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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2860
한자 國樂
영어의미역 Traditional Korean music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오진호

[정의]

부산에서 전승 또는 제작되고 있는 전통 음악.

[개설]

전통 음악은 일반 민중이 즐겼던 민요·농악부터 중인이나 선비가 즐겼던 풍류 음악, 왕과 신하가 즐겼던 궁중 음악, 종교 음악인 범패와 굿 음악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은 계층과 그들의 문화를 아우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 음악은 대개 특정한 작곡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전승되면서 새로운 곡이 첨부되기도 하고,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전통 음악은 상고 시대부터 존재해 왔다. 그중 일부는 기록에 남아 있지만 소략(疏略)하며 대개 민간의 음악은 기록에 남지 못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확인하기 어렵고, 추측만 가능하다. 부산 지역과 관련된 전통 음악 역시 약간의 기록과 현재 남아 있는 전통 음악을 근거로 역사를 살펴봐야 하는 한계가 있다.

[상고 시대]

상고 시대부터 존재해 온 부산 지역의 전통 음악은 민요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민요는 대개 노동요와 같이 노동 행위를 하면서 일의 능률을 높이고, 노동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불렀다. 현재도 「수영 농청놀이」[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2호], 「다대포 후리 소리」, 「동래 지신밟기」[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4호]와 같은 민요들이 남아 있지만 이런 노래들이 삼국 시대 이전부터 불렸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비슷한 민요들이 상고 시대에도 불렸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까지 부산에서 전래되거나 만들어진 악곡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통일 신라 시기에 신라 음악의 편성은 삼현(三絃)인 가야금·거문고·향비파와 삼죽(三竹)인 대금·중금·소금, 박판(拍板)과 고(鼓)이었다. 신라 음악은 신라에 가야금을 전해 준 우륵(于勒)이 지었다는 12곡, 옥보고(玉寶高)가 지었다는 거문고곡, 신라 향가 등을 언급할 수 있지만 모두 부산과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려 때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정서(鄭敍)는 부산 지역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정서의 본관은 동래로 호가 과정(瓜亭)이다. 인종(仁宗)의 비 공예 태후(恭睿太后) 동생의 남편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1151년(의종 5)에 폐신(嬖臣) 정함(鄭諴)·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동래 및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1170년(명종 1)에 풀려났다. 정과정곡은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 가요 가운데 작자가 확실한 유일한 노래이다. 우리말 노래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하고 『대학후보』에는 노래와 함께 곡조도 표시되어 있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 다양한 국악의 형태를 만날 수 있다. 우선 불교의 의식 음악인 범패(梵唄)를 들 수 있다. 범패는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로 범음(梵音) 또는 어산(魚山)이라고 한다. 범패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3~4세기 무렵 한국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그 의식과 함께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雙磎寺)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문(眞鑑禪師大空塔碑文)[804]에 의하면 진감 선사가 당나라에 갔다가 830년 귀국하여 수많은 제사들에게 범패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진감 선사 이전에도 범패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월명사 도솔가조’에 “오직 향가만 알고 범패는 부를 줄 모른다.”고 한 데서 범패를 부르는 전문적인 승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남 지역의 범패 중 통도사(通度寺)와 범어사(梵魚寺)의 소리가 유명하여 이를 통범(通梵) 소리라 하였다고 한다. 1700년 범어사에서 간행된 『어산집(魚山集)』은 재의 순서에 따른 절차와 게송(偈頌)의 가사를 적어 놓고 있다. 『어산집』의 책판[1권 1책 30판]은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7호로 범패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부산 지역의 범패의 전통은 범어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어산회를 중심으로 이어져 오다, 1972년 금정산 국청사 주지 김용운이 부산시 무형 문화재 제1호로 범패의 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으나 이듬해 입적하여 지정이 취소되었다. 이후 김용운의 제자들이 영산재의 의식 절차를 정비하여 1993년도의 지정 때[부산시 무형 문화재 제9호] 문영호(文瑛浩)는 도량장엄과 범패, 조병태(趙炳台)는 범패, 김영규(金英奎)는 나비춤, 신석갑(辛錫甲)은 바라춤의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동래부의 악공·기생의 공연 문화는 동래 지역의 지방지류인 『동래부지(東萊府誌)』, 『동래부사례(東萊府事例)』에 단편적으로 악공과 기생의 수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동래부사가 왜[일본] 사신을 영접하는 모습을 그린 『동래 부사 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에 나타난 취고수와 세악수의 행진 음악과 연향의(宴享儀) 때의 삼현 육각(三絃六角)과 기생이 춤추는 모습이 남아 있다. 그리고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는 왜의 사신에 따른 연향의(宴享儀)의 종류와 절차가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이때 어떤 음악을 연주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1828년(순조 28)의 『진찬의궤(進饌儀軌)』에 의하면 당시 영남 지역 10곳의 기생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동래에서는 도화(桃花)라는 기생이 참여하였다. 이렇게 궁중 잔치에 참여한 기생들은 궁중에서 배워 온 기예(技藝)를 각 지역 관아에 다시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인 「동래 고무」[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10호]는 원래 관아의 기생들이 추었던 춤이고, 「동래 야류」[중요 무형 문화재 제18호], 「수영 야류」[중요 무형 문화재 제43호]의 길놀이 과정과 춤의 반주에도 기생과 악공의 공연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 후기 각 지역의 관아의 교방(敎坊)에는 관기(官妓)와 악공(樂工)이 소속되어 있어 관아의 행사 노래·춤 등의 기예를 제공하였다. 조선이 망하자 각 지역의 교방청의 기녀들은 기생조합을 결성하였고, 나중에는 일본식의 이름인 권번(券番)이라 불렸다. 동래 교방청은 1910년 국권 강탈과 더불어 해체되고 관기(官妓)들은 1910년 동래기생조합(東萊妓生組合)을 형성하였고, 1912년에는 동래예기조합(東萊藝妓組合)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얼마 후에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개칭되었다.

동래권번의 기생들은 검무, 북춤, 가곡, 시조와 같은 관아에서 연행한 레퍼토리도 익혔지만, 점차로 판소리, 산조, 잡가, 신민요와 같은 당시 유행하는 연행 예술도 습득하였다. 교방청의 기녀들과 달리 공식적인 행사에 예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 돈을 받고 예능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유행하는 것을 익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제 강점기의 권번은 검무와 북춤과 같은 전통 예술을 보존하는 유일한 창구이자 전승의 공간으로 기능을 하였지만, 사회적 인식은 좋지 못하여 국악에 대한 인식을 나빠지게 하는데 일정한 역할도 하였다.

1934년 2월 동래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동래 야류」를 비롯한 여러 민속 예술들이 공연되었다. 동래 줄다리기와 길놀이는 정월에 열리는 고을 굿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이 속에서 「동래 야류」, 「동래 지신밟기」 같은 여러 민속 예능이 함께 연행되었다. 이후 동래 줄다리기는 전승이 중단되었고, 1969년 복원되어 재현된 바 있다.

1937년 3월 30일 중앙방송국에서 부산정악구락(釜山正樂俱樂)이라는 이름으로 영산회상을 연주하였다. 연주자는 이기열[양금], 임석윤[현금], 김봉관[단소], 황하윤[해금], 오일동[장고]이다. 부산에서도 율회(律會) 활동이 이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일제 강점기 국악 활동은 대체로 권번을 통해 이루어졌다. 민중에 의해 민요와 같은 노동요와 무속 집단의 굿도 연행되었겠지만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서술할 수 있는 내용이 적다.

[해방 이후~1980년대 초반]

1945년 해방 전후 한국은 근심한 혼란기를 겪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와중에 부산은 여러 지역에서 모인 피난민들의 피난처 구실을 하였고, 임시 정부의 청사가 있어 임시 수도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통 예술 후원자인 김동민(金棟旻)[1910~1999]은 1945년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자택에서 경남국악원[이후 민속무용연구소로 개칭]을 개원하여 일반인을 대상으로 무용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곳에서 강태홍(姜太弘)[1847~1957]을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 권번에서 사범으로 활동하던 명인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여 전통 춤을 가르쳐 전통 예술의 외연을 확장하였다.

1951년 4월 10일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개원[초대 원장 이주환]되었다. 전쟁 와중에 국립국악원은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부산 지역에 궁중 음악과 정악을 소개해 주었다.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는 1958년 8월 대한민국 수립 1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개최되어, 1999년 한국 민속 예술 축제로 명칭이 바뀌었다. 전국 민속 예술 축제는 일제 강점기, 6·25 전쟁 등으로 사라져 가는 우리 전통 공연 예술을 다시 발굴하여 재현하는 데 앞장섰다. 부산 지역에서도 「동래 야류」, 「수영 야류」, 「수영 농청놀이」 등 여러 종목을 발굴하여, 중요 무형 문화재 및 부산시 지정 무형 문화재로 지정받아 보존과 전승에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66년 부산민속예술보존회[1969년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로 개칭]와 1971년 수영고적민속보존협회의 결성은 부산 지역의 민속 예술을 발굴하고 보존·전승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현재에도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는 「동래 야류」, 「동래 학춤」[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3호]·「동래 지신밟기」·「동래 고무」의 보존과 전승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수영고적민속보존협회는 「수영 야류」·「좌수영 어방놀이」[중요 무형 문화재 제62호]·「수영 농청놀이」의 보존과 전승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63년 부산시가 정부 직할시로 승격되자 3월 2일 전해에 발족한 한국국악협회 경상남도지부[부산시 포함]에서 한국국악협회 부산지부로 독립하여 발족하게 되었다. 초대 지부장에는 김동민[1910~1999], 부지부장에 박송강, 최장술 두 명이 선임되었다. 이후 1986년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회로 명칭이 바뀌면서 한국국악협회 부산지부도 한국국악협회 부산지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국국악협회 부산지회는 부산 지역 국악인들이 처음으로 모여서 만든 공식적인 조직으로 당시 부산에서 활동한 강백천(姜白川), 송순섭, 박봉술 등의 명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었다.

1973년 3월 국악사양성소 동문인 조창훈, 박정배, 이의경, 이세환과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속 음악을 하는 국악인과 취미로 공부하는 사람이 모여 부산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였다. 초대 단장은 조백진이었고 악장은 조창훈, 총무는 이의경이었다. 이후 부침을 거듭하다 1979년 5월부터 1984년 5월 23일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으로 창단될 때까지 이의경이 단장을 맡아서 활동하였다.

부산국악관현악단은 당시 부산 유일의 국악 관현악 단체로 국악 협회에서 할 수 없는 국악 관현악 및 정악곡을 연주하여 부산 시민들에게 다양한 국악을 들려 준 점과 당시 부산 지역의 정악과 민속악을 하는 국악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82년부터 2008년까지]

1982년 부산대학교에 처음으로 국악학과[현 한국음악학과]가 창설되었다. 부산대학교 국악학과는 부산·경상남도·울산 지역 유일의 국악을 가르치는 고등 교육 기관으로 초대 학과장은 김길운[1946~2005]이었다. 부산대학교 국악학과는 부산·경남 지역의 국악인을 양성하는 중추적인 기관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많은 국악인들을 배출하여 부산 지역 국악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은 1984년 5월 23일 창단되었으며 초대 지휘자는 이의경이었다. 매년 신년 음악회를 시작으로 다양한 정기 연주회와 특별 연주회를 하고 있다.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은 부산국악관현악단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시립 연주 단체로 보다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활동을 통해 부산 시민들에게 국악을 향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는 1979년 5월 김춘지[1919~1980]를 보유자로 중요 무형 문화재 제23호 지정받았다. 그러나 김춘지가 이듬해 사망하였고 이후 원옥화, 구연우 등이 모두 사망하여 전승이 어려웠으나 1989년 7월 신명숙을 보유자로 부산시 무형 문화재 제8호[현 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제 제8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강태홍류가야금산조보존회가 발족되어 부산 지역에서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의 보존과 전승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2004년에는 창작 음악 파트가 본격적인 공연 활동을 하면서 2006년 효산가야금연주단을 창단하여, 부산 지역에서 창작 음악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남산놀이마당[1992년], 효원국악관현악단[2000년], 국악실내악단 산·바다·해[2003년], 부산가야금연주단[2005년], 국악그룹 아비오[2007년] 등 많은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국악 단체들이 생겨 부산 국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2008년 국립 부산 국악원이 개원하였다. 다른 지역의 국악원들과 다르게 국립 부산 국악원은 2001년 ‘국립 부산 국악원 설립을 위한 범시민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지역의 시민들과 문화 예술인들이 설립을 위해 범시민적 운동으로 확산되면서 2002년 설립이 확정되었다.

국립 부산 국악원은 다양한 국악 및 전통 예술 공연을 시민들에게 보여 주고, 청소년과 교사들에게 국악 교육을 제공하는 등 국악의 대중화를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부산·영남 지역의 전통 예술을 연구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학술 자료를 발간하고, 이를 공연하여 지역의 전통 예술을 계승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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