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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다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631
한자 密茶苑
영어의미역 Mildawon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지명/시설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로 68[광복동 2가 38-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인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다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8월 1일 - 정운삼 자살
최초 설립지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 38-2

[정의]

6·25 전쟁기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던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소재의 다방.

[개설]

6·25 전쟁기 1·4 후퇴를 전후한 피난 시절 부산시 광복동에 있었던 다방 밀다원을 비롯하여 그 주변의 금강 다방, 스타, 르네상스, 야자수 등은 문인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의 일종의 아지트로,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허무를 술로 달래던 한국 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공간이다.

당시 부산의 많은 다방 중에서도 광복동의 밀다원김동리(金東里)의 소설 『밀다원 시대』의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대표적 공간이 될 만하다. 실제로 다방 밀다원에는 김동리를 비롯한, 황순원(黃順元), 조연현(趙演鉉), 김말봉(金末峰), 이한직(李漢稷), 이봉구(李鳳九), 박기원, 김환기, 남관(南寬), 김소운(金素雲), 조병화(趙炳華), 박인환(朴寅煥) 등이 상주하였다. 문학 평론가 김병익(金炳翼)은 당시 밀다원에서의 문인들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묘사하였다.

“부산 문단의 중심처인 이 다방은 당시 갈 곳 없는 문인들의 안식처였고, 찾기 힘든 동료들의 연락처였으며, 일할 곳 없는 작가들의 사무실이었으며, 심심찮게 시화전도 열리는 전시장이기도 했다. 이들은 여기서 원고를 썼고, 약간의 고료가 생기면 차나 가락국수를 시켜 먹고, 혹은 선창가의 대폿집에 들어가 ‘피란살이의 시름과 허탈·자학·울분’을 동동주에 띄우며 ‘예술 대회[유행가 부르기]’를 열기도 했다”

특히 밀다원은 1951년 8월 1일 정운삼(鄭雲三)의 자살로 당대 문인들에게 팽배했던 염세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애인에게서 받은 실연의 상처로 자살을 택한 것이라 하지만, 죽음을 찬미한 당대 문인들의 극단적인 시대 인식도 자살 결행의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정운삼밀다원 구석 의자에서 졸듯이 숨을 거두었는데, 정운삼이 앉아있던 탁자에는 「고별」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글이 놓여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페노발비탈 60알과 새코사나둠 다섯 알을 한꺼번에 먹었다. 나는 진실로 오래간만에 의식의 투명을 얻었다. 나는 지금 편안하다. 나는 지금 출렁거리는 바다 저편에서 나를 향해 웃음을 보내는 나의 애인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지금 나의 앞에는 나의 친애하는 벗들이 거의 다 모여 있음을 본다. 나는 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는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더 나의 생애를 연장시키고 싶지는 않다. 잘 있거라, 그리운 사람들”

[구성]

밀다원이 있었던 위치는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가 38-2번지로 로얄 호텔 건너편, 남포동으로 건너가는 골목이다. 당시 밀다원의 주변에 대해 소설가 이호철은 “앞에 큰 공터가 있었고, 덩다란[덩그렇게 커다란] 2층 건물이며, 다방이라기보다는 세무서 같은 공공건물 같았다”고 하였다. 2층 건물 중 1층은 전국문화단체총연합[약칭 문총] 사무실이 있었고, 2층이 밀다원이었다.

[변천]

정운삼의 자살로 인해 밀다원이 며칠간 휴업을 했다 영업을 재개했다고도 하고, 폐업을 했다고도 하는데, 이 사건의 여파로 결국 밀다원과 아래의 전국문화단체총연합 사무실이 문을 닫고 문인들이 다른 다방으로 쫓겨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현황]

1980~1990년대까지 왕비 다방이라는 상호로 다방의 업종을 유지하였으나, 2011년 현재 밀다원 터에는 의류 대리점[HEAD]과, 음식점[통마루]이 위치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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