재배를 하던 아버지 김득천의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소년 시절 금수현은 독실한 불교 집안의 비교적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학예회 때 담임인 김두성(金斗星)의 칭찬에 크게 고무되어서 음악에 입문하였다. 금수현은 사업가나 금융가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산제2공립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양음악학교 본과에서 성악[바리톤]을 전공하였다.

[활동 사항]

1941년 5월 귀국한 금수현부산좌[현 부산 극장]에서 독창회를 갖고, 친구들과 노래극을 만들어 김해·마산·삼천포·통영 등지를 순회공연하였다. 1942년 4월에 동래고등여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소설가 김말봉(金末峰)[1901~1961]의 딸 전혜금(全蕙金)을 만나 1943년 10월 27일 결혼하여 금난새를 낳았다. 전혜금은 동래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교편을 잡았던 금수현의 제자였다. 김말봉은 전혜금의 의붓어머니였는데, 이런 연유로 1947년 작곡한 금수현의 대표작 「그네」가 김말봉의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46년 금수현은 부산의 음악인과 음악 교사들을 중심으로 경남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경남음악협회는 경상남도에 음악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교육 음악부·성악부·기악부·작곡부의 4부문으로 구성되었다. 또 음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꾀하던 금수현은 경남 음악 콩쿠르 대회를 개최하고, 『음악 주보(音樂週報)』를 발간하였다. 경남음악협회가 발간한 『음악 주보』는 해방 후에 나온 첫 음악 간행물로, 정기 간행물이었다. 8절지 1매[4면]를 프린트한 것이었는데, 음악계의 주요 뉴스와 교재용 노래 1곡을 실어 부산과 경상남도의 각 학교에 배부하였다. 『음악 주보』는 월 3원의 유가지(有價紙)였음에도 희망 학생이 많아 매주 2천 부를 찍어야 했다. 이 경험으로 1951년 금수현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새로이출판사를 차려 일반 도서 및 악보 출판을 시도하였다. 그러한 경험은 1970년 음악 잡지 『월간 음악』을 창간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1947년 금수현은 경남 도립 극장의 극장장으로 취임하여 한국의 쟁쟁한 음악가들을 초청해 매달 1회의 ‘희망 음악회’를 열었다. ‘희망 음악회’는 희망하면 누구나 무대에 섰으며, 곡목은 청중의 요청에 따라 조정되는 독특한 형식이었다. 1949년에는 음악인뿐만 아니라 문화를 사랑하는 30여 명을 모아 노래하자회를 조직하고, 매월 쉬운 새 노래를 만들어 미국 공보원에서 청중들과 함께 부르는 개창 운동을 전개하였다.

금수현경남여자고등학교 교감, 부산사범학교 교감을 거쳐 1952년 34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경남여자중학교 교장으로 발탁되어 지역 음악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6년 2월에는 통영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1957년에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6년간 근무하였다. 편수관은 각급 학교의 교육 과정을 정하고, 국정 교과서의 편찬과 검인정 교과서의 검열 등을 수행하는 주요한 직책이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금수현은 『국제 신보』 고문을 맡아 「거리의 표정」이라는 칼럼을 썼으며, 이를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책으로 묶어 간행하였다. 또한 1965년 ‘영 필하모니관현악단’ 이사장직을 맡았고, 1968년 금잔디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1970년에는 『월간 음악』을 창간하였다. 그리고 1972년 음악저작권협회 회장, 1982년 한국작곡가협회 회장과 한성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지냈다. 이런 가운데 그는 말년에 필생의 작품인 오페라 「장보고」를 3년여 각고 끝에 완성하였다. 초창기 부산에 서양 음악의 씨앗을 뿌린 금수현은 당뇨 합병증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2년 8월 31일,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표준 음악 사전』[월간음악출판부, 1980]·『음악의 문』·『거리의 심리학』·『나의 시대 70』[월간음악출판부, 1989] 등이 있으며, 발간된 2권의 가곡집에는 「그네」·「파랑새」·「구름」 등 24편의 가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오페라 「장보고」, 기악곡으로 오페라 서곡 「새벽의 바다」, 기타 독주곡 「가락」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0년에 녹조 훈장을 수상하였고, 1981년에 외솔상을 수상하였다. 1992년에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금수현 노래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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