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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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部隊-通-釜山 |
영어의미역 | Busan Seen from Camp Hialeah[U.S. Military Install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금도 |
[하야리아 부대, 다시 부산 시민의 품으로]
오랫동안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채 이방인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옛 하야리아 부대(Camp Hialeah)가 2014년 부산 시민 공원의 개장과 더불어 부산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구릉지가 많은 부산의 지형적 특성에 비해 비교적 평탄한 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이곳은 일찍부터 교통 요충지로서 토지의 이용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일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주한 미군 주둔 부대와 철도 기지창 등의 국가 기반 시설들은 오히려 도심 개발을 저해하는 심각한 장애물로 여겨져 왔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2010년 1월 27일 부산광역시로 반환된 하야리아 부대이다.
부산의 도심인 서면과 인접해 있으면서 범전동과 연지동 일대를 가로지르고 있는 54만 3360㎡ 규모의 이 광활한 토지 이야기는 가깝게는 일제 강점기의 상설 경마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군 군용지와 임시 군속 훈련소, 주한 미군 부대 등 격동기의 굴곡진 시대적 아픔이 그대로 아로새겨진 이 지역은, 이른바 ‘근대 도시’ 부산의 산 증인과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부지 반환을 계기로 부산광역시에서는 일찌감치 이곳에 ‘부산 시민 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총사업비 6679억 원의 예산을 들여 부산광역시 미래 발전 사업의 하나로 2014년에 공원을 완공하였다. 오랜 기간 방치되고 있던 부대 주변도 공원 조성과 연계한 뉴타운 사업을 통하여 새롭게 정비되고 있다. 더불어 성지곡지와 부산 어린이 대공원 같은 주변 녹지나 학생 교육 문화 회관, 국립부산국악원 등과 같은 공공시설과의 공간적 네트워크도 적극적으로 구축되고 있다. 그리고 좀 더 넓게는 동천, 북항 재개발 사업과 연계하는 밑그림도 제안되는 등 오랜 시간 단절되었던 주변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가 시도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옛 하야리아 부대 터에 켜켜이 새겨진 역사적 흔적은 그 태생부터 지금까지 부산시 도심 개발의 장애물로서, 혹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매우 중요하고도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 지난한 애증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조상들의 풍요로운 삶의 터전]
옛 하야리아 부대 이야기는 주로 100여 년 전,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되기도 하지만 이 땅의 역사는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 시민 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옛 하야리아 부대 터 곳곳에서 선사 시대부터 삼국 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재가 대거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대 반경 1~2㎞ 내외에는 이미 전포동 조개더미·범전동 조개더미·당감동 고분군·동평현 성지 등을 통해 삼국 시대 및 고려~조선 시대의 생활·분묘·성곽 유적 등 먼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이 발굴된 바 있다.
옛 하야리아 부대 터에서 발굴된 광범위한 유적과 유물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부산 시민 공원 조성 사업 부지 내 문화재 발굴 조사’에 참여한 동양문물연구원[원장 김재현]은 “청동기 시대 후기[B.C. 7~ B.C. 3세기] 지석묘 3기가 일정 간격을 두고 나란히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하야리아’서 청동기 유적 출토, 지석묘와 부장 유물 나와」(『부산 일보』, 2011. 8. 8)].
뿐만 아니라 삼한 시대와 삼국 시대의 토기류와 조선 시대 백자편 유물까지 발굴되면서 적어도 이곳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지역민이 거주해 왔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백양산과 화지산을 배후로 하고, 부전천과 전포천을 낀 배산임수의 완만한 경사지가 풍요로운 농경지로서만 아니라 주거지로도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먼 과거부터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 온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옛 하야리아 부대 터의 발굴 유구는 공원 내에 건립된 역사 문화관을 통해 지역사에 대한 생생한 현장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말발굽 소리 요란한 경마장과 군용지로!]
오랜 세월, 조상들의 풍요로운 삶의 근거지였던 옛 하야리아 부대 터는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이주민들의 한반도 정착과 식민 통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1910년부터 전국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이 일대 대부분의 토지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유력 자본가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토지를 빼앗긴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곳에 경마장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소작농으로서의 생계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1930년 11월 11일자 『동아 일보』 기사를 보면 그 땅에 농사를 지어 호구해오던 30여 명의 소작농들이 그 해부터는 생계를 꾸려가던 방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경마는 주로 1920년대부터 근대적 스포츠의 형식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전국적인 경마 대회 열기에 부응하여 부산에서도 1921년 4월, 부산진 매축지에서 최초의 경마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약 10여 년 간 주로 매립지나 개발 직전의 대규모 공터 등을 전전하며 경마 대회가 개최되곤 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에 조직되어 경마 대회를 주관하던 부산경마구락부가 이듬해인 1927년 7월 13일, 동래군 연산리에 전용 경마장을 설치하기로 하고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상설 경마장이 개설된 곳은 범전리 일대의 서면 경마장이었다. 바로 옛 하야리아 부대 터이다. 이 일대를 상설 경마장 부지로 선정한 이유는 첫째 교통의 편리성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미처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서면 일대가 경마장과 같은 대규모 부지를 확보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당시 일본인들의 생활 거점이었던 부산부의 영역 확장 필요성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이 주로 자리를 잡았던 부산부와 한국인들의 생활 거점인 동래군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던 서면 일대가 부산부의 도시 공간 확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경마장 입지 선정과 조성 과정에서 한국 농민들이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서면공립보통학교[현 성지초등학교]와의 마찰도 있었다. 경마장이 개장한 다음 해인 1931년 1월 2일자 『동아 일보』 기사를 보면 지역의 한국인 유지와 학부형들이 허가권자인 경상남도, 시행 단체인 부산경마구락부, 학교 감독자인 동래군수에게 경마장 운영으로 인한 교육 여건 저해와 사행심 조장 등의 폐해를 강력하게 항의한 사실이 나타난다. 대대로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던 곳에, 그것도 학교 담장 바로 너머에 경마장을 조성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과 폐단도 뒤로하고 경마장은 부산, 그리고 멀리는 경상남도 일원의 지역민들에게 흥행과 관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갔다. 지금도 옛 하야리아 부대 주변에는 ‘경마장로’와 같은 도로명을 통해 경마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경마의 흥행과 경마장 조성은 조선총독부의 세수 확보와 더불어 마필 자원의 확보라는 군사적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경마장은 경마 대회의 흥행을 통해 세금을 확보하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전쟁에 필요한 군마를 관리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전쟁 중에는 대규모 군사 훈련 등의 군용지로도 사용되었다. 실제로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서면 경마장의 경마 대회 기능은 축소된 반면 부산항의 배후 군용지로서의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전쟁 중에 서면 경마장에는 일본군 10288 기마 부대가 설치되었으며, 군사용 마필을 훈련하고 지원하는 시설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 전쟁 시에는 이곳에 제72병참경비대가 설치되었으며, 1942년에 이르러서는 임시 군속 훈련소가 설치되어 포로 감시원을 양성·배출하는 기능도 하였다.
부산 시민 공원 역사 문화관 구술 자료 수집 연구 최종 보고서에 기록된 당시 일본군 군수품 운반을 책임지는 노무자로 일했던 이문규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 군수품의 유통은 주로 부두-부전역-옛 하야리아 부대 물류 라인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반도나 만주 등에서 사용될 군수품이 부두의 창고 시설만으로 부족해서 옛 하야리아 부대로 옮겨서 보관하였던 것이다. 반대로 만주 등에서 들어오는 물건들도 하야리아 부대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다. 현재 공사가 한창인 북항 재개발지 주변의 3, 4부두도 1941~1943년경 전시 체제에 따라 군수품이 증가하면서 설치된 시설이라고 한다.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일제는 한반도 전체를 병참 기지화하고자 하였다. 그 교두보가 되는 부산의 도시 공간 전체를 전시 체제로 전환하고 철도, 도로 등의 교통망도 모두 군수품과 군대 이동에 편리한 형식으로 바꾸었다. 1941년 11월, 화물선인 적기선이 부전 지구와 연결된 것이나 가야선, 부전선, 문현선 등이 1944년에 집중적으로 개통된 것도 이러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특히 부전역과 적기 부두 사이의 철도도 이 즈음인 1945년 5월에 개통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말에 들면서 군수 창고와 군용지로 전용된 서면 경마장을 중심으로 군수품 수송과 군대 이송을 위한 많은 철도 시설과 군부대가 집중하게 되었고, 이러한 군사적 성격이 광복 이후 미군 점령지로 연결되면서 하야리아 부대가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하야리아 부대, 이방인의 영역으로 남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지만 38선 이남은 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 때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단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본국으로 잠시 철수하였다가 1950년 6월 6·25 전쟁을 계기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최후의 보루로서 부산은 많은 피난민의 수용과 함께 임시 수도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만 했다. 특히 전시 체제였던 당시 상황에서 부두를 중심으로 한 병참 물자의 수송과 군대 이송 등은 매우 중요한 기능이었다. 그리고 그 기능의 중심에 있었던 하야리아 부대는 군수품의 보급과 관련된 기지 사령부 기능과 군 지휘부 및 유엔 한국 위원단 등 주요 외교 기관 요인을 위한 숙소 제공, 통신과 우편물 집적, 후방 기지 병원 등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의 ‘캠프 하야리아’라는 부대 명칭도 이 시기에 붙여졌다고 한다. 부대 근무자와 군속 및 관련 민간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미 극동사령부 산하의 부산기지사령부를 7월 3일 서면 경마장 부지에 설치하면서 당시 초대 사령관의 고향인 미 플로리다 주 하야리아 시(市)에서 부대 명칭을 따왔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하야리아 부대는 이방인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산과의 어색한 관계 맺기에 나서게 되기도 하였다.
하야리아 부대를 비롯하여 오늘날에도 한반도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부대는 당시 남북한의 긴장 관계 속에서 군사적 안정을 이루려는 목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방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도 하였다. 특히 부산의 하야리아 부대는 당시 서면과 남포동 일대 등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도 상당하였다. 이제 그 이야기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자.
당시 하야리아 부대는 주로 대전 이남의 미군 부대에 필요한 군수품 보급을 책임지고 있었다고 한다. 부두를 통해 들어오는 필수품은 55 보급창[523병참 중대]에 보관했다가 미군 부대로 전달되곤 하였다. 한국해양대학교 산학협력단 구술 자료 보고서에 수록된 손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때 이곳으로 들어오는 오렌지 하나는 15원으로, 태화 극장 영화 한 편 관람료와 맞먹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부대를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 중에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빼돌려서 부대 앞 가게에서 소화하거나, 국제 시장 등으로 들고나가 파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갈치 시장에서 거래되던 미군 군복이나 야전잠바들도 군속이나 노무자들이 부대에서 몰래 들고나가 판 것들이었다.
당시 하야리아 부대 내에는 관사나 군인 숙소 외에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교회, 학교, 병원, 영화관, 체육관 등과 세탁소, 차 정비, 빵 공장 등의 다양한 부속 시설들이 많았고, 거기서 일하는 한국인 군속과 노무자들도 많았다. 부대 내의 미군 물자들은 대부분 이들을 통해 외부로 흘러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하야리아 부대에서 카투사로 3년간 복무하였던 탁현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빼돌리는 물품 중에는 소위 황금 마차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명칭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에서 건너온 수송품들은 당시 열악한 국내 경제 사정에 비해 ‘황금’과 같은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시장에 암암리에 흘러들어가 거래되었다는 것이다. 황금 마차 안의 가장 싼 물건은 화장지였고 가장 비싼 물건은 텔레비전이었다고 한다.
한편 하야리아 부대의 여러 출입구 중 특히 G3는 ‘레이버 게이트(labor gate)’라고 불렸는데, 이곳을 통해 부대 안 미군과 부대 밖 한국 사람들의 일상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G3 밖에는 양복점, 세탁소, 미용실, 클럽 등이 있었고, 이 주변에는 직·간접적으로 하야리아 부대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대에 직접 취직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부대 주변에서 미군을 위한 양복점, 세탁소, 미장원, 선물 가게, 식당 등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초량의 텍사스가 주로 술집과 유흥가 위주였다면, 이 G3 주변은 상가 등의 근린 생활 시설이 밀집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부산 시민 공원의 대지 정형화를 위해서 철거한 G3 인근 돌출 마을에는 당시 방세를 받아 생활비에 보태는 집들이 많았는데, 이 역시 부대 바로 옆 동네라는 특성을 잘 살린 수입원이었다. 하야리아 부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 중에는 한국 여성들과 동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따라서 그들이 살 수 있는 생활 공간이 필요했다. 방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방세를 받기 위하여 집을 수리하여 방을 만들고 내부를 늘린 집들이 최근까지만 해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방세로 생활비에 보태고 자녀 학자금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부전동으로 이사 온 후 45년 정도 세를 주면서 자식을 키워낸 김순옥도 이 중의 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야리아 부대에서 29년간 부대 군속으로 근무하면서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기증한 오택근의 기증 유물에는 각종 감사장, 근속 상장, 기념 배지 등과 더불어 기술 훈련 교육자 이수 과정 수료증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 부대 내에서 상당한 기술 교육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후 반듯한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에 하야리아 부대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부대 안의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거들며 밥벌이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활 공간을 쪼개어 세를 놓기도 하며, 부대 내의 앞선 장비와 기술을 배워 민간 업체에 취직을 하기도 하는 등 미군 부대라는 이방인의 등에 기대어 나름대로 삶의 방편을 마련해 나가기도 한 것이었다.
이처럼 하야리아 부대를 중심으로 미군과 민간인들의 상당한 교류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종종 위험한 일들도 많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부대 안팎에서는 성폭력과 성매매가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6·25 전쟁 이후에도 미군이 계속 주둔하면서 부대 내부를 간간이 민간에 개방하기도 하면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던 옛 하야리아 부대는 이제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지만, 어려운 피난살이에서 힘껏 세월과 부대끼고 미군 부대라는 이방인의 영역에 기대어 살았던 우리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는 부산의 한 역사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부지 반환과 주한 미군 반환 공여 구역]
옛 하야리아 부대가 처음 주둔할 때만 하더라도 이 주변은 광복동이나 남포동 등의 원도심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곳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시내 곳곳으로 도로망이 연결되고, 많은 생산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발전해 나갔다. 반면 하야리아 부대 주변 지역의 낙후성은 상대적으로 매우 심각한 도시 문제로 대두되었다. 군부대 인근 지역이라 오랜 기간 「군사 기지 보호법」으로 인해 개발이 묶이고 일체의 건축 행위가 제한되는 바람에 슬럼화가 지속되면서 도심 속 오지처럼 낙후된 지역으로 남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기형적 공간 구조와 불균형적인 도심 발전에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미군 부대의 철수와 공여지의 반환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1995년부터 하야리아 터를 되찾기 위해 지역의 시민 단체들이 모여 ‘부산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고, 하야리아 부대 주둔지 반환 문제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통상 군부대의 입지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위치하게 되지만 하야리아 부대의 경우, 일제 강점기 경마장으로 시작된 군용지가 그대로 미군 주둔지로 연결된 채, 도시의 성장과 팽창 과정에서 도시 공간의 중심에 놓이는 아주 특이한 사례가 형성된 것이었다. 부산시에서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미 협약과 한미 주둔군 지위 협정[SOFA] 지침서에 따라 하야리아 부대의 재배치와 시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다양한 대체 장소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2004년 10월의 LPP협정 개정으로 마침내 2006년 8월에 하야리아 부대의 폐쇄가 최종 결정되었다. 기존에 하야리아 부대가 담당하던 기능은 타 지역인 대구[워커헨리], 왜관[캐롤], 진해 등지로 분산 재배치되었고, 미군 부대 반환을 위해 17년간 지속되어 온 시민운동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무엇보다 큰 의미는 2010년 1월 27일 부산광역시가 미군으로부터 하야리아 부대의 관리권을 인수받게 됨으로써, 그동안 하야리아 부대를 반환받기 위해 시민 사회에서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추진해온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 것이었다.
부지 반환과 함께 주변 지역에 대한 밑그림도 새롭게 그려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방을 위하여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미합중국 군대에게 공여되거나, 공여되었던 구역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제정된 「주한 미군 공여 구역 주변 지역 등 지원 특별법」의 적용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법의 목적은 낙후된 공여 구역 주변 지역의 경제를 진흥시켜 지역 간의 균형 있는 발전과 주민의 복리 증진을 도모하는 것이다. 특별법의 적용으로 하야리아 부대 주변의 기반 시설에 대한 국비 지원이 있었다. 그리고 2005년 12월부터 건축 허가 제한 구역으로 묶인 부대 주변 40만 8000㎡를 반환 공여 구역과 함께 새롭게 정비하는 재정비 촉진 사업이 2008년 4월부터 시작되었다.
공원 정형화와 재정비 촉진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위 돌출 마을 300가구의 주민 이전과 오랜 역사의 성지초등학교, 부산진중학교의 이전 및 증설 계획으로 인한 주민들과의 갈등과 논란도 있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부산광역시는 부산 시민 공원 조성과 재정비 촉진 지구[뉴타운] 계획 등 대규모 도심 공간 개발을 추진하면서 프로젝트 매니저(PM) 등의 총괄 계획가를 선정하지 않아 전체적인 경관 관리 실패와 비효율성을 자초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부산 일보』, 2010. 1. 15].
무엇보다 주변 지역 교통 체계와 연계 동선, 상업 시설의 위치, 주변 건축물의 규모와 높이에 따른 공원의 일조 및 경관 시뮬레이션 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었다[『부산 일보』, 2009. 12. 4]. 향후 부산 시민 공원이 주변 재정비 촉진 사업과 한데 어우러져 제대로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인접한 부전역 복합 환승 센터, 부전 시장, 송상현 광장 등과의 연계 및 철도 시설 이전 부지, 동천 복원 사업 등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달갑지 않은 선물, 환경 오염]
그러나 부지 반환 협상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하야리아 부대 이전 부지의 토양 오염을 비롯한 환경 오염에 대한 우려와 그 정화 비용 문제로 많은 논란이 빚어졌다. 한미 양국은 두 차례에 걸쳐 하야리아 이전 부지에 대한 오염 조사를 실시하였지만 시민들이 충분히 납득할 만큼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다. 미군측은 자국 지침인 ‘KISE’ 규정에 따라 긴급을 요하는 오염 치유를 서둘러 마치고, 국방부가 국내 「토양 환경 기준법」에 따라 오염을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부산광역시와 국방부 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단이 ‘캠프 하야리아 지장물 철거 및 환경 오염 정화 사업 위·수탁 협약’을 체결하였다. 국방부가 주관해 지장물 철거 및 토양 오염 정화 작업을 한 뒤 부지를 매각할 경우, 하야리아 부대 이전 부지의 시민 개방과 시민 공원 조성 등을 통한 조기 활용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부산광역시가 이를 위탁받아 시행하기로 한 것이었다.[『부산 일보』, 2010. 4. 5].
시민 사회는 즉각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전 부지의 환경 오염에 대한 의구심 해소를 위하여 오염 실태에 대한 투명한 공개와 민간 합동의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넘쳐 나왔다. 그러나 이의 신청은 기각되었고, 급기야 부산환경운동연합 명의로 대정부 상대 소송이 제기되기도 하였다[『부산 일보』, 2010. 5. 28]. 대법원의 춘천 미군 부대 캠프 페이지에 대한 환경 오염 조사 결과 정보 공개 결정 사례에 따라 하야리아 부대 이전 부지 환경 오염 조사에 대한 즉각적인 자료 공개를 주장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부지 내 토양 321곳에서 952개 시료를 채취 조사한 결과, 약 20%에 해당하는 총 191개 시료에서 벤조피렌이 미국 내 기준치의 4배 이상 검출되었다는 한미 양국 공동 오염 조사 결과가 일부 공개되기도 하였다[『부산 일보』, 2010. 7. 2]. 국방부는 전체 부지에 대한 정화 비용은 실시 설계 결과가 나와야 알 수 있고, 전체의 약 0.26%에 해당하는 부분에 유류와 중금속 오염이 남아 있으며 정화 비용은 약 3억 원 정도로 추산하였다. 그러나 하야리아 부대 이전 부지의 반환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환경 오염 논란과 그 치유 비용을 사용자인 미군측이 아니라 우리 측이 부담하기로 한 것은 향후 전국 40여 개 미군 기지 반환에 나쁜 선례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처 해결되지 못한 환경 오염 문제는 한창 공사가 마무리 시점에 접어 든 2013년 10월 현재까지도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부산 시민 공원 발암 물질 검출 의혹이 2013년 7월초부터 시작된 후, 급기야 8월 29일에는 부산시민공원조성 범시민운동본부가 1급 발암 물질 검출 의혹을 받고 있는 부산 시민 공원의 공사 금지를 위한 가처분을 신청을 부산지방법원에 제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급 발암 물질인 벤조피렌에 심각하게 오염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공사가 강행된다면, 앞으로 이를 이용하게 될 여성과 임산부, 어린이, 노약자 등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연합 뉴스』, 2013. 8. 28].
[하야리아 부대 어떤 시설들이 남겨졌나?]
한편 부산광역시는 2006년 폐쇄가 결정된 하야리아 부대 부지를 시민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부산을 대표할만한 세계적인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국제 공모전 결과, ‘흐름과 쌓임의 충적지’를 의미하는 얼루비움(Alluvium)의 개념을 제시한 미국의 조경 건축가 제임스 코너(James Corner)의 안이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이 계획안을 토대로 실시 설계를 진행하였고, 드디어 2011년 8월 부산 시민 공원 조성 기공식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사업 초기부터 공원의 컨셉에 대한 시민 공감대가 약했고, 공원 조성의 방향에 있어서도 역사·문화 공원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시민 공감대 형성을 위하여 설문 조사, 공청회, 부지 내 각종 행사 개최 등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었으며, 이를 통해 기존의 생태 공원 개념에서 문화와 역사의 테마를 강화하는 공원으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부산디자인진흥원에서 작업한 자체 BI 등을 공원 내·외부 및 주변 출입구, 안내판 등에 적용하는 등 공공 디자인 차원에서도 접근하여 공원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부산 시민 공원은 기억, 문화 즐거움, 자연 참여 등 5개의 숲길과 부전천, 전포천, 그리고 이들 하천을 중심으로 조성된 북쪽의 파크프론트, 공원 입구부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게 되는 남측의 파크프론트, 7개의 건물군 등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공원 조성과 더불어 전면 철거 이전 상태에 대한 기록화 작업을 통하여 향후에 역사성을 반영하고, 보존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에 대한 각계각층의 요구가 있었다. 이로 인해 공원 부지 인근의 시·공간적 특징 및 스토리텔링 등에 대한 다양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이루어졌고, 몇몇 주요 건물들은 남겨서 활용하게 되었다.
이전 하야리아 부대 시절의 마권 발매소와 학교, 하사관 숙소, 퀸셋 막사, 장교 관사, 사령관 관사 등을 남겨 역사성과 장소성을 살린 7개의 건물군은 역사관과 체험 공간, 문화 센터 및 카페테리아 등을 통하여 방문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두 개의 기존 시설에 대한 재활용 계획이 눈에 띈다. 우선, 하야리아 부대의 장교 클럽으로 사용된 옛 마권 발매소는 하야리아 부대 이전 부지의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부산 시민 공원 역사 문화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일제 강점기 경마장 시절의 자료를 비롯, 이후 일본군 임시 군속 관련 자료, 일본 방위성 자료, 그리고 미군 주둔기 미국립문서관리청 소장 자료는 물론 부지 반환 및 공원 조성기에 만들어진 다양한 결과물 등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부대 내 기존의 학교 시설은 부산국제건축문화제가 주관한 현상 설계 공모를 통하여 도시 역사와 생태, 교육이 어우러진 복합 시설로 보존, 재활용되고 있다. 우헌건축사 사무소[대표 이한식]가 제출한 당선작은 기존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존중하면서 옛것과 새것의 대비와 조화를 통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기존 학교의 공간적 질서를 최대한 지켜내면서 새로운 문화 공간 기능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이른바 보존적 개발을 기치로 삼았다. 그 규모는 지상 2층에 연면적은 2,645.35㎡에 달한다. 이곳에는 도시 역사 전시실과 도시 생태 전시실, 문헌 조사 자료실, 회의 및 강의실, 다목적 세미나실과 카페테리아, 다양한 옥외 휴게 공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 부산 시민 공원은 부지 반환에서부터 시작하여 공원이 조성되기 전부터 다양한 시민 참여가 이루어졌다. 특히 공원 내 나무를 심기 위한 ‘시민 헌수(獻樹)운동’이 큰 호응을 얻었으며,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공원 조성과 더불어 명품 공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원의 관리·운영에 대해서도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012년 11월 19일자 『부산 일보』 기사를 보면, 부산광역시에서 부산 시민 공원의 효율적 운영 방안을 위한 라운드 테이블 회의를 열고 이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를 한 바 있다.
도시 공간에 대한 기존의 관 주도의 행정적 패러다임에서 시민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며, 이러한 차원에서 부산 시민 공원의 관리 운영 조직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반면, 시민운동연대 측에서는 공원 운영 프로그램은 민간에서 맡고, 시설 관리와 행정은 공공 기관에서 맡는 쪽으로 민관이 결합한 형태가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문화 단체 측에서는 민관이 주도하는 별도 법인을 만들 경우, ‘영화의 전당’처럼 별도 법인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의들은 2013년 9월 25일 제정된 「부산 시민 공원 관리·운영 조례」에 반영되었고, 따라서 공원 조성 이후에도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조례의 주안점은 공원 관리 운영의 주체와 시민 참여, 활성화 방안 등이었으며, 부산시민공원위원회를 설치하고 시민 공원의 관리 운영에 관한 사항, 시민 공원의 활성화를 위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에 관한 사항, 시민 및 기관·단체의 참여를 위한 활동 지원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민 공원 이용 활성화를 위하여 시민 공원의 특성을 살린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여 적극적인 시민 참여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시민 공원 위원회의 구성과 역할, 시민 공원 또는 시민 공원 시설의 효율적 관리 운영을 위해 제3자에게 위탁하기로 한 것 등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고민과 공감대 형성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옛 하야리아 부대 터, 부산의 오래된 미래를 담은 곳]
도심 한복판에 47만 749㎡ 규모의 평지 공원으로 부산 시민을 위한 공간적, 정서적 허파 역할을 하게 될 부산 시민 공원은 그동안 일제 강점기의 침략과 수탈의 장소에서, 그리고 미군 부대라는 이방인의 영역에서 이제는 당당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지역의 새로운 성장 거점이 되고 있다. 그 동안 이곳에서, 그리고 이곳에 기대어 힘겨운 삶을 이어 온 사람들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은 풍성한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되어 지역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그토록 오랜 기간 좌절과 실패의 땅으로 남겨졌던 옛 하야리아 부대 터가 이제는 지역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시민들에게 돌아와 함께 눈부신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옛 하야리아 부대 터에 새로 들어서는 부산 시민 공원은 이제 단순한 공간적 경계만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도시 부산이 감내하고 겪어내야 했던 질곡의 시공간을 고스란히 녹여 만든 지역성의 텃밭이며, 창조 도시 부산이 만들어갈 움트는 과거이자 오래된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