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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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埠頭總罷業 |
영어의미역 | General Strike at Busan Wharf |
이칭/별칭 | 부산부두노동자 총파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1921년 9월 부산 부두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단행한 파업.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1914~1917년] 이후 일본이 겪게 된 불경기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21년 1월 부산의 택산(澤山)형제상회, 내국상선만철회사, 일본상선회사 등 하역업 회사들이 예고도 없이 부두 하역 노동자의 임금을 한꺼번에 3할이나 인하하였다. 이는 가뜩이나 열악한 노동 조건 아래 있던 조선인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것이었으므로, 노동자들은 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업주들은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를 계속하여 무시하고 임금 인하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노사 양측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경과]
1921년 1월의 임금 인하 조치가 시정되지 않은 채 또 다시 임금 인하가 거론되면서 9월 초 부두 노동자들은 파업을 결의하였다. 9월 12일 제1 부두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부두 노동자들은 이들 하역업자에게 임금의 4할 인상을 요구하고 15일까지 수락하지 않으면 파업을 단행할 것을 알렸다. 그러나 하역업자들이 이를 묵살하면서, 9월 16·17일 양일간 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당황한 하역업자들이 25일까지 답변하겠다고 하였으므로, 노동자들은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이 때 석탄 노동자들도 임금 인상안을 하역업자들에게 전달하고 25일까지 답변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결국 하역업자들이 노동자 측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부산항 하역 관계 노동자 5,000여 명은 25일 파업을 결의하고 26일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파업이 시작되자 경찰은 비상경계망을 펴 주도자를 체포하고 집회를 방해했으며, 하역업자들도 경찰의 힘을 믿고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결과]
파업이 시작되자 며칠 만에 부산항의 화물 수송이 마비되어 산업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결국 일본인 하역 업주들은 조금이나마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1할 내지 1할 5분의 임금이 인상되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파업 기간 중 배후로 지목한 노동 야학의 교원 손명표(孫命杓), 김경직(金璟直), 최태열(崔泰烈)과 이들의 친구라는 이유로 잡은 조동혁(趙東赫) 등은 파업을 끝내면 풀어주겠다는 노동자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결국 처벌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 부두 총파업은 한 도시의 동일 부문의 노동자 전체가 전체 고용주를 상대로 전개한 초유의 대규모 항쟁으로, 일제의 폭압과 사용자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단결된 투쟁이 큰 성과를 가져다 준 사례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런 이유로 부산 부두 총파업은 1920년대 조선 전체의 노동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