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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683
한자 李仲燮
영어음역 Yi Jungseop
이칭/별칭 대향(大鄕)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영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화가
성별
대표경력 건국훈장 수상
출생 시기/일시 1916년 4월 16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3년 -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34년 -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5년 -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37년~1940년 - 일본 문화학원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일본 독립전·자유전에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미술창작가협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신미술가협회 결성, 창립전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41년|1943년 - 미술 창작가 협회전 태양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마사코와 결혼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북조선 미술 동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원산사범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원산 신미술가협회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0년 12월 - 월남, 제주도를 거쳐 부산에 정착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국방부 정훈국 종군 화가단에 입단
활동 시기/일시 1954년 6월 - 대한 미술가 협회전에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개인전 개최[대구 미공보원]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개인전 개최[미도파 화랑]
몰년 시기/일시 1956년연표보기 - 이중섭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0년 - 부산 로터리 다방에서 유작전 개최
추모 시기/일시 1972년 - 15주기 기념 유작전과 작품집 제작
추모 시기/일시 1978년 - 건국 훈장 수상
추모 시기/일시 1986년 - 30주기 기념 회고전 개최
추모 시기/일시 1997년 - 이중섭이 살던 집을 복원하여 개관
출생지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
학교|수학지 종로보통학교 - 평안남도 평양
학교|수학지 오산고등보통학교 - 평안북도 정주
학교|수학지 일본 제국미술학교 - 일본 동경
학교|수학지 일본 문화학원 - 일본 동경
활동지 미술창작가협회 - 일본 동경
활동지 신미술가협회 - 서울특별시
활동지 원산사범학교 - 함경남도 원산시
활동지 종군 화가단 - 부산광역시

[정의]

부산에서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인 근현대 미술가.

[활동 사항]

이중섭(李仲燮)[1916~1956]은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대향(大鄕)이다. 부농의 가정에서 삼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던 이중섭은 5세 되던 해인 1920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1929년에 부유했던 외가로 가서 살게 되었다. 평양의 종로보통학교를 거쳐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 교사였던 임용련(任用璉)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는데, 이 무렵 평양 일대의 고구려 벽화들을 보면서 미술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19세 되던 해인 1934년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그만두었다. 1937년 일본으로 가서 도쿄의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에 입학하여 1940년에 졸업하였다.

분카학원에 재학 중인 1938년에 이중섭은 일본 미술 공모전인 독립전(獨立展)과 자유전(自由展)에 출품하여 신인으로서 인정을 받았다. 이 무렵 이중섭은 김종찬·김학준·문학수·이쾌대·진환·최재덕 등과 함께 미술창작가협회를 결성하고 있었는데, 1941년에 미술 창작가 협회전에 「소와 소녀」와 「불상」을 출품하여 협회상인 태양상(太陽賞)을 수상하였다. 그해 서울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화신 백화점에서 창립전을 개최하였다. 1943년에도 이중섭은 미술 창작가 협회전에서 태양상을 수상하였다. 이때 역시 소와 관련한 그림인 「소와 어린이」를 출품하여 천재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1945년 무렵 이중섭은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山本方子)와 원산에서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

1946년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 교사로서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고, 1950년에는 원산 신미술가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친구인 시인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가 문제가 되면서 표지를 그린 이중섭까지 정치적 압력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첫 아들을 디프테리아로 잃는 슬픔까지 겪게 되자, 이중섭은 1950년 12월 6일 월남하여 제주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였다.

1952년 2월 이중섭은 국방부 정훈국 종군 화가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으나, 부인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아이들을 데리고 도쿄로 이주하였다.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과 통영 등지를 전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훗날 덧붙여진 그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그림엽서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1953년 이중섭은 밀항하여 가족들을 만났으나 굴욕적인 처가 신세가 싫어 다시 귀국하였다. 1954년에는 화가 박생광(朴生光)의 초대로 진주에서 작품을 제작하여, 6월에 대한 미술가 협회전에 그 유명한 「달과 까마귀」를 출품하였다. 1955년에는 미도파 화랑과 대구 미 공보관에서 개인전을 가질 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가 41세가 되던 1956년 불규칙하고 자학적인 생활로 인해 정신 이상과 영양실조, 간장염까지 발병하여 청량리 뇌병원[현 청량리 정신병원] 무료 환자실에 입원하였다. 간장염 치료를 위해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하였으나 9월 6일 오전 11시 45분에 사망하였다.

이중섭이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닭·어린이·가족 등이 가장 많다. 불상·풍경 등도 몇 점이 전하고 있다.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것과 동화적이며 동시에 자전적(自傳的)인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싸우는 소」·「흰소」[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움직이는 흰소」·「소와 어린이」·「황소」·「투계」[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닭과 가족」·「사내와 아이들」·「집 떠나는 가족」과 그 밖에 수많은 은지화[담뱃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들은 후자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화단 활동은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朴古石)·한묵(韓默)·이봉상(李鳳商) 등과 같이 만든 기조전(其潮展)과 신사실파에 일시 참여한 것 외에 통영·서울·대구에서의 개인전이 기록되고 있다. 살아 있었을 때에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적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저술 및 작품]

대표 작품으로 「여인」[1942]·「소년」[1942]·「흰소」[1953]·「물고기와 아이」[1953]·「봄의 어린이」[1953]·「달과 까마귀」[1954]·「투계」[1954]·「닭과 가족」[1954]·「노란 달과 가족」[1955]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43년에 이중섭은 미술 창작가 협회전에서 태양상을 수상하였다. 사망 후인 1960년에 부산 로터리 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고, 1972년 서울 현대 화랑에서 15주기 기념 유작전과 작품집 마련되었다. 1978년에는 건국 훈장이 수여되고, 1986년에는 서울 호암 갤러리에서 30주기 기념 회고전이 열리고, 1997년에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이중섭이 살던 집을 복원하여 개관하였다. 이중섭 관련 저서로는 2000년 다빈치에서 『그대에게 가는 길』[이중섭 저, 박재삼 역]과 2003년 다빈치에서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1916~1956』[박재삼 역]이 출간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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