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부산에서 희망을 찾는 일본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69
한자 釜山-希望-日本人
영어의미역 The Japanese people who find hope in Busan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정민

[신라대학교 국제관광학부 조교수 미야기 케이나 씨]

1. 청춘, 부산 아줌마에 반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차는 뭐가 좋으세요? 커피도 있고, 녹차도 있고……. 그럼, 재스민 차로 합시다. 오키나와[沖縄]에서는 재스민 차 많이 먹어요. 저는 오키나와 사람입니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죠?”

신라대학교 국제관광학부 조교수로 재직 중인 미야기 케이나[宮城佳奈, 38세]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여러 번 놀랐다. 소탈하고 싹싹하게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 놀랐고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놀랐다. 그리고 묻기도 전에 자신의 고향을 밝히고 스스로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오히려 이쪽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솔직함과 당당함으로 무장한, 시쳇말로 쿨(cool)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여겨졌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미야기씨가 부산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95년이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녀는 우연히 신문에서 한 광고를 접하게 된다. 그것은 부산에서 홈스테이하며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참가자 모집에 관한 것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미야기씨는 바로 신청 접수를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후텐마[普天間] 기지 근처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그녀 역시 어릴 적부터 외국인을 자주 접해 왔던 터였다. 때문에 외국이나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은 비교적 적었다. 그저 바다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고 기회가 닿으면 가보고 싶다고 여기고 있던 찰나에 부산에 방문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부산에 도착한 이후 19세 소녀의 마음은 거침없이 부산에 빠져들고 말았다. 부산이라기보다 부산 아줌마의 매력에 흠뻑 젖은 것이다.

미야기씨는 홈스테이 가정에서 만난 부산 아줌마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 여자 경찰관 정정숙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미야기씨에게는 여자 경찰관이라는 아줌마의 직업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지만 무엇보다 야간 대학에 다니며 공부하는 모습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프로페셔널 한 커리어 우먼이자 만학도이기도 하며, 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아내이기도 한 아줌마. 그런 아줌마의 모습에 반한 소녀는 어렴풋하게나마 ‘이곳에서 결혼하여 아줌마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품게 되었다.

이렇게 미야기씨는 부산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이후로도 부산과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나가사키[長崎]에 있는 한 단기 대학에 진학한 그녀는 일본식 가야금인 고토[琴] 공연과 다도 시연을 위해 1996년에 다시 부산의 한 대학[부산여자대학]을 찾는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교환 학생으로 부산여자대학에 다니면서 한국어 어학연수를 하였고 동아대학교 국제 관광학과 1학년에 입학한다. 학사 졸업 이후 같은 대학교에서 관광 경영학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을 마치고 이후 부산외국어대학교[시간 강사], 부산정보대학[지금의 부산과학기술대학교, 전임 강사]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6년 전부터 신라대학교 강단에 서고 있다. 그러니까 미야기씨는 1996년에 교환 학생으로 부산 땅을 밟을 이후 대학원 박사 과정이 끝날 때까지, 아니 끝난 이후에도 지금까지 귀국하지 않고 부산에서 줄곧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부산에 살게 만들었을까. 그녀는 자신을 표현하고 자기 계발을 하는 데 있어서 부산이라는 장소가 가장 적합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미야기씨의 표현에 따르면 부산 아줌마는 재미있다. 감정을 억제하기보다 자기 의사를 잘 표현하며 공부도 열심히 한다. 이런 부산 아줌마의 이미지에는 자신의 롤 모델과 같은 정정숙씨의 영향도 짙게 배어 있는 것 같다.

미야기씨는 동아대학교 영어 서클에서 만난 선배와 9년 연애 끝에 4년 전에 결혼했다. ‘이곳에서 결혼하여 아줌마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19세 소녀의 바람이 실제로 이루어진 셈인 것이다. 지금 38세인 그녀는 18년째 한국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삶의 거의 절반을 부산에서 보내고 있는 미야기씨. 이변이 없는 한 그녀의 부산 생활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그녀는 어떤 ‘아줌마’로 살게 될까. 자못 궁금해진다.

2. 강단, 끊임없는 자기 계발의 원동력

미야기씨는 9년째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3시간 수업을 하는데 30시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준비할 만큼 철저하고 빈틈이 없다.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미야기씨는 수업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진로도 함께 고민한다. 그녀가 현재 재직 중인 신라대학교는 중국을 비롯하여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으로 학생들의 해외 인턴십 파견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학생들 또한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에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그녀가 보기에 부산의 학생들은 외국에 대한 거부감이나 위화감을 비교적 덜 느끼는 편이다. 이 같은 현상은 부산이 외국과의 접촉이 빈번하고 또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분위기나 여건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미야기씨는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학생들의 이러한 태도는 일본의 학생들과 비교해도 뚜렷이 대비되는 모양이다.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은 언어 구사 능력은 물론이고 일에 대한 자신감과 책임감도 높아진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재학 중에 경험한 사회 활동이 이후의 구직 활동이나 직장 생활에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야기씨는 학생들에게 인턴십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자세를 높이 평가하는 미야기씨는 이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평소에도 정보 수집 안테나를 높이 세운다. 특히 부산에 진출해 있는 일본 기업의 주재원들에게 학생들을 자주 소개하는 편이다. 물론 미야기씨가 중간에서 노력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모두 취업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하는 과정도 일종의 도전이자 경험이며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가운데 학생들은 취업의 노하우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학생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미야기씨가 국제 관광학부 소속이다 보니 호텔이나 리조트 쪽으로 학생들의 취업을 많이 소개해 왔다. 이번에는 오키나와 NGO 단체에 학생들을 소개하여 이들이 영어 강사로 활약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신라대학교의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은 중국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지만 2년 전부터 미야기씨가 일본 쪽의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에 관여하면서 이에 대한 관심도 점차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미야기씨는 본인도 학생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강단에 서는 것이 매우 행복하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학문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수업 시간에 논의한 사항들이 실전에서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탐구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커다란 깨우침을 가져다준다고 믿기에, 그녀는 그 노력을 잠시도 게을리 할 수 없다. 그녀의 말에는 좋은 연구자로서, 그리고 좋은 교육자로서의 보람과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3. 부산, 그리고 한국을 이해하기까지 걸린 세월, 18년

미야기씨가 유학생으로서 본격적으로 부산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96년의 일이다. 당시에는 외국인 유학생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부산에 사는 일본인의 수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예민한 사안들이 많이 잠복되어 있다. 어쩌다 민감한 문제들이 불쑥 불거지기라도 하면 난감하기 그지없다. 비교적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부산 사람들이 불편한 말을 한마디씩 건넬 때마다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음식 또한 그녀에게는 커다란 고민 중 하나였다. 지금이야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한국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유학 초창기에는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도 많이 했다. 일본 식재료도 구하기 쉽지 않았을 시절이니 그럴 만하기도 하다. 일본 음식을 파는 곳이 있어도 멋쩍어서 혼자 들어가 먹기도 쉽지 않았다. 스파게티나 피자가 먹고 싶어도 당시에는 이들 음식이 지금만큼 대중화되지 않았던 터라 이 역시 찾아 먹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부산의 상황도 변했고 미야기씨도 부산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바꾸었다. 먼저 미야기씨가 부산에 살기 시작한 1996년과 비교했을 때 정주 일본인은 약 200명 정도 증가했다[1996년 910명, 2012년 1,108명-부산광역시청 홈페이지 통계 DB 자료실]. 뿐만 아니라 부산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이 증가함에 따라 시내 곳곳에 일본어 안내 표시판이나 게시판이 설치되었고, 지하철이나 백화점에서는 일본어 안내 방송까지 실시되는 등, 부산 사람들의 일본어, 일본인 접촉 빈도가 높아져 일본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위화감이 많이 약화된 측면이 있다.

과거에 일본인은 낯설고 예외적인 타자였지만 지금 이러한 인식은 많이 흐려진 편이다. 한편 미야기씨는 부산 생활이 길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산을 이해하게 되었고 식성도 바뀌게 되었다. 부산 사람들이, 아니 한국 사람들이 궁금히 여기는 점들도 이제는 대충 파악이 되기 때문에 저쪽에서 먼저 묻기 전에 미리 답해주는 여유까지 생겼다고 한다. 역으로 일본 사람들이 부산에 대해 궁금해 하는 점도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기에 미리 알아 두고 이야기 해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미야기씨는 첫 대면에서 자신이 오키나와 출신이라는 것을 묻기도 전에 밝히기도 했다. 나이도 그녀가 먼저 밝혔다. 고향, 나이와 같은 개인적인 질문을 으레 받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 음식도 이제는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다. 김치찌개, 삼계탕, 삼겹살, 보쌈 어느 하나 양보할 수 없을 정도로 다 좋아한다. 먹을 수는 있지만 굳이 먹으려 하지 않는 것은 번데기뿐이란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그녀가 부산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란, 어차피 겪어야 하는 일이라면 피하기보다 현명하게 부딪쳐 보는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20년을 살았고 부산에서 18년을 산 그녀는 지금은 어떤 점이 불편한지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부산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부산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태도가 적극적이고 생각이 구체적이며 도전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러한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소위 한국인의 ‘빨리빨리’ 성향의 일종으로 비춰져 단점으로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속도감 있고 시원스러운 부산 사람의 성격이 지금의 부산을 만들어 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단점을 장점으로 이해하기까지 18년이나 걸렸네요. 참 오래 걸렸네요.” 그녀의 말에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부산을 깨달은 진정성이 묻어났다. 말하자면 미야기씨는 ‘진짜’ 부산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4. 새로운 ‘우리’의 탄생

미야기씨가 부산에 18년이나 거주하는 동안, 그녀의 가족, 친척, 지인들도 부산을 많이 찾았다. 지인의 부산 방문이 많을 때에는 한 달에 네다섯 번 손님을 맞아 안내하기도 했다. 부산 거주 햇수가 오래된 만큼 부산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기에, 그녀는 방문한 사람의 취향이나 요망 사항에 맞추어 코스를 정한다. 예를 들면 바다가 있는 지역에 사는 일본인이 부산을 방문하면 해운대, 광안리와 같은 바닷가를 피하고 범어사나 온천장 쪽을 안내하고, 바다가 없는 지역에 사는 사람이 부산에 오면 부산의 바다를 안내하는 식이다. 방문객에게 공통적으로 인기가 많은 곳은 자갈치 시장, 국제 시장, 광안 대교 등이고 김해 한옥 체험관도 자주 들르는 곳이다.

미야기씨의 고향 오키나와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로, 박물관, 전시관, 호텔, 리조트, 음식점, 해양 스포츠 등과 같은 관광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다. 오키나와와 부산을 비교했을 때, 관광의 측면에서 부산은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많이 남아있다. 기본적으로 도로가 울퉁불퉁하여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나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 관광하기에는 많이 불편하다. 그녀는 지인 가운데 장애인이 부산을 방문할 때면 음식점은 물론이고 호텔에도 미리 가서 동선을 확인해 둔다고 한다. 그리고 숙박시설도 매우 부족하다. 호텔이 아주 비싸거나 아주 싼 곳으로 양분되어 있다 보니 적절한 가격의 호텔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본의 호텔 체인인 토요코 인이 부산에 여러 군데 있어서 양극화된 호텔계의 중간을 채워주고는 있지만 수요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밤에 건전하게 놀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노래방이나 술집은 많지만 그 외에 관광객이 즐길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다. 야경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떠오르는 것이 없는 것이다. 지난 10월 29일 중구의 부평 깡통 시장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야시장을 개장하였는데, 미야기씨는 야시장을 중심으로 한 나이트 투어가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길거리의 어수선한 간판을 정리하거나, 유엔 묘지, 부산광역시립박물관과 같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한다.

학교에서 국제 관광에 관련된 과목을 가르치는 미야기씨는 자연스럽게 부산의 관광 명소나 관광 사업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 그녀는 부산광역시 관광 진흥과의 국제 위원으로도 활약하며 내실 있는 관광 정책 마련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미야기씨는 ‘우리 부산’을 강조했다. ‘우리 부산’의 관광에 대한 그녀의 욕심은 그저 부외자가 늘어놓는 불만이나 불평이 아니라 그녀 역시 ‘우리 부산’의 일원으로써 애살스레 이야기하는 아쉬움이자 바람이었다.

미야기씨에게는 또 다른 ‘우리’가 있다. 그녀는 대학 재학 시절에 만난 학교 선배와 9년 연애 끝에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시어머니도 함께 살고 있다. 일본인 아내이자 일본인 며느리인 그녀는 18년이나 부산에서 살았지만 한일 관계가 여전히 부담스럽다. 사실 요즘이 특히 그러하다. 부산에서 18년을 사는 동안 지금처럼 한일 관계가 경색 국면에 빠진 적은 없는 것 같다며, 지금이 최악이라고 미야기씨는 토로한다. 양국 사이가 조화롭지 못한 가운데 자신이 한국에서 산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부담감보다도 이웃 나라와의 관계 악화가 오래 이어질까 걱정되고 가슴 아프다고 한다.

일본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오키나와 사람이기도 한 그녀는 ‘우리[오키나와]도 빼앗긴 나라’이며 일본과 오키나와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일본과 오키나와의 관계와 닮아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우리도 빼앗긴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미야기씨는 부산에서 학생으로, 사회인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해 왔다. 놓여 있는 환경에 따라 다양한 차원에서 양국의 차이를 체감했다. 그 가운데는 메우지 못하는, 좁힐 수 없는 차이도 있다. 그러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양자 사이의 팽팽한 대립과 갈등을 좁혀야 할 노력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에 대한 미야기씨의 끊임없는 고민과 노력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서면 일번가 일본식 주점 마쓰리야 운영자 우타쓰 다다유키 씨]

1. 참으로 오래 이어진 한국과의 인연

우타쓰 다다유키[歌津忠行, 60세] 씨의 고향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다.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지내다가 졸업한 이후에 도쿄[東京]로 나갔다. 아버지와 두 형이 모두 건축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탓에 우타쓰씨도 한때는 건축업에 몸을 담기도 했지만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아 부모, 형제 몰래 집에서 나와 버렸다. 그리고는 도쿄로 향했다. 맨주먹으로 상경한 젊은이가 방황과 상처 속에서도 기어이 결실을 맺고야 마는 어느 청춘 드라마같이, 그의 삶도 그러했다. 도쿄에 도착한 후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와 일절 연락도 하지 않고 살았다. 자신의 처절한 발버둥과 아물지 않은 생채기를 가족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도쿄에서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을 때, 그제야 그는 부모님께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청년 시절의 우타쓰씨는 도쿄에서 모피나 가죽을 융통하는 사업에 종사했다. 때마침 일본의 경기가 한창 좋을 무렵, 그러니까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한때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으로 군림하던 ‘버블 경제’ 시절에 사업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그가 경영에 참여한 모피 회사[LOVE SEASON]의 연간 수익은 30억 엔에 달하기도 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사업가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다. 모험심과 의지력도 있고 경험이나 경력을 잘 활용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그는 기존에 러시아인들이 즐겨 입을 것 같은 일자로 툭 떨어지는 통짜 모피에서 탈피하기 위해 업계에서 처음으로 디자이너를 고용했다. 굴곡진 여성의 몸에 맞게 디자인한 모피 코트는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 덕분에 모피 전문 업체뿐만 아니라 일반 부티크에도 납품할 수 있었다. 판로가 훨씬 넓어진 것이다.

한국과의 인연도 모피 사업 때문에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 한국에서도 이름이 난 진도모피에 납품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서울을 찾으면서 한국과의 인연이 깊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에 부산을 종종 방문하기도 했다. 중앙동의 코모도 호텔이 개관할 무렵이라고 하니 역시 1980년대 초반의 일인 것이다. 사십 계단 윗길 영선 고개 언저리에 위치한 이 호텔은 주변의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했다. 그의 정기적인 한국 방문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무렵까지 이어졌다.

이후 홍콩에 모피 공장을 세워 사업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한국을 방문할 기회는 대폭 줄어들었지만 2, 3일 일정의 짧은 여행은 여전히 반복되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한국을 방문했다. 1993년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 한강 저편의 논두렁이 모조리 사라지고 대신 육중한 건물들이 들어선 것에 적지 않게 놀랐다. 사업차, 혹은 관광차 들르던 한국과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혼한 아내도 지금의 아내도 모두 한국인이다. 아무래도 한국과는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고 조용히 말하는 우타쓰씨. 그 연으로 인하여 그는 5년째 아내의 고향인 부산에서 살고 있다.

2. 낯선 편안함이 느껴지는 곳, 부산

우타쓰씨가 부산에서 일본식 주점을 열기로 마음먹은 것은 부산에 일본식 요리점이 부쩍 늘어가고 손님들도 많이 찾는 분위기를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어느 틈엔가 일본식 선술집인 이자카야[居酒屋]가 대학가, 시내 할 것 없이 골목골목마다 자리를 잡아 ‘이자카야’라는 말이 더 이상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고, 일본 전통주인 사케나 일본 맥주도 접할 기회가 늘어났다. 대학가 근처에는 일본식 카레, 일본식 주먹밥, 일본식 돈가스 등을 주 메뉴로 하는 식당도 급증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기 때문일까?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부산에는 유독 일본식 주점이나 요리점이 많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012년 12월 10월 19일 대구에서 개업한 이자카야 키세키(きせき)의 홈페이지를 보면 ‘아직 대구에서는 이자카야라는 것이 생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이자카야 키세키는 이.웃.사.촌. 같은 정감 있는 가게로 성장하겠습니다.’하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개업한 대구의 가게가 이와 같이 선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참 전부터 일본식 주점 붐이 일어났던 부산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아내의 고향이 부산이기도 하여 이곳으로 이주한 그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고향 삿포로를 떠난 뒤에는 줄곧 객짓밥만 먹어 온 그였다. 부산이라고 해서 특별한 감정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삶터가 반드시 ‘부산’이어야 한다고 고집하지도 않는다. 낯선 곳이 주는 편안함도 있고, 또 살다 보면 정이 든다는 것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터였다. 부산도 그러한 객지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그러나 우타쓰씨는 부산만큼 살기 좋은 곳도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젊은 시절에 모피 사업과 관련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모피·가죽의 원자재 경매부터 시작하여 가공[무두질 등], 디자인, 제조, 유통 등 전 과정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해야 했다. 예를 들면 코펜하겐, 프랑크푸르트, 토론토,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 홍콩, 마카오, 서울, 부산 등등……. 그런 도시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부산에는 어쩐지 모를 편안함과 안락함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부산 사람들의 운전 매너가 좋지 못하다고들 하는데, 특별히 그렇다고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서울 사람들의 운전이 더 위험한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부산 사람은 툭하면 싸우려 드는 성미도 있지만, 그래도 정이 많다고 느낄 때가 더 많다.

그는 반년 전 지금의 자리로 가게를 옮기기 전까지 서면 복개 도로 인근에서 약 3년간 일본식 주점을 운영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단골이던 한 손님은 현재의 가게 근처에서 같은 업종[일본식 주점]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우타쓰씨가 가게를 옮겨왔을 때에 견제하기는커녕 대환영해 주었다고 한다. 맞은편에 있는 ‘개미집’의 사장님도 단골손님이다. 주변 사람들의 텃세보다는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마냥 고맙게 느껴진다.

그래도 부산에서 살면서 불편한 점이 당연히 있을 터. 그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은 언어다. ‘100세 시대’니, ‘인생은 60부터’니 말들을 하지만 올해로 환갑을 맞은 그가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일상생활마저 정해진 패턴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대면하는 사람들도 한정되어 있어 한국어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일본어가 능숙한 한국인 아내가 있어 소통에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생후 6개월에 부산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부산에서 자란 딸아이는 한국어밖에 할 줄 모른다. 당연히 우타쓰씨와 딸 사이의 대화에 한계나 장벽이 있을 수 있다.

한창 말을 배우고 있는 딸이 우타쓰씨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발음 연습을 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아이가 만족할 때까지 발음 연습은 몇 번이고 되풀이된다. 어린 딸의 재롱이 그저 흐뭇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젖지만 한국어 공부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그래도 부산에서 사는 이상,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한국어가 조금씩 늘어 가지 않겠느냐고 우타쓰씨는 조용히 웃어 보인다. 그에게 부산은 여전히 낯선 곳이지만 분명한 것은 부산이 그의 삶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3. 스키야키, 부산에서 새로운 옷을 입다.

‘마쓰리야[まつり家]’라는 상호로 영업을 해온 지도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부산의 그 어느 곳보다 유행에 민감한 곳이 바로 서면이다. 그리고 가게의 흥망 부침이 심한 곡선을 이루는 곳도 역시 서면이다. 이러한 상권에서 그는 5년 동안 같은 메뉴로 영업을 해왔다. 말하자면 우타쓰씨의 사업도 그 나름의 역사를 쌓아온 것이다. 서면에 일본식 주점이 즐비하고 우타쓰씨의 가게처럼 스키야키[鋤焼]를 대표 메뉴로 내세우는 음식점도 5곳이나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도 꽤 선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부산 서면에서 영업을 시작한 것은 2009년 8월 3일이다. 서면 복개 도로 인근의 26㎡ 남짓한 공간에서 일본식 선술집 마쓰리를 개업했다. 테이블이 6개밖에 없었던 탓에 금세 만석이 되기 일쑤였다. 자리가 없어 발길을 돌리는 손님들을 볼 때마다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3여 년이 지난 2013년 3월 20일, 마쓰리는 서면 일번가로 확장 이전하게 되었다. 이 때 상호 이름도 조금 바꾸었다. 마쓰리라는 이름을 가진 가게가 많아져 이들과 구분 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꾼 이름이 마쓰리야이다. 지금은 2층까지 홀로 사용할 수 있어 손님들이 되돌아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도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에는 금세 만석이 된다. 소문난 맛집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이보다 더 명확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서면 인근의 교보생명이나 삼성전자, IBK은행에 다니는 회사원들이 이 집 단골손님이라 한다.

우타쓰씨가 자신 있게 선보이는 요리는 스키야키와 스지오뎅탕이다. 스키야키는 일본식 쇠고기 전골이고 스지오뎅탕은 소 힘줄과 어묵으로 만든 국물 요리다. 스키야키는 일본의 쇠고기 요리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간장, 미림, 술, 설탕, 다시마 등을 넣어 간을 맞추기 때문에 한국의 쇠고기 전골보다는 약간 짭조름하고 달게 느껴진다. 쇠고기 외에도 표고버섯, 팽이버섯이나 쑥갓, 두부 등이 부재료로 쓰인다.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히는 것은 개인 접시에 날달걀을 풀고 익힌 재료를 찍어 먹는 것이다. 날달걀이 비릿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고소한 맛이 감돈다.

잠깐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 한 가지를 확인해 두자. 1600년대 말, 그러니까 부산에 왜관이 있던 시절, 부산에서 일본 요리 스키야키는 꽤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왜관에서는 신년 축하, 외교적인 절차, 협상 등을 할 때 향연을 자주 열었는데, 그때 상당히 호화로운 요리들이 제공되었다. 그 요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스키야키이다.

“스키야키와 아귀 요리는 정말 조선 사람들이 좋아하더군요. 지난번에 동래 부사가 연향에 참석하러 오셨을 때, 의뢰하신 대로 스키야키를 조리하였답니다. 굉장히 마음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드시고 남은 것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중략] 스키야키는 부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내려오신 양반님들도 좋아하셨는데……[후략]”[이근우, 『부산 속의 일본』, 부경대학교 출판부, 2012]

이처럼 스키야키는 오래전부터 부산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원래 일본에서 먹는 스키야키는 국물이 자작한 편인데, 우타쓰씨가 내놓는 스키야키에는 국물이 제법 많다. 이는 한국 사람들의 식습관에 맞추어 바꾼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탕 요리와 함께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주로 마시는 소주에는 국물이 있는 요리가 안주로 곁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자작한 국물로 스키야키를 내놓으니 손님들이 따로 국물을 요청하는 일이 빈번했다.

사실 사업 초창기에는 스키야키를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도쿄와 삿포로에서 부업으로 불고기[야키니쿠] 가게를 운영하던 그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쇠고기를 다루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해 온 터라 상심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식 스키야키보다 국물을 넉넉하게 만든 한국식 스키야키를 고안하게 되었다. 이처럼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쓰리야 고유의 스키야키는 탄생하게 되었고, 이 음식은 마쓰리야를 대표하는 요리로 자리 잡았다.

또 다른 인기 메뉴는 스지오뎅탕이다. 쫀득쫀득한 소 힘줄과 탱탱한 어묵, 그 외에도 무, 감자, 곤약, 유부 주머니가 뜨끈한 국물에 몸을 담구고 있는 이 음식은 탕 요리를 선호하는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부산은 어묵으로 유명한 만큼 어묵 요리에 관해서는 까다롭게 굴 부산 사람도 많을 것 같지만 그런 걱정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다. 예사롭지 않은 국물 맛에 그저 숟가락만 자주 다녀갈 뿐이다.

마쓰리야에서 일하는 스태프는 모두 한국 사람인데 주방을 드나드는 스태프에게도 이 국물 맛의 비결은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꼬치구이[야키토리] 소스나 기타 양념에 관해서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있다. 우타쓰씨에게 요리 비법을 전수해 줄 것을 요청하며 가맹점을 열고 싶다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는 국물 맛이나 소스, 양념 등을 계량화하여 앞으로 가맹점을 모집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일본 음식이 부산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재탄생한 가운데, 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인기를 이어갈지 자못 기대가 된다.

4. 관계로서의 부산

부산으로 이주한 이후, 우타쓰씨는 부산일본인회에 가입하였다. 부산일본인회는 말 그대로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모임으로 현재 300명 정도의 일본인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일본인회는 비영리 단체로서 개인 회원과 법인 회원으로 나뉘고 각각 부회를 가진다. 우타쓰씨는 개인 부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개인 부회 사람들은 3개월에 한 번씩 모여 회합을 갖는다. 부산일본인회에 소속되어 있는 개인 회원의 대부분은 전근이나 주재원으로 파견된 사람들이다. 우타쓰씨의 경우처럼 정주자인 경우는 드물다.

전근자의 가족과 정주자의 가족은 물질적·심리적 환경에 있어서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부산에 잠시 다녀가는 사람의 생활과 앞으로 계속 살아갈 사람의 생활이 같을 리는 없을 터. 자녀 교육만 해도 그러하다. 전근자의 자녀들은 대부분 부산일본인회가 설립한 부산일본인학교[수영구 소재]에 다니지만, 우타쓰씨의 딸은 부산의 한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며 앞으로도 한국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시킬 계획이다. 부산에서 정주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아이가 보다 빨리 부산의 환경에 적응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부산일본인학교는 소규모이지만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파견된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육 과정 또한 일본 문부과학성이 정한 학습 지도 요령을 따르고 있다[물론 교과목의 성격에 따라서는 지정 외의 다른 교재를 사용하기도 하고 한국어나 영어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부산일본인학교는 교육 장소를 부산으로 옮겨온 것일 뿐, 교육 내용이나 심리적인 환경 측면에 있어서는 일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우타쓰씨의 딸은 종일 한국어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때문에 개인 회원들이 모여 점심을 먹고 다과 모임을 할 때에도 일본어를 잘 못하는 딸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이 접기 교실에서도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 종이 접기에만 집중하는 딸을 보면 마음이 짠해 지기도 한다.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오히려 낯섦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사정을 아버지와 어머니, 딸 모두가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딸이 태어날 당시에는 부산으로 이주할 계획이 없었던 탓에 딸은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도쿄 출생이지만 생후 6개월 이후 부산에서 자란 이 딸이 앞으로 어떠한 정체성을 소유하며 자리매김하게 될지 걱정과 기대가 교차한다.

우타쓰씨는 매월 첫째 일요일마다 봉사 활동을 한다. 금정구 부곡동에 위치한 노인 복지 시설 ‘초원의 집’을 방문하여 할머니들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하는 일을 3년째 이어오고 있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가게에 손님이 많아 새벽 2, 3시까지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도 어르신들을 만나기 위해 다음 날 일찍부터 식재료를 장만한다. 이뿐만 아니라 휴대용 가스버너, 냄비 등 각종 조리 도구도 가게에서 직접 가지고 간다. 초원의 집에 계시는 할머니들은 약 30명이고 자원봉사자들[인터넷 맛집 동호회 회원]이 10명 정도 있으니 한꺼번에 적어도 40인분 이상의 음식을 마련하는 셈이다. 어느덧 환갑이 된 그는 자신의 몸도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래도 부산에 사는 이상 무언가 하나 정도는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단다.

할머니들께 접대하는 요리는 마쓰리야를 대표하는 스키야키, 스지오뎅탕이다. 이색적인 이 음식이 처음에는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손꼽아 기다리는 일종의 특별 행사가 되었다. 사실 할머니들에게는 어떤 음식을 먹는가 하는 것보다 누구와 함께 먹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자원봉사자들이 마술 쇼도 선보이고 또 그들과 함께 식사도 하는 어울림의 장이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이루어진다는 점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다.

우타쓰씨의 아내와 딸도 참가하는 일요일 봉사에서 역시 딸은 할머니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 자신들의 손녀와 같은 어린 아이의 행동, 표현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가끔 할머니들이 쌈짓돈을 꺼내어 딸에게 용돈을 주는 경우도 있단다. 할머니들의 사정은 그리 넉넉지 않을 터인데 꼬깃꼬깃한 지폐를 딸에게 쥐어주는 모습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고. 아무튼 자신을 반겨주는 할머니들과 수녀님들을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봉사를 계속 이어가고 싶단다. 이렇게 우타쓰씨는 음식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음식으로 베풂을 실천하며 이곳 부산에서 살아가고 있다.

[참고문헌]
  • 이근우, 『부산 속의 일본』(부경대학교 출판부, 2012)
  • 인터뷰(사하구 하단동 미야기 케이나[宮城佳奈], 38세, 여)
  • 인터뷰(남구 용호동 우타쓰 다다유키[歌津忠行], 60세, 남)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