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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싸운 마도로스의 명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02
한자 -明暗
영어의미역 The light and shade of a seaman who has fought against the sea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유식

[닻을 올리다]

지역 사회의 정체성은 주민과 자연, 그리고 문화의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이며, 양자는 표리의 관계에 있다. 주민이 없는 지역 사회가 존재할 수 없듯이 지역 문화 없는 지역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부산’이라는 지역적 정체성을 가장 뚜렷이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명백한데, 그것은 ‘바다’이다. 부산의 역사는 곧 부산 바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뒤돌아볼 때, 부산의 사회적 상징성은 언제나 바다를 통해 정립되어 이어져 왔다. 구한말 개화와 개항의 전초 기지로서, 한국 전쟁기에는 국난의 마지막 보루로서 부산은 혼란의 세월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산 문화와 부산 정신의 뿌리가 바다를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산 사람들에게 바다는 어떠한 모습으로 인식되고 존재해 왔는가? 특히 바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생활 공간으로서의 바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생활 공간은 척박한 생존의 터전이다. 부산은 그 지리적 여건상 바다를 생업의 수단으로 하며 살아왔다. 대표적으로 자갈치 시장은 대형 수산물 유통 시장으로서의 현재적 기능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남겨진 우리 민족의 생활 공간으로 더욱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

생활 공간으로서 삶의 지표가 되는 부산 바다. 그 바다를 표상으로 한 일련의 생활 공간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 바다를 건너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일 것이다. 거친 파도를 가로지르며 고기를 낚고, 승객이나 화물을 싣고 나르는 사람들. 몇 달을 망망대해에서 보내며 지상의 사람을 그리워해야 하는 사람들.

해기사! 과거 그들은 뱃사람으로 통칭되었다. 지금은 그들을 항해사[officer]라고 부른다.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마도로스[matroos]를 꿈꾼 적이 있을 것이다. 마도로스는 외항선 선원을 뜻하는 네덜란드어인데, 아메리카 무역선이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올 무렵 일본인이 발음하기 쉽게 마도로스로 변형했다고 한다.

우리들에게 그들은 하얀 제복에 금테 선명한 캡틴 모자, 그리고 담배통이 크고 뭉툭하며 대가 작달막한 서양식 꼬부랑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으로 상징된다. 그들은 갑판에 서서 해질녘 바다를 지긋이 바라보며 삶의 여운을 만끽하는 동시에, 5대양 6대주를 큰 배를 타고 누비면서 다양한 인종들과 문화를 체험하는 자유인이다. 이런 짐작은 우리의 다양한 문화적 체험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들의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 바다 사나이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수십 년 동안 해풍을 맞았고, 그 속에서 부유(浮游)하였으며,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익숙했다. 그들이 삶의 터전인 바다를 토대로 일구어 온 다양한 삶의 양태를 따라가면서 해기사들의 ‘빛과 어둠’을 주제로 이야기의 닻을 올려 보자.

[빈 선장, 첫 승선에서 1등 항해사까지]

빈병선씨를 만난 것은 올해 2월, 새봄을 알리는 절기인 우수(雨水)를 갓 넘긴 어느 날이었다. 그는 1968년에 경상남도 남해 상주에서 태어났다. 바닷가 마을에 살았지만 바다에 큰 뜻이 없었던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로의 진학이 좌절되면서 바다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선택한 학교가 바로 남해수산고등학교였던 것이다. 수산고는 공립이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등록금이 사립의 절반이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부모님, 3남 2녀 중 차남이라는 가계를 고려하여 부득불 수산고 진학을 결심한 것이다.

당시 수산고는 4개의 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어업과와 수산과, 증식과, 기관과가 그것이었는데 빈병선씨는 어업과를 선택했다. 수산고를 졸업하면 어선 5급 면허를 자동으로 취득하게 된다. 빈 선장은 어선보다 상선을 타기로 결심하고 목포해양전문대에 진학하려 하였으나, 고교 진학에 이어 두 번째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래서 또 부득불 고교 졸업 후 동네 삼촌의 소개를 받아 울산 연안을 운행하던 소형 유조선을 탔다. 이것이 빈 선장의 첫 항해였다.

항해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면허가 있어야 한다. 일종의 운전면허 같은 거다. 그 면허를 해기사 면허라고 한다. 해기사는 선박의 운항, 선박 기관의 운전, 선박 통신 업무 등을 수행할 수 있는 면허를 받은 자로 정의할 수 있다. 해기사 면허에는 항해사 이외에도 기관사, 통신사, 운항사, 소형 선박 조종사가 있다. 항해사 자격의 등급은 1급에서 6급까지 있으며, 승선 경력이나 학력에 따라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다르고 자격의 등급에 따라 선박의 크기나 수행할 수 있는 직책이 다르게 부여된다. 하는 일과 직책에 따라 선박의 최고 책임자인 선장, 1등 항해사, 2등 항해사, 3등 항해사가 있다. 면허 등급에 따라 승선할 수 있는 선박의 크기와 하는 일이 달라지며 시험 과목도 다르다고 한다.

빈 선장처럼 해사 고등학교나 수산 관련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각각 상선 혹은 어선 분야의 항해사 4급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데, 빈 선장은 실습 항해사로서 1년 정도 근무하고 4급 상선 항해사 시험에 응시하여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90년대 초반에 일본 선박 회사에서 근무하였다. 이 선박은 원양 구역에만 종사하였는데, 일본인과 한국인이 함께 근무하는 형태였다.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배운 일본어가 여기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여기서 3등 항해사로 1년 정도 근무했는데, 이 기간에 빈 선장은 배에 대한 전문 지식을 생애 가운데 가장 많이 습득하고 체험했다고 한다.

빈 선장은 일본 소유의 선박 회사를 거쳐 냉동 운반선에 승선하였다. 여기서는 2등 항해사로 근무하였다. 냉동 운반선은 남미의 파나마 등지에 과일이나 냉동 육류 등을 싣고 선주사의 지시에 따라 이동하는 형태였다. 여기서 11개월을 승선하였다. 냉동 운반선은 기존에 빈 선장이 탔던 유조선이나 다른 선박에 비해 스트레스가 거의 없고, 술에 대한 제재도 없었다. 단지 급료가 적다는 것이 흠이었다. 업무의 경중과 수입은 역시 정비례 관계인가 보다.

빈 선장이 네 번째로 이동한 곳은 다시 유조선이었다. 미국 선주사 MOC였는데, 미국을 본거지로 해서 중남미의 콜롬비아나 멕시코 등지에서 원유를 싣고 미국 동부로 순환하는 회사였다. MOC는 최고 급료를 지급하였다. 이 회사는 목포해양대나 한국해양대 졸업 후 승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입사하는 회사였으나, 빈 선장은 이전의 많은 승선 경험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빈 선장은 3등 항해사로 근무를 시작하여 2등 항해사를 거쳐 1등 항해사 자격까지 취득하였다.

MOC에서 10년 동안 근무하였는데, 이후 MOC는 영국 국적 OSG로 넘어갔다. 영국 선박 회사가 관리하면서 선원을 교체하고, 기존 직책도 하향 정리하는 구조 조정을 단행하였다. 따라서 선장으로 진급할 무렵이던 빈 선장 입장에서는 허탈한 심정일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는 비전이 없다’고 생각해서 2005년 싱가포르에 관리사를 둔 선박 회사에 취직하였다. 이곳에서 빈 선장은 30만 톤급의 초대형 유조선에서 1등 항해사로 근무하였다. OSG에서 근무한 경험은 자타 공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선원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그런 시선을 받는 빈 선장은 자부심을 느꼈다. 빈 선장은 해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 기간에 직간접으로 얻었고, 이후 선장이 되어서도 이때의 경험은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고 한다.

[캡틴이 되다]

“선장은 선박의 최고 책임자로 법 규정에 따라 선박과 인명의 안전을 책임지고 선박 내 모든 활동에 대한 지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선장은 배가 출항하기 전에 항해 목적지, 기후, 거리 등을 확인하고, 항해 시에는 해도, 나침반, 레이더, 선박 자동 식별 장치[AIS] 및 기타 항해 기기를 사용하여 선박의 속도와 항로를 결정한다.”

이것은 직업 탐구에서 밝힌 선장의 정확한 규정이다. 항해사의 면허는 1급이 최고이며, 직책은 선장이 최고 직위이다. 선박이 해양[바다 혹은 강, 호수 등]을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역할이 필요한데, 이 중 항해사는 항로 설정, 선박 위치 측정, 선박 내 인사 관리, 질서 유지 등 선박 운항에 관한 전반적인 책임을 맡는 사람이다. 이런 항해사의 최고 책임자가 선장이고, 승선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선장은 동경의 대상이 된다.

선장의 말은 선상에선 곧 법이다. 그 누구도 선장의 정당한 오더[명령]에 태클을 걸 수 없고 이행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박의 위계 질서는 상당히 엄격하다. 선박 내 식당이나 선교에 있는 선장 의자에는 누구도 앉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선장의 의자에 앉지 않는다는 측면보다는 선장의 권위와 지위를 인정해 준다는 심리적인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선장은 배의 모든 것을 총괄하여 지휘 감독해야 하므로 선원보다 더 많이 책을 들여다보아야 하고 신경을 늘 곤두세워야 한다. 위기 상황 때 홀로 내리는 결단이 선박과 승무원들의 생명, 나아가 소속된 해운 회사의 운명까지 바꿀 수 있으므로 누구에게 기댈 수도 없는 형편이다. 요컨대 외롭고 고독한 자리이며, 전 선원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엄중한 자리이다. 선장은 무엇보다 바다를 좋아해야 한다. 그리고 엄격하게 통제되는 선상 생활을 해야 하고, 장기간 가족과 떨어져 생활해야 하는 어려움과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또한 장시간 좁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는 여러 사람을 통솔해야하기 때문에 원활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줄 아는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빈 선장은 2006년 수일해운 ‘타이탄’ 선박 회사에서 드디어 선장으로 승선하게 된다. 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20여 년이 흐른 때였다. 빈 선장은 해양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고졸 출신으로서는 상당히 빠른 나이에 선장이 되었다. 빈 선장도 일반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배의 사령관인 선장 직업을 ‘꿈의 실현’이라고 말한다. 빈 선장을 다시 만난 것은 3월의 첫날,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는 날이었다. 선장이 된 감회를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굉장히 규범적인 인간형이라 배 타는 일이 적성에 맞다 안 맞다 그런 거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또 내 삶이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고. 살면서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해 가며 살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선장이 되었을 때 그냥 원래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뿌듯하기야 하죠. 일 년에 2/3는 떨어져 지내는 집사람과 신경도 제대로 못 쓴 아이들에게 아버지로서 보여 줄 수 있는 ‘명찰 하나 받았다’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감개무량했습니다. 부모님 산소도 가고 친척들도 만나면서 먼저 인생의 봉우리에 오른 느낌이었습니다. 아무튼 내가 원래 재미없는 사람이라 이렇게밖에 설명을 못 하겠네요.”

[선장의 하루]

빈 선장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의 임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생활은 철두철미했다. 그가 밝힌 선장의 역할과 하루 일과는 무미건조한 삶 그 자체로 보일 정도로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직업인으로서의 성실함과 무게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선장이 진행하는 선원 교육은 프로그램 진행 일정에 따라 이루어진다. 안전에 대한 교육, 탱크 운항 실무 교육, 안전 설비 관련, 그리고 입항했을 때의 규정 등에 대해 교육한다. 매월 1회 이상 안전 교육을 수행한다. 이것은 선장과 선원들 간의 일종의 미팅이다. 이 미팅은 선원들의 어려움을 청취하고, 업무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고 등에 대해서 원인을 분석하는 자리로 활용된다. 미팅 후 논의된 내용들은 회사에 보고한다. 선장은 매일 정오에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내는데 이를 ‘데일리 리포트’라고 한다. 선주사와 관리사, 또 화물 주인에게 보고서를 보낸다.

선장의 기본 근무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이다. 오전 7~8시는 아침 식사 시간, 오후 12~1시는 점심 식사 시간, 그리고 오후 5시 30~6시 30분까지는 저녁 식사 시간이다. 오전 8시부터 점심시간 전까지는 선내를 순회하고 브릿지[선교]에서 메일 확인 회신 업무를 본다. 오후 6시 이후는 개인 시간이다. 운동을 하거나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기도 한다. 운동은 오후 7시 30분부터 오후 8시 30분까지 한 시간 정도 한다. 오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는 통상 선교에 올라가서 날씨, 통행로 등에 대해 최종 점검한다. 이후 선장은 야간 기록부를 작성하는데, 이 야간 기록부는 항해사가 사인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자정에 취침하여 오전 7시에 기상한다.

“선장은 보통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 30분까지 근무합니다. 오전에는 선내를 순회하고 메일 확인 회신 업무를 보고, 저녁 6시 이후에는 개인 시간을 갖습니다. 저녁 먹고 운동이나 빨래를 합니다. 야간 기록부를 작성하면 끝입니다. 단조롭지요? 다시 태어나면요? 우리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또 배를 타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그저 주어지는 것을 묵묵히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일에 조금 무심해도 된다면 이 일도 나쁘지 않습니다. 분명한 건 유유자적한 생활을 꿈꾼다면 어림없습니다.”

망망대해에서는 선박 밀도가 적어 별 문제가 없지만 특정 항구에 입항할 때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항구는 들어가는 수로가 제한되어 있어 배의 충돌 위험이 높다. 물론 해도를 가지고 입·출항 항로를 설정하지만, 입·출항 중에 타 선박과 조우 과정에서 충돌 사고 위험이 크다. 어선 사고의 80%는 선박 노후와 날씨 때문에 발생한다. 인적 과실에 따른 사고는 미미하다. 그러나 상선의 경우에는 충돌, 좌초 등 자연적인 현상에 따른 사고보다는 선원들의 전문 지식이나 실전 경험 부족에 따라 발생하는 인적 사고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가장 경계를 많이 해야 하는 두려운 존재는 안개이다. 빈 선장이 운행하는 배의 선체가 330m인데, 안개가 자욱하면 선수에서 선미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레이더가 있지만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 선박의 등화를 이용해 확인하기도 한다. 안개 상황에서 항해하는 것을 무중 항해라고 한다. 짙은 안개 상황에서는 육안으로 관측이 안 되고, 레이더로 관측하지만 시각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제해사기구[IMO] 에서 규정하는 해상 충돌 예방 규칙에 따라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만, 승선하고 있는 선원들의 자질이나 요건에 따라 사고가 발생한다. 이러한 사고를 휴먼 에러라고 한다.

“선장이 늘 좋은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사고를 염려하지 않고 배를 탔다면 모를까. 우리 일이 그게 안 되니까. 안개는 정말 눈뜬 장님 노릇이니까. 안개 상황에서 항해하는 것을 무중 항해라고 합니다. 레이더가 있기는 해도 우리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도 있으니 그것도 항상 걱정이고, 충돌이나 좌초 등도 걱정이고. 참, 사람도 걱정거립니다. 사람이 왜 걱정거리냐 하면, 인간이 땅을 오랫동안 안 밟으면 예민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승선하는 선원들 간에 마찰이 생기는 경우도 있어서 그것도 항상 신경을 써야 합니다.

탱크선 사고도 위험합니다. 배의 화물을 하역한 후에는 탱크가 빈 공간이 되지 않습니까? 이 상태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소 농도를 8% 미만이 되게 해야 하는데 가연성 물질과 열 관리를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폭발하니까요. 또 배를 씻을 때 해수로 하는데 해수에 압력을 가해 세정합니다. 세정 후 8% 산소 농도에서는 작업이 불가능하니까 산소 주입 후에 찌꺼기 제거 작업을 하는데, 산소가 주입이 안 될 경우 질식 사고의 위험도 있습니다.”

[최 선장, 국립 해양대를 졸업하고 승선하다]

또 한 명의 선장인 최대규 선장을 만난 때는 올 7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는 소서(小暑)를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최 선장은 1952년에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중·고교 시절에 서울로 유학 갔다가 해양 대학교에 입학했다. 해양 대학교는 국립 대학인데, 당시 학비가 없고 졸업 후 취업이나 보수 등을 고려해 선택하게 되었다. 1971년 입학 당시 해양 대학은 항해과와 기관과 등 2개 학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최 선장은 항해과를 나왔다. 항해과의 정원은 100명으로 학생은 모두 200명이었다. 전부 군사 훈련을 받았는데, 말하자면 NROTC였다. ROTC는 육군 장교가 되는 것으로 대학 3, 4학년 때 후보생 과정을 거친 뒤 졸업 후 소위로 임관된다면, NROTC는 해군 장교가 되는 것으로 훈련 과정은 육군의 ROTC와 유사하다. NROTC는 해양대, 제주대 등에 있다. 최 선장은 졸업하자마자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만 해도 복무 기간은 3년이 아니고 더 짧았다고 한다.

소위에서 중위로 복무하고 제대한 후 일반 상선에서 일정 기간의 근무를 마치면 자동으로 군 면제가 된다. 물론 이후에 계속 상선에 남아서 근무할 수 있으며, 당연히 월급도 지급된다. 해양대를 진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혜택을 염두에 둔다. 이런 고려는 각자의 가정 형편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 선장의 경우도 홀어머니 밑의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를 감안했다. 등록금이 없는 것은 물론, 졸업 후에는 당시 일반 직장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높은 임금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최 선장이 졸업하던 1975년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당시 최 선장의 급여가 26만 원 정도였음에 비해 일반 4년제 대졸자 임금은 4~6만 원 선이었다. 최고 임금이라고 해도 8만 원 정도였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차이이다.

이렇게 항해사의 임금이 높았던 이유는 선박 수 대비 해기사[항해사]의 절대 부족 현상을 들 수 있다. 배는 있는데 해기사가 없으면 배가 운항을 못하니 말이다. 다행히 외국 선주들의 국내 해기사들에 대한 인식이 좋아 유럽과 일본 선주들이 한국 선원들을 고용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물론 같은 회사의 외국인과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한국인 선원의 급료는 낮았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돈이 주는 기쁨이 큽니다. 나는 속된 인간이라 그런지 몰라도 주머니에 돈이 차니 친구도 만나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남자들은 왜 그렇지 않습니까. 70~80년대만 해도 대기업 다니는 친구가 우스워 보였어요. 그거 뭐 배 한 번 타면 별 거 아니더라구요. 워낙 우리 시절이 어려워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대학 동기들이 대부분 시골내기에 가난한 집 장남이 많았거든요. 승선한 후 월급 받아서 고향 내려가는 맛이 꽤 쏠쏠했죠. 지금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외국 선원과 비교하면 우리 돈이 가치가 없으니까, 같은 일하고 더 받을 수 있다는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그때 처음으로 경제적인 부강에 부수적인 혜택이 따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외국인 노동자 너무 무시하고 그러면 안 돼요.”

[아직도 나는 뱃사람]

최 선장의 첫 직장은 일본의 산꼬기선[三光汽船]이었다. 산꼬는 일본에 본사를 두었고, 송출 회사는 서울에 있었다. 지사는 부산에 있어서 선원들의 대부분은 부산 출신이었다. 선원들은 섬 출신들이 많았다. 최 선장은 산꼬에서 3등 항해사로 출발하여 선장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15년을 근무한 뒤 SK해운으로 자리를 옮겼고, 올해 2월에 정년퇴직을 했다. SK해운에서는 LNG선을 만들 때 4년 동안 선박 건조하는 감독을 했다. 이후 현대중공업에서 배를 인도받아 퇴직까지 배를 탔다. 최 선장은 현재 일종의 선원 교육 센터에서 계약직으로 트레이닝을 담당하고 있다.

최 선장은 가장 빨리 항해사가 되려면 상선 해기사의 대표적인 양성 기관인 해양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는 가장 빠르고 안전하며 전문적이다. 통상적으로 외국 항을 입·출항하는 큰 선박들의 일반적인 승진 경로는, 어선이나 상선의 어느 한 분야에서 승선 경력을 쌓아 3, 2, 1등 항해사를 거쳐 대형 선박의 선장이 되는 것인데, 여러 면에서 최 선장은 이 분야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계통에서는 우리가 군대로 치면 육사 출신이니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승진이나 면허나 인정받는 면에서 유리한 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전문 지식을 쌓고 훈련받는 시간이 길었으니까 좀 쳐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경로로 선장이 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항해사가 좋은 점요? 일단 보수가 육지에서 회사 다니는 사람보다는 평균적으로 소득이 높죠. 또한 입·출항 시 이외에 항해 시 자기 근무 시간 이외에는 별다르게 바쁜 업무도 없구요. 그래서 그 시간을 면허 준비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외항선을 타면 해외를 주로 나가니까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견문의 기회가 많다는 것도 장점이죠.

물론 어려운 점도 많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고통이 가장 큽니다. 또 항해하는 중에 스트레스, 외로움 등 정신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자각 진단이긴 하지만 우울증인가 해서 병원에 가 볼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말이 없어지고 움직이기도 싫고 그렇더라구요. 어느 정도 적응하면 견딜 만하지만, 일적으로는 자동화 설비 때문에 인원이 감축돼 한 사람이 맡은 일이 많이 늘어난 걸로 압니다. 무엇보다 뱃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진지하게 전직을 고려해야 하구요. 오랜 항해의 외로움과 갑갑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떠나면 돌아가고 싶고, 돌아가면 다시 떠나고 싶어집니다. 역마살이죠.”

[선원과 가족들의 생활]

뱃사람들은 ‘창살 없는 감옥’으로 배를 표현한다. 승선 기간 동안 한정된 공간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하는 생활의 고통을 간단하게 표현한 말일 것이다. 선박 생활에서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뱃사람들이 공통으로 입을 모아 동의하는 현실이다. 배를 타는 사람도 힘들지만, 가장을 수개월 동안 기다리며 사는 그들 가족들의 삶은 더 힘들다. 최대규 선장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힘든 것은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신혼 때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애들을 온전히 아내에게만 맡겨야 하니. 그리고 초창기에는 전화 요금도 워낙 비싸서, 요즘은 얼굴 보면서 통화하고 국제 전화 요금도 저렴하고 세상 많이 좋아졌죠. 그러나 요즘에는 결혼 적령기에 신부가 싫어하는 경향도 있고요. 우리 동료들 중에는 아내가 춤바람 난 경우도 꽤 많아요. 농담이 아니고 이 직업이 몇 달씩 떨어져 지내야 하니까.”

지금은 선원들의 급료가 일반 회사원들에 비해 높다고 할 수 없지만,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웬만한 선박 회사의 선원들은 자녀들의 학자금을 지원받는데, 요즘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지원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원들은 급료가 나오면 집으로 바로 송금한다. 통장으로 바로 들어가기 때문에 자신이 급료를 확인할 수도 없는 시스템이다. 배에서는 큰돈이 필요하지 않지만, 술도 먹고 담배도 필요하기 때문에 약간의 용돈이 필요하다. 용돈이 부족하면 급료를 가불해서 쓰기도 한다.

이렇게 집으로 입금된 돈은 선원의 아내가 관리하며 살림살이에 쓴다. 물론 총각 선원이라면 그의 부모에게 송금될 것이다. 선원의 아내들은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는 저금을 많이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50%까지는 되지 않아도 급료의 30% 정도는 저금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한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지만 선원들의 아내들도 자식 교육만큼은 꽤 신경을 쓴다. 자식들이 부모보다 나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멀리 떨어져 힘들게 배를 타는 남편을 생각해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야 한다는 마음이 무엇보다 앞선다. 애비 없는 자식으로 비칠까 봐 더 신경을 쓴다고 한다. 다른 부모가 그렇듯 학원도 보내고 과외도 시킨다.

떨어져 사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헤어지는 선원 부부들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떨어져 살기 때문에 위기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같이 살면 보였을지도 모르는 많은 단점들이, 어떤 상황에서 생각의 차이로 충돌할 경우 위기가 현실로 나타났겠지만, 떨어져 살다 보니 안쓰러운 마음에 더 그리워하고 더 격려해 주게 되더라는 것이다. 35년 뱃사람 경력 김권식 갑판장 아내의 말이다.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위기 같은 것은 없었어요. 같이 있었으면 아마 위기가 있었을 겁니다. 남편이 상당이 가정적이어서, 그래서 모든 것을 참고 견뎠어요. 떨어져 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요. 남편은 나를 먼저 생각하고 아이들을 다음으로 생각했어요. 오로지 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힘이 되었죠. 남편은 애들을 너무 좋아하고, 가족에 대한 애착이 아주 컸습니다. 힘든 부분이 있어도 그런 애잔함이 있으니까 묻어가고 또 묻어가고 했어요.”

선원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휴가 기간이다. 2~3개월의 휴가 기간 동안에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한다. 무엇보다 여행을 많이 간다. 휴가 기간이 확정되고 남편이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은 아내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육지의 아내는 휴가를 어떻게 보낼지 자세한 계획을 세운다. 어디로 여행을 가고, 아이들과 무엇을 하며 놀지, 무엇을 하며 무엇을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한다. 1976년에 학력도 경력도 없이 무작정 배를 타서 갑판장의 지위까지 올랐다가 최근 정년을 한 후 재취업해서 배를 타고 있는 이학재 갑판장의 말이다.

“육상에 있는 사람들은 두 달 휴가라 하면 깜짝 놀랍니다. 해상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런 휴가 매력 때문에 계속 일하는지 모릅니다. 휴가 때는 나름대로 바쁘게 보냅니다.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나요. 그동안 부모님 산소에도 가고, 노모가 있을 때는 찾아가야 하고, 지인들도 만나야 해서 나름대로 바쁩니다. 또 나이 든 사람들은 신체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병원을 찾습니다. 회사에서 의무적으로 정기 건강 검진을 받게 합니다. 특히 치아 치료가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 치과에 가장 먼저 들러요.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거죠. 기회를 놓친 이들 중에 치아 때문에 고생하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휴가 때 가장 먼저 치과를 찾습니다.”

[사랑의 메신저, 편지]

선원의 가족들은 절이나 교회에 나가 가장의 안전을 기원한다. 지금은 전화나 인터넷 통신을 통해 주로 연락을 주고받지만, 정보 통신 기술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는 대개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배가 특정한 항구에 잠시 들어가게 되면 위성 전화로 연락을 할 수 있었지만, 고작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전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선원들은 만족할 수 없었다고 했다.

가족들이 편지를 써서 국내에 있는 선박 회사에 먼저 보내면, 회사는 그 편지를 선원에게 전달해 준다. 망망대해를 운항하는 배에 직접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배가 특정 항구에 들어가면 회사 대리점에서 받고 보내는 방식이다. 보내는 편지는 일정한 간격으로 전달되는 경우도 있지만, 배의 입항 시기가 늦어져서 제때에 편지를 전달받지 못해 몇 통을 한꺼번에 받는 경우도 있다. 35년을 뱃사람으로 살고 은퇴를 앞두고 있는 김권식 갑판장과 그의 아내는 수십 통의 애절한 사연을 담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들에게 편지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고 가족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선상 생활의 안녕을 비는 사랑의 메신저였다.

“방 한쪽 구석에 걸려 있는 벽시계가 땡~ 자정을 치는군요. 지금은 취침 시간. 별반 다름없는 생활의 반복이지만 이 시간만은 언제나 다름없이 작은 의미를 안겨 줍니다. 조용한 평정 속에서 내 사랑하는 당신을 생각할 수 있고, 또 이렇게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항상 기다림을 배우며 당신의 작은 편지에 위안을 느끼며 하루를 당신을 향한 마음의 바람 속에서 세월을 맞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 여보, 어제는 당신이 부쳐 준 돈을 찾으러 어머니랑 함께 외환은행에 갔더랬어요. 현금 6만 8,400원. 당신 용돈도 없이 보내 준 돈으로 늦었지만 어머니 구두를 맞추고 남은 돈으로 옷이라도 해 입으시라고 하니,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해서 모아 보내 준 돈인데 옷을 해 입으시냐며 돈을 조금 더 보태어 컬러 TV를 사시겠대요. 어머니께서 말씀을 않으시지만 당신의 성의에 너무너무 고마우신가 봐요. [……] 오늘 같은 날, 당신의 글을 두 통이나 받은 날, 편지지에 묻어 온 당신 체취를 아직도 느낄 수 있는 날.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 쓰고 저절로 눈이 감길 때까지 당신 생각하며, 언제나 건강하세요. 1981. 8. 25. 당신의 선이가.”

“사랑하는 아내 선에게. 오늘은 12월 19일,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가려는구나. 몇 장 남지 않은 카렌다를 보면서, 덧없는 허무함을 느낀다. 1년이란 결코 짧지도 않은 시간 속에서 난 무엇을 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온 것인가. 뚜렷이 남을 만한 것도 없다. 너무나 무의미한 삶의 한 부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반복되는 시간은 현재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마냥 아쉬운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 속에 한껏 사랑하고 진정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산다면 아귀다툼 속의 백 년 삶보다 낫지 않느냐고 자위를 해 보지만, 그래도 서운한 맘은 어쩔 수 없다.

벌써 우리가 결혼한 지도 만 2년이 지났건만 우리의 결혼 생활은 고작 6개월이 조금 더 넘을 뿐. 선이의 마음도 무척이나 안타까우리라. 하지만 선아! 현재를 위해 사는 우리가 아니라는 마음가짐으로, 다가오는 밝은 날을 위하여 일순간 헤어져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서로를 위하며 아끼고 더욱더 깊은 사랑하는 맘을 키워 가야 되리라.

[……] 아마 선이 생일쯤 되어서 귀국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 생일 전에는 귀국해야지. 그래야 작년에 못 간 서면 칼국수 집에 갈 수 있을 텐데. 선아! 나는 어쩌면 좀 더 나은, 아니 좀 더 당신과 현창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다음엔 좀 더 당신을 사랑하며 위해 주리라는 맘으로 하루해를 보낸다. 그리고 이 편지는 크리스마스카드를 대신해서 보내는 것이다. 한 장의 카드에 몇 마디 글을 쓰겠니. 형식에 치우치기보다 이렇게 많은 글로 카드를 대신하는 것이 나으리란 마음으로. 선아! 다가오는 새해엔 좀 더 착한 며느리로, 착한 아내로, 현창이의 엄마로,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더욱더 짙어 가길 빌며 오늘은 안녕. 1981. 12. 19. 선이만을 사랑하는 남편 식이가.”

참으로 아름답고도 가슴 저미는 사연이다.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항해하는 배 안에서 아내가 보내온 눈물겨운 편지를 읽는 남편의 심정. 거센 파도 뚫고서 당장이라도 육지로 달려가고픈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랑의 편지가 있었기에 그의 고달픈 하루하루는 따뜻한 날들이 되었고, 어떤 거센 비바람과 파도도 견디어 나가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육지에 외롭게 남겨져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내는 남편의 온 마음이 담긴 편지가 있었기에 그 어떤 고달픔도 기꺼이 견디며 살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편지란 그런 것이다. 옆에 없지만, 그 애틋한 마음을 전해 받을 수 있으니 옆에 있는 것만큼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김 갑판장의 아내는 그 외로운 신혼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얼마나 힘든 시절을 보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아이들도 다 컸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고, 남편도 은퇴를 앞두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배를 타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에게]

요즘 뱃사람 중에는 유독 결혼하지 않은 노총각들이 많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시대 분위기도 있지만, 그보다는 결혼을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연애의 달콤함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 신혼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아이를 키우고 부모님을 모시는 외롭고 힘든 긴 시간을 홀로 보내야 하는 여성으로서는 배를 타는 직업이 썩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다.

김권식 갑판장은 2~3년 정도 짧은 기간이면 모를까 수십 년간 배를 타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만약 아들이나 젊은이들이 배를 타려고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권하지도 않을 것이라 한다. 이런 남편의 말에 그의 아내도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아마 다수의 선원들이 비슷한 생각을 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반듯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고, 경제가 침체되어 있는 지금으로서는 선원이라는 직업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이학재 갑판장은 말한다.

“현재 젊은 사람들은 배를 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견습 기간만 보내면 3,000만 원의 연봉이 보장됩니다. 다른 직장은 대학을 나와도 3,000만 원이 될까 말까 한데, 견습을 받고 나면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4~5년만 지나면 지방에 집을 마련할 수 있어요.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최근 젊은이들은 떨어져 살아야 하고, 인터넷도 못하고, 연애도 못해서 회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결혼 못 한 노총각 선원들이 많은 것에 대해 이학재 갑판장과 그의 아내는 옛날에 비해서 젊은이들의 눈높이가 달라진 것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떨어져 산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힘든 것을 싫어하고 편한 것만 좇는 젊은이들의 사고가 더 큰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직장이 안정적으로 보장되고, 자녀들의 학비도 보장되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면서 이학재 갑판장과 그의 아내는 아쉬운 마음을 드러낸다.

“젊은이들이 철이 없어서 그렇죠. 옛날에는 배 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어떤 배인지도 몰랐습니다. 떨어져 사는 갑다 하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받아들이고 살았어요. 그때는 1년 만에 집으로 휴가를 왔지만, 지금은 자주 들어옵니다. 선원 아내라는 자리는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40대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좋은 직장입니다. 일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몇 년 다니다가 퇴사해서 자영업하고,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지만, 배 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신랑감 1위는 해기사입니다. 해양대 졸업한 해기사. 정년이 보장되고, 월급도 많습니다. 요즘 통계가 그렇습니다. 대기업에 들어가도 40대 중반에 나와야 됩니다. 그때는 별로 할 것이 없어요. 그러나 선원은 정년이 보장되어 있고, 월급도 많고, 또 안정적이고. 근래에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 바뀌고 있습니다. 선원들에 대한 인식이 좋은 쪽으로 바뀌는 추세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선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망망대해를 떠다니며 넓은 세상을 가슴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닻을 감다]

“부산항 떠나서 사이공/ 우리들은 마도로스다/ 뱃길이 천리만리라/ 우리는 바다에 날고 기는 용사/ 불어라 비바람아 닥치어라 파도야/ 저 멀리 깜박이는 등대를 찾어/ 뱃머리를 돌려라 돌려.”

1939년에 백년설이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대중가요 「마도로스의 수기」의 가사다. ‘먹고 살기 위해’ 외항 선원을 선망하던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된 때문인지, 아니면 불운한 시대의 육지를 벗어나고 싶은 갈망의 표현이었는지 이후 많은 대중가요에서 선원의 생활이 묘사됐다. 그들의 모습은 용감하고, 남성미가 넘치고, 술을 좋아하고, 모험심이 강하다. 무엇보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이 조선 해양 계통의 일자리를 권장하는 패러다임이기도 했다. 산업의 역군이 어디 육지에만 필요했겠는가! 그러고 보면 이런 대중가요를 단순히 즐기고 넘어가기에는 굳건히 바다를 지킨 그들이 짠하게 느껴진다.

빈 선장과 최 선장, 그리고 김 갑판장과 이 갑판장은 유영하듯 항해를 즐기기보다 사고의 위험에 대처해야 했고, 또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속해 있는 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라 새로운 직장으로 옮겨 와 적응해야 했다. 기관실은 기관실대로 소음이나 열기로 인해 근무 환경이 열악한 경우도 있고, 무인화 선박 시스템의 확대로 근무 환경이 개선됨에 비해 인원 감축으로 인한 업무량의 증가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내가 희생하면 가족의 삶이 더 나아진다는 기대로 승선하지만, 막강한 현실 속에서 풍요로운 개인적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육지의 삶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바다도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지 않은가. 결국은 항해사든 기관사든 갑판장이든 조타수든 각자의 위치에서 제각각 맡은 책임을 다할 때 배는 올바른 방향을 향해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다행스러운 사실은 6개월 이상 승선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랜 항해는 오히려 이후 항해의 독이 될 뿐만 아니라, 여타의 사회 문제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회사마다 인지했기 때문이다.

바다는 영원성과 퇴행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인간은 머물 항구가 없고, 시간은 쉴 기슭이 없다는 말이 있다. 항구에서 항구로 이동할 수는 있지만, 닻을 내리기도 감기도 하지만 항해사는 항해를 쉽게 끝내지 않는다. 그것이 뱃사람, 마도로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빈 선장과 최 선장, 김 갑판장과 이 갑판장 역시 바다 사나이고 그것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생활 공간으로서의 바다가 언제나 기쁨을, 행복을 주는 곳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갈 때 편안하게 안길 안식처가 되는 곳임은 분명해 보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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