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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019
한자 臨時首都釜山-時節-
영어의미역 Tracing back the History of Busan, Formerly the Provisional Capita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학림

[부산, 6·25 전쟁으로 임시 수도 되다]

조선 시대에 부산은 ‘예민한’ 국경 도시였으나 큰 도시는 아니었다. 부산이 오늘과 같은 대도시로 성장한 것은 근현대의 두 가지 계기에 의해서였다. 첫 번째 계기는 개항이었고, 두 번째 계기는 6·25 전쟁이었다. 6·25 전쟁은 부산을 비약적으로 팽창시켰다. 당시 부산은 1차[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2차[1951년 1월 3일~1953년 8월 15일] 두 번에 걸쳐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6월 27일 대전으로, 7월 16일 대구로, 8월 18일 부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1차 임시 수도로서 부산의 역할은 70일 만에 끝이 났다. 하지만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1·4 후퇴 하루 전부터 휴전 협정 체결로 환도할 때까지 부산은 1차 때보다 훨씬 길게 2차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임시 수도 시절, 정부 부처와 국회, 각국 외교 기관, 금융·경제·문화·교육 기관 등의 주요 기관들이 모두 부산으로 이전해 있었다. 정부 청사는 경상남도청[현 동아대학교 박물관], 보건부와 문교부는 옛 부산시청, 상공부는 남선전기 사옥[현 한전 토성동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교통부는 조금 떨어진 부산진구 범천동 범곡교차로 인근에 청사가 있었는데 아직도 이 일대를 ‘교통부’라 부르고 있다. 국회는 처음에 부산 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경상남도청 체육관이던 상무관으로 옮겼다. 경상남도 도지사 관사는 대통령 관저[현 임시 수도 기념관]가 되었고, 남포동 소화장 아파트는 국회 의원들의 관사가 되었다. 그야말로 모든 국가 기능이 부산에 집중되었다.

1, 2차를 합쳐 통상 ‘임시 수도 부산 1000일’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 항구 도시 부산은 피난민들의 물결에 휩쓸려 바다 속으로 침몰할 듯 혼란의 북새통이었다. 인구 40만 명의 도시 부산이 단숨에 인구 100만 명의 대도시로 변해버렸다. 당시는 하루도 쉴 날이 없었던 정치적 격동과 경제 사회적 혼란의 시기였다.

2013년 광복동, 남포동의 밤거리는 활기차고 환하다. 이 화려하고 환한 거리가 깊고 어두운 절망을 품었어야 했다. 1951년 2월 16일, 금요일 저녁이었다. 남포동 뒷골목의 지하 스타 다방에서 시인 전봉래(全鳳來)가 28세를 일기로 자살했다. 그가 흔들리는 필체로 쓴 원고지 2장의 충격적인 유서는 많은 이들을 울렸다. “나는 페노발비탈을 먹었다. [중략] 10분이 지났다. 눈시울이 무거워진다. 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히 살기 위하여 미소로써 죽음을 맞으리다.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 이 유서는 ‘전쟁 중 부산’에 집결한 피난민들의 극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김동리(金東里)는 단편 「밀다원 시대」에서 1·4 후퇴 이후 부산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걸음도 떠나갈 수 없는, 한걸음만 더 내디디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곳….” 끝이 무엇이던가. 치사량의 페노발비탈을 먹는 곳,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곳, 어쩔 수 없이 죽음과 마주한 곳이다. 하지만 그곳은 반환점이요, 또한 새로운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죽어야 살 수 있는 곳이다.

해방으로 갓 태어난 한국 정치는 임시 수도 시절 독재로 치달았고, 전시 경제는 엉망이었으며, 사람들은 꿀꿀이죽을 먹으며 아사 직전을 헤맸다. 부산은 그야말로 엄청난 수의 피난민이 몰려들어 침몰 직전의 구명정 같았다. 그러나 되레 그것들이 현대사의 아픔과 얼룩, 상처를 온전히 간직한 도시 부산을 만들었다. “국란의 현장에서 부산은 모든 역량과 모든 사람들을 품어내는 바다 역할을 했습니다.” 이현주 임시 수도 기념관 관장의 말이다.

[부산 정치 파동, 이승만 독재의 길]

대한민국 임시 수도 기념 거리’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에서 임시 수도 기념관까지의 가로 500m. 기념 거리 입구에는 한때 부산 시내 최고 교통수단이었던 전차 1량도 전시돼 있다. 거리에는 피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부조나 조형물이 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다. 이 거리는 2010~2011년에 조성됐다. 2011년 당시 임시 수도 기념관 앞에 이승만(李承晩) 동상을 설치해 심각한 논란을 빚었다. 동상은 곧 뻘건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설치 3개월 만에 철거됐다. 받침대는 2013년 현재까지 비어 있다. ‘동상 없는 텅 빈 받침대’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정문 바로 앞에 있는 붉은 벽돌의 동아대학교 박물관[등록 문화재 제41호]은 당시 임시 수도 정부 청사였다. 이 앞에서 1952년 5월 26일 한국 헌정 사상 최초의 대낮 정치 쇼가 벌어졌다. “국회 의원이고 나발이고 비상계엄인데 검문을 받아야 할 거 아냐.” 그 전날 이승만은 부산, 경상남도, 전라남도·전라북도 일원 23개 시·군에 비상계엄령을 내렸다. 헌병대는 5시간의 실랑이 끝에 국회 의원들이 탄 통근 버스를 공병대 크레인에 대롱대롱 매달아 끌고 갔다. 이런 해괴망측한 구경거리가 있을 수 없었다. 부민동 거리에는 출근길부터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국회 동의 없이 국회 의원 12명이 구속됐다.

이것이 발췌 개헌안 공포[7월 7일]까지 40여 일간 진행된 부산 정치 파동의 시작이었다. 검거령이 떨어진 골수 야당 의원 40명은 한여름 내내 숨어 지냈다. 비상계엄은 대통령 재선 가능성이 100% 없었던 이승만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였다. 4·19 혁명으로 막을 내릴 이승만 12년 장기 집권의 서막이기도 했다.

남포동 뒷골목도 출렁거렸다. 1952년 6월 20일 국제구락부 사건. 경양식집인 국제구락부의 주소는 남포동 2가 25번지[현재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길 34], 오늘날 지번으로 찾아보니 놀랍다. 전봉래가 자살한 스타 다방 위치와 거의 들어맞는다. 거기서 한국 정치가 한 번 더 죽었다. 그날, 국제구락부에서 반 이승만 인사들이 ‘반독재 호헌 구국 대회’를 열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폭도들에 의해 대회는 풍비박산이 났다. 김창숙(金昌淑)의 흰 모시 두루마기는 피로 물들었고, 조병옥(趙炳玉)은 화분으로 얼굴을 맞아 묵사발이 됐다. 야당인 민주국민당의 총무부장인 유진산(柳珍山) 등 27명이 구속됐다.

국제구락부에 난입한 폭도들은 해골 문양으로 유명한 ‘백골단’이었다. 이들은 영도경찰서 옆 대평동의 낡은 일본식 2층 집에 본부를 둔 정치 깡패 집단이었다. 1952년 초 이승만의 참모인 국회 의원 양우정(梁又正)이 재일대한청년단 사람들을 불러 만든 것이라고 한다. 땅벌 문양을 사용한 ‘땃벌떼’도 백골단과 쌍벽을 이룬 정치 깡패 집단이었다. 백골단과 땃벌떼는 벽보 작업, 소환 대회, 탄원서, 국회 해산 촉구 데모 등을 통해 부산 정치 파동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 ‘정치 파동 변곡점’]

오늘날 충무동 교차로. 버스와 자동차가 복잡하게 오가는 이곳과 인근 서구청 자리는,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가장 큰 공원인 대정(大正) 공원이었으며, 해방 이후 충무동 광장으로 바뀌었다. 이 충무동 광장에서 1952년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6·25 전쟁 2주년 기념식장에서 벌어진 그 사건은 아주 어설펐다.

기념식장 단상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하면서 연설을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때 귀빈석 왼편 뒷자리에서 양복 차림에 중절모를 쓴 60대 노인이 갑자기 단상으로 돌아내려 오더니 이 대통령과 3m도 안 되는 곳에 섰다. 이 노인은 모자를 벗고 그 속에 숨겨놓았던 권총을 꺼내 이승만을 겨누었다. 순간, 총에서 “탕 탕”이 아니라 “찰칵 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불발이었다. 노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경상북도 안동 출생으로 대구에 사는 62세의 전 의열단원 유시태였다. 배후는 역시 의열단 출신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따르던 국회 의원 김시현(金始顯)이었다. 이 사건을 두고는 ‘조작이다’, ‘실제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승만에게 겁만 주려고 했다’는 등 여러 설이 나왔다. 당시 재판 때 군 기관의 총기 감정 결과가 가관이다. ‘총은 녹슬고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며, 탄환은 30년도 넘은 것으로 그 권총과 탄환으로는 누가 쏴도 불발일 수밖에 없다.’

그날 이승만 대통령은 원래 대연동 유엔 묘지만 참배하고 6·25 기념식장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발길을 돌렸다. 사건 당시 요즘 청와대 경호실장 격인 경무대 서장 이정석은 인근 부평동 시장 골목 안에서 발바닥 티눈을 빼는 수술을 하고 있었다. 뭔가 석연찮은 틈이 보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하튼 이승만 저격 미수 사건은 반 이승만 세력을 난처하게 만든 ‘부산 정치 파동의 변곡점’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권위는 6·25 전쟁 이전에 와해되고 있었다. 1951년 잇달아 터진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국민 방위군 사건은 이승만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승만은 전시를 틈탄 부산 정치 파동으로 극적인 역전 기회를 잡았다. 북한의 남침이 외려 이승만 체제를 강고하게 한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 삶과 현실, 역사의 큰 역설이 있다. 그게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뤄졌다.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 개헌안 공포 뒤 이승만은 ‘노회한 능청’을 떨었다.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 않겠다. 나는 이미 나이가 많다. 조용히 살고 싶다.” 부민동 대통령 관사 앞은 매일 시끄러웠다. 데모꾼들은 “각하는 꼭 출마하셔야 합니다.”라는 구호를 짜놓은 고스톱 판의 각본처럼 외쳐댔다.

그해 8월 5일 대통령 직접 선거에서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뽑혔다. 이승만은 정치 파동의 수족으로 활용한 이범석(李範奭)과 족청계, 그리고 국무총리 장택상(張澤相)을 제거하는 무서운 정치력을 차근차근 발휘하기 시작했다. 60여 년 전 출마를 촉구하는 관제 데모꾼들이 그렇게 들끓었던 임시 수도 기념관 앞이건만, 2013년 현재 이승만 동상은 이곳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전시 물가 100배까지 뛰다]

임시 수도 기념 거리에서 일직선 도로를 따라 보수 사거리를 지나면 보수동 책방 골목, 국제 시장, 부산 근대 역사관이 있는 대청로로 이어진다. 이 대청로에 2013년 7월까지 한국은행 부산본부가 있었다. 1963년에 지어진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 건물은 부산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됐다. 원래 이곳은 일제 강점기 조선은행이 있던 자리. 『부산 사진 대관』에는 르네상스 풍으로 고색창연한 옛 조선은행 부산지점 건물 사진[1959년]이 있다. 이런 건물이 지금껏 남아 있다면…, 아쉽다.

임시 수도 부산 시절, 화폐 조치와 화폐 개혁이 있었다. 이중 재미있는 사연이 있는 것은 1950년 7월에 찍은 1,000원 권과 100원 권, 두 종의 지폐다[이들 지폐는 1953년 2월 1차 화폐 개혁 때까지 유통된다]. 1,000원 권에 이승만 대통령 얼굴이 실려 있는데 동전 깃이 넓적한 한복 차림으로 딱딱한 느낌이다. 갑자기 전쟁이 터지자 주일 한국 대표부에서 급히 유통하기 위해 집무실에 걸려 있던 이승만 초상화를 임시변통으로 넣어 일본에서 찍은 지폐였다. 이승만은 “내 얼굴을 넣었다고? 그래 잘했어!”라고 했다. 건국 이후 첫 한국은행권이 그랬다. 100원 권 지폐에는 책에서 골라낸 광화문 그림을 넣었다. 맨 처음 총 20억 원어치를 찍어 부산 수영 공항으로 공수해 시중에 유통시켰다.

임시 수도 정부는 1950년 8월 28일 구권과 신권을 1대 1로 교환하는 화폐 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피난 오면서 서울 한국은행 지하 창고에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해 오던 조선은행권 지폐 원판을 그냥 두고 온 것이었다. 뒤늦게 서울 한국은행을 집중 폭격했으나 허사였다. 북한이 이 원판을 이미 입수해 마구 남발한 일명 ‘빨간 딱지’ 지폐로 전시 경제가 몹시 교란됐다. 이 빨간 딱지와 맞서기 위해 예의 딱딱한 이승만 초상이 들어간 새 한국은행권을 일본에서 계속 찍었다.

수영 공항과 1부두를 통해 들여온 새 지폐를 전쟁 중 트럭에 싣고 곳곳을 찾아 구권과 교체했는데 패잔병의 습격으로 현금 수송 트럭이 전복되는 일도 잦았다. 화폐 교환 조치는 전쟁 때문에 전쟁 와중에 전쟁처럼 치러졌다. 한국은행권의 이승만 초상은 1952년 한복 입은 부드러운 초상으로 한 번 바뀌었다. 그리고 1953년 2월에는 양복 입은 새로운 초상으로 바뀌는데 이때 제1차 화폐 개혁이 단행됐다. 이승만은 양복을 입어 더 부드러워졌지만 시중의 사람들은 당황했다. 하루아침에 100원이 1환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화폐 개혁 조치가 발표된 직후 15일 오전 중 부산 시내의 교통 기관 버스 택시 등은 운행을 중지하고 아까까지 열려 있던 다방들도 바쁘게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노상에서 멋모르고 물건을 팔던 담배 및 잡화 장사들은 의외로 물건이 잘 팔리자 기분 좋게 다 팔고 난 후에야 사실을 알고 땅을 치고 우는 등의 웃지 못 할 비극도 연출되고 있다.

시중의 표정을 전한 당시 한 신문 기사 문장은 비문으로 어색한데 그 정도로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던 모양이다. 1차 화폐 개혁은 통화 남발로 물가가 100배나 뛰었기 때문에 단행했다. 통화량이 6·25 전쟁 전 560억 원에서 1952년 말 1조 원을 넘었다. 이승만의 전적인 결정으로 동그라미 두 개를 떼 내는 화폐 개혁이 이뤄졌다. 2013년 문현동 금융 단지로 옮긴 한국은행 부산본부의 화폐 박물관에는 임시수도 시절의 지폐와 북한이 남발한 빨간 딱지가 전시돼 있다.

[경부 성장 축 강화로 부산 제2 도시 되다]

한국 경제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 성장 축’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 성장 축’, 두 축을 갖고 있다. 경부 축이 눈앞에 곧바로 보이는 곳이 있다. 전쟁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부산의 산복 도로이다. 이곳에서 보면 영도 대교부산 대교를 경계로 부산의 북항과 남항 구분이 확연하다. 왼쪽의 북항은 컨테이너 선박들이 드나드는 상선들의 항구요, 오른쪽 남항자갈치 시장이 있는 어선들의 항구다. 수려한 부산 해안선 중 저 부산항은 부산의 먹거리를 직접 만드는 때 묻은 삶의 현장이다.

동구 산복 도로에서는 부산역[초량동]도 내려다보인다. 경부선 철도의 종착점이자 시작점인 저 부산역이 부산항과 더불어 20세기 초부터 이른바 ‘경부 축’의 핵심 역할을 해왔다. 현재의 부산역은 유리 외벽의 멋진 건물이다. 6·25 전쟁 및 임시 수도 시절, 부산역은 다른 곳에 다른 모습으로 있었다. 중앙동 쪽인 부산세관 앞 부산무역회관 빌딩 자리에 있었다. 이곳에 있던 옛 부산역이 남인수(南仁樹)의 노래 「이별의 부산 정거장」으로 눈물을 적셨던 바로 그 부산 정거장이다. 1910년 준공된 부산역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위풍당당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3년 11월 대화재로 소실됐다. 그 건물이 아직 남아있던 임시 수도 시절부터 부산 경제는 위풍당당해졌다. 6·25 전쟁은 부산을 한국 제2 도시로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경부 축 강화의 역사에는 또렷한 추이가 있다. 부산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관문으로 갑자기 부상했다. 이른바 ‘경부 축’이 처음 대두했다. 1913년 부산은 인천을 제치고 조선 최대 교역 항구가 되었다. 경부선 철도와 경부 축의 짝을 이룬 부산항은 일제 강점기 내내 매축을 통해 팽창 일로를 걸었다.

하지만 해방은 단절이었다. 부산 경제는 일본과의 경제 관계가 끊어지면서 가장 심각하게 타격을 입는다. 중국, 홍콩, 마카오가 한국의 교역 상대가 되면서 ‘경인 축’이 살아나는 대신 경부 축은 크게 흔들렸다. 경인 축의 수출입 비중이 80~90%를 차지하고, 경부 축은 심지어 5%까지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그런데 6·25 전쟁이 터지면서 경부 축이 다시 회복되었다. 1951~1953년 한국 경제에서 부산이 차지하는 무역 비율은 85% 안팎을 기록했다. 부산은 6·25 전쟁의 가장 큰 경제적 수혜지가 되어 한국 제2의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부 축의 상징인 부산항과 경부철도를, 6·25 전쟁 때 형성된 산복 도로 동네에서 훤히 볼 수 있다는 게 예사롭지 않은 것 같다.

[요정과 다방의 도시]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홍곡로 75] 수정1동주민센터 근방, 어른 키를 넘는 석축 위에 2층의 일본식 건물인 정란각이 약간 고풍스런 모습으로 있다. 근대 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330호다. 1939년 일본인 부산철도청장 관사로 쓰이다가 해방 후 요정으로 바뀌었던 곳이다. 1960~70년 한국 정치는 요정에서 다 이뤄졌다고 이른바 ‘요정 정치’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요정은 룸살롱의 이전 형태로 검은 돈과 정치, 술과 가무 등이 한데 버무려진 곳이었다.

이 요정 정치의 뿌리가 임시 수도 부산에 있었다고 해야 할 정도로 부산은 말 그대로 ‘요정의 도시’였다. 그 힘든 피난 시절이 요정 전성시대였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고통과 퇴폐는 함께 가는 법이다. 전쟁고아가 3만 명에 달하는데 무허가 요정이 부산만 500곳에 달한다는 등의 기사가 당시 신문에 보인다. 1951년 6월 기사에는 경상남도 경찰국이 닷새 동안 무허가 요정 1,500여 곳을 적발했다고 돼있다. 이 정도면 숫제 무허가 요정이 발에 차였다는 말이다.

“앞 골목 뒷골목에서 주지육림의 경박한 잔치는 밤에 낮을 이어 마담들의 호주머니만을 불려주었다. [중략] 관리 나으리들이 거의 다 이 무허가 요정으로 집중하게 되니 계속되는 호경기 속에 무허가로 전향하는 요정 수가 자꾸만 늘어갔고 낮에 관공서에 나타나는 화려한 차림의 여성들이 70%는 요정 마담, 그중 70%는 무허가 요정들의 마담들이라고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뒷골목 천국은 더욱더 임시 수도 부산을 구가하였다.”[『동아 일보』, 1953. 7. 24]

임시 수도 정부 청사 부근 부민동과 보수동은 정치 1번지였다. 이곳에 임시 수도 정치인들의 아지트로서 요정이 번창했다. 요정 신성에 모이는 이들은 신성파, 요정 삼우장에 모이는 이들은 삼우장파로 불렸다. 여기서 임시 수도 ‘밤의 정치’가 도모됐다. 보수동의 요정 역사는 길다. 이곳에는 1910~40년대 신식 색주가가 있었는데 그것을 이어받아 임시 수도 시절 유명한 요정이 있었던 것이다. 보수동에는 1970년대까지 부산의 실력가들이 드나들던 요정들이 있었다.

임시 수도 시절 부산을 또한 ‘다방의 도시’라고 불렀다. 남포동, 광복동 일대 좁은 골목길이나 뒷길에는 다방이 쫙 깔려 있었다. 흡사 오늘날 이곳에 원두커피 전문점들이 즐비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사뭇 다르다. “어느 다방을 둘러보아도 각계각층 인사들이 오뉴월 뒷간에 구더기처럼 법석대고 있었다.”고 당시 신문은 적고 있다.

지인들끼리 만나면 “요새 어느 다방에 나가시오?”라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20여 곳에 이르는 다방은 남으로 밀려온 피난민들과 문화 예술인들의 객실이자 거래처이며, 또한 숨구멍이었다. ‘에덴’, ‘오아시스’, ‘레인보’, ‘희망’, ‘늘봄’, ‘망향’, ‘등대’, ‘루네쌍스’, ‘햇피’ 등의 다방 이름은 전쟁 와중에 고향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정신적 허기를 말하고 있었다.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해 그들은 다방에서 죽쳤고, 또 요정을 드나들었다. 사치와 방탕, 부패에 몸을 떠맡겼다. 구덕 운동장, 매축지 일대, 하야리아 부대, 그 인근 300번지, 초량동 등지에 윤락 여성들이 우글거렸다. ‘빼딱 구두’[하이힐]를 싣고 다니는 윤락 여성들은 ‘유엔 사모님’으로 불렸다. ‘유엔 마담’은 미군을 상대로 술과 여자를 파는 업주를 말하는데 1952년 5월 2만 5000여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비밀 댄스홀이 창궐해 「양춤에 미친 규중녀」라는 신문 기사도 실렸다. 1953년 2월 경향신문 문화부장이자 소설가인 김광주(金光洲)가 공보처장 부인에게 끌려가 1박 2일간 폭행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춤바람 난 장관 부인 얘기를 다룬 단편 『나는 너를 싫어한다』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그 부인이 사람을 시켜 김광주에게 린치를 가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될 대로 되라’는 뜻의 ‘케세라 세라’를 외치며 막 나갔다. 이런 사치와 방탕의 이면에는 시대의 우울이 깔려 있었다.

한 시절 요정이었던 정란각은 이제 근대 문화유산이 되어 있다. 요정과 다방의 도시로 불렸던 임시 수도 부산 시절, 그 풍속의 역사는 근현대 생활사의 한 페이지로 더 많이 복원돼야 할 것이다. 그것은 퇴폐와 환락도, 부박하고 천박한 문화도 기꺼이 도시 문화와 역사의 일부로 껴안아 큰 틀 속에 뜨겁게 뒤섞고 있는 도시 부산의 속살을 벗겨내는 작업이 될 법하다.

[부산 문화와 피난 문화 만나다]

임시 수도 부산은 환도할 때까지 한국 문화의 중심지였다. 온갖 예술인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으며 광복동과 남포동을 중심으로 문화적 사건들이 불빛처럼 명멸했다. 27세의 천경자(千鏡子)가 청탑 그릴에 독사 떼를 그린 「생태」[1951]를 내걸어 화단을 충격했고, 화단의 귀재 이중섭(李仲燮)은 「범일동 풍경」, 「문현동 풍경」을 그려 피난살이 판자촌 모습을 생생하게 남겼다. 김은호(金殷鎬), 변관식(卞寬植) 등 일급 화가들은 영도의 대한도기에서 ‘수출용 도자기 그림’을 아르바이트로 그렸다.

1952년 6월 25일 부산시청[지금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 현관 위에 「자유와 통일을 위하여」라는 그림이 내걸렸다. “공보처 선전국에서는 김인승, 남관, 김환기, 박영선 4화백에게 위촉하여 「자유와 통일을 위하여」라는 대화(大畵)를 6·25 2주년 멸공 통일의 날을 기하여 부산시청 앞에 건립 전시하여 멸공 통일을 위한 국민의 사기를 북돋워 주게 되었는데 동 그림은 일반 전시가 끝나는 대로 국회 의사당에 게시할 예정이라 한다.”[『경향 신문』, 1952. 6. 25]

이 그림은 한국의 대표적 화가들이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모방했다고 비판이 많았다. 나중에 일본과 미국에도 전시하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외국 작품 구도를 모방한 괴물을 두고 대(大) 예술 작품이라고 자부하는 파렴치가 감행된다면 이야말로 이 나라 화단이나 예술 문화 전반을 위해서 일대 비극이요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는 비난이 일었다. 이 그림은 공보부 처장이자 문학 평론가로서 화가들과 친하게 지낸 이헌구가 생활고에 허덕이던 작가들을 돕기 위해 그리게 한 것이다.

1952년 2월 작가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해 종군 화가단이 만들어졌다. 종군 화가단은 국방부 정훈국 소속이었는데 술고래라고 불렸던 장욱진 등이 여기에 끼었다.

"초량동에 있는 당시의 국방부 정훈국에서 모임이 있었다. [중략] 이마동 씨를 단장으로 20명 가까운 화가들이 전원 군복 차림이었다. [중략] 장욱진의 군복 차림은 옷걸이에 덮어놓은 군복을 보는 느낌이요, 중섭은 유격대원, 손응성은 우편배달부, 이런 느낌 속의 한묵의 의젓함이란 북구라파의 무슨 특수 장교를 연상케 하는 일품이었다.”[화가 박고석 회고담]

피난 예술인들은 “배신과 음란과 아사와 부정과 광태의 무수한 병균이 엉클어진 항구의 거리에서 나는 오직 그리다 그리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싶다”[화가 김훈]라는 투를 구사하며 짐짓 멋을 한껏 냈다. 1953년 광복동의 한 다방에서 화가 김병기는 피카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송했다. 6·25 전쟁을 비판한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을 되레 비판하면서 그는 피카소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문화적 제스처’를 연출했다. 피난 화가들은 대한미협전, 후반기전, 기조전 등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1953년 3월 김윤민, 서성찬, 김영교, 김경, 김종식, 임호 등 부산 화가 6명은 피난 화가들에 맞서 지방 색채를 고수하기 위해 ‘토벽회’을 결성했다.

부산은 중앙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문학 판에서 “지금까지는 서울 있는 놈들이 문단을 리드해왔지만 지금부터는 부산이 수도로 됐으니까 재부(在釜) 문인들이 문단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김동리「밀다원 시대」는 적고 있다. 작품에서 그런 주장을 펼친 이를 ‘전필업’이라고 하고 있는데 전필업은 당시 부산일보 문화부장이자 시인이었던 정진업(鄭鎭業)을 말하는 것 같다.

임시 수도 시절, 부산에서는 외지 문화와 부산 문화가 충돌했고 어우러졌다. 그러면서 한국 현대 예술의 씨앗이 잉태됐고, 부산 문화가 자의식을 가지게 됐다. 그 문화의 현장이 임시 수도 정부 청사 2~3㎞ 반경 내에 있던, 오늘날 구도심인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였다.

[죽음마저 녹여낸 ‘뜨거운 가마 도시’]

임시 수도 시절은 과연 부산에 무엇을 남겼나. 그 시절, 부산은 이름에 ‘가마 부(釜)’ 자를 쓰는 도시답게 세계사적인 전쟁이 수반한 죽음과 고통을 녹여낸 ‘뜨거운 가마 도시’가 됐다.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이 원도심의 산비탈에 팍팍한 삶을 송곳처럼 힘겹게 꽂았으며, ‘났다 하면 불’ ‘부산 아닌 불산’이란 말처럼 하루 서너 건의 화재가 판자촌을 휩쓸었지만 피난민들은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이 부산을 일군 것이었다.

처참했던 피난살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곳이 있다.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곳은 부산 서구 아미동 ‘비석 마을’로, 이곳은 일제 강점기 이래 9,000기를 헤아리던 부산의 대표적 공동묘지였다. 오갈 데 없는 피난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비석을 쓰러뜨린 무덤 자리에 천막집과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 동네 골목 모퉁이를 돌면 곳곳에 ‘소화 14년’[1939년] 등의 글자가 훤히 보이거나 글자를 애써 쪼아 낸 비석들이 댓돌, 축대, 계단 돌 등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동시대의 무덤 위에 바로 형성된 이런 마을은 다른 나라에서 그 예를 찾기 힘들 것이다.

두 번째로 부산 남구 우암동 ‘소막 마을’을 꼽을 수 있다. 피난 시절에 소막사, 즉 우사(牛舍)를 집으로 개조해 이룬 마을이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길 사이에 소막의 외형이 보이는 집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우암동 시장 일대의 이곳은 6·25 전쟁 당시 ‘아카자키[赤岐]’라고 불리는 피난민 7만 명의 수용소가 됐는데 화가 이중섭도 처음 이곳에 수용됐다. 이 ‘소막 판잣집’ 동네가 확장돼 오늘날 우암동이 이루어졌다. 공동묘지 위에 형성된 마을, 소막사를 개조해 집을 만들고 거기서 이뤄진 마을이 도시 부산을 이룬 것이다. 그러니 ‘죽음과 고통을 녹여낸 도시’라는 이름 외에 부산을 달리 무엇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임시 수도 부산 시절은 ‘큰 것의 경험’으로 인해 훗날 자양분이 될 만한 것을 부산에 남겨놓았다고 할 수 있다. 문화 분야에서는 피난 문화가 충격을 가해오자 지역 문화 스스로 자의식을 다지게 되었다. 그것은 장차 1980년대 부산의 활발한 지역문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될 것이었다. 임시 수도 부산 시절의 정치가 부산에 남겨놓은 것은 많지 않다. 용두산 공원이승만의 호를 따서 한때 우남 공원으로 불렸을 뿐이다. 잘 나가는 정치인들은 환도와 더불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이승만은 장기 집권의 초석을 부산에서 놓고 훌쩍 떠났다. 그런데 결국 그가 하야하게 된 4월 혁명의 도화선에 첫 불을 당긴 곳이 부산 경남이었다는 것은 그냥 우연일 뿐이었을까.

경제 분야에서 그 시절은 부산을 한국 제2 도시로 만들었다. 미국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냉전 축을 완성했다. 중국을 차단하고 일본을 한국 경제의 국제 창구로 만들었다. 임시 수도 부산 시절에 경부 성장 축이 강화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부산 역사가 장엄하다고 해야 할 만큼 제2 도시 면모의 형성은 다른 측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개항 이후 일제가 들어오면서 부산의 중심이 동래에서 초량 왜관이 자리한 용두산 일대 현재의 원도심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일본인 전관 거류지로 ‘조선 속의 일본’이 되었다. 6·25 전쟁과 임시 수도 시절은 일본 땅 같은 이곳을 일거에 뒤흔들어버렸다. 한 예로 상가와 주택가로 번화한 일제 강점기 서정(西町)은 일본이 패퇴하면서 소각했는데 그 공터에 국제 시장이 새로 만들어졌다. 국제 시장은 온갖 지역의 피난민들과 물건들이 모여들고 흩어지는 ‘개방성과 역동성의 공간’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부산을 부산답게 하는 특징이다.

임시 수도 시절의 ‘피난 도시 부산’은 ‘식민 도시 부산’의 단일한 외양을 걷어치우면서, 아니 그것마저 품으면서 그때는 정말 어떻게 귀결될 줄 몰랐던 숱한 혼동, 혼란, 고통, 아픔, 좌절을 용광로 속에 녹였다. 그 과정을 통해 부산은 도시 자체를 아예 하나의 거대한 생활사 박물관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한국의 근현대를 고도로 집적시킨 유례가 없는 도시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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