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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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盛昌木材合板- |
영어의미역 | Those who make plywood at Sungchang Lumber Co.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로 627[다대동 38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지아 |
[청송에서 온 청년]
해동씨가 성창기업에 입사한 해는 1966년이다. 1947년생인 그는 대구농림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5년에 실습생으로 처음 이곳에 왔다. 청송에서 사과 과수원을 하는 집의 4남 4녀 중 장남인 그는 홀로 대구까지 유학을 왔다가 실습을 하러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성창기업의 회장님이 대구농림고등학교 선배라고 하셨다. 농림고 학생이니 나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고 목재 회사로 실습을 가는 것이라 부산으로 오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이 직접 면담을 하셔서 3학년 학생 중에서도 몇 명만 특별히 뽑혀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때 우리가 처음에 올 때 부산역이 아니라 부산진역에 대구서 와가, 여 실습하러 올 때 교장 선생님하고 같이 인솔해가 왔는데. 우암동까지 가는 버스가 마땅치 않아가꼬 뭐 오래 기다리가 마이크로버스 같은 거 타고 그래가 겨우겨우 왔지.”
열아홉 어린 학생 7~8명과 교장 선생님까지 기차를 타고 힘들게 내려왔다. 우암동 회사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거의 1시간은 길에서 보내다 겨우겨우 도착한 회사.
‘적기동 4가 7에 2’
5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또렷이 기억하는 옛 회사의 주소이다. 당시에는 우암동을 적기동이라고 했다. 일제 강점기에 그 골짜기를 적기동이라고 불렀는데 1960년대 그가 내려올 당시만 해도 일본말로 ‘아카사키’라고 불렀다.
회사에 처음 도착해서 회장님에게 인사 먼저 드렸다. 그는 지금은 돌아가신 노회장님을 처음 대면한 날의 감격을 떠올린다. 실습생으로 멀리 대구에서 와줬다며 실습 기간 동안 특별 대우를 받았다. 실습생들은 일반 기숙사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라 일본 기술자들이 지내는 숙소에서 묵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 기술자들이 직접 한국으로 와서 기계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숙소가 별도로 있었다. 사택처럼 단독 주택에 마련된 일본인 숙소에서 실습생들도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우가 상당히 좋았다. 실습 당시에는 나무에 대한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서 여기저기 기록도 많이 하고 다녔다. 몸을 쓰는 일보다 공장 안을 돌아다니며 배우는 경우가 많아서 편하게 있었다며 웃는다.
그는 성창기업에 1966년 2월 1일 정식으로 입사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인 1965년부터 실습생으로 성창기업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근속 기간을 물어보자 사원이 된 날을 정확하게 말한다. 스무 살 젊은 청년이 부산에 터를 잡은 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원이 된 이후 우암동 기숙사로 들어왔다. 워낙 기숙사 생활을 하는 직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셋방에서 지내면서 기숙사에 자리가 생길 때까지 대기자 순번을 올려두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렇게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오래도록 위원장을 했다. 기숙사에 사감이 있었지만 기숙생을 대표하는 위원장도 따로 있을 만큼 규모가 컸었다. 남자 기숙사보다 여자 기숙사는 그 규모가 더 컸었다. 남·여 기숙생의 대표로 위원장을 하면서 어린 나이였지만 꽤 열심히 활동을 하였다.
합판 공장의 현장직에는 여직원들이 무척 많았다. 요즘은 그런 경우가 없지만 당시에는 현장직 여직원을 부산 이외의 먼 지역에서 많이 데리고 왔다. 원래 회사가 경상북도에서 만들어졌고 회장이 경상북도 봉화 출신이다 보니 경상북도 지역에서 젊은 아가씨들이 많이 왔다. 경상북도 봉화에서 어린 아가씨들이 통근 버스에 가득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온 여직원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했다. 잠 잘 곳이 없는 여공들에게 회사가 해줄 수 있는 혜택이었다. 명절이면 경상북도 봉화나 전라남도 순천까지 30대가 넘는 회사 버스가 귀경길을 떠났다.
“군대를 좀 늦게 갔어요. 1972년도에 갔다가 1975년도에 돌아왔지. 입사 해가 5~6년 근무하다가 군대 갔고 또 인사하러 오니까 회사 들어오고 싶어 하는 기색이다 싶으니까 시골 가 좀 쉬고 있으니까 서류 보내라고 하대. 마땅한 자리도 없으니까 그래 또 꾸역꾸역 왔습니다.”
기숙사에서 이십대를 모두 보냈다. 그곳에서 군대를 갔고, 제대 후에 다시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의 이십대는 군대에 있는 기간 이외에는 성창기업과 기숙사, 위원장 생활이 전부였다.
해동씨는 서른 살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이제 기숙사 생활을 벗어나는가보다 생각했지만 어림없었다. 결혼한 새 신부를 청송 시골집에서 시집살이를 좀 살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뜻에 따라 새신랑인 그는 또다시 혼자 기숙사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집사람과 같이 못 살았어. 고 떼놨다가 기숙사 생활을 어느 정도 하면서 6개월인가 1년인가 했지. 그라고 셋방을 얻어가 이사를 하게 됐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나왕]
처음 해동씨가 입사할 무렵만 해도 일본 기술자들이 회사에 많았다. 아직까지도 합판 공장의 기계들은 일본이나 독일에서 수입한 것들이 많다. 물론 우리나라도 이제 어지간한 기계들은 모두 만들 수 있을 만큼 기술력이 발전했다. 하지만 좋은 기계들은 아직도 수입산이 많다.
예전에는 아예 우리나라 기계가 없었다. 일본에서 기계들을 구입해 와서 합판 공장에 들여놓는 것이 큰일이었다. 합판 공장이 번창해 갈수록 기계도 계속 새로 들여와야 해서 일본 기술자들이 수시로 와서 기술도 가르치고 새 기계도 설치했다. 예전에는 합판을 만드는 원재료인 원목이라고 하면 나왕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나왕이 합판 산업의 유일한 주 원료였다.
“나왕이라 하는 거는 남양 지대에 그러니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쪽을 우리말로 남양 지대라 하는데 그쪽에서 오는 활엽 나무 굵은 거 직경 1m, 길이 한 15m, 20m짜리 그거를 통틀어가 나왕이라 카지.”
먼 외국에서 수입해 온 원목이 들어오면 비싸게 사온 원료이기 때문에 등급과 규격 등이 정확하게 왔는지 검수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해동씨가 주로 있던 원목관리계의 일이었다.
나왕은 배에서 내리면 바다에 그대로 띄워 놓았다. 지금도 1960~1970년대 합판 산업 소개에 흔히 볼 수 있는 물 위에 떠 있는 나무가 바로 나왕이다. 원목이 워낙 크기 때문에 원목 검수를 위해 사람들이 나무 위를 걸어 다녀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무와 함께 물 위를 걸어가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예전 회사 자리를 보여준다. 지금 우암동에 자리 잡은 부산외국어대학교 아래 넓은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공장 앞은 바로 바다가 있어서 나왕들이 둥둥 뗏목처럼 떠 있었다. 나무를 바다에 띄워 놓고 위를 돌아다니며 그가 한 일은 나무의 굵기 등의 치수를 재는 일과 나무에 흠이 있는지를 살펴 등급을 매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체크리스트를 작성해가며 검수를 했다.
원목관리팀에서 하는 일은 또 있었다. 원목을 공장 안에 공급해주고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감독하는 일도 그들의 몫이었다. 남양재는 등급을 매겨서 ‘로타리 기계’ 깎는 데까지는 원목관리팀에서 관리 감독을 했다. 공장 안을 다니면서 감독을 하다보면 현장 직원들과 싸움도 많이 해야 했다.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하기 편한 좋은 원목만 쓰려고 하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기왕 돈 주고 사온 재료들이니 힘들어도 모두 만들어내자는 입장이라 그 둘 사이에서 감독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지금도 보면 일일 생산량 목표가 있어가지고 A조 B조 있쟎아요. 원목 나무 좋은 게 들어가느냐 안 좋은 거 들어가느냐에 따라 각조가 생산량이 달라요. 좋은 나무만 가져가서 쓸려고 편식을 할 거 아니에요. A조 B조 경쟁이 붙으니까. 그러다보면 좋은 것만 갖다 쓰고 안 좋은 것만 남게 되니까 나중에 문제가 생겨요.”
해동씨는 2003년 정년 퇴임까지 줄곧 원목 관리 업무를 맡았다. 그래서인지 나무 하나는 척 보기만 해도 착 하고 답이 나온다고 한다. 검수 작업은 그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 3명이 한 팀으로 일을 했다. 나무 길이를 재려면 한 사람은 끝에서 줄자를 잡아주고, 한 사람은 반대편에서 길이를 읽어주면 나머지 한 사람이 기록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작업의 최소 인원이 3명은 되어야 했던 셈이다.
직경을 잴 때면 한군데만 재어서는 정확한 수치가 나오지를 않는다. 나무가 정확하게 둥근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열십자로 재어야 했다. 물 위로 드러난 나무의 가로를 잴 때에는 ‘크립빠’라고 부르는 윤척을 사용했다. 세로를 잴 때는 물밑으로 손을 넣어 나무 끝에 자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까다로웠다. 그렇게 나온 두 치수의 평균을 내는데 나무 윗동과 아랫동을 모두 이런 식으로 재고 그 평균을 따져야 정확한 나무 크기가 나왔다.
원목관리계의 가장 주 임무는 원목 검수 작업이지만, 이와 함께 수입해온 원목을 하역하는 것에서부터 원목을 공장에 적절하게 투입해 주는 일까지 꽤 다양한 업무를 처리했다. 어떤 합판을 만들 것인가에 따라 투입하는 원목의 종류도 달랐기 때문에 나무마다 특성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3년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로 직접 원목 구매를 하러 나가기도 했다.
“나왕 카는 기 영어로 ‘트로피칼[?] 우드’라꼬 남양재 그기 전부다 활엽수입니다. 남양 지대 적도 주위에 사는 기 그거는 활엽수입니다. 강도가 침엽수가 연하고...활엽수 중에도 특이 수종은 연한 게 있지. 우리나라로 말하면 오동나무, 버드나무 이런 거는 연하지만은 참나무라든지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이런 것들이 대부분 소나무보다 강하듯이 남양재에도 강한 품종이 좋은 합판을 만드는 거야. 합판의 내구성이라든지 강도라든지.”
바다에 나무를 띄울 때만 해도 가공하기에 불편하고 접착제를 붙이는 등의 작업에 어려움이 있어서 물에 가라앉는 나무는 ‘신카’라고 부르며 수입하지 않았다. 그런 나무들은 등급이 낮아 예전 같으면 합판용으로 쓰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동남아시아산 나왕이 합판 산업의 주원료가 되면서 결국 물에 뜨는 좋은 나무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주원료인 나왕이 부족해지자 다른 원료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크레인, 아비돈, 카폴...이런 레진, 송진 나오는 나무들이 강하고 내구성이 있고 하니까 그기 넘버원 되는 거야.”
[합판 한 장을 만들기까지]
수입해온 원목은 검수 과정을 거쳐 합판 공장 기계로 들어갔다. 기계라고는 하지만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는 물 밑에 구루마에다가 나무 씌워 갖고 우이찌를 감아 올리가꼬 ‘거두’카는 그 놀부가 박 탈 때 쓰는 톱, 그거 갖고 켜는 거를 내가 봤습니다. 그거 켜면 하루에 두 동가리 자르고 옆에 막걸리도 슬 먹어가면서 뭐 이래 쉬엄쉬엄...그때는 공장 규모가 작었기 때문에......”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나무를 켜던 시절에는 하루 작업량도 그리 많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많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하나 둘 편리한 기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기계 갖고 크레인카 들어올 리가 ‘케인쇼[?]’라고 기계톱이 있어요. 그것가 커팅 하는 거는 그냥 뭐 칼로가 무 자르기 식이지.”
합판 규격에 따라 나무 길이를 자르기를 2m 50㎝로 자르거나 2m로 자른다. 합판 크기는 흔히 여덟 자 합판 즉, 8피트 합판과 6피트 합판으로 구분이 된다. 그렇게 나무 용도에 따라가 길이를 맞춰 잘라 주는 것이 합판을 만드는 첫 단계이다. 그렇게 자른 나무를 공장 안에 넣어주면 ‘로타리 기계’ 여러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계에 나무를 넣으면 기계가 나무를 꽉 잡고 돌리면서 사과 껍질을 깎듯이 속까지 똑같은 두께로 얇게 나무 한 통이 깎였다.
나무가 정확히 원통형이 아니기 때문에 깎다 보면 겉에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부분들이 떨어져 나갔다. 나무 상태가 조금 불량한 것은 조각조각 떨어지기도 했다. 상품 가치가 없는 것들은 찢어서 회사 보일러에 넣어 불을 뗐다. 어느 정도 형태가 유지되면서 깎이면 그때부터 얇은 나무판이 쌓이기 시작했다. 질 좋은 나무를 ‘로타리 기계’에 넣고 깎으면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둘둘 말려서 나왔다. 깎인 나무를 ‘리딩’이라고 하여 다시 한 번 말아준다. 그렇게 말린 나무를 1단, 2단, 3단까지 기계에 올려서 다음 공정으로 가지고 간다.
둘둘 말린 나무가 기다리고 있는 순서는 ‘드라이어’라고 하는 건조 기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콤베아’라고 하는 쇠로 만든 그물망 위에 말린 나무가 쭉 펴지면서 건조기를 지나간다. 기계 안에는 뜨거운 열과 바람이 나와서 나무를 말려준다. ‘드라이어’의 길이가 짧은 것은 20m, 긴 것은 50m까지 된다. 50m짜리 기계는 길이가 길기 때문에 나무가 빨리 지나가고 길이가 짧은 것은 천천히 지나가면서 적절하게 말려주는 것이 중요했다.
“두꺼운 거는 중간에 드가는 놈이고 말리는 거는 바깥으로 나오는 거. 흠 있는 놈이 두껍게 깍이는 거야.”
‘로타리 기계’에서 조각난 나무들은 따로 모아서 사람이 직접 드라이 기계에 투입을 해야 한다. 조각은 조각대로 두루마리는 두루마리대로 드라이 기계를 통과하면 함수율 15%의 일정한 기준을 가진 나무판이 된다. 나무가 잘 마르는 것도 있고 안 마르는 것도 있기 때문에 수종별로 드라이 속도를 달리해서 함수율을 조절했다.
“나오면 찍는 거 있어, 함수율 빡 찍히는 거. 그것까 해보고 옛날에는 딱 찍어가 높으면은 벨이 막 울리거든. 울리면은 저짜 운전하는 사람이 속도를 딱 늦차 주는거라 천천히. 벨 누르는 거에 따라 더 빨리 돌리라 카면 더 빨리 돌리고 벨을 갖고 다 조절을 했다꼬.”
다 마른 나무판은 나오는 동시에 규격대로 ‘크립빠’로 자른다. 자를 때에도 원래 규격보다 2~3% 정도 크기에 여유가 있도록 자른다. 조금 여유 있게 잘라야 공정을 모두 마치고 정재단을 할 때 정확한 크기의 합판이 되기 때문이다. 잘린 나무판이 차곡차곡 쌓이면 예전에는 인력을 동원해서 성형 작업을 했다. 찢어진 곳에 테이프를 붙이고, 옹이가 있는 곳은 ‘빠찡’이라고 하여 옹이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잘라서 들어냈다.
“옹이 들러내면 밑에 말짱한 거 꽂고 테이프 붙이 뿌면 합판이 깨끗해요. 그런게 이제 원목 손실을 방지하고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 그때는 인건비도 헐코 사람도 많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거쳐 갖고 또 합치기 카는 데를 지나갑니다.”
나무 조각을 모아 말린 것은 두꺼운 나무판이 되어 합판의 중간에 들어가는 중판이 된다. 중판은 중판대로 따로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더 번거롭다. 예쁘게 두루마리 모양으로 말린 나무들은 질이 좋은 얇은 나무판이 된다. 합판은 두께가 다양해서 몇 장의 나무판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3프라이’, ‘5프라이’, ‘7프라이’ 등으로 달라졌다.
“합판이 보통 홀수 프라이로 나가는데 1, 3, 5, 7, 9 이래. 보통 3프라이라 하면은 서로 다른 결로 십자형으로 세 겹을 쌓는다. 그래야 안 쪼개지고 강도가 쎄지는 거라. 그 다음에 5프라이는 밖에는 똑바르게 좋은 거 붙이고, 안에는 좀 두꺼운 거 중간에는 또 같은 방향으로 드가고, 7프라이, 9프라이....두꺼운 합판이 보통 보면 30미리까지, 특수하게 만들라 카면은 바둑판도 만들지.”
“3프라이는 뭐 갑을판만 넣어주면 되는데 5프라이는 병판 카는기 있거든. 갑을판하면 을은 좀 못해도 개안은데 제일 우에 나오는기 갑이라. 병판은 중간에 들어가는 거. 7플라이는 병판이 두 장 들어가지. 중판 카는 거는 중간에 크로스로 엇갈리게 들어가는 거. 중판은 3프라이는 1장, 5프라이는 2장, 7프라이는 3장이고 그래야 나와. 그런기 사람들이 합치기 하는기 여자 직원들이 많이 하지. 지금도 여자 직원들이 하고 있어. 그런 건 가벼운 거니까. 손이 재빠르고 섬세하고 여자들한테 맞는거야.”
합판의 얼굴이 되는 가장 위쪽에는 갑판이, 제일 아래쪽에는 을판이 있다. 그 사이에 중판이 몇 장, 병판이 몇 장 들어가느냐에 따라 합판의 두께도 달라지는 것이다. 얇은 나무판을 요리조리 돌리며 포개어 놓는 ‘합치기’ 작업은 여직원들이 도맡아서 하고 있다.
그 다음 과정은 ‘스프레드’이다. 풀을 붙이는 작업으로 나무판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귀하신 몸 갑을판은 옆에 두고 중판에만 앞, 뒤로 풀을 듬뿍 묻힌다. 여기에 갑판과 을판을 한 장씩 양 옆으로 넣어주면 중간에 풀을 머금은 중판 앞, 뒤에 갑을판이 붙어 나온다. ‘스프레드’ 작업은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했다. 제대로 풀을 먹이는 일은 기계가 자동으로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 넣을 때 보면 반대편에 거울이 있어. 구겨져서 들어가면은 바로 스돕이지. 바로 스돕 안해주서 막 들어가면 다 엉망이 된다꼬. 풀 묻어뿌면 안되거든. 그런 것이 백미러 있제 잘못되고 있으면 바로 멈출 수 있도록 반대쪽을 보여주는 커다란 거울. 사람은 기계 너머 있으니까 항상 거울보고 넣는 거야. 뭐 잘못되면 스돕, 막대기로 피고 마 그런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합판이 100매, 200매씩 쌓이면 다음 공정으로 간다.
“‘콜드 프레스’라꼬 있어요. 열압 과정 앞에 찹은 걸로 가꼬. 그때는 두툼하기는 엄청 두툼하지. 숨도 안 죽은 이불 있제 두툼하게. 거기다가 ‘콜드 프레스’에 넣어 뿌면 한 절반 이하로 나무가 눌러져.”
‘콜드 프레스’는 1차 압축이라 100매, 200매씩 지게차에 넣어 큰 실린더가 2~3개 달려있는 기계로 눌러준다. 1㎤당 몇 백 ㎏씩 눌러주는 기계로 ‘빼짱구’를 만들어 준다. 일정한 시간 동안 합판을 기계에 넣어두고 압축이 되도록 기다린다. 너무 짧게 눌러줘도 안되고 너무 오래 있어도 안 되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 측정이 필요했다.
그 다음은 ‘호트 프레스’. ‘콜드 프레스’에서 거의 두께가 일정하게 나온 합판을 열압방이라고 하는 곳으로 보내어 다시 한 번 압축을 시킨다. ‘호트 프레스’는 합판을 한 장씩 기계에 넣어줘야 했다. 합판을 넣는 기계 입구에 한 장을 넣으면 다음 칸이 올라와서 또 한 장을 넣는 식으로 50~60장을 넣는다. 높이가 10미터 이상 되도록 쌓아서 넣어주면 ‘호트 프레스’가 열과 압력으로 합판을 눌러준다.
“그 다음은 재단인데, 보통 여서는 ‘따블쇼’라고 통하지. 따블쇼라고 하면은 톱이 두 군데 달려 갖고 그기 둥근톱 쪼께난 게 있다. 딱 넣으면 합판 정품 길이가 121㎝ 그럼 짝 자르고 나면 저짝으로가 팩 돌아가. 합판 길이가 242㎝ 딱 잘라. 그기 4피트 바이 8피트 큰기 있고. 작은 거는 3피트 바이 6피트니까 92㎝에 182㎝인가 그래. 그기 딱 합판이 되가 오면은 물론 별 탈 없이 되가 나오면은 샌딩에 드간다. 샌드 빼빠갖고 매끄리하게 닦았죠 인물 나도록. 합판이 색깔이 거무티티한 놈이 좀 더 고아지는기......”
그는 합판도 사람들처럼 성형을 한다고 말한다. 완성품 합판을 살펴보면 잘린 자국이나 옹이 자국 같은 흠이 있는 경우가 나오는데 그런 제품이 보이면 바로 성형에 들어간다. 쌓여 있는 합판을 한 장씩 살펴가며 여직원들이 흠을 찾는다. 흠이 나오면 들고 있던 ‘목빠데’라고 부르는 목분, 화장에 비교하자면 파운데이션 같은 것을 칠해준다. 건성건성 보는 것 같지만 이때 흠을 모두 잡아낸다고 한다. 그렇게 결함을 ‘목빠데’로 가리고 사포로 문질러 주면 언뜻 봐서는 전혀 표시가 나지 않을 만큼 흠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합판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지나가면 마지막으로 검사 라인을 지나간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체크를 해서 바로 등급별로 적재를 한다. 다시 한 번 손을 봐야 하는 불량품은 불량품대로, 낮은 등급은 낮은 것대로, 정품은 정품대로 최소 3~4등급으로 구분을 한다.
이렇게 등급이 정해지고 적재까지 되었지만 다시 한 번 상태를 점검해서 절단면에 구멍이 생기면 나무젓가락을 넣어서 구멍을 막는다. 이런 수정 작업도 이제는 모두 옛날이야기일 뿐 요즘은 모든 공정을 기계가 하는데 기계가 워낙 좋아서 불량품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성창기업 마크를 넣으면 합판 제조의 전 공정이 끝난다.
정신없이 기계를 돌리다보면 시간도 금방 지나갔다. 예전에는 작업 중에 슬쩍 나와 나무 그늘 밑 아무 데나 앉아 한숨 돌리면 그게 바로 휴식 시간이었다. 요즘은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20분씩 휴식 시간이 따로 있다. 이것저것 간식도 주고 다 같이 쉴 수 있어서 예전에 비해 훨씬 대우가 좋아진 것을 새삼 느낀다.
[적기동 공장의 추억]
예전에는 성창기업이 성창그룹으로 통했다. 반도목재와 태창목재도 모두 성창기업을 모체로 한 회사였다. 그렇게 회사가 번창할 수 있었던 기반은 모두 적기동에서 사업이 잘 되었기 때문이다. 우암동으로 명칭이 변하였지만 해동씨에게는 적기동이 더 편하게 다가온다. 회사의 옛 주소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만큼 그는 당시 회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공장 앞 바다는 원목 야적장이었다. 바다에 나왕을 띄워 놓다보니 공장까지 운반하는 것도 공이 많이 들었다. 더 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당시 공장 안에는 풀장이 있었다. 바닷물을 가득 담아둔 풀장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폭이 5~6m, 길이는 20~30m가 될 만큼 아주 컸다. 공장 길이만큼 나무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30m가 넘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다에 띄워진 나무를 그대로 공장 안 풀장에 띄어놓았다. 공장 안에 길고 짧은 나왕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하루에 정해진 양의 나무가 풀장에 떠 있으면 풀장 옆에서 ‘도비창’이나 일본말로 ‘하까떼’라고 부르던 창으로 나무를 찔러 이동했다. 물 위에 떠 있는 나무는 한 사람이 창으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바닷물에 충분히 불은 나무는 아주 부드러워서 ‘로타리 기계’에 넣으면 잘 깎였다. 썩지도 않고 작업하기도 좋아 나왕은 당연히 바닷물 행이었다.
바다에 나무를 풀어두니 물을 먹어 바다 속에 완전히 잠긴 나무들도 꽤 많았다. 바다에 잘 떠 있는 나무가 상품이기 때문에 우선 그런 나무들을 가지고 합판을 만들었다. 그러다 원목 재고가 줄어들게 되거나 바다 속에 나무가 너무 많이 차서 배가 접근하기 힘들게 될 때면 1년에 몇 번씩 바닷물에 빠져있는 나무를 건져 올렸다. 바다 속에 있는 나무를 올리는 작업에는 ‘머구리’들을 불렀다. ‘머구리’와 예인선이 함께 움직여서 나무들을 바다 위로 끌어냈다.
“나무들 건지면은 와이어 메어 갖고 예인선 ‘낫지’라꼬 있어요. 성창 1호라 요놈 딱 끌고 밀어서 와이어 끈만 주면은 크레인 기중기로 해갖고 물 밑으로 시커먼 놈이 고래맨키로 그거는 10년 놔둬도 안상하고 숙성이 되는 거지. 큰놈은 예인선 끌어도 잘 안 온다. 작은놈은 잘 따라오고...... 문현 로타리 쪽에 ‘머구리’ 선주 영감이 있었어. 부르면 와가 싹 훑어가”
그렇게 바닷물에서 나온 나무들은 꺼내는 즉시 처리를 했다. 육상에서 바로 잘라서 공장에 넣어줬다. 끌어낸 나무를 공장 안 풀장에 넣어버리면 다시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에 풀장에 넣을 수가 없었다. 대신 지게차로 운반을 해서 절단을 하고 그대로 ‘로타리 기계’에 넣어서 처리를 했다.
“머구리라고 있어요. 잠수해 갖고 바다 밑에 작업하는 사람들 한 번씩 부르면 그 사람들이 원목도 많이 건지지만은 피조개 이런 걸 가지고 온다꼬. 우리가 물 위에 집을 지어놓고 살았쟎아. 관리 사무소같이. 수돗물도 나오게 해갖고 난로 피우가 집이 크다꼬. 원목 관리하는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 옷도 말라야 되고 목욕도 해야 되고 물에 종종 빠지거든. 물에 빠지면은 ‘독탕주’라 카는 큰 목욕탕에 혼자 목욕 했다꼬 그날 저녁에 막걸리 한말을 내야 돼. 그때 머구리가 오면 해산물이 제법 있었어. 막 건져 올린다. 안주해갖고 바로 술 한 잔 묵고. 이때가 재미있었지.”
‘독탕주’ 이야기가 나오니 그의 목소리에 흥이 넘친다. 원목 검수를 하다보면 겁 없이 먼 산을 보고 나무 위를 건너 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물에 빠지면 위험하기도 하고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업무를 마치고 술 한턱내는 핑계로 삼아 그 시절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다.
수입한 원목을 하역하는 작업도 힘든 일 중 하나이다. 해창운수라는 하역 회사는 성창기업의 자회사였다. 그 시절 장비는 부족한데 하역양은 많아서 애를 먹기도 많이 했다. 그럴 때면 업무를 모두 마칠 시간인 저녁에 배를 끌고 들어온다. 어두운 밤까지 일을 하면서 잔업 수당에 야식으로 막걸리까지 먹어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의 제4 부두 자리에서 원목 하역 작업을 했다. 철사를 가지고 나무 위에다가 ‘깡’을 박으면 나무들이 모두 엮어졌다. 그렇게 엮인 나무들을 예인선이 끌고 와서 물 위에 띄워둔다. 그 나무들을 우암동까지 끌고 가야했다. 원목은 배에 싣고 와서 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했고, 물에 띄운 나무를 끌고 공장까지 가야했기 때문에 너무 먼 거리는 이동하기가 어려웠다. 자연히 합판 공장은 바다를 끼고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피가 큰 나무가 주원료이다 보니 나무를 적재할 자리를 찾는 것도 큰일이었다. 공장 바로 앞에 야적장이 있었지만 그곳은 당장 처리할 양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바닷물이 있는 해안가에 나무들을 보관할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 자성대 컨테이너 부두 안쪽의 제5 물량장이라는 곳에 성창기업의 야적장이 하나 더 있었다. 부두 안쪽 방파제가 있는 주변에 원목들을 많이 띄워놓았다. 회사 앞 바다의 원목 야적장은 바다가 협소해서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고, 하역 작업을 하던 부두에서도 가까웠기 때문이다. 태풍이 올 때면 작은 배들이 피항하는 자리였던 그 곳에 수입해 온 원목을 띄워 두었다. 급하게 나무가 필요하거나 볼 일이 있으면 우암동 공장에서 이곳까지 뗏목을 타고 노를 저어 왔다가고는 했다.
영도에서 조금 들어가면 지금의 한국해양대학교 자리가 예전에는 조도라는 섬이었다. 회사에서 꽤 멀었지만 이곳에 해상 저목장이 있었다. 부두 개발이 점점 진행되고 군부대가 들어오면서 회사가 가지고 있던 원목 수용 능력이 점점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찾아간 바다가 조도였다. 지금은 매립이 되었지만 그곳에 꽤 규모가 큰 저목장이 있었다.
당시에는 성창기업뿐만 아니라 태창목재와 광명목재도 함께 들어와 있었다. 동명목재는 건너편 지금의 신선대 부두 쪽 회사 땅에 따로 저목장이 있었다. 그때 동명목재는 ‘동명왕국’이라 불릴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해상이지만 세 회사가 분할해서 각각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원목으로 울타리도 만들었다. 원목을 길이대로 연결해서 중간에 쇠사슬을 엮으면 회사 소유의 원목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도 않고 울타리가 되었다. 바다 속에도 큰 말뚝을 박아서 원목이 많이 움직이지 못하게 했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태풍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 특히 1979년에 왔던 큰 태풍은 조도에 있던 해상 저목장을 싹쓸이 해버렸다. 울타리며 말뚝이며 모두 사라지고 세 회사의 나무가 정신없이 뒤엉켜서 나무의 소유가 어디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스갯소리로 당시 날아간 원목이 강원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태풍의 위력은 대단했다.
[막걸리 한잔의 행복]
해동씨는 지금도 첫 월급 액수를 기억하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큰 돈 3,500원. 그가 실습생으로 와서 처음 받은 월급이다. 다음 해에 정식으로 발령이 난 이후 받은 돈은 4,500원이었다. 회사 등급도 참 복잡했다. 실습생을 뜻하는 시용, 고졸 사원을 뜻하는 고원. 그 다음은 서기보, 서기, 주임......많기도 많았다. 시용으로 받은 월급 3,500원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저축이었다.
“처음에 내가 독한 맘 묵고 1,500원을 저축을 했어. 저축을 어디서 했나 카면은 범일동 조방 앞에 부산진 시장 고 보면 한일은행이 있었어. 그기 우리 회사 거래 은행이라. 그 가가 1,500원 저축한 게 기억이 나고......”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알뜰하게 돈을 모았다. 그 당시 현장에는 휴일이 없었다. 토요일까지는 공장을 정상 가동하고 일요일은 공장 기계 정비 같은 일을 했다. 일요일에 일을 하면 잔업을 모두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직원들도 일을 시켜주기를 바랐다. 어려운 시절, 그나마 일요일에 회사를 나오면 점심밥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직원 식당 밥도 그때는 거의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안 놀라 그랬다. 그게 다 돈이니까. 그리고 현장에 그때 돈이 워낙 짜치기 때문에 5일 날이 봉급날이고 20일이 가불날. 이게 고정적으로 딱 되가 현장직에 한해서......그때는 다 못살았으니까. 또 그때는 합판 산업이 워낙 잘됐거든.”
해동씨는 원목관리계에 있어서 일요일에 출근을 해도 현장직처럼 잔업 수당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휴일을 기숙사에 혼자 있어봤자 별 재미가 없어서, 늦잠 좀 자고 놀기 삼아 회사에 나갔다. 사람들과 어울려 회사 업무를 같이 보다 마치면 술도 한잔씩 하는 재미가 있었다.
당시에는 회사 정문 앞에 성창기업 직원들을 보고 생긴 술집들이 쫙 깔려 있었다. 밥집이며 술집이며 모든 것을 회사 문 앞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술집이라고 해봤자 안주는 공짜로 주는 시락국에 막걸리 한잔 하는 대포집이었다. 비싼 안주는 먹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처음 취업할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들과 많이 어울렸다. 다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혼자 먹을 생각은 못했고, 한잔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먼저 한잔 하러 가자고 말을 꺼내면 줄줄이 따라왔다.
술집에 가면 술 먹고 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둔 노트가 있었다. 대학 노트에 잘 어울리는 사람들 이름이 30명이면 30면 모두 적혀 있는 리스트였다. 함께 모여 한잔 하는 날에는 그 날짜에 누가 참석했는지 자기 이름 옆에 선만 하나 그으면 됐다. 제일 아래에는 총금액을 적어두고 참석 인원만큼 나누어서 외상을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월 통계를 내어 월급날이 되면 월급봉투를 들고 외상값을 갚으러 갔다.
성창기업 월급날이면 회사 앞 가게들도 월급날이었다. 사람들의 외상값을 대표로 들고 가는 날이 많아서 월급날이면 해동씨의 인기가 가장 좋았다고 한다. 현금으로 바로 외상값을 치르면 주인이 동냥걸이라며 빚을 갚은 턱을 냈다. 서비스라고 해봤자 매번 같은 시락국이지만 그렇게 얻어먹는 맛이 참 좋았다.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한잔씩 마시다 보면 외상값 갚는 자리에서 또 다시 대학 노트에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경리들이 직접 세어 담아주던 누런색 시멘트 포대 같은 월급봉투의 재미가 쏠쏠했다. 같이 돈을 세어주며 보내는 월급날은 원 없이 돈을 만져보는 날이기도 했다. 휴일도 없이 하루하루 살았지만 힘든 줄 모르고 지내왔다. 다 같이 없는 형편에 막걸리 한잔 나눠 먹으면 또 그렇게 살아갈 힘이 생겼다.
[변해버린 것들]
일본에서 발전한 합판 산업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한국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일본 기계들이 많이 들어왔었다. 인건비도 워낙 저렴했기 때문에 합판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 합판을 수출한 회사 중에는 성창기업이 가장 빨랐다. 아마 1968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동명목재와 태창목재, 성창목재가 합판으로 수출 역군 몫을 톡톡히 해냈다. 국내에서는 아직 산업이 크게 일어나지 않던 시기라 합판을 쓸 형편이 못되었다. 당연히 생산해 내는 즉시 해외 수출을 하게 되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98%가 수출이었다. 합판 산업은 유류 파동을 거치면서 점차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1979년 2차 유류 파동은 타격이 심각했다.
“내가 기억나는기 1978년도 인도네시아 갔는데 큰 골짜기에 임자 못 만난 원목을 1㎤에 25불. 그기 1981년도까지 한 번도 안 내리고 계속 올라가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이 260불까지 계속 올랐어. 10배 넘게 올랐어, 3년 동안에. 보통 원목 가격이 원유처럼 들쭉날쭉한데 이기 3년 넘게 계속 올라가니까 그때 동명목재, 태창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 다......”
원자재 가격은 정신없이 오르는데 수출 판매 가격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서 합판 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내로라하는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우암동에서 지금 회사가 있는 다대포로 공장을 이전한 것은 1986년이었다. 여전히 회사의 규모는 컸다. 현장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통근차가 각 지역마다 움직였다. 영도, 수영, 부산진, 우암동, 용호동. 아침이면 통근 버스가 공장 안으로 들어오느라 분주했다.
명절이면 통근 버스가 귀성 버스로 변신을 했다. 귀성 버스에 오르는 직원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가용을 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통근 버스 운행도 많이 줄었다. 일흔이 가까운 그도 자가 운전으로 출퇴근을 한다. 공장의 풍경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남양재가 없기 때문에 화장지 말듯이 그게 없쟎아. 그기 있을 때는 자동으로 로타리 타고 올라가 드라이까지는 다 연결이 됐는데. 지금은 소나무니까 그 과정도 없고 전부다 책 맨치로 재단을 해가 쌓이면은 말루는 기계 드라이에다가 지게차로 옮겨주는 거. 고론 차이지. 그 다음에 말루고 나오면 또 조판하는 데로 옮겨주고 조판에서 스프레드로 옮겨주고. 남양재와 침엽수의 차이점이 침엽수는 딱딱 끊겨가지고 밴드를 타고 가는 거에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양재 나무가 더 이상 나지 않게 되었다. 필리핀 쪽은 풍부했던 자원을 너무 많이 반출하는 바람에 자원이 고갈되었다. 동남아시아 전반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자 1980년 초부터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서 자국의 환경보호를 위해 금수조치를 내리게 되었다. 더 이상 외국으로 목재 수출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원산국인 이들 나라에서 직접 합판을 만들어 팔게 되면서 합판 산업의 주도권도 넘어가게 되었다.
“그쪽 원목이 비싸니까 잡동사니 사러 파푸아뉴기니까지 솔로몬 군도 하고......지금도 포항제철이라든지 이런데 들어가는 포장재는 남양재 써야 됩니다. 침엽수가 힘이 없어가 감당을 못헌다꼬.”
1986년에 다대포로 오면서 더 이상 바다 위에 떠다니는 나무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바닷물에 가라앉는 나무들이 많았기 때문에 육상에 적재를 한 채 합판을 만들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자 소나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소나무를 사용한 것은 1996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나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태평양 곳곳을 돌아다녔다. 지금은 뉴질랜드에서 소나무 공급을 많이 받고 있다.
침엽수는 나왕 등에 비해 가공하기가 훨씬 힘들었다. 활엽수에 비해 직경이 작아서 ‘로타리 기계’로 깎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왕을 구입하기 어려워지면서 대체재를 찾아야 했고, 1990년대 초부터 침엽수를 합판 원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바닷물에 나무를 띄워놓을 때는 나무가 썩지도 않고 관리하기가 좋았다. 하지만 주종이 소나무로 바뀌면서 소나무는 바닷물에 가라앉기 때문에 육지에 적재하게 되자 상하거나 썩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지금도 감천 부두 근처에 야적장이 있지만 이제 더 이상 바닷물에 띄운 나무는 없다. 합판 생산량이 줄어들게 되면서 이때부터 회사에 작업 인원이 축소되었다. 인원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기계로 생산을 하다 보니 한 사람당 생산하는 양은 예전에 비해 5~6배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요즘 공장에서 생산하는 합판의 양은 많을 때는 원목 1,300㎤까지 투입한다. 원목을 투입해서 나무 조각 등 여러 부산물을 버리고 정제품으로 생산되는 비율은 약 60% 남짓이다. 대략 합판으로 800㎤ 정도가 하루에 생산된다. 이 비율을 높이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에 최대한 62~63%까지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를 판가름 하는 것이 바로 원목 원재료의 질이다. 원목의 품질이 나쁘면 생산 비율이 떨어지고 좋으면 잘 나오는 것이 확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원목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
공정 과정도 상당히 중요하다. 현장에서 합판을 만드는 사람들은 최대한 좋은 품질의 원목을 가지고 합판을 만들려고 한다. 작업의 성과가 눈으로 구별이 될 만큼 달라지기 때문에 가끔은 관리자들이 보지 않을 때 충분히 합판을 만들 수 있는 재료도 버리는 경우가 있다.
공장 안에 가동 중인 ‘콘베아’는 계속 지나가기 때문에 멀쩡한 원료를 여기에 넣어버리면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부서져서 보일러실로 들어가게 된다. 부산물도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서 기름 대신 보일러를 떼는데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까운 재료를 버리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목을 어느 정도 구입해 두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재고를 많이 두면 그만큼 돈이 묶여지는 일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나무가 상할 수도 있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구입 계획을 세워야 한다. 원목을 관리하고 구입 하는 것을 잘하면 재료는 떨어지지 않고 최대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 합판 산업이 예전에 미치지 못하는 요즘은 회사에서 하는 모든 일에 효율성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게 되면서 원목 구입에 많은 노력을 요한다.
“나무가 특히 여름에 쌓이면 나무가 상하는 거야. 그렇지만은 나무 가격이 기름값 맨치로 막 올라갈 때 그때는 배가 터지도록 안고 있어야 돼. 더 오를 때는 오르기 전에 사야 되고 팔 때는 떨어지기 직전에 그래야 하고 그런 노하우가 있어야 돼.”
속된말로 ‘통밥’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원재료인 나무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우리나라에서 원료를 구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쟁이다.
2006년부터는 소나무를 찌는 기계가 공장에 들어왔다. 침엽수를 처음 사왔을 때 작업에 익숙하지 않은 나무라 어떤 방식으로 가공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 바닷물에 나무를 띄워 둘 때는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그나마 부산은 겨울에 원목이 얼어서 터지는 일은 거의 없어서 나았다. 인천 등 부산보다 기온이 낮은 지역에서는 겨울에 소나무를 쌓아 두었더니 원목이 얼어서 터지는 일이 많이 발생했다.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 위에 커다란 천막을 쳐서 나무를 씌우고 그 안에 연탄불을 피워 온도를 유지했다. 작업 공정상 소나무를 부드럽게 깎기 위해 나무를 찌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소독도 되고 나무가 부드러워져서 깎기도 훨씬 쉬웠다. 이제는 합판 공장마다 나무를 찌는 방법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해동씨는 2003년 정년 퇴임을 했다. 당시에는 정년을 끝까지 챙긴 사람이 드물었지만 그는 만기 정년을 했다. 그렇게 회사를 떠난 지 몇 년 만에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이제는 원목관리팀 대신 자산관리팀의 고문으로 재직 중이다. 자산관리팀에서 회사 소유의 임야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특히 동래 식물원은 국내 최초 사립 식물원으로 돌아가신 창업주가 많이 아낀 곳이라고 한다. 원목 관리가 궁금하면 가끔 들여다보기는 하지만 지금 업무도 할 일이 꽤 많다.
“옛날에 남양재 할 때가 실지로 많이 다니면서 경험하고 노하우가 써먹히지 지금 소나무는 단촐해. 뉴질랜드에서 보내니까 정확하게 나무를 보내 줘. 대신 요즘은 어느 지역의 나무가 괜찮다 어느 항구의 기능은 좋다 그런 것만 머리에 넣고 있지.”
“원목 기술은 이제 별로 필요치 않아. 옛날 남양재 이런 놈은 수종이 여러 수십 가지라. 수십 가지를 외아가 나무 성질도 알아야 되고 생산 강도 뭐 이런 거 다 알아야 되지만 소나무는 ‘라지에타 파인’ 한 개가 끝나니까 이젠. 적재적소에 공장에 잘 넣어가 잘 만들도록 하기만 하면 돼,”
요즘은 기계에다 원목을 통과시키면 알아서 스캔을 해서 원목 재적까지 정확하게 나온다. 원목마다 바코드도 다 붙어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기술들이 필요하지는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기계화로 변하게 되면서 하나하나 외워야 할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옛날에 내가 정글 지대에서 주재 생활을 하면서 고생 좀 했다꼬 보상 해주는가보지. 오너께서 내가 건강도 개안코 놀고 있으면 건강 해친다고 내한테 적당한 업무를 주신거지.”
딱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이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는데도 정년까지 한 직원을 다시 불러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회사가 고마울 따름이다. 그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즐겁게 일을 하며 사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