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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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港-技士 |
영어의미역 | An operator of a giant crane who could have lifted the Pusan Harbor.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블레셋의 골리앗, 부산항에 내리다]
고대 팔레스타인(Palestine) 민족 중에 ‘블레셋(Philistia)’이라는 해양 국가가 있었다. 일찍 철기 문화에 눈뜬 블레셋은 인근 국가인 이스라엘과 달리 야금술(冶金術)에 능하였고,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농기구를 얻어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무기를 가진 블레셋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을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블레셋의 전사 골리앗(Goliath)이었다. 성서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 중 하나가 아마 다윗(David) 대 골리앗의 대결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후대에 많은 작가, 화가, 조각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골리앗은 키가 8척 반[2.9m]에 이르는 거인이었고, 우리는 큰 키를 가진 힘센 사람을 보면 으레 골리앗이라 부른다. 골리앗은 그렇게 전설 속 인물이면서 종종 현실에 불려 나오는 대명사가 되었다. 갑옷을 입은 거인 골리앗은 다윗의 매끈한 돌에 어이없이 쓰러졌지만, 부산항에는 사람이 아님에도 철갑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골리앗이 있다고 한다. 바로 부산의 골리앗, 즉 ‘크레인’이 그것이다.
그럼 크레인은 무엇일까? 흔히 크레인(Crane)이라고 부르는 것의 우리말 표현은 기중기(起重機)다. 동력을 사용하여 무거운 짐을 매달아 올리고 이것을 수평이나 수직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인데, 한 마디로 무거운 물건을 사람 대신 들어 올리거나 옮길 수 있는 기계 장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오직 힘으로만 그 능력을 시험해 본다면 여타의 동물들에 비해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릴 적 마을 행사나 운동회에서 쌀 한 가마 들고 누가 빨리 뛰어 들어오나 하는 능력으로 ‘아, 저사람 힘이 장사구나’라고 했다. 여기서 쌀 한 가마 무게는 보통 80㎏정도라고 한다. 한 사람의 능력으로 80㎏을 들기도 힘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크레인을 고안한 두뇌를 지녔다. 지금 산업 현장에서는 보통 40㎏ 이상 되는 짐들은 모두 크레인 작업으로 설치를 하고 있다.
기중기는 인류가 가장 먼저 고안한 기계 장치로 추정된다. 이집트의 가장 큰 피라미드의 벽돌 한 개의 무게는 2.5톤이고, 그 개수는 자그마치 250만 개라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돌들을 설마 사람이 들어 올려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피라미드의 설치 방법은 불가사의(不可思議)로 남아 있지만 아마도 크레인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이집트에 피라미드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수원 화성이 있다. 수원 화성 공사 때 사용한 것이 그 유명한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개발한 거중기(擧重器)이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원 돌의 무게 1/16만큼의 힘만 가하면 돌을 들 수 있었다.
기중기[이하 크레인]의 발달은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인간의 수고를 덜어 주었다. 크레인은 바퀴가 달려 이동할 수 있는 이동식 크레인, 공장 등에서 쓰이는 레일위로 이동하는 크레인, 항만에 고정되어 있는 크레인 등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부산항에서처럼 하역 현장에서 주로 쓰이는 크레인은 천정 크레인, 지브 크레인(Jib Crane), 갠트리 크레인(Gantry Crane) 등이 있는데, 갠트리 크레인이 바로 일명 ‘골리앗 크레인’으로 불린다. 이해를 돕자면 큰 지지대가 있는 크레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부산 신항과 북항에는 115대가량의 초대형 갠트리 크레인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컨테이너선의 수출입 물동량 상·하역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 갠트리 크레인은 한 해 1,600만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s, 20ft 컨테이너 박스 1개를 나타내는 단위]의 수출입 물동량과 환적 화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부산항 컨테이너 터미널의 규모와 갠트리 크레인의 개수에 뿌듯해 하며 발전적 미래 항만 도시를 꿈꾸는 것에 비해, 수많은 거대 크레인을 운전하는 사람들의 면면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편이었다. 항만 산업의 규모가 날로 커짐에 따라 이 분야의 인력 수급의 중요성 또한 확대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부산항에서 현재 공은 있으나 언급이 미미했던 그들, 지금부터 그들의 일상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본다.
[먹고살려고 시작한 생활, 노역이지만 부산 제3 부두는 내 삶의 전부]
“고향 진해에서 고등학교 중퇴하고 막노동 생활을 1~2년 했는데, 그때 마침 진해에 건설 회사가 들어왔습니다. 부산에서 크레인 2대가 왔더라고요. 20톤짜리 하나에 30톤짜리 하나. 그때 나는 현장에서 돌 깨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크레인 기사가 조수가 도망갔다고 나에게 배워보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40년도 더 된 얘기네요.”
『논어(論語)』 위정 편에는 ‘나이 육십이 되면 귀가 순해진다.’고 나와 있다. 만물의 이치를 깨닫기 때문에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1954년생 크레인 기사 전성택씨가 그러했다. 그는 경상남도 진해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부모님과 6형제 중 셋째라는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일찌감치 돈벌이로 나섰다. 당시 현장에서 크레인을 운전하던 이북 출신 기사는 동생뻘 되던 전씨에게 잘 대해주었다. 그를 크레인 세계로 이끈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그래서인지 전씨는 운전도 빨리 배웠다. 가끔 자신을 믿고 이북 기사가 부산에 놀러가거나 늦게 출근하는 일이 잦았지만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크레인을 배웠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 분야의 정식 자격증이 별도로 없어서 1년 정도 배우고 나서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으면 그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계기는 3년 정도 일하던 건설 회사가 다른 공장에 흡수·인수되어 크레인이 부산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북 출신 기사가 부산으로 같이 가면 전씨를 A급 기사로 만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했고, 그 말을 믿었기에 영도 태종대 이모님 댁에서 생활하며 크레인 조수 일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 중반인 당시만 해도 부두에 큰 배가 접안을 못 할 때여서 작은 배가 화물을 싣고 오면, 크레인이 가서 육지로 올리고, 올려놓으면 부대에 담는 형식이었다. 화물은 주로 무연탄이었고 주로 부산 제3 부두와 부산 제4 부두에서 일하였다.
유진화학 기중기로 부산 제3·4 부두 조수로 일하면서 전씨는 중장비 기사 자격증을 땄다. 당시 기중기[크레인] 면허 시험은 1년에 2회 밖에 없었고, 특수 1종 면허는 빨리 취득했으나 기중기 시험에 매번 낙방하는 바람에 꽤 오래 고생했다고 한다.
“책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 돼서 머리는 잘 안 돌아가도 조수 일을 했으니 몸 쓰는 시험은 뭐든 자신했는데 그게 뜻대로 안됩디다. 1978년에 자격증을 땄어요. 이듬해에 삼덕사에 갠트리가 2대 들어왔는데, 이북 기사가 그쪽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거긴 부산항 제7 부두였어요. 나는 그 사람이 꽤 유능해보였기 때문에 믿고 따랐죠. 월급이 21만 원이었어요. 그 시절에는 21만 원이면 꽤 많은 액수였어요. 당시 일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아마 10만 원도 못 받았을 걸요? 부산 제3·4 부두에 있을 때 월급이 7~8만 원선이었는데, 자격증 따고 정식 기사가 되니 대우도 많이 달라졌죠. 참, 부산항 제7 부두에 가기 전에 덕운공업고등학교에서 4개월 정도 교육을 받았어요. 그때 교육관이 일본 기사였는데, 그 사람은 갠트리를 모두 조립할 줄 알고 손놀림이나 기술이 대단하더라고요. 어쨌든 전 그 일본 기사의 한국 제자 1호인 셈이었죠.”
부산항 제7 부두에서 일할 때에는 돈벌이가 쏠쏠했기 때문에 살던 이모네를 나와 하숙을 하였다. 하숙비는 한 달에 3만 원선이었다. 용돈이 풍족했지만 저금은 하지 못했다. 바깥에 나와 있으니 부모님의 간섭이 아예 없었고, 총각이라 돈 모아줄 가족[아내]도 없었고, 모이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게 유일한 낙이었으니 저축은커녕 진해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돈도 제대로 부치지 못하였다.
“그렇게 흥청거리며 1년 정도 보낸 뒤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1년이나 병원 생활을 했고요. 병원에서 나온 뒤 회사에 출근해서 겨우 갠트리에 올랐는데, 당시만 해도 노사 분규가 많았어요. 나는 홀몸이고 젊은 혈기에 노조 문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더니 회사에서 나를 자동 사표 처리해 버리는 거 아니겠어요?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당시에는 일할 곳도 많고 해서 소송은 하지 않았어요. 이후 국제통운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부기사로 들어갔어요. 6개월 뒤쯤 원래 기사 월급을 받았고요. 월급은 부기사 때 받은 액수에다 나머지 기사 월급을 소급해서 받았어요. 국제통운 보수가 셌어요. 부산 제1·2·3 부두에서 일했는데, 국제통운에서는 ‘피에네치’라는 특수차를 가지고 일했어요. 일종의 크레인인데 이 차를 끌고 천안도 가고 울산도 가고 했죠. 거기서 한 2~3년 일했나? 다시 부산 제7 부두 삼덕사로 갔어요. 요청이 왔더라고요. 기사가 없다고 급하다고. 당시 삼천포 발전소 건설이 될 때인데 유연탄을 옮겨 싣는 기계가 서서 부산 기사들이 그쪽으로 대부분 갔어요. 기사가 모자랐을 때니까 그때 기사들은 돈 많이 벌었어요.”
삼덕사 소속 직원들은 정비 기사와 갠트리 기사 등 기사 3명이 있었고, 보조 기사가 10여 명쯤 있었다. 한 갠트리 크레인에 기사 4명씩 배치해서 주야로 종일 일했단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24시간 일하고 교대했다. 지금은 3교대지만 당시는 2교대였다. 월급이 많은 만큼 업무 강도도 셌다. 그러나 늘 24시간 계속 일을 하는 시스템은 아니었고 배가 없으면 당연히 일도 쉬었다. 당시 크레인 기사들의 월급이 센 점을 감안하면 회사 입장에서도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삼덕사 사장은 교회 장로이기도 했는데, 중구 중앙동에 빌딩을 몇 개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경기가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7년 IMF가 오고부터 경기가 안 좋으니 당연히 물량도 줄었어요. 우리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만 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같이 근무하던 기사 3명과 함께 한진해운에 입사했어요. 같이 간 친구들은 갠트리 교육을 다시 받았지만 저는 크레인을 몰 수 있었기 때문에 부산 제3 부두에 바로 배치되었어요. 그리고 ‘하바 크레인’을 운전했어요. 퇴직할 때까지 하바를 했으니 한 10년 넘게 운전한 셈이죠. 하바 2대는 2개조로 해서 오전에 한 타임, 오후에 한 타임 1대 1로 운영하면서 3시간 일하고 3시간 쉬는 방식이었어요. 1대당 1조는 주간을 2파트로 나누어 각각 2명씩, 갠트리 1대, 일반 크레인 1대, 스페어도 있어서 총 10명 정도가 1조가 돼요. 24시간 일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물량에 따라서 하고, 밤에 물량이 없으면 집에 가서 쉬기도 하고 밤에 쉴 때는 다음날 오전도 쉬고, 저녁에 투입되기도 했어요. 아침에 일찍 타는 순번 1·2·3·4번은 일찍 타고, 그 다음 타임은 조금 늦게 출근하여 탔어요. 출근은 대체로 빨리 해요. 첫 타임 사람이 안 나올 사정이 생기면 대신 타주기도 했기 때문에 다들 일찍 출근했죠. 한 7시쯤(?) 출근하면 갠트리나 하바는 아래에 노무자들이 있어서 이들이 준비를 마쳐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어요. 아래에 일하는 직원들은 하바가 작업을 하면 퇴근을 못해요. 크레인 운영과 항운노조 운영은 따로 하지만 크레인 작업이 없으면 항운노조 노무자들도 퇴근할 수밖에 없죠. 한진 3 부두에서 일할 때는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갔어요. 삼덕사에서 일할 때는 마치고 맨날 술 먹고 그랬는데, 당시는 집안일도 도와줘야 했고, 나이 먹으니 자연 그렇게 되더라구요. 참, 하바는 일반 원료를 선적하는 이동식 크레인입니다. 어려운 장비라 지금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해도 쉽지가 않더라고요. 하바를 운전해 본 사람은 갠트리를 할 수 있지만, 갠트리만 한 사람은 하바를 못해요. 하바는 배우려는 사람은 많지만 금방 배울 수가 없어요. 조정이 까다롭고 어렵거든요.”
전씨는 2008년 한진해운을 퇴직하였다. 그때가 만 55세였다. 2009년에 용역으로 남구 감만동 부두에 다시 취직하였다. 지금은 ‘TC’라고 줄여 부르는 트랜스퍼 크레인을 운전하였다. TC는 화물차가 싣고 온 컨테이너 화물을 내려서 야드에 야적하는 크레인을 말한다. 갠트리는 배에 컨테이너 화물을 선적하는 크레인이다. 일반적으로 TC에서 갠트리로 이동하는 것이다. TC는 일이 있으나 없으나 주야로 일한다. 감만 부두에는 색깔로 직원을 분류한다. 노란색은 용역 장비고, 빨간색은 직원 장비다. 빨간색을 타는 사람은 연봉이 5,000만 원이 넘고 노란차 타는 사람은 연봉이 그 절반 정도라고 한다. 일은 더 많이 하는데 월급은 너무 적다고 전씨는 용역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들이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 일은 정말 힘듭니다. 나는 우리 아들이 크레인 기사 되겠다고 하면 안 시키고 싶어요. 요즘은 수동이 많이 줄어 점점 일감도 줄고 있고요. 야간 작업이 너무 잦고 예전보다 급료도 많이 낮아졌어요. TC나 갠트리는 정말 힘들어요. 하바는 배워 놓으면 좋겠지만, 일이 고된 게 가장 문젠데 나이드니 집에 있는 것보다 일하러 나오는 게 나아 나오긴 하는데 점점 힘에 부쳐요. 우리나라도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이 대우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거 고생 말도 못하는데 사람들은 알아주지도 않고 말이죠. 그런 것도 힘든 부분 중 하나입니다. 이래저래 한평생을 부두 다니며 살았어요.”
[크레인에서 내려와 낚시로 시름을 덜다]
전성택 기사는 부산 제3 부두를 떠나면 부산 제3 부두를 잊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야 다시 일을 할 때 덜 고단한 법이다. 크레인 운전은 3교대가 이루어지는 불규칙적인 일상이고 평일에 쉬면 예전 친구 만나는 것도 쉽지가 않아 같이 쉬는 동료 기사가 있으면 함께 낚시를 떠난다. 낚시는 그에게 유일한 숨구멍이자 위안이었다.
“우리 일이 눈이 빨리 상해요. 특히 하바나 갠트리 운행하면 더 그래요. 높은 곳에서 아래 유리를 통해 컨테이너를 응시하는 작업을 집중적으로 하다 보니 눈이 과로에 시달리나 봐요. 특히 야간작업에는 더더욱 집중하게 되니까. 젊었을 때는 시력 좋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너무 나빠졌어요. 최근에는 눈이 더 나빠져서 어림짐작으로 작업을 하기도 해서 그만둬야 하나 고민스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워낙 오랜 기간 숙련을 해서 큰 어려움은 없지만 혹시나 사고로 이어질까 걱정이 됩니다. 크레인 타는 사람 중에 고혈압도 많아요. 모르죠, 젊었을 때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도. 우리 일이 혈압을 곧잘 상승시키거든요. 계속 아래쪽을 응시하면서 작업을 하니 어깨 통증도 장난 아닙니다. 사실 내가 레바 작동 때문에 어깨가 굳어서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나이가 먹으면서 그 부위가 더 아프기도 하고. 뭐 이제는 만성이라 다양한 질병과 같이 가는 수밖에요. 야간작업으로 수면 시간이 불규칙해서 잠을 잘 못자요. 그것도 좀 고통스럽고, 모르죠, 그것도 술 때문인지.”
전 기사는 국제통운 다닐 때 하숙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였다. 신혼집은 당시 회사에서 가까운 남구 감만동에서 전세로 시작하였다. 슬하에 자녀는 딸 셋을 두었다. 삼덕사 다닐 때 내 집 마련을 했는데 지금 우암동에 있는 집은 20년이 조금 넘었다. 우암동 집은 땅을 사서 기존 집을 헐고 새로 지었다. 그래도 하바 크레인 운전하던 한진해운에서 학자금이 나와서 자녀들 공부를 다 시킬 수 있었다.
물론 전 기사처럼 무난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크레인 기사들의 대부분이 야간 근무를 하면 집으로 곧장 들어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감만동 회사 다닐 때 부두 근처에는 술집이 많았고, 식당도 많았다. 가정집을 개조해서 술집이나 식당을 차리는 사람들도 있어 간판도 없이 영업을 하였다. 그때 동료들 중에는 화투나 마작에 손을 대어 가진 돈을 잃고 빚을 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일이 회사나 집에 알려져 퇴직을 강요당하거나 파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기사 친구는 다단계 판매에 손을 대 패가망신하고 급료를 모두 압류당하기도 하고, 지금은 신용 불량자가 된 친구들도 있다. 급료가 압류당해 회사 취직도 못하거나 이혼을 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전 기사 자신도 다단계 판매를 할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우리 기사들이 순진하면서 단순한 사람들이에요. 밤새 일하고 술이나 먹고 집에서 잠이나 자고 그러니 세상 물정에 어둡고요. 신문이나 뉴스도 잘 안보죠. 그런 거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다 보니 누가 솔깃한 건수 있다고 하면 쉽게 빠져드는 거 같아요. 나도 한두 번 그런 유혹에 시달리다가 낚시를 우연히 안 뒤부터는 다른 생각을 안 하게 된 거 같아요. 고향 진해에 가서 배타고 봄에는 도다리, 가을에는 아나고[붕장어]나 게르치를 낚으러 가요. 몇 시간 찌 담그고 크레인 타느라 피곤해진 눈도 바다 속을 응시하고 있으면 그 속에 나만의 딴 세상이 있더라고요. 근데 아, 이놈도 중독성이 있어서 우리 마누라가 낚싯대 몇 개를 감추기도 했어요.”
남해 연안과 동해 연안에서 실행되고 있는 고기잡이 방법 중에 문어 단지가 있다. 150~300m의 줄에 30~100개 정도의 단지를 달아서 수심 20~50m 되는 곳에 주낙을 놓듯이 놓았다가 1~2일 경과한 후에 소형 어선을 사용하여 끌어올려 단지 안에 들어 있는 문어, 낙지 등을 잡는 방법이다. 이 원리는 숨어 있기 좋아하는 문어의 속성을 이용한 것이다. 문어는 이 단지 안에서 안락함을 느낀다. 최소한 끌어올려지기 전까지는 그렇다. 전씨에게 낚시는 이런 문어 단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음날 힘든 노역(勞役)이 기다리고 있지만 낚시가 안락한 소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선적 마치면 애국한 듯 보람되다]
“우리 일이라는 게 머리를 숙여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컨테이너 박스를 정확하게 집어 올려야 하기 때문에 목과 어깨가 잔뜩 긴장해 늘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초보자들은 멀미를 겪기도 합니다.”
부산 신항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갠트리 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는 황월영씨[52세]. 그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총 높이 55.8m[조종석 높이 28m]의 갠트리 크레인. 황씨는 14년째 수출입 컨테이너 박스를 배에서 부두로 내리거나 부두에서 배로 선적하는 일을 하고 있다.
황씨는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한복점을 운영하셨고, 아버지는 사회봉사 활동을 주로 하셨다. 고향에서 초·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집안의 경제 사정을 감안해 수산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1986년 고등학교 졸업 후에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중장비 자격증을 따는 것이 붐이었다. 중기차 운전 수요가 증가하면서 자격증만 있으면 어디든 쉽게 취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씨는 자동차 1종 보통을 시작으로 지게차 자격증까지 취득하였다. 황씨처럼 중장비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학력이 요구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중학교 졸업 이상은 되어야 업무 수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중장비 기사만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은 아직 없고, 공업고등학교나 직업 훈련원에서 관련 과정을 이수할 수는 있다. 또 사설 학원을 통해 단기 훈련을 마치고 자격증이나 면허증을 취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면허가 있다고 하더라도 업무의 성격상 해당 업체나 회사에서 숙련된 운전원의 감독 하에 최소 3개월부터 일정 시간 동안 운전 기능 습득이라는 수련 과정을 거쳐야 현장에 투입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격증을 딴 후에도 황월영씨는 생각처럼 취업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인천 숭의동 연탄 공장에 첫 직장을 얻었다. 그곳에서 1년 정도 근무하면서 덤프차 면허를 딴 뒤 군복무를 다녀왔다. 제대 후 5년 정도 부산에서 덤프차 운전을 하였다. 낮에는 부산 지하철 공사 현장, 밤에는 만덕 터널 공사 현장을 누볐다. 이 무렵 부모님이 형제들의 귀향을 종용하여 부산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박물관 사업을 잠시 도왔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해서 전에 따 둔 자격증을 믿고 한진해운에 입사 원서를 제출하였다. 중기차 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에 트레일러 운전 시험을 쳐서 합격한 후에 한진해운 울산 지사에 첫 발령이 났다. 이후 부산 재송동 한진해운 본사로 발령이 났고, 그곳에서 트레일러 운전을 하였다. 회사 창고 안에서 운전하며 근무하는 형태였다. 트레일러는 워낙 경쟁이 치열하여 회사로부터 언제 자신의 트레일러를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황씨는 과감하게 직종 변경을 희망하여 중기차 운전인 지게차로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따 놓았던 지게차 면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3년 동안 회사 내에서 지게차로 컨테이너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지게차 운전을 하면서 크레인 운전면허에 도전하였다. 기회가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일이지만 곧바로 투입 가능하도록 면허를 우선 만들어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TC 같은 경우는 높이가 아파트 5층 정도 돼요. 인간이 일반적으로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래요. 고소 공포증이 없는 사람도 이 높이에 서면 못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요즘은 무인 자동화 시스템인가 하는 게 고소 공포증보다 더 무서워요. 부산 신항 사무실에서 자동으로 다 조정하니까 TC 운전기사들은 일자리가 그만큼 없어지는 거죠. 한진해운이 신항만에 자동화 터미널을 도입하면서 업무 효율 면에서는 수동으로 할 때보다 나아졌겠죠. 속도도 그만큼 개선되고, 일 처리 시간이 정확하게 예측되니까 후속 업무도 미리 미리 대비할 수도 있고. 뭐 예를 들면 몇 시까지 다 선적할 수 있다는 말로 화주에게 신뢰감도 줄 수 있잖아요. 우리는 좀 허무하죠. ‘오라이’, ‘스톱’하는 소리가 사라지니까 신바람도 안 나고. 나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고. 뭐, 그래요.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황씨는 갠트리 크레인을 운전한다. 이름은 ‘갠트리’, ‘골리앗’, ‘STS’ 등 다양하게 불린다. 황씨의 첫 갠트리 크레인 운전은 감천 부두였다. 1990년 후반에 감천 부두가 생기면서 운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10년 정도 감천항에서 운전하다가 2008년 부산 신항이 개항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부산 신항에서 한진해운이 소유한 갠트리는 모두 12대란다. 한 조에 19명씩 3개조가 3교대로 근무하며, 12대를 관리 운전하고 있다고 했다. 황씨는 조장을 맡고 있다. 감천항에서 일할 때는 갠트리가 4대였고, 한 조에 8명씩 2개조로 관리했는데, 부산 신항의 근무 환경이 더 열악한 셈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황씨는 고소 공포증이 없고, 트레일러와 지게차 운전 경험이 있고, 회사 동료 기사들에게 크레인에 대한 이야기도 꽤 들었다. 이런 간접 경험 등이 왠지 크레인을 익숙하게 해 주었다. 고생은 덜었지만 사고를 몇 번 목격한 뒤부터 굉장히 조심하게 되어 일의 속도가 더디다고 한다. 크레인 사고는 인명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셀 가이드(Cell Guide)에 컨테이너가 끼이는 사고나 컨테이너가 손상되는 사고가 발생하면 입장이 난처해진다.
“컨테이너는 선박으로 화물을 반복적으로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도록 「선박 안전법」에서 규격화해 놓은 직사각형의 용기예요. 선적 및 양하하는 데 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수송 대상 화물을 커다란 상자 속에 넣고 이 상자를 그대로 선박 등의 수송 수단에 기계로 적재하여 편리하고 신속한 수송이 이루어지도록 만든 거죠. 현재 곡물 등 살물[撒物, 포장하지 않은 상태로 운반되는 화물]과 유류 등 액체 화물 이외의 화물은 대부분 컨테이너를 이용한 수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면 돼요. 컨테이너의 재질은 일반적으로 강재 또는 알루미늄이 많이 사용되고 있고요. 이런 컨테이너는 셀 가이드에 따라 고정적으로 격납되는데, 그 간격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면 끼이고 파손의 우려가 발생한다는 거죠. 클레임 요청이 들어오면 싫은 소리 들어야 되고 그러면 자존심도 상하고요. 무엇보다 금전적인 손해가 커요. 사고 처리까지 시간이 소요되면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손해도 있고, 또 수리 경비도 들어가니까요.”
황씨의 갠트리 크레인이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는 40.6톤이다. 51m의 긴 팔을 가지고 있고, 총 중량이 761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일꾼이다. 황씨는 자신이 조종하는 갠트리 크레인으로 시간당 20ft 컨테이너 박스 25개를 들어 올리고 내린다.
“항만 근무의 특성상 설과 추석 명절을 제외하고는 별도의 휴일이 없는 것도 큰 어려움이죠. 가족과 함께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 한 게 늘 아쉬움으로 남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힘든 것은 야간 근무 때 고공에서 혼자 근무하면서 느끼는 피로입니다. 밤새도록 휴식과 작업을 번갈아 가며 똑같은 작업을 하다 보니 내가 기계가 되는 느낌을 받아요.”
황씨와 같은 크레인 기사의 작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작업 지시서를 보고 운반할 블록을 확인한다. 크레인의 작동 상태를 확인한다. 전원을 확인하고, 신호수와의 통신 상태를 확인한다. 와이어로프와 새클[Shackle, 연결용 쇠고랑]을 체결하고, 신호수의 신호에 따라 작업물을 감아올린다. 작업장 주위의 상태, 주위 시설물 등을 고려하여 주의 깊게 이동한다. 신호수의 신호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놓는다. 작업이 종료되면 장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전원을 차단하여 크레인의 작동을 중지시킨다. 이 작업 과정이 익숙해지면 여기서 어떤 부분을 더 배울 필요는 없고 단순한 일을 무한 반복하는 업무다 보니 황씨처럼 내가 기계인지 기계가 나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수많은 컨테이너 박스들이 자기 손을 거쳐 간다는 자부심에 늘 가슴이 뿌듯하다고 한다. 갠트리 크레인 기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황씨지만 요즘 고용 불안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형제와 같이 일해 온 동료들과 함께 안심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왔으면 하는 게 그의 최고 바람이다.
“한때 갠트리는 ‘항만의 꽃’이라고 불렸어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임금도 좋았고, 근무도 기계 1대에 기사 2명꼴이고 2시간 일하고 2시간 쉬었어요. 그래서 누구나 자격증을 따두려고 했고, 언젠가 갠트리 크레인에 오르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항만의 화려한 꽃이 아니라 시들어 버린 꽃이 되었죠.”
[물류 입국을 위해 골리앗은 쓰러지지 않는다]
물류 산업은 국제화 시대의 국가 경쟁력에서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한 주요 부문이기도 하다. 물류 입국을 건설하는 데 핵심적인 산업이 바로 컨테이너 운송 하역업이며, 핵심적인 자원 중에 하나가 바로 운송 하역 노동자이다. 우리나라 컨테이너 운송 하역의 80%를 담당하고 있는 거점 지역이 부산항인 점을 감안하면, 부산에서 운송 하역을 담당하는 노동자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가 된다.
“부산항은 컨테이너 하역료 하락과 물동량의 컨테이너 편중, 항만 지원 사업 영세성 등으로 항만 관련 산업의 국제 경쟁력이 취약합니다. 부산 항만 물류 산업의 ‘판’ 자체를 새로 짜야합니다.”
부산항의 문제점은 지나친 경쟁으로 컨테이너 하역료가 크게 하락했고, 컨테이너 터미널은 수익성이 악화되는 반면, 외국 선사들의 배만 불리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판’이라는 경쟁력 강화는 언제나 사측의 입장만 반영된 것이기에 힘든 노역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크레인 기사들의 고달픔은 해갈해 주지 못한다. 국내 선사끼리 하역 가격을 둘러싼 경쟁의 파장은 고스란히 크레인 기사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측은 자신들이 입은 손해 분을 기사들의 임금을 동결하거나 기사 수를 줄이거나 근무 조건에 투입되는 재정을 줄이는 것으로 만회하려고 하고 있다. 생활의 리듬을 깨가면서 열심히 일하기에는 목적의식이 떨어지는 실정이다. 또한 파견직이나 계약직이 늘어나면서 기사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구심력도 그만큼 약해졌다.
대부분의 크레인 기사들은 제때에 식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틈틈이 먹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위장이 나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말에 고정적으로 쉴 수 없기에 친구가 없다고 호소한다. 동료가 상주가 되었을 때 장례식장에 가보면 친구가 없단다. 왜냐하면 평소에 친구의 경조사를 못 가기 때문이다. 앞서 본 전 기사의 일상처럼 대부분의 크레인 기사들은 그들끼리 술을 마시거나 낚시를 하거나 등산을 한다. 직장 동료가 친구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현장에서 노동 강도가 높고, 출근이 주간·야간으로 들쑥날쑥하다 보니 자녀들과 진지한 대화를 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그런 생활을 수년간 지속하다 보니 왠지 자신만 소외되는 느낌이 들어 집에만 들어가면 텔레비전 시청 외에 별다른 일이 없다는 것이다. 크레인 기사들은 부산 신항으로 옮겨오면서 노동 강도가 더 높아졌다고 불만이 많다. 노동 강도는 항만 크레인 기사 중 여성 기사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3교대로 돌아가면서 근무하다 보니 남들이 쉴 때 일하고, 일할 때 쉬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생활 리듬이 깨지고 일상생활이 뒤죽박죽이 되기 일쑤이다.
1967년생 갠트리 크레인 경력 9년차 임진수씨는 전성택 기사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식에게는 크레인 기사라는 직업을 되물림하기 싫다고 말했다. 크레인 기사의 90%는 현 직장 생활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친구와의 만남, 가족과의 저녁 식사, 집안 행사 등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작은 행복을 자주 가져보지 못하는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야간 근무를 오래 하면 평균 수명이 줄어든다며 걱정이라고도 했다. 그의 안타까운 호소성 말들은 사기가 현저히 떨어져 있는 부산 신항 크레인 기사들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크레인 기사들은 선적 작업이 모두 끝나고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배가 출항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입을 모았다. 또 갠트리 크레인 운전할 때 낮에는 주변 풍경 감상할 여유가 없지만, 간혹 노을이 물든 저녁이나 밤하늘의 별을 볼 때 그 기분이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그 행복이 잠깐이 아니라 자주 일어나는 일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해운 입국의 청사진을 내실에서 먼저 찾으면 어떨까 한다. 적정한 인원의 충원을 통해 그들의 노동 시간을 헤아리고, 동기 부여를 위해서라도 승진 관리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산업 재해나 신체의 악화가 되지 않도록 그 예방도 합리적으로 조치한다면, 수많은 전 기사나 황 기사는 크레인을 운전하는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보람은 고스란히 부산항의 낮과 밤을 지키는 힘찬 골리앗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해운 입국의 청사진을 내실에서 먼저 찾으면 어떨까 한다. 적정한 인원의 충원을 통해 그들의 노동 시간을 헤아리고, 동기 부여를 위해서라도 승진 관리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산업 재해나 신체의 악화가 되지 않도록 그 예방도 합리적으로 조치한다면, 수많은 전 기사나 황 기사는 크레인을 운전하는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보람은 고스란히 부산항의 낮과 밤을 지키는 힘찬 골리앗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