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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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成贊 |
영어음역 | Seo Seongcha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항동 2-247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영준 |
[정의]
부산 출신의 서양화가.
[활동 사항]
서성찬(徐成贊)[1906~1958]은 1906년 부산광역시 영도구에서 태어났다. 상업실수학교를 나와 큰 양복점에서 점원으로 일하였다. 당시에 모은 돈으로 일본의 가와바다양화연구소에 들어가 후지다쯔구지에게 3년 동안 수학하였다.
1935년에 김남배(金南倍)·서태문 그리고 일본 작가들과 함께 경남미술회를 만들었으며, 이는 부산 미술계에서 첫 동인 활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0년에는 양달석(梁澾錫)·김남배·우신출(禹新出) 등과 함께 춘광회를 결성하여 3년 연속 전시를 하였다. 같은 해에 부산 미술전이라는 공모전을 통해 서태문·허민(許珉)·현용건 등과 함께 지역 화단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48년에는 동광초등학교에서 열린 부산 미술 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1949년에는 부산시립공회당에서 경남미술연구회라는 미술 동인을 만들었다. 경남미술연구회는 1950년 제2회 전시부터 혁토사로 개명하여 작품을 출품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혁토사전은 사진이 미술 전람회에 수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 부산의 첫 서양화 동인회인 토벽을 만들어 르네상스 다방에서 김영교·김윤민(金潤玟)·김종식(金種植)·임호(林湖)·김경(金耕)과 함께 제1회 토벽 동인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무렵 서성찬은 추상 미술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후 같은 해에 휘가로 다방에서 제2회 토벽 동인회를, 1954년에 실로암 다방에서 제3회 토벽 동인회를 개최하고 1955년 12월 14일에는 부산 미국 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58년 10월 24일에 임호와 정원일[당시 부산사범대학교 2년생], 서성찬 셋이서 함께 귀가하다 영도 다리 위에서 심장 마비를 일으켜 이승을 떠났다. 서성찬은 그의 행적을 담은 기록과 알려진 사실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죽음도 부산 화단에 여러 가지 의문을 남겼다.
서성찬의 작품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작가의 뛰어난 회화적 감수성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자유로운 화면 구성, 독특한 색채 감각, 우연한 선묘로 구성된 작가의 작품은 당시 양(羊)을 주로 그렸던 김남배와 함께 부산 화단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서성찬은 경남미술연구회, 춘광회 등의 창립 멤버였으며 일제 강점기 말 이후 부산 지역 화단의 형성에 있어 커다란 공로를 쌓은 작가라 할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작품으로는 「가면이 있는 정물」[73×60㎝ 캔버스에 유화, 1956년], 「한촌」[91×65㎝ 캔버스에 유화, 1957]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