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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동 음악다방 DJ들이 만든 부산 문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19
한자 光復洞音樂茶房-釜山文化
영어의미역 The culture of Busan produced by the disk jockey of music cafes in Gwangbok-dong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별고룸 노래 소주방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길 25-3[남포동2가 15-1]지도보기

[광복동 다방의 문화사]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은 다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일본인들이 떠난 도시 부산 광복동에서는 그 황량함을 허름한 다방 한편의 예술혼이 채웠다. 8·15 광복 직후, 모든 것이 열악한 신생 조국에서 다방은 유학파 예술인들에게 소중한 만남의 장이었고, 저마다의 예술 세계를 펼치고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안식처였다. 6·25 전쟁 발발 후, 임시 수도 시절에 다방은 경향(京鄕)의 예술인들이 모여 깊은 절망과 실낱같은 희망 속에서도 서로를 달래며 견뎌냈던 사랑방이었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절망의 시대를 견디다 못해 몇 알의 수면제에 기대어 삶을 마감하였고, 또 누군가는 담뱃갑의 은박지에 우툴두툴 은지화를 그리면서도 누추한 삶과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다방에서 벗이라도 만나 술판이라도 벌여야 숨통이 트이던 암담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느 유명한 소설가는 이 시대를 광복동의 다방 ‘밀다원(蜜茶苑)’에 빗대어 ‘밀다원 시대’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자 ‘밀다원 시대’도 끝났다. 유수의 예술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다방의 공허함을 채운 것은 부산의 지역 예술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부산의 토착 문화 예술이 조금씩 자리 잡아 갔다. 그 무대는 역시 광복동이었다. 이렇게 해방 이후 오랫동안 예술인들의 ‘광복동’은 현재의 법정동인 광복동은 물론, 동광동, 신창동, 창선동, 남포동, 나아가 부평동까지 아우르는 ‘시내’의 대명사였고, 다방은 그대로 서재이자 작업실, 갤러리, 그리고 공연장이 되었다.

그 시절 다방에도 커피와 함께 음악이 있었다. 8·15 광복 후, 유학생들이 몰고 온 서양 문화가 고급문화로 여겨지면서 서양 고전 음악[클래식] 역시 문화의 척도로 각광받았다. 뮤직 박스를 설치하고 디스크자키[Disk Jockey: DJ]도 채용하여 음악해설을 곁들이면, 다방은 손님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지금이야 손가락 한 번 움직이면 언제 어디서든 혼자 음악을 즐길 수 있지만, 그때는 레코드와 오디오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해서 광복동에는 한 집 건너 한 집 음악다방이 들어섰고, 더러는 전문 음악 감상실로 모습을 바꿨다. ‘에덴 다방’, ‘오아시스’, ‘클래식’, ‘백조’, ‘칸타빌레’, ‘미화당 음악실’, 그리고 ‘필하모니’에 이르기까지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광복동에는 고전 음악을 취급하는 숱한 음악다방과 음악 감상실이 명멸했다.

한편, 1960년대 들어 대중음악[팝]이 지평을 넓혀가면서 ‘에츄드’ 등 젊은이의 문화로 팝 음악을 취급하는 음악다방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별들의 고향’과 ‘무아’가 인기를 얻던 1970년대는 클래식에서 팝으로 음악 팬의 취향이 옮겨갔다. 음악다방의 DJ는 라디오와도 접목하면서 바야흐로 ‘DJ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 글은 1970년대 ‘별들의 고향’에서 시작하여, 1980년대 부산문화방송[부산MBC]으로 옮기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DJ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그 시절 광복동 음악다방과 부산의 청년 문화를 돌아본다.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음악다방’과 음악 감상을 위주로 하는 ‘음악 감상실’, 술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펍 레스토랑’은 엄연히 차이가 있지만, 이 글은 DJ와 음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셋 중 가장 연원이 긴 ‘음악다방’으로 통칭하여 쓰기로 한다.

[광복동 음악다방과 DJ 계보]

김영수. 함경도가 고향인 선생은 대구에서 출생한 피난민 2세다. 서울에서 중학교 2학년 때 부산으로 와, 이곳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1973년 서면 ‘싼레모 음악실’ DJ를 하던 중 음악실 사장의 추천으로 행사 사회자[MC]를 겸하게 되었다. 1974부터 1977년까지 군 복무 후, 1977년부터 1978년까지 광복동 ‘중앙 파크’의 DJ를 거쳐,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별들의 고향’에서 DJ 겸 MC를 맡았다. 그러다 1981년 부산MBC에 입사하여 「정오의 희망곡」을 비롯한 각종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으며, 1991년 퇴사 후에는 광고 회사에서 활동하였다.

경남상고 다닐 때 응원 부장을 했어요. 또 방송반 일을 하다 보니까 방송에도 익숙했고, 음악도 좋아하고요. 저는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2세다 보니까 친척도 별로 없어서 사람 사귀는 게 취미가 된 거죠. 군대에서도 군 방송 요원을 했어요. 군 제대 후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게 본업이 된 거죠.”

피난민의 아들인 김영수 선생은 어쩌면 약점으로도 작용할 수 있었던 자신의 커리어를 외향적인 성격으로 외려 장점이 되게 했다. 외로웠기에 더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었고, 표준어를 구사하는 이방인이었기에 일찍부터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생길의 선택에는 항상 음악이 있었다.

“당시 ‘무아’ 음악실이 부산에서 제일 유명했고, 거기에 백형두, 배경모, 이영철, 강동진, 세미[본명 유문규], 지명길 등이 있었는데, 이분들이 부산 DJ의 주류였어요. 저는 그 중에 주로 강동진이라는 분께 영향을 받았는데, DJ이기도 했으나 MC를 주로 했지요. 그때 광복동 일원의 ‘심지 다방’, ‘왕 다방’, ‘중앙 다방’, ‘아카데미 음악실’ 등이 부산 DJ들의 본산이자 팝송 전파의 첨병 역할을 했었지요.”

김영수 선생이 그려 보이는 광복동 음악다방과 DJ의 계보다. 훗날 강동진과 배경모는 MBC 피디가 되었고, 김영수 선생은 ‘별들의 고향’에 있다가 MBC DJ 겸 리포터, MC, 시사 프로그램 앵커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으니, 음악뿐 아니라 인생길도 DJ 선배들을 따른 셈이다.

‘무아’와 ‘별들의 고향’은 1970년대~1980년대 부산의 청년 문화를 견인하는 쌍두마차의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둘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는데, ‘무아’는 전문 DJ들이 팝송을 소개하는 음악 감상실이었던 반면, ‘별들의 고향’은 포크(folk) 가수들의 연주와 노래를 술을 마시면서 즐기는 펍 레스토랑이었다. 부산은 물론, 서울이나 타지에서 부산을 찾는 젊은이들도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무아’, 생맥주 마시면서 젊음의 낭만을 구가하려면 ‘별들의 고향’으로 각각 향했다.

“‘무아’와 ‘별들의 고향’은 다르지요. ‘무아’는 음악 감상실이고, 여기[별들의 고향]는 술집이고. ‘무아’ 음악실은 입장료를 내고, 차는 따로 사먹어야 돼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3시간이든, 4시간이든, 아니면 10시간이든……. 리포트 쓰기를 음악실에 가서 한다 이거죠. 내부를 극장식으로 해놨어요. 반면에 ‘별들의 고향’은 무대가 있고, 조명이 있고, 음향도 최고 성능의 시스템을 갖춰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놨죠.”

‘무아’는 광복동 입구, 지금의 용두산을 오르는 계단 쪽에 있었는데, 1층은 ‘수 다방’, 3층은 당구장인 건물의 2층에 있었다. ‘별들의 고향’보다 일찍, 1975년경 문을 연 ‘무아’는 팝과 클래식을 모두 취급했지만, 젊은 층이 고객의 다수인만큼 팝을 주로 틀었고, 클래식은 늦은 오후 1~2시간 들려주는 정도였다. 실내조명을 어둡게 하고 대학 강의실용 책상과 의자를 정면 스피커를 향해 줄 세워 놓은, 흡사 교실과 같은 분위기였다. 음악 감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 놓은 이러한 류의 음악 감상실에서는 어둠 속에서 연인의 손이라도 잡거나 떠들다가 음악 들을 자격이 없다고 추방당하는 일도 간혹 있었다고 하니, 모든 것이 편하고 빠르기만 한 현대의 정서로는 정말 먼 나라 얘기 같기만 하다. 반면, ‘별들의 고향’과 같은 펍 레스토랑은 ‘술’이라는 매개체로 인해 보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다.

[‘별들의 고향’을 거치지 않으면 가수가 아니다]

‘별들의 고향’은 지금의 남포동할매집 회국수’[중구 남포동 2가 15] 건물 2층에 자리했다. 3층에는 클래식 음악다방 ‘전원’이 있었다. 김영수 선생은 그 시절 ‘별들의 고향’이 정녕 부산 유일의 ‘청춘의 해방구’라고 정의한다.

“내가 ‘별들의 고향’에 있는 동안 송창식, 이장희, 김세환, 양희은, 이수만, 윤형주, 어니언스, 홍민, 하남석, 김정호, 노고지리 등이 매일 바꿔가며 서울에서 와서, 현충일 빼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공연했어요. 그 시절에 활동했던 가수들 중 안온 가수가 없었을 정도로. 말하자면, ‘별들의 고향’이 부산에서 유일한 젊은이들의 해방구, 대중음악의 해방구였다 할 수 있겠지요.”

1979년~1980년 당시 가수들 몸값은 하루 공연에 100만 원 정도였는데, 지금의 화폐 가치로는 대략 1,000만 원 정도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송창식·양희은 등 대가의 경우이고, 몸값이 싼 이는 일주일에 500만 원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공연은 하루에 30분씩 두 번인데, 자신들의 히트곡을 부르면서 팝송도 소개했다. 특별히 장르나 음악의 경중에 제약은 없었다. 송창식의 경우에 「고래 사냥」이나 「왜 불러」 등 대중적인 곡은 물론, 「토함산」 같은 철학적이고 무거운 곡도 불렀다. 조영남·전유성·주병진과 같은 이는 노래와 함께 우스갯소리를 겸했다. 코미디언으로 널리 알려진 주병진은 본래 대학 가요제 출신의 가수였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팝이 좋아서 좋아한 경우도 있지만, 젊은이들끼리 큰 대화의 콘텐츠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팝송을 누가 더 많이 아느냐, 귀한 음악을 누가 더 빨리 아느냐 이런 게 자랑이었어요. 유명한 음악들을 많이 알면, 여자애들한테도 부러움도 사고. 그 시절 젊은이들의 놀이 문화라는 게 기껏 해봐야 술 먹는 거, 학교에서의 스포츠, 그러고는 뭐 다른 게 없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문화적으로 제일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팝송, 가요 중에서 포크 송 이런 데 젖을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청춘들의 팝에 대한 열광은 별다른 취미가 없던 시절의 일종의 ‘고급 취향’이었지만, 흔히 ‘뽕짝’이라고 희화되었던 이전 세대의 트로트, 신민요에 대한 반감이기도 했다. 때는 바야흐로 세계가 변혁의 열기에 들끓던 1960년대의 뒤끝, 혹은 연장이었고, 이는 한반도 끝자락의 부산 광복동에도 이어져, ‘별들의 고향’ 이래 아류들이 양산되었다.

“‘별들의 고향’이 생기니까 유사한 집들이 서면이고 광복동이고 어디고 곳곳에서 난립을 했어요. 그러나 ‘별들의 고향’의 아성을 못 깼지요. 한 십년 가까운 시간 동안 ‘별들의 고향’은, 서울에서도 방학 때 부산 갔다 오면, ‘너 ‘별들의 고향’ 갔다 왔니?’ 하고 물을 정도였어요. 그 시절만 해도 부산이 콘텐츠에 약했다는 거죠.”

항간에는 ‘‘별들의 고향’을 거치지 않으면 통기타 가수가 아니다’라는 말도 있었다. 이는 곧 부산에서는 ‘별들의 고향’을 거쳐야 제대로 된 검증을 받는다는 의미였고, 따라서 통기타 가수들은 그 무대에 한 번 서는 것이 꿈이었다. 서울에 송창식·양희은·김세환이 나오는 ‘로즈 가든’이나 ‘포시즌’과 같은 곳이 있었다면, 부산에는 ‘별들의 고향’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오디션을 보려고 부지기수의 많은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중 한 사람을 김영수 선생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후 한국 최고의 록 밴드 리더가 되었으나, 그때는 그의 진가를 알지 못했다.

“전유성씨가 데려왔는데, 어떤 곡을 들고 와서 한번 들어봐 달라고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천재적인 가수를 내가 몰라봤지. 그때는 그룹도 아니고 그냥 통기타 가수였거든요? 그날 하룻밤 셋이서 같이 자긴 했지만, 그 후로는 연락을 안했는데, 불과 몇 년 뒤에 그렇게 잘될 줄을 내가 몰랐던 거죠. 그때는 진짜 촌스러웠는데…….”

[날라리 오빠가 아닌 문화 전령사]

김영수 선생이 ‘별들의 고향’에서 DJ를 하던 1978년~1981년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 중 격동기였다. 부마 항쟁과 10·26 사건, 12·12 군사 쿠데타와 서울의 봄, 그리고 5·17 비상계엄 확대와 5·18 광주 민중 항쟁에 이르기까지 숨 가쁜 역사의 장들이 흘러갔고, 그 결과 신군부가 권좌를 차지했다. 청춘들의 해방구인 만큼 ‘별들의 고향’ 역시 시대의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제가 ‘별들의 고향’에 있던 시절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서 연일 데모를 할 때인데, 광복동에서도 끊임없이 데모를 하고, 또 데모가 끝나고 나면, 밤에는 또 이런 데 와 가지고 푸는 거지요, 젊은이들이 뭐, 우리 가게만 왔겠습니까? 그 옆에 보면 ‘남촌’이나 ‘양산집’이라는 막걸리집이 있었는데, 이런 데서 밤에는 분을 삭이고, 정권에 대한 규탄도 하고…….”

부산 민주화 운동의 거목 고(故) 최성묵 목사도 YMCA의 활동가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러 ‘별들의 고향’에 자주 들르곤 했다. 간혹 속칭 ‘도바리’라 했던 학생 운동 수배자들도 동석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정보과 형사들이 이들을 잡으러 덮치면 정보를 미리 알아내어 피신시키기도 했다. 때문에 ‘별들의 고향’이 수배자를 비롯한 학생 운동가들에게 편안한 휴식처가 되기도 했다. 워낙 대학생들이 많고, 친구들도 함께 있으니까 다른 곳보다 비교적 안전했던 것이다. 물론 대학생들이 즐겨 찾았던 데는 저렴한 가격도 한몫했다. 이렇게 의도치 않은 민주화 운동 세력과의 인연으로 인해 김영수 선생 자신이 형사들의 타깃이 되었던 일도 있었다.

“정보과 형사들이 동향 파악을 해가서 김영수최성묵 목사를 자주 만나니까, 김영수 얘도 운동권이 아니냐 하면서 나를 잡으러 왔는데, 우리 가게 사장이 피신시켜줬어요. 정보과 형사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너는 어디 다른 데를 가라’해서 제가 서울로 피신도 다녀오고 그랬어요.”

김영수 선생의 얘기를 듣다 보니, TV 드라마 등 대중 매체 탓에 ‘DJ’하면 흔히 ‘도끼 빗’으로 상징되는 ‘날라리 오빠’의 이미지만 갖고 있었는데,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그 격동기를 아장아장 걸음마 연습을 하며 보낸 필자의 무식한 소리에 선생이 질색을 한다.

“그거는 우리 뒤 세대 얘기예요. 80년대 중반 이후, 그러니까 83~85년 이후 이야기이죠.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우리 DJ들은 운동권 같은, 그러니까 장발에다가 군복을 까맣게 물들여 입고 다니는 걸 폼으로 알았어요. 옷을 세련되게 입지 않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역할이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많이 주니까.”

김영수 선생은 DJ계의 2세대임을 자처한다. 1세대가 1960년대~1970년대 초까지 활동한 최동욱·이종환·박원웅 등이라면,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활동한 선생과 그 선후배들은 2세대요, 1세대와 ‘날라리’로 이미지화된 3세대 사이의 ‘낀 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2세대는 군사 정부 시절 젊은이들의 분출되는 욕구를 대변하고, 음악을 통해 좋은 감성을 전달하는 ‘문화 전령사’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물론 그 시절에도 이성을 의식하여 요란하게 치장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청년 문화를 대변한다는 사회 운동적 의식이 가슴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강동진이니 배경모니 이런 사람들은 옷을 일부러 점잖게, 단정하게 입었어요. 음악을 소개해도 가급적이면 음악이 갖고 있는 메시지를 설명하죠. 예를 들면,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곡은 철학적인 가사가 많거든요. 그런 거를 소개함으로써 우리 젊은이들이 그냥 음악만 들을 게 아니라 음악이 주는 메시지, 철학을 가사와 함께 전달하니까 사람들이 감동도 받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자성하는 계기도 되는 거고, 그런 데 대한 자부심이 있었죠.”

간혹 우연히 ‘별들의 고향’ 팬들을 만날 때가 있다. 무려 30년이 지났는데도 어디서 술이라도 한잔 하다보면, ‘우리 옛날에 ‘별들의 고향’에 갔었다’ 하고 인사를 건넨다. 그러고는 너무나 강렬하게 각인되었던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곤 한다. 심지어 그렇게 만나서 요즘도 연락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니, DJ 2세대로서의 사명감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6·25 전쟁 때 피난민에 의해서 광복동의 수다방이라든가 이중섭 선생 같은 분들이 다니던 굉장한 다방들이 있었는데, 그런 얘기를 기자들, 선배들을 통해 자꾸 듣다 보니까 우리 2세대가 함부로 놀지 못했다는 거죠.”

DJ 2세대의 이러한 ‘문화 전령사’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은 결국 ‘밀다원 시대’ 이래의 광복동 다방문화사에 그 연원이 있었던 것이다.

[DJ 오빠들의 하루]

DJ들은 보통 오후 2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는데, 인기에 따라 A급·B급·C급의 세 종류가 있어서, 각각 하루에 3시간씩 마이크를 잡았다. 그중 가장 몸값이 높은 A급 DJ들은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그리고 오후 7시부터 8시까지, 소위 ‘골든타임’을 맡는다. 그리고 그 앞뒤로 B급과 C급의 DJ들이 붙는다.

“4시에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몰려나오니까, 대학에서 마치면 그 시간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4시부터 6시까지 하는 사람들은 좀 골든타임이고, 6~7시는 밥시간이잖아요? 그럼 B급이에요. 그 다음에 7~8시 하는 사람이 또 A급, 8~9시하는 사람은 B급, 9시 이후에 하는 사람은 C급이죠.”

오후 2시에 오픈해서 4시가 되기 전까지의 2시간은 C급과 B급이 각각 한 시간씩 맡는다. 가게의 마감시간은 밤 11시다. 12시부터 통행금지였기 때문이다. 즉, 음악다방 DJ들의 시간표를 정리하면, ‘C급[오후 2시]→ B급[오후 3시]→ A급[오후 4시]→ B급[오후 6시]→ A급[오후 7시]→ B급[오후 8시]→ C급[오후 9~11시]’가 되는 것이다. 흔히 C급을 ‘DJ 보조’라고 불렀는데, 한때 어느 음악다방에서 김영수 선생의 보조를 하던 동갑의 친구가 지금은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단다. 그러나 선생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가 옛날 일을 이야기하고서야 알아보았다.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뉴욕과 서울, 파리를 오가며 창작 활동을 하는 화려한 이력의 중견 화가가 한때는 자신의 DJ 보조였다는 놀라운 고백에 선생은 인연이라는 것의 미묘함을 새삼 느꼈다. 그의 이름은 ‘최울가’이다.

“디스크자키가 음악을 소개할 때,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 Palmer)’의 「탱크(Tank)」 보내드리겠습니다. 7번 테이블에 소개해 주신 분, 감사합니다. 차 잘 먹겠습니다…. 이렇게 음악을 쫙 틀고 하잖아요? 근데 얘는 음악만 틀뿐이지 멘트를 못하는 거예요, 부산 사투리니까. 그러니까 걔는 할 수 있는 멘트가 뭐냐면, ‘김영수님 전화왔습니다’…. 하여튼 내가 한참 웃었다고.”

보조였던 그는 동갑의 메인 DJ가 담배라도 피러 나가고 나면 마이크를 잡고 한마디 하고 싶어서 가슴이 두근두근 했노라 했다. 보조는 메인 DJ가 한 시간 동안 진행을 하면서 튼 음악들 중 괜찮은 몇 곡을 골라놨다가, 다음 시간대에 바로 틀수는 없으니까 며칠 후에 자신의 시간대에 틀어 보곤 했다. 이렇게 해서 메인 DJ의 음악 세계가 보조 DJ에게 전파되었다. 김영수 선생 역시 강동진·유문규 선배에게 그렇게 영향을 받았고, 또 다른 선배 DJ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홍수진이라고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의 실제 인물이에요. 「영일만 친구」에 나오는 친구가 바로 홍수진이라는 인물이거든요. 그 사람이 우리 DJ들의 선배인데, 나중에 시인이 되었고…. 아무튼 내가 이 사람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이 양반이 레오나르도 코헨(Leonard Cohen)이라든지, 조니 미첼(Joni Mitchell)의 「Big Yellow Taxi」 라든지 이런 곡들을 나한테 소개해줬어요. 록 오페라 「토미(Tommy)」 중에 「Overture」 같은 이런 당대의 명곡들을 나한테 소개해 줬지요.”

아무튼 3명의 DJ가 번갈아가며 진행하다 보니, 메인 DJ는 남들보다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술판을 벌였다. 때로는 예술인들의 안식처로 여겨졌던 에덴 공원의 백광덕 선생을 찾아가서 밤새 마시기도 했다. 안주거리는 언제나 우울한 시대였다.

“우리는 8~9시 마치면 그때부터 계속 술 마시는 거예요. 매일 음악 들으면서 시국도 그렇고, 만나는 사람도 운동권도 있고 하니까…. 난들 배우지 못해서 그렇지 음악을 통해서 세상이 군부 독재라는 것은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그들은 나한테 와서 위로를 받지만, 나는 어디 가서 위로를 받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백광덕 선생님 같은 이들한테 가서 위로를 받든가, 아니면 친구들하고 소주집 막걸리집 가서 먹다가 통행금지 지나면 여관 같은 데 가서 밤새도록 먹고, 가수들 내려오면 그 사람들 하고 숙소에서 먹고, 뭐 그런 거죠.”

당시 DJ들에 대한 대우는 어땠을까? 1979년도 기준으로 삼았을 때, 김영수 선생은 한 달에 21만 원을 받았다 한다. 그때는 대기업에 다니는 이들의 월급이 그보다 적었다고 하니, 하루 3시간 손님과 만나는 일 치고는 꽤 급여가 높은 수준이라 하겠다. 당시 선생은 면허증이 없었지만, 그 시절에 웬만한 DJ들은 다들 차가 있었다고 하니, 대우가 후했고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DJ들 사이에서는 ‘이 집에서 얼마 주느냐, 저 집에서 얼마 주느냐’ 하는 것이 큰 화제가 되었다.

마산 오동동에서 한 번은 나를 백지 수표를 주고 데려가려 한 적이 있었어요. 가수 김상배가 마산에 있었는데, 내 신세를 좀 졌거든요. 걔가 나한테 와서 마산에 한번 가자고 해서 가보니까, 오동동에 있는 음악다방이더라고요. 내가 아무 소리를 안하니까, 백지 계약을 하자… 근데 내가 가보니까 거기는 내가 있을 데가 아니어서 며칠 봉사 활동만 하고 안했죠.”

돈만 생각했다면 건네는 백지 수표를 받았겠지만, 흥청망청한 관광지의 음악다방이 선생은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음악을 통해 배운 세계관이 그러한 물질 만능을 용납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왕년 DJ 오빠의 음악 세계]

“사이먼 앤 가펑클의 「April, Come She Will」이라든지, 비틀즈(Beatles),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은데…….”

음악의 사회성을 필두로 본격적으로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커다란 보따리를 앞에 두고 무엇을 먼저 꺼낼지 뒤적이는 것처럼 김영수 선생은 한참을 망설인다. 아마도 너무 오랜만에, 준비된 원고도 없이 즉석에서 음악을 소개해야 하는 막막함 때문일까? 그래도 막상 하나씩 꺼내기 시작하니 줄줄이 엮여 나온다.

“「Yellow Submarine」, 「Let It Be」, 「Love」, 「I Want to Hold Your Hand」 라든지…. 비틀즈 음악들은 하나도 버릴게 없어요. 비틀즈는 제가 볼 때는 20세기가 만든 문화 혁명, 대중 문화의 화산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까? 이 사람들이 평화 운동도 하잖아요? 반전 운동도 하고. 그리고 존 바에즈(Joan Baez),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밥 딜런(Bob Dylan).”

모두 팝의 고전들이라 필자도 익히 들어본 이름들이다. 에릭 클랩튼이나 밥 딜런은 그렇다 치고, 존 바에즈는 서정적인 곡을 주로 부르는 컨트리 음악의 뮤지션이 아닌가?

“존 바에즈는 대표적인 반전 가수예요. 그 외에 레오나르도 코헨, 조니 미첼 이런 사람들이 비교적 의식이 있는 가수죠. 우리가 마돈나가 의식이 있다고는 잘 생각하지 않을 텐데, 이런 사람들은 대단히 의식이 있는 가수다 이거죠. 폴 사이먼(Paul Simon)이나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같은 경우는 미국 하버드대 출신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목소리가 참 근사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문 분야로 깊숙이 들어가니 마치 내가 그 시절 음악다방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다. 마치 뮤직 박스가 가로놓인 듯한 우리 둘 사이에 지난 시절의 천재 뮤지션들이 플래시백이 터지듯 명멸한다.

“밥 딜런의 「A Hard Rain's A Gonna Fall」이라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소낙비」라고 번안되어서 소개되었죠. 이것도 반전사상을 담았어요. 밥 딜런의 노래가 원체 괜찮은데다가, 리듬이 밝고…. 「April, Come She Will」 같은 경우는 가사가 워낙 좋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사이먼 앤 가펑클이에요. 그리고 레오나르도 코헨의 「Nancy」.”

The morning has not come Nancy was alone

Looking at the Late Late show through a semi-precious stone

In the house of honesty her father was on trial

In the house of mystery there was no one at all

There was no one at all

It seems so long ago

None of us were very strong

Nancy wore green stockings and she slept with everyone

She never said she'd wait for us even though she was alone

I think she fell in love for us in nineteen sixty one

In nineteen sixty one

Another morning would not come Nancy was alone

A forty five beside her head an open telephone

We told her she was beautiful we told her she was free

But none of us would meet her in the house of mystery

The house of mystery

And now you look around you see her everywhere

Many use her body many comb her hair

In the hollow of the night when you are cold and numb

You hear her talking freely then

She's happy that you've come

She's happy that you've come

여명은 아직 밝지 않았고 낸시는 홀로였고 외로웠어요

그녀는 싸구려 TV로 ‘Late Late Show’를 보고 있었어요

그녀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고

미스터리한 집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어요

더 이상 아무도 없었어요

무척이나 오래 전 일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없었어요

낸시는 녹색 스타킹을 신고서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같이 한 거예요

그녀는 비록 외로웠지만 결코 우리를 기다렸다고 말한 적은 없었어요

난 그녀가 우리들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가 1961년이었어요

1961년이었어요

또 다른 아침은 오지 않을 것 같았고 낸시는 여전히 혼자였어요

그녀의 머리 곁엔 45구경 권총이 있었고 수화기는 내려져 있었어요

우리는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했었고 자유롭다고 말했었지요

하지만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미스터리한 집에 찾아가지 않았어요

그녀의 미스터리한 집에

이제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어디에서나 그녀를 볼 수 있어요

많은 이들이 그녀의 몸을 탐했고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었지요

춥고 무디어지는 공허한 밤이면

그녀가 터놓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와주어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당신이 와주어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캐나다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싱어송 라이터인 ‘음유 시인’ 레오나르도 코헨은 이 노래의 주인공 낸시와 친분이 있었다.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했고 사내 아이를 낳았지만, 미혼모로서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낸시는, 결국 탁아 시설에 아이를 입양시키고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코헨은 낸시의 자살 소식을 듣고 이 곡을 쓰게 되었다는데, 가사가 매우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쓸쓸히 죽음을 택한 낸시를 추모하며 ‘나’와 ‘우리’의 무관심을 질타하고 있다. 추천한 이 곡으로 선생의 음악 세계를 약간은 이해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대중은 사회적 책임을 거론하는 음악보다 ‘마돈나’를 원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대중성에 기운 노래들도 소개했을까.

“안할 수는 없지요, 워낙 신청이 들어오니까. 그러나 저 같은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젊은이들에게 가사에서 주는 메시지를 좋은 멜로디와 함께 소개하자는 주의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록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소개를 해줘요. 그런 곡들은 요즘은 통하던데 그 시절에는 반반이었어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시끄러운 음악이라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고. 저를 좋아한 사람들은 감성을 쫓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DJ 오빠의 아슬아슬한 외출]

DJ로서 김영수 선생의 인기는 MC를 겸했기에 폭발적이었다. 부산의 거의 모든 대학 축제를 섭렵했다고 하니, 당시 대학생들에게는 마치 지금의 연예인급의 유명 인사였다.

“그때는 MC들의 자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 축제는 거의 제가 MC를 봤습니다. 기발이라는 사람과 저 둘이서 하는데, 기발이가 부산대학교를 하고, 나머지 대학을 거의 제가 다 했어요. 하여튼 4~5년 동안은 진짜 바쁘게 했었죠.”

DJ로서, 또 MC로서의 성공 요인은 역시 표준어였다. 특히 DJ든 MC든 자신의 영역 외 타 영역은 낯설 수밖에 없는데, 김영수 선생은 둘 다 가능했기에 대중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표준말 쓰는 게 보편화되어 있지만, 30년 전만 해도 부산에서 표준말을 쓰면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봤어요. 버스 안에서 표준말 쓰면 여자들이 다 쳐다봤다니까요. 그런 시절인데, 표준말을 쓰는 데다, DJ만 한 사람들은 MC하는 것에 아무래도 서툴 수밖에 없지만 저는 MC도 하니까, 아무래도 좀 유리한 점이 많았던 거죠. DJ는 얼굴을 보일 일이 없는데, 저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얼굴과 목소리를 서로 연상하게 되니까 좀 실력이 딸려도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유리한 점이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인기란 어느 정도였을까? 말 그대로 마음 놓고 거리를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연애를 못했어요. 충무동에서 시청 앞까지 남포동·광복동 거리를 내가 걸어다니지를 못한 거야. 맨날 골목으로만 다니고. 연애를 해도 집사람과 같이 다니지를 못했어요, 다 쳐다봐서. ‘별들의 고향’ 시절에도 그랬고, 방송국에 가서도 그랬고, 하여튼 1977년부터 1985년까지는 젊은이들이 내 얼굴을 많이 알아봐 가지고, 진짜 광복동 다니기가 힘들었어요. 그때 FM 방송, AM 방송, TV 3개를 동시에 한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인기가 있다 보면, 다소 극성스런 팬도 있기 마련이다.

“나를 쫓아다니는 스토커 같은 여자도 있었는데, 매일 제가 일하는 데 혼자 와가지고 딱 앉아서 아무 말도 안하고 똑같은 노래만 계속 신청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렇듯 집중적으로 대중의 시선을 받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아내를 만나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다. ‘싼레모 음악실’에 온 팬이 인생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의 로맨스에도 역시 음악이 결정적인 매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시절에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다. 가수 최백호, 윤형주, 배철수, 주병진, 임창재, 어니언스의 이수영 등 모두 지금까지 30년 넘게 교류하고 있다. 어떤 이의 결혼식에는 직접 사회를 보기도 했다. 이렇게 ‘별들의 고향’을 비롯한 음악다방은 지금도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DJ, 라디오를 만나다]

음악다방 시절의 인기는 부산문화방송 시절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아니, 이제 부산을 벗어나 경상남도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니, 인지도와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MBC FM은 단파 방송이니까 바다 건너 거제도에 가면 더 잘 들려요. 진주 이런 데서도 전화가 오고, 여수까지 들려요, 부산MBC가. 전화를 걸어서 하는 말이, 감동을 받았다, 내 사연을 소개해줘서 고맙다…….”

그 시절의 방송 사연들 중 아직도 기억나는 것들도 있다. 한 선원이 보내 온 사연인데, 한동안 한국에 들어와서 방송을 듣다가 ‘이제 다시 출국하면 내가 못 듣겠지만, 그래도 소개해 달라, 누구랑 같이 듣겠다’라는 내용의 엽서를 국제 우편으로 보내 왔던 것 같다. 또 관제엽서 열장 정도를 실로 이어가지고, 아예 책을 만들어서 정성스럽게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김영수 선생이 팬들을 기억하는 만큼 청취자들도 그 방송을 기억하고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서 불쑥불쑥 예전 얘기를 꺼내놓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제 방송을 듣고 나도 방송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데요. MBC 모 기자 중에 그런 후배가 있어요. 지금은 차장인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내가 형 20년 전 그 방송을 보고서 방송하고 싶어서 공부 열심히 해서 됐다’는 거예요.”

김영수 선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정오의 희망곡」이란 프로그램을 할 때 가장 인기가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도 잠깐 했었고, 「아침의 행진」 등 돌아가면서 많은 프로그램을 맡았지만, 그래도 「정오의 희망곡」을 가장 오래했고, 지금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중·고등학생들이 주요 청취자고, 「정오의 희망곡」은 직장 여성들이 80~90%예요. 그 사람들은 신청해 놓고 직장에서 듣는 거지요. 이어폰으로 듣기도 하고. 특히 은행원들이 방송을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시절에는 거제도나 광안리, 송도에서는 FM만 틀어놨어요, 해수욕장에다가.”

1시간 방송에 평균 8~9곡이 나가는데, 동일한 곡을 신청하는 사람이 서너 명 되니까, 대략 27~30명 정도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모든 사연을 다 소개하지만, 매일 도착하는 100장이 넘는 엽서 가운데 공통된 것, 사연이 기특하거나 딱하거나 감동적인 것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방송을 했다. 그런데도 가끔은 시간이 부족할 때도 있었다.

“프로그램의 인기가 있나 없냐는 광고가 많이 붙나 안 붙냐로 알 수 있는 건데, 우리가 광고는 전CM, 중CM, 후CM 3개로 나누거든요? 이걸 소개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어떨 때는 음악을 7곡 밖에 못 틀 때도 있었어요. 광고가 너무 많이 붙으니까.”

김영수 선생이 진행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에 ‘별들의 고향’에서의 공개 방송이 특히 인기가 있었다. 토·일요일 빼고 매일 방송하는 「생방송 4시에 만납시다」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별들의 고향’과 광복동 스튜디오를 연결하는 이원 방송으로 진행되었다. 진행은 ‘새미’라는 예명의 유문규가 했는데, 방청객과 즉석 인터뷰도 하고, 음악 신청도 할 수 있었다. 생방송이다 보니, 아무래도 실수가 없을 수 없었다.

“음악 신청을 했는데 다른 음악이 나온다든가, 생방송이란 걸 알고 술 마신 휴가병이 심한 농담을 한다든가 그런 거는 흔히 있을 수 있는 거고…. 하여튼 「생방송 4시에 만납시다」가 아주 센세이셔널 해서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TV도 있었지만, 아직은 ‘따뜻한 라디오’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를 선도한 것은 음악다방 DJ 출신들이었다.

[광복동, 음악다방 그리고 청년 문화]

학창 시절부터 방송국 시절에 이르기까지 DJ 김영수 선생을 중심으로 이렇게 그 시절의 광복동 음악다방과 청년 문화를 돌아보았다. 이제 우리의 대화에 매듭을 지어야 할 시간, 선생에게 광복동 음악다방의 의미를 물어보았더니, 무언가 의미심장한 답변이 돌아온다.

“부산의 대표적 도심인 광복동의 1970년대는 아직 왜색 문화가 많이 잠식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에 우리 젊은이들이 광복동 음악다방에서 유일한 해방 공간을 찾았다는 거죠. 답답한 시대에 청년들의 갈증이 이런 문화들을 자연스럽게 낳은 것인데, 문화 전령사를 자처한 우리 DJ들이 팝과 우리의 포크 등 대중음악을 통해 소통을 꾀하면서 그러한 청년 문화를 확대·재생산한 현장이 바로 광복동 음악다방이란 거죠.”

‘청년 문화’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였지만 음악 좋아하고, 술 마시기 좋아하는 여느 시대에나 있는 청춘의 낭만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청년들의 놀이라고 해봐야 선택의 폭이 지극히 좁았지만, 그래도 그 시절 청춘의 상징적 장소는 다름 아닌 광복동이었다.

“DJ인 나도 광복동에서는 다른 다방에 가거나, 다른 DJ가 하는 다른 음악실에 가거나 그것 밖에는 할 게 없었어요. 그때 광복동에 교보 문고가 있었는데, 제가 갖고 있는 책의 반절은 여기서 산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젊은이들이 다방에 죽치지 않으면 교보 문고를 주로 가는데, 그 마저도 싫증나면 막걸리집에 가거나 고갈비를 먹거나, 아니면 자갈치로 가서 장어구이나 고래 고기를 먹는 거죠. 음악도 듣고 할 말도 다 했으니, 이제 술 마셔야 할 거 아닙니까?”

어느 시대건 청년 문화가 없겠냐마는, 요즘처럼 등록금이나 취업에 찌든 파편화된 개인을 생각하면, 그 시대에는 적어도 청년들이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의제는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불행히도 시대에 대한 울분이었을망정.

“건전했지요, 그 시절에는. 그런데 80년대 중반 이후 남천동이 발전하고 하니까 저쪽으로 옮겨가 버리고, 광복동에는 이제 이런 게 없어져 버렸어요. 딱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의 얘기예요.”

1970년대 청춘들의 상징적 장소 ‘별들의 고향’은 1980년대 중후반 이후 나이트 클럽으로 변신하여 광복동 시대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른바 ‘별고 나이트’로 기억되는 그곳. 생맥주와 통기타 음악이 있던 때를 지나, 신나게 발바닥 비비며 청춘의 열기를 내뿜던 시기를 거쳐, 지금은 ‘별고룸 노래 소주방’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름에서부터 벌써 청춘의 장소는 아닌 듯한데, 이 작은 청춘들의 ‘고향’의 변천사가 광복동의 명암을 축사한 듯해 영 입맛이 씁쓸하다.

“광복동·남포동에는 젊은이의 문화는 없어졌다 봐야죠. 오히려 가족 중심의 문화가 강해졌고, 그들의 문화는 모두 대학가로 이동했으니까. 대학가에는 지금도 미니 음악다방도 있고 그래요.”

영원한 청춘의 장소 ‘별들의 고향’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을 보일까? 추억도 추억이지만, 그 시절 청년들의 아들딸들, 지금도 소리 없이 지고 있는 청춘들에게도 그때의 음악다방처럼 작은 해방구라도 하나 허락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청년다운 야망이란 그저 음악다방 시절의 교과서에서나 존재하는 우울한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도 꼭 또 다른 ‘별들의 고향’이 함께 하기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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