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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관 훼리호 보따리 장사들의 눈치작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54
한자 釜關-作戰
영어의미역 The wait-and-see policies of the peddlers at Bugwan Ferry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가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0년 6월 - 부관 훼리호 재취항

[부관 훼리, 과거로의 여행]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은 매일 저녁 8시, 부산항 국제 터미널에서는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로 향하는 카페리 성희호가 출항한다. 일본 쪽 카페리는 시모노세키 항에서 저녁 7시 출항하는 하마유(はまゆ)호다. 운항 소요 시간은 8시간.

1905년 9월 최초의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또는 부관 연락선] 이키마루[壹岐丸]가 취항한 이래 이 뱃길은 많은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해왔다. 일제 강점기 침략을 수반한 일본의 근대 문물과 일본인들이 이 관부 연락선을 타고 부산항에 첫 발을 내딛었으며, 일자리를 찾아 조선을 떠나는 노동자와 더 나은 삶을 위해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의 희망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기도 했다. 「사의 찬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괴로움으로 관부 연락선 위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졌으며,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수많은 조선인 징병자·노동자·위안부들이 이 배를 통해 일본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1945년 6월 미군의 공습과 어뢰 공격으로 부산~시모노세키 항로는 통행이 중지되었지만, 두해 전부터 운행되고 있었던 부산~하카타[博多] 항로가 보조 항로로서 연락선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여 고국으로 되돌아오는 귀환 동포들이 설레는 마음을 안은 채 부산항에 들어올 때도, 또 패배의 쓴잔을 들이키며 본국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이 부산항을 떠날 때도 관부 연락선이 이용되었다.

광복 이후 잠시 단절되었던 부관 항로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5년이 지난 1970년 6월 재취항했다. 이후 관부 연락선에서 부관 훼리로 이름을 바꾼 이 배는 보따리 장사 아주머니들의 치열한 삶의 전쟁터가 되었다. 부관 훼리의 주인공인 보따리상들은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그들의 녹록치 않은 삶은 꽃과 같이 피어나던 젊디젊은 시절 처음 배를 탔던 때부터 주름살이 깊게 패인 지금까지 마찬가지. 비록 아름다운 삶의 추억거리는 아닐지라도 정직한 땀 냄새 폴폴 풍기며 ‘희망 보따리’를 지고 오늘도 부관 훼리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인생극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우리는 인터뷰 같은 거 원래 잘 안 해]

20여 년 간 부관 페리를 이용하여 보따리 장사를 하고 계신 한 어머님. 배 안에서의 생활이 창피한 것도 많고 힘든 것도 많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따리 장사에 대해 알려달라고 해도 잘 해주지 않는다. 기자들이 찾아와도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일이든지 돈을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이지만 보따리 장사 아주머니들은 여자의 몸으로 그 무거운 짐 보따리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세관의 눈치를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끼리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더욱 각오를 다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힘겨웠던 그네들의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을 터이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낮춰 부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보따리 장사’라는 이름이 아무렇지 않은 걸까. 고유 명사화 된 보따리 장사, 보따리상이라는 말은 광복 전부터 배를 타고 옷·잡화 등 생필품들을 흰색·분홍색 천에 싸서 교역을 한 것에서 유래한다. 지금은 아무도 보따리를 들고 다니지 않고 대신 속칭 ‘이민 가방’이라 부르는 커다란 캐리어 또는 박스, 컨테이너로 교역을 한다. 그래도 옛날부터 보따리라고 불리어 왔고, 글자 그대로 실제 보따리를 들고 다니면서 장사했던 적도 있기 때문에 보따리 장사라는 말이 맘에 들고 말고가 없다.

[먹고 살려고 타기 시작한 배]

올해 67세의 보따리 장사 어머님.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시고 세련된 차림새를 하고 계신 어머님은 아직 현역으로 장사를 하고 계신다. 어머님이 처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42세 때였다. 목적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님은 보따리 장사에 뛰어들게 된 옛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내신다.

“옛날에 우리 아저씨가 동경에서 땅을 좀 구입해서 폐차 사업을 했는데 그게 어렵게 된 거라. 그래서 한국에 돌아오려고 배를 탔어. 원래 배를 타려고 탄 게 아니라 비행기를 타려고 했는데 비행기가 없어서 배를 타게 됐어,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보니까 장사꾼이 많은 거야. 그때 내 생각에 배를 타면 돈이 될 것 같았지. 내 나이 44살이었어. 지금 67살이니까 23년 전이네. 그렇게 배를 타게 되었어. 일본에서 거기 물건 가지고 와서 여기서 팔고, 여기 물건 가지고 나가고.”

어머님은 이런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풀어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양 수줍어하시면서 기억을 되새기신다.

[일본어를 잘 할 줄 몰라도 장사는 한다]

보따리 장사를 하려면 유창한 일본어는 필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머님이 던지신 한마디, “일본어 몰라도 다 되더라고!” 어떻게 일본어를 모르고 물건을 주문받고 구입하고 팔 수 있단 말인가.

시모노세키에서는 거의 다 한국 사람이 물건을 대주고 있다. 교포들이 보따리상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아예 일본어를 모르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도쿄에서 살았던 적이 있기 때문에 간단한 숫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또 아무리 못 배웠다고 해도 자기 이름 정도는 한자와 영어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특별히 책상 앞에 앉아서 배우지 않아도 생활 속에서 자꾸 하다 보면 하게 되는 것이 언어이지 않던가.

장사에는 많은 일본어가 필요치 않았다. 이치[일], 니[이], 산[삼], 시[사] 정도 알고 햐쿠[백], 센[천] 정도 알면 만사 오케이. 물건 이름 또한 외우려고 외운 것이 아니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워졌다. 고마핫바[깻잎], 모야시[콩나물] 등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아는 단어가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일본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되고 생활하는 데 별로 지장이 없을 정도로까지 실력이 늘었다. 도쿄 같은 대도시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도 한국 교포들이라서 크게 힘든 점은 없었는데 항상 배움에 대한 갈망은 컸다. 제대로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바람 때문인지, 어머님은 정식으로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지만 대신 큰 아들을 일본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아들은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보따리 장사 어머니의 장사 노하우를 물려받아 현재 무역업을 크게 하고 있다. 어머님의 보따리에서 시작된 작은 무역상이 이제 온 가족이 함께 컨테이너로 수출입을 하는 큰 무역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배를 한번 타면 다른 일은 못해]

처음 부관 훼리를 탈 때는 지금처럼 좋은 배가 아니어서 불편했지만, 2002년 배를 리모델링하고 나서는 많이 편해졌다. 배 안에는 보따리장수들이 생활하는 곳이 따로 있고 부관 훼리 쪽에서도 보따리장수들의 편의를 많이 봐주는 편이다.

지금 어머님은 일반 보따리장수들과는 떨어져서 특실을 잡아 왕래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다 같이 생활하셨다고. 보통 사람들은 배 안의 생활이 불편하고 힘들 것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배 안에는 큰 목욕탕도 있고, 특히 성희호는 빨래 건조기와 세탁기까지 구비하고 있어 생활하는 데 불편이 없다.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오히려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가 있어서 배를 한번 타면 다른 일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배 안에서 생활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어. 그걸 만날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딴 일은 못하지. 만날 거기서 그렇게 일하는 거라. 배 안에서 생활이 재미가 있어. 그래서 70, 80살이 넘어도 배를 타고 있는 거지. 다른 데 가면 재미가 없어서 못 있겠대, 거기 생활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많이 모이잖아. 그러다 보니 재미가 있어, 나름대로. 그러니 거기서 생활을 하는 거지. 괜찮아 재미있고 즐겁고. 그래서 크게 돈이 안 되더라도 하고 있어.”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항로에는 한국의 성희호와 일본의 하마유호가 있지만 일본 배 타는 사람은 일본 배만 타고, 한국 배 타는 사람은 한국 배만 탄다. 배 안에 자기 자리가 있고 집처럼 자신들의 생활용품이 구비되어 있으니까 다른 배는 탈 수 없다.

[우린 서로 경쟁자, 보따리 안의 물건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보따리장수들은 보통 서너 끼의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면서 삼삼오오 둘러 앉아 식사를 한다. 이렇게 겉으로는 친해 보이는 그네들이지만, 실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서로 경쟁자이다. 배 안에서 서로 다투는 게 일이다. 장사는 원래 장사 세(勢)라는 것이 있어서 서로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허허 실실 웃고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서로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다.

돈 되는 물건이 있으면 혼자 가져와서 아무도 모르게 팔면 10원이라도 더 받으니까 절대 “친구야 이거 우리 같이 사자!”라고 권하는 사람이 없다. 모든 것이 비밀이다. 내가 뭘 가져가는지 옆에서 모르고 또 누가 뭘 가져가는지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당연히 물건을 어디서 가지고 오는지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나대로 더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쪽은 그쪽대로 터득하는 것이다. 다 경쟁자들이다. 돈이 걸려 있는 문제라서 어쩔 수 없다. 바깥 사회나 배 안에서의 사회나 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보따리상들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지켜야 할 불문율이 있다고 한다. 첫째, 얼마나 팔았는지 묻지 말 것. 남이 많이 팔건 적게 팔건 내 물건만 좋은 값에 팔면 된다. 둘째,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 것. 호기심으로라도 남의 물건을 열어보거나 손대지 않는 것이 기본 예의이다. 셋째, 뭉쳐서 행동하지 말 것. 각자가 걸어 다니는 무역업자이므로 각자 계획한 대로 가져온 물건을 건네주고 돈을 받아올 뿐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규율들이 암묵적으로 그들 사이에 강요되고 있다.

어머님과 같이 나오신 친구 분께서 계속해서 보따리장수들끼리의 경쟁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 나게 이야기해 주신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삶의 치열한 이야기라고 강조하시며.

“배를 내릴 때 안 있나, 빨리 나가도 줄을 서야 하고 늦게 나가도 배 출입문 앞에 줄서야 하거든. 솔직히 빨리 나가도 아무 할 일도 없어. 그런데 괜히 빨리 나가서 앞에 서면, 뒤에 선 사람이 그걸 시기해서 싸움을 대대적으로 한다. 그 줄 서는 데도 넘버가 다 있다. 앞에 서는 사람들이 다 정해져 있는 거라. 1등실에 타는 사람이 제일 먼저고 그 다음이 배를 오래 탄 사람들 순서로 나가고. 이렇게 들어가고 나가는 것도 순서가 다 정해져 있다. (옆에 어머님을 가리키며) 여기는 20만 원 주고 특실 타고, 내는 14만 원 정도 주고 타니까 여기가 제일 먼저 나가는 거라. 우리는 보통 여행객들보다 배 값이 싸다. 많이 타니까 좀 세일을 해주는 거지. 하여튼 친한 것 같아도 속으로는 치열하다. 내리는 자리 하나 때문에 물고 뜯고 싸운다.”

[세관 검사대를 향한 뜀박질]

그들의 경쟁은 배에서 내릴 때뿐만이 아니다. 배에서 내려 세관 검사대로 향하는 순간에도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빨리 가려고 난리다. 이른바 좋은 ‘다이’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요새는 보따리가 작고 가지고 가는 게 별로 없어서 그렇지만, 옛날에 가방 5~6개를 가지고 나올 때는 말도 못한다.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순식간에 다 해치워 버린다. 순식간에. 만약 그렇게 가다가 엎어져도 뒤에 사람은 그거 밟고 넘어가지 도와주고 그런 거 별로 없다. 시간이 없거든. 빨리 가서 ‘다이’도 좋은 거 타야 하고. 옆에서 엎어지고 넘어지고 다리가 부러져도 모른다. 밟고 넘어가도 모른다. 그런 것이 보따리 엄마들이다. 참 삶이 치열하제?”

이른바 좋은 다이는 융통성 있는 세관 직원이 검사하는 검사대를 말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야만 사정을 해서 하나라도 더 내갈 수 있으니까. 어떤 세관 직원은 절대로 더 내주는 것 없이 빼앗아 버리기도 한다. ‘꽉 막힌’ 직원을 피하기 위해 보따리상들은 배에서부터 내달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일본 쪽이든 한국 쪽이든 세관 직원에 대한 정보 공유는 필수.

[요즘엔 일주일에 한번 배에서 내려]

어머님이 처음 일을 시작하셨을 때는 몇 달씩 배 안에서 생활했지만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은 집에 들어간다. 즉 월요일에 배를 타면 토요일이나 금요일에 내린다. 경기가 안 좋아서 쉬기 좋다고 웃으면서 말씀 하시지만 그 씁쓸한 웃음의 뒷면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옛날에는 몇 달씩 배 안에서만 살았어. 시간이 없으니까. 요새는 이렇게 경기가 안 좋으니까 놀기에 딱 좋지 뭐. 한국 물건이 많이 들어갈 때 아니면 안가거든. 일요일에 교회도 가고 좋다. 옛날에는 일본에서 나올 때, 장사꾼 욕심으로 쉬지 않고 가지고 나왔지. 후딱 물건 내려주고 그 길로 다시 일본으로 가는 거지. 옛날에는 지금처럼 서류가 아니고 보따리로, 사람이 가져가는 숫자대로 검사를 했어, 서류 없이. 한 번에 소주 1병, 라면 3개, 김 2개 뭐 이렇게 지정한 것만 가져다 나르니까 물건이 바쁘지. 빨리빨리 많이 해야 많이 남으니까. 그리고 그 양이 모자라다 보니 매일 배를 탔는데, 지금은 뭐 몇 백 박스도 컨테이너로 하루에 다 갖다 날라 버려. 그래도 물건을 가지고 가야 하니까 배에서 5~6일은 생활하는 거라.”

[일본 전자 제품이 잘나갈 때는 재미 좋았지]

대부분의 보따리장수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라면, 소주 등을 먼저 가지고 나간다. 어머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머님은 배를 타려고 마음을 먹고 잠시 시모노세키에서 일도 배울 겸 그릇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한국 물건을 구해 달라고 해서 그 물건을 구해 부치니까, 도쿄에 있던 사람들이 택배 주소를 보고 시모노세키로 어머님을 찾아와 한국 물건을 주문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제일 주문이 많았던 것이 라면, 소주 등의 식료품이었다고.

보따리상들은 지금도 일본 쪽에서 주문하는 것은 다 구해 준다. 시장에서 직접 발품을 팔아 물건을 구입해 가져가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물건을 대신 구해[일명 구매 대행] 주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써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주문을 위한 책자를 만들어 돌리기도 한다. 물론 책자를 만들어 돌릴 정도의 보따리상들은 이미 보따리상의 단계를 넘어선 큰 무역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여튼 한국에서 먹고 사는 것은 다 일본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지금도 제일 많이 팔리는 건 여전히 라면이다. 그중에서도 ‘신라면’. 지금은 라면, 소주, 김, 김치 등 식료품은 물론이고, 그릇, 수저, 액세서리, 가방, 신발, 의류 등 온갖 잡화가 다 일본으로 들어간다. 오히려 지금은 일본 물건을 들여오는 것보다 한국 물건을 가지고 나가서 파는 것이 더 이윤이 많이 남는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시작은 한국 물건을 일본으로 나르는 것부터 시작했지만, 한때는 일본 물건을 한국으로 들여오는 것이 ‘더블’로 남았던 적도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5~20년 전, 어머님의 기억에는 그때가 가장 장사가 잘 됐고 재미있었던 때라고 회상하신다.

“처음 일 시작했을 때, 그때는 하루에 몇 백만 원씩 벌 때도 있었다. 그때는 많이 벌었지. 우리나라가 전자 제품도 잘 안 되던 때였고 술도 양주는 가져오는 대로 술집에서 다 가져갔고…… 그런데 지금은 안 돼, 지금은. 지금은 세관에서 딱 정해 놓은 것만 하는 거라. 보따리 장사 같은 경우에는 기본이 깨 5개, 기름 3병, 술 한 병, 담배 한 보루, 과자 몇 개, 화장품 비싼 거는 1개, 아니면 2개, 이렇게 다 정해 놨어. 면세 품목으로. 그래서 요즘은 일본 물건 가져오는 건 잘 안 된다. 이건 할매들 용돈 벌이밖에 안 되는 거라. 요즘 한국 전자 제품이 얼마나 좋아. 밥솥만 해도 빙빙 도는 ‘쿠쿠’가 있는데 ‘코끼리 밥솥’ 누가 사나? 아무도 안 사지. 그리고 일본에서도 옛날에는 전자 제품을 자기들이 만들었지만 지금은 중국제가 많고 인도나 저기 다른 데서 만들어서 들여와. 그래서 질이 많이 떨어졌어. 그러니 전자 제품이 더 안 팔려. 중국에서 만들어오니까 그렇지. 일본 내 공장들이 다 외국으로 옮겨버리고 없어. 그래서 점점 더 한국 물건들이 많이 나간다. 지금은 한국 물건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

우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때 한국 아주머니들 사이에 코끼리 전기밥솥이 얼마나 로망이었던가를. 중·고등학교 때 소니워크맨을 가진 친구들을 우리는 얼마나 부러워했던가를. 또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를 손에 넣기 위해 부모님을 얼마나 졸라댔던가를. 거의 15년 전쯤에는 일본으로 여행 가는 사람들에게 사달라는 부탁을 할 만큼 일본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는 최고 인기였다. 비록 지금은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에 밀려 아날로그적인 일본 게임기는 그리 인기가 없지만 말이다.

[요즘은 풋고추가 대세]

최근에 가장 잘 팔리는 품목을 물으니 돌아오는 답이 의외다. “풋고추!” 단번에 풋고추, 청양 고추 일명 ‘땡초’가 제일 먼저 튀어나왔다. 아니, 일본인들은 매운 것을 싫어하지 않았던가. 어머님의 말씀에 의하면, 요즘 일본에서 땡초가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풋고추나 땡초를 된장에 묻어두고 숙성시켜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계절상 지금 풋고추가 제일 맛있을 때이기도 해서 주문이 많이 들어온다. 그리고 깻잎도 많이 찾는 식품이다. 일본에 없는 채소이기도 하지만 향이 좋아서 교포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많이 찾는다.

얼마 전까지는 참외를 많이 팔았다. 참외 같은 과일은 신선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직접 참외의 고장 성주에서 5㎏ 상자에 넣어 부산항으로 가지고 온 후 컨테이너에 넣어 바로 일본으로 보낸다. 한 번에 몇 백 상자씩 보내지만, 성주에서 바로 참외를 따서 일본 소비자들에게 풀리기까지 딱 3일이면 충분하다. 참외는 어머님 네가 제일 많이 수출하는 품목이다.

[일본에서도 발품 팔아서 물건 해야 해]

이쯤 되면 거래처가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물건을 보다 싸게 구해 와야지 이문이 많기 때문이다. 일본 물건을 사올 때 따로 거래처가 있는 것일까. 물론 단골집은 있지만 대량으로 물건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발품을 파는 일이 더 많다.

시모노세키에 보따리상들을 위한 상점이 몇 군데 있고 거기서는 시중 가격보다 더 싸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고급 화장품이나 잡화는 백화점 세일 기간에 맞추어 대량 구매한다. 시모노세키뿐만 아니라 요즘은 근처에 있는 고쿠라[小倉]에까지 가서 물건을 구해온다. 고쿠라 가 백화점이나 약국[일본에서는 약국에서 잡화나 화장품 등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이 크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전자 제품 파는 가게가 시모노세키 항구 근처에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없어졌고, 좀 색다른 것이어야만 한국에서 잘 팔린다. 일본 소비자의 구미에 맞춰 한국 물건을 구입하듯이 일본 물건을 들여올 때도 한국에서 특별히 주문 받은 것을 구해 온다. 그런 특별한 물건들을 구입하기에 시모노세키는 조금 아쉬운 동네다.

“보따리상들한테 파는 물건들은 다 따로 있어. 일반보다 더 싸게. 그래서 어떤 물건은 여기[한국]가 더 헐타. 시세이도 비누 같은 거, 잘 알지?”

실제 여기 깡통 시장에서 일본 현지보다 더 싸게 팔리고 있는 물건이 몇 가지 있다. 엔이 비쌀수록 일본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보다 깡통 시장에서 구입하는 것이 더 싸다. 그만큼 물건을 싸게 구입하는 데는 수십 년을 쌓아 올린 어머님들만의 노하우가 존재할 것이다. 또한 빠른 정보력과 민첩한 행동은 보따리 장사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밑거름이 된다.

처음 어머님이 배를 탔을 때 한 배에 보따리장수가 200명도 더 넘게 있었지만 각자가 어디서 물건을 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래도 다 물건을 해오는 루트가 있고 자기 나름대로 일거리가 있어 왔기 때문에 할머니가 된 지금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

[일본 물건 찾는 사람이 계속 줄고 있다]

요즘 일본 물건을 특별히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11년 3월 동일본 지역에 지진과 함께 쓰나미가 발생하고 후쿠시마 원전 문제가 터진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지만, 한국 물건이 일본 것보다 점점 더 좋아지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지금은 과자 종류와 염색약, 보온병 같은 것이 꾸준히 팔리는 정도. 과자도 예전만 못하다. 과자의 주 소비층은 아이들인데, 방사능 사태 이후 엄마들이 일본 과자를 구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에서 가지고 오는 물건은 얼마 안 되고 한국에서 가져가는 물건이 많다.

[세관에게 바란다]

20여 년 전만 해도 보따리장수는 거의 밀수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머님도 그건 인정하신다. 그런데 요즘은 “택도 없는 소리”라고 바로 일침을 놓으신다.

“옛날에는 세관 직원이 지키고 서서 물건을 확인했지만, 요즘은 컴퓨터가 좋아서 방 안에 앉아 가지고 모니터로 딱딱 두드린다. 옛날에는 밥솥 속에 넣어서 들고 들어와도 몰랐거든. 그런데 지금은 뭐 밥솥도 들고 오지도 않지만, 그만큼 세관이 맑아졌다고나 할까. 우리나라가 그만큼 맑고 깨끗하게 처리되고 있어. 요즘은 바늘구멍만큼도 못 속여. 나도 속이기도 싫고. 그만큼 우리나라가 살기 좋게 된 거라. 세관 직원들하고도 옛날에는 친했지만 요즘은 안 친해. 요즘은 젊은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많아서 안 친해진다. 어휴, 딸내미들이 얼마나 깐깐한지 몰라. 좋은 말로는 똑 소리 나지만 그만큼 정이 없지. 그리고 요즘 우리나라 전자 제품이 얼마나 좋아. 또 우리나라 과자고 옷이고 식품이고 얼마나 좋아. 그러니 일제가 점점 돈이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일본에서 들고 올 때는 세관이 정한 만큼만 들고 와. 더 들고 올 것도 없다.”

일본 전자 제품은 더 이상 한국에서 인기가 없기 때문에 보따리장수들은 예전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밀수를 하지 않는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 세관이 정말 깨끗해졌기 때문에 10원 하나 불법이 없으며, 들고 오는 것만큼 세금도 지불하니까 털끝만큼도 속이는 게 없다.

실제로 부산세관이 분석한 자료를 보면 지난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부산에서 밀수로 적발된 가전제품은 금액 기준으로 전체의 5~8%를 꾸준히 차지해 왔다. 하지만 2005년에는 비중이 1%대로 줄어들었고, 2009년에는 전체 밀수금 약 5,400억 원 가운데 10억 원인 0.2%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또 대부분의 무역이 컨테이너로 이뤄지면서 보따리상이나 어선을 통한 직접 밀수는 이제 거의 자취를 감췄다.

세관의 밀수 적발 방식도 과거 어선에 직접 올라가 검사를 하거나 보따리상의 짐을 수색하던 방식은 거의 사라졌고, 통관 서류 등 정보를 전산으로 분석해서 수출입 과정의 이상 징후를 포착하는 첨단 방식으로 변모하였다. 사회가 그만큼 투명해졌다는 이야기이니 세관 직원과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세관이 그전보다 많이 깨끗해진 것은 사실이다. 보따리장수들도 우리나라가 발전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고 한다. 다만, 세관 직원들이 조금은 보따리 장사 어머님들께 유연한 자세로 대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우리 세관에 비하면 일본 세관은 신사다. 겸손하고. 우리나라는 권위적이고 뻣뻣하고 좀 그렇다. 시모노세키에서는 줄을 서면 ‘이리 와라 저리 가라’ 이런 말 안하는데, 여기는 ‘와라 가라’ 계속 명령한다. 그리고 줄을 좀 많이 서면 검사 못하게 딱 막아버리고. 우리가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리 심통인지 몰라.”

아마 모든 보따리장수들이 느끼는 것이리라. 어차피 세관에 다 등록되어 있는 보따리장수들인데 그렇게 빡빡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보따리상들은 의무적으로 세관에 등록할 필요는 없지만 워낙 자주 다니는 분들이라서 관리의 편의상, 일본 측에서도 한국 측에서도 보따리장수들의 명단과 사진을 가지고 있다. 불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뻘 되는 사람들이 용돈 벌이 하는 걸 가지고 너무 거만하게 대하는 것이 불만이고 이를 좀 시정해 달라는 부탁이다.

또 세관에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면세 범위 확대에 관한 것이다. 보통 보따리 장사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면세 범위가 일반 관광객보다 높을 줄 알고 있지만, 똑같이 400달러이다. 그래서 한국 물건 들고 나가는 것에 비해 10분의 1도 채 못 가지고 온다. 많이도 아니고 600달러 정도만이라도 면세 범위를 늘려주면 고마울 텐데 계속해서 건의를 해도 안 된다. 400달러도 세관이 정한 400달러만큼 가져와야 한다. 즉, 세관에서 정하는 400달러는 인터넷으로 보고 측정한 것이거나 깡통 시장에서 팔리는 가격으로 시장 조사를 해서 물건의 가격을 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더 많이 못 가져 오는 것이다. 실제 보따리상들은 세관이 알고 있는 가격보다 훨씬 싼 값에 물건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물건 가격을 매겨 버리기 때문에 세관이 정한 것보다 더 많이 들고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없다. 그 점이 많이 아쉽다. 면세 범위를 600달러로 올리고, 거기서 추가되는 금액은 세금을 내면 되니까 제발 올려주면 좋겠다는 것이 지금의 가장 큰 바람이다.

[후쿠시마 방사능 사건, 그 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직후 한국인들은 일본 식품은 물론이거니와 물건조차도 꺼리고 있다. 이 일이 있는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제는 될 수 있는 한 피하려고 한다. 보따리장수들에게 후쿠시마는 어떤 의미일까.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처음에는 일본 물건이 여기 도착하면 식품안전청 사람들이 나와서 전부 검사 했어. 그래도 물건이 안 팔리더라고. 지금은 그때 보다 조금 낫다. 사람들이 방사능 걱정 많이 하는데 우리나라에 들고 오는 물건들은 안전해. 후쿠시마 쪽에는 공장이 없더라고, 전부 농사짓고. 그리고 여기 들고 오면 철저히 검사를 해. 처음에는 전부 검사했는데 지금은 무작위로 검사하는 거라, 며칠에 한 번씩. 생각지도 못했는데 품목마다 이 보따리상한테서는 과자, 저 보따리상한테서는 화장품. 뭐 이렇게 해서 검사 다한다. 방사능이 있다 하면 한국에서 가만 놔두겠나. 당장 못 들고 오게 하지. 우리나라 검사하는 거 유명하다. 철저히 하니까 믿고 먹어도 된다. 일본에서도 만들면서 방사능 검사 다 하더라. 중국은 거짓말 많이 하지만 일본은 먹는 것에는 거짓말 안한다. 선진국답게.”

그러나 아무리 검사를 철저히 한다고 해도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 실제 깡통 시장으로 놀러가는 사람들은 재미로 일본 사탕 하나라도 사서 가는데,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고 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후쿠시마 사태 이전과 이후의 마음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어디 걱정이 방사능뿐이랴. 최근 곤두박질치고 있는 환율도 어머님의 골칫거리다.

[아베노믹스가 보따리상에게 미치는 영향]

아베 신조가 일본 총리가 되고 나서부터 환율이 요동치고 있다. 원화 가치가 너무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님처럼 주로 한국 물건을 가지고 나가서 파는 보따리장수들은 요즘 몇 달째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 물건을 들고 나가 봤자 손해다. 환율이 오를 때는 끝에 몇 자리만 얻어먹어도 돈이 많은데 지금은 한국 물건이 너무 비싸서 적자가 많다. 아베가 총리가 되고부터 계속 이런데, 조금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나라는 무역밖에 더 있나?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환율이 올라야지. 돈 버는 데 힘 안 드는 것이 없다. 일본 사람들은 환율 떨어졌다고 좀 봐주고 이런 거 전혀 없다.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짠지 모를 거라. 100엔 가지고도 짤짤짤, 1,000엔은 큰돈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콩나물이라도 갖다 줘야 돈 받지 한 푼도 능청이 없어.”

[깡통 시장과 같은 배를 타다]

1970~1980년대만 해도 깡통 시장은 일본에서 들여온 밀수품들로 넘쳐 나던 곳이었다. 일제워크맨, 게임기, 밥통 등 전자 제품은 물론이고 고급 화장품 등 당시 다른 데서는 구하기 어려운 수입품을 여기서는 전부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명성이 전국에 자자했고, 멀리 서울 사람들도 물건을 구하기 위해 깡통 시장에 올 정도였다. 특별한 것을 찾아 다녔던 당시 연예인들도 깡통 시장의 주 고객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깡통 시장에 물건을 대주는 사람들이 바로 보따리장수들이다. 지금도 보따리장수들이 물건을 풀어 놓는 곳이 이 깡통 시장. 그러나 지금은 국산 제품의 성능 향상과 더불어 일제 전자 제품을 찾는 수요가 거의 없고 일본과의 교역보다 중국과의 교역이 더 확대되면서 깡통 시장의 명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여기 깡통 시장도 옛날에 비해서 많이 줄었어. 새로운 사람들은 수입품 장사를 안 하지. 돈이 안 되니까. 지금 수입품 장사 하는 사람들은 다 나이든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 장사 끝나면 아마 없어지겠지. 젊은 사람들은 안하려고 해. 이 시장에서 젊은 사람은 거의 없어. 그러면 보따리도 우리 세대가 끝나면 없어지겠지.”

예전에는 깡통 시장 곳곳에서 워크맨, 전화기, 전축 등을 파는 상점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식품, 술, 소소한 잡화 등을 파는 가게들만 남아 있다. 앞으로 깡통 시장이 없어질 것이라는 어머님의 말씀이 계속 가슴에 걸린다. 부산에 사는 사람들은 깡통 시장에 관한 추억거리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어릴 적, 부평동 시장의 명물인 ‘오뎅’을 입에 하나 물고 엄마 손에 이끌려 깡통 시장에서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이야 백화점에 가면 화려하고 신기한 수입품들이 많지만 그 당시만 해도 진귀한 수입품을 볼 수 있는 곳은 깡통 시장뿐이었다. 스승의 날이나 어버이날 등 무슨 날만 되면 좀 더 특별한 물건을 찾아온 사람들로 깡통 시장은 입구부터 북새통이었다. 그런 깡통 시장과 그 깡통 시장을 있게 해준 보따리장수들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에서 내 어릴 적 추억이 뜯겨 나가는 것마냥 씁쓸한 기분이 든다.

[진화하는 보따리 장사]

어머님이 처음 장사를 할 때는 배의 승객 500여 명 가운데 보따리장수만 200~300명 정도 고정으로 타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관광객이 대부분이고 장사꾼들은 장사가 잘 안되니까 보통 50여 명, 많을 때는 60명, 적게는 35명 정도가 고정적으로 성희호를 탄다. 그중에서도 90% 이상이 50대 이상 여성이고 이 중 절반 이상이 60대를 넘긴 어르신들이다. 어머님께서는 우리 세대가 끝나고 나면 아마 보따리 장사는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어머님의 이런 걱정이 기우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모든 이들의 바람일 것이다.

오랜 세월, 갖은 풍파를 견뎌 내며 부산항의 명물이 된 보따리 장사 어머님들. 보따리를 이고 달리던 그네들의 방식은 이제 세월의 뒤안길로 비켜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보따리상도 지금은 단순 개인 무역업을 넘어 새로운 틈새 산업을 형성해 가는 모양새다. 가격은 비싸지만 품질이나 디자인이 뛰어난 제품으로 부유층을 겨냥하는 사람, 깡통 시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더 싼 가격으로 제품을 파는 사람, 아예 젊은 층을 공략할 심산으로 발품을 팔아 옷이나 특이한 속옷 등 특정한 품목을 집중적으로 들여오는 사람 등 예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보따리상의 전통을 계속 이어 가고 있다. 보따리 장사도 시대에 따라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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