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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 항쟁 참가자들의 민주화 열정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18
한자 釜馬抗爭參加者-民主化熱情
영어의미역 The democratic zeal of the participants in the Busan-Masan riot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선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단체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고신대학교|부산공전
1979년 10월 15일 - 부산대학교 학생 시위 실패
1979년 10월 16일 - 부산대학교 학생 시위 발발, 민중 항쟁 촉발
1979년 10월 17~18일 - 부산 지역 민중 항쟁 확산
1979년 10월 18일 - 마산으로 민중 항쟁 확산
발생처 부산대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산 30지도보기
확산처 부산광역시 중구, 서구, 동구 일원

[1979년 10월 16일, 부산]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는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유신 반대 가두 시위가 벌어졌다. 저녁이 되면서 시위 양상은 폭력화되어 남포파출소를 비롯한 도심 일원의 파출소와 방송국과 언론사가 습격당했으며, 시위는 통금 시간인 자정을 넘기며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이는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유신 체제하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저항이었으며,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구호를 정면으로 내건 최고 수준의 항쟁이었다. 이튿날인 17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위의 폭력적 양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때문에 18일 0시를 기해 박정희 정권은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장갑차와 군대를 동원했고, 이에 부산의 시위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8일에 시위는 마산으로 이동하여 학생들과 시민들의 항쟁이 20일까지 계속되었다. 부산에서 시작되어 마산으로 확산된 이 항쟁은 뒤에 ‘부마 항쟁’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날 가두시위를 촉발한 것은 부산대학교 학생들이었다. 특히 부산대에서는 전날인 10월 15일에 한 차례 시위가 시도되었으나 무산된 바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음날인 16일에 재차 시위를 감행했고, 결국 대규모의 유신 반대 투쟁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왜 부산대 학생들은 서슬 시퍼런 독재 정권을 상대로 반대 투쟁에 떨쳐 일어났던 것일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한 차례의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게 만들었을까. 그 실마리는 당시 시위를 주도한 주역들의 한국 사회 인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위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종세[당시 부산대 수학과 3학년, 현재 민주시민교육원 부원장]은 유신 말기인 1970년대 후반 그들의 위기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학에 들어와서 가치관이 전도되는 혼란을 겪었어요. 대학 2학년 때죠. 제일 대표적인 게 이영희(李泳禧) 선생의 『전환 시대의 논리』[창작과 비평사, 1977], 『우상과 이성』[한길사, 1977], 『팔억인과의 대화』[창작과 비평사, 1977] 같은 책을 읽었는데, 특히 『전환 시대의 논리』는 그 당시에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거든요. 그 안에 나오는 중국 문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부분은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그거를 보면서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반공주의에 젖어 있었던가를 알게 된 거죠. ‘이건 아니야! 우리가 배웠던 것이 정말 잘못됐구나, 박정희 정권에 세뇌된 거였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러면서 ‘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거는 전부 거꾸로 봐야 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

이 무렵 유신 체제는 말기로 치달으며 각종 인권 유린과 부정부패 사건을 양산하고 있었고, 그 진상을 접한 양심적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로 하여금 의분에 떨게 했다. 이 가운데 가장 파장이 컸던 것은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78년 2월 21일 인천의 동일방직에서 발생한 것으로,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에 참석하려는 여공들에게 회사 측 직원들이 똥물을 뿌린 사건이었다. 10월 15일 부산대에 「민주 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시도했던 이진걸[당시 부산대 기계설계과 3학년]은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으로 인한 충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친구가 도시산업선교회 같은 데서 나온 각종 성명서와 같은 유인물을 많이 보여줬죠. 기억나는 게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 같은 이런 것들. 그야말로 무자비하고, 초보적인 인권조차 보장이 안 되는 아주 생생한 현실을 보면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 힘없는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얼마나 심각하게 유린되는가에 대해 굉장히 많이 충격을 받았어요.”

이 사건은 민주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대의원 선거라는 노동자의 기본권을 침해했을 뿐 아니라, 그 방법이 사람에게 인분을 투척하는, 전대미문의 무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는 동일방직 여공들의 울부짖음을 통해 이 일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던 것이다.

최소한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4월 17일의 ‘부산대 자율화 민주 투쟁 선언서 배포 사건’과 7월 3일 ‘부산대학교 페인팅 사건’은 이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4·19 혁명 기념일을 목전에 두고 부산대 교내에 뿌려진 ‘선언서’는 부산대 이성동, 정외영과 중부교회 전중근 등이 주도한 것으로, 유신 체제하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 및 인권 유린에 저항하는 학생 시위를 선언한 것이었다. 부산대 이상경 등이 감행한 ‘페인팅’ 사건은 부산대 운동장의 본부석에 ‘박정희 물러가라’, ‘유신 철폐하라’는 구호를 페인트로 써서 유신 반대를 외친 사건이었다. 민주화의 실현과 유신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연이어 발생한 두 사건은 이즈음 부산 지역 청년 학생들의 현실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판적 글 읽기, 학술 서클에서 이념 서클로]

이 무렵 부산에서는 양심적 지식인과 종교계가 진보적인 청년 학생층과 연계되면서 민주 세력의 대오가 형성되고 있었다. 중부교회와 도시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계, 천주교 부산교구 내 일부 신부와 제오세[JOC, 가톨릭노동청년회] 등의 가톨릭계, 장기려(張起呂)함석헌(咸錫憲)이 지원하는 부산 ‘씨알의 모임’, 1978년 설립된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약칭 양서협동조합 또는 양협] 등은 부산 지역의 진보적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의 집결체였다. 특히 대학가에서는 학생 운동 세력이 확대되고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부산대의 경우 비공개 지하 서클[일명 ‘도깨비집’]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기존의 학술 서클이 이념 서클로 성격을 전환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부산대의 지하 서클은 1978년 2학기 초에 이상록[당시 부산대 법학과 3학년]의 주도로 시도되어, 1979년 1학기가 끝날 무렵 재생산 체제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단계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화한 지하 서클이 등장한 것은 부산대에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학술 서클에서 이념 서클로 변화한 경우는 아카데미회가 대표적인데, 아카데미회 회장을 지내기도 한 김종세 부원장의 관련 설명이다.

“아카데미회는 1978년 1학기 말쯤 해서 우리 77학번[1977년에 입학한 학년]이 학습 조직을 만들었어요. 당시 1학년인 78학번 후배들을 지도했죠. 그러다가 79년도에 신입생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거든요. 70명 정도 들어와서 한 학기 지나고 대략 절반 정도가 남았지요. 그래서 79년도에 비로소 3학년, 2학년, 1학년으로 학습 조직이 가동되게 됐지요. 그때부터는 체계적으로 커리큘럼을 짜 갖고 학습을 했습니다. 당시에 선진적인 지역의 학생 운동 조직이 그렇게 했는데요, 저희들도 거기서 배운 거지요. 제 경우에는 KSCF[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에서 많이 배웠어요.”

학생 운동 조직의 가장 기초적인 활동은 ‘비판적 글 읽기’였다. 이는 제도권 교육에 의해 주입된, 거꾸로 된 사회의식을 바로잡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아카데미회의 사례를 통해 비판적 글 읽기의 구체적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학년 딱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주로 문학 분야입니다. 문학 분야가 감수성이 예민한 신입생한테는 사회 문제에 눈 뜨는 데 좋은 관문 역할을 하거든요. 2단계가 되면 언론과 시사에 관한 거를 주로 봤는데, 송건호(宋建鎬), 이영희 선생이 쓴 정치 평론집 같은 거지요. 그 단계가 지나고 나면 세 번째 단계로 학습하는 게 경제 관계죠. 이영협(李英浹), 김준보(金俊輔), 박현채(朴玄埰), 유인호(兪仁浩) 선생의 경제사 관련 책을 많이 봤어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를 경제 구조의 측면에서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문제를 파악해 들어갔지요. 4단계로는 역사 공부를 하게 됐죠. 그리고 이때쯤 되면 정치 [관련 글이]라든지, 이런 것도 사이드로 읽게 되고, 그래서 대개 4개 단계 정도로 학습을 했죠.”

이러한 단계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학습의 지속적인 축적을 통해 운동권의 인식 역량은 강화되었고 조직의 틀 또한 굳건해져 갔던 것이다. 이외에도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학습은 아닐지라도 사회 과학 서적의 학습이 학생들 사이에서 확산되어 갔다. 이진걸의 경우 함께 시위를 계획한 황선용[당시 서면서점 근무]과 만나게 된 계기가 바로 사회 과학 서적이었다고 말한다.

“이 분은 제가 책들을, 자꾸 사회 과학이나 사회 비판 서적들을 많이 보면서 책방에 자주 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생략] 제가 책을 주로 사회 과학 쪽에 많이 사니까, 저한테 ‘혹시 이런 책 봤느냐’고 [말을 걸어왔어요]. 그때 제가 김지하(金芝河)의 「오적」이나, 또 신경림(申庚林)의 판금[판매 금지]된 [시집], 양성우(梁性佑)의 『겨울 공화국』 등등 그런 류의 책을 보니까, 이 양반이 조심스럽게 나한테 당시 판금된 책들을 구해주고, 그러다 보면서 얘기도 가끔 하고 알게 됐죠.”

10월 15일 다른 갈래로 「민주 투쟁 선언문」을 살포하고 시위를 시도한 신재식[당시 부산대 사회복지학과 2학년, 복학생]은 출판사를 경영한 가형(家兄)의 권유로 개인적으로 학습을 진행한 경우이다.

“주변의 책들을 가지고, ‘아, 이 책도 읽어봐라’, ‘저 책도 읽어봐라’ 했죠. 형님이 책으로 이야기 하죠. 형님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죠. 거의 반 이상은 형님이라고 해야죠.”

[민주화의 열망 표출-시국 강연회,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

사회 과학 학습 이외에 시국 사건과 지식인의 강연도 이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부산대 자율화 민주 투쟁 선언서 사건’과 ‘부산대학교 페인팅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재판을 받고 있는 학생과 청년을 위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회는 주로 보수동의 중부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여기에 참여한 김종세 부원장의 말을 통해 당시 기도회장의 분위기를 살펴보자.

“78년 여름 중부교회에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가 있었는데, 아마 이성동 그룹과 동일방직 노동자를 위한 예배였던 거 같은데, 예배 중에 가스펠송[복음 성가]을 불렀어요. 당시 상황을 은유하는 「금관의 예수」를 많이 불렀고, 「우리 승리하리라」, 「흔들리지 않게」 뭐 이런 가스펠도 불렀죠. 이런 노래들은 복음 성가지만 가사 자체가 당시 암울하고 억압적인 사회 상황을 상징하고, 우리의 결의를 다지는 저항적 성격이 담긴 노래였지요. 그리고 최성묵 목사의 설교와 대표 기도가 이어지는데 그 내용이 그런 거죠. 구속자들을 성서 속에 나오는 고난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비유하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힘을 내기를 기도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기도회는 형식으로는 교회 예배지만 내용상 집회인 거죠, 집회. 단결, 결심…, 뭐 민주화에 대한 열망, 이런 거를 표현하고 함께 나누는 집회인 거지요. 시간은 대략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걸렸어요. 그리고 예배 끝날 쯤에는 헌금을 해요. 투쟁 기금을 마련해야 되거든요. 기도회 전단을 만드는 인쇄비나 구속된 사람들을 위한 영치금도 필요하고, 변호사 비용 등등에 사용하지요. 근데 웃기는 건 그때 우릴 감시한다고 예배당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부산대 상담지도관실의 장관진이가 헌금통이 자기 앞을 지나가니까 자기도 헌금을 하는 거예요. 코메디죠, 코메디.”

이성동 그룹은 ‘부산대 자율화 민주 투쟁 선언서’를 배포한 이들이다. 구속된 동일방직 노동자란 동일방직 노조를 탄압한 섬유 노조 위원장 김영태가 부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김영태의 악행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경찰에 구속된 추송례, 김옥섭 등이다. 기도회는 형식적으로는 일반 예배와 마찬가지로 노래, 설교, 예배, 헌금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내용적으로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구속된 이들을 지원하고 민주 세력의 단결을 다지는 일종의 집회였던 것이다. 기도회에서 부른 가스펠송은 대표적인 ‘운동권 가요’였고, 목사의 설교와 예배의 성격도 그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는 종교 행사의 외피를 빌린, 사실상의 민주화 운동 집회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런 행사에는 어김없이 대학의 상담지도관실 직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상담지도관실은 유신 정권이 운동권 학생들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 전국의 대학에 설치한 것인데, 부산대의 경우 대학 본부 건물의 지하 1층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기도회가 사실상의 집회임에도, 교회 예배라는 형식 때문에 감시하는 외에 달리 제제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도 기도회라는 형식 때문에 이들을 내보낼 수 없었던 것이니,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가 같은 장소에 나란히 앉아 함께 행사를 치르는 웃지 못 할 촌극이 연출되었던 것이고, 이것이 당시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김종세 부원장에 따르면 이들의 감시는 학내에 머무르지 않고 학생들의 교외 활동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시국 사건을 방청하기 위해 법원을 방문한 학생들을 가로막고 나선 것도, 상담지도관실 직원이었다고 한다. 재판의 방청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경찰이 학생을 체포할 수는 없으니, 이들이 학생 지도라는 명목으로 나서서 심문을 하면서 괴롭히고 활동을 방해했던 것이다.

이 무렵 개최된 진보적 지식인의 시국 강연회도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한완상(韓完相), 안병무(安炳茂), 고은(高銀), 김동길(金東吉), 임헌영(任軒永), 조세희(趙世熙) 등이 주요 강연자였는데, 당시 시국 강연의 분위기와 학생들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진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 워낙 정부에 대한 비판은 긴급 조치 9호가 발동되[어 통제가 심했]었고, 누구도 함부로 정부에 대해서 비판을 못하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중략] 가장 대표적인 게 YMCA [강연이었다]. 한번 가는 게 쉽지 않았죠. 워낙 분위기가 살벌하고, 가면 형사들이 워낙 많았고, 심지어는 강연회라고 가면 앞에서 신분증을 검사할 정도로 그랬습니다. 당시에 유명하신 분들 와 가지고, 그것도 노골적으로 아니고 둘러서 정부에 대해서 또 인권에 대해서 [비판했어요]. 그렇지만 저한테는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워낙 목말라 있었기 때문에. 그런 데를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들도 알게 되고, 안면이 생긴 거죠.”

이런 집회와 강연회를 통해 이들은 결속을 다지고 당면한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체험을 하면서 역량을 축적해 갔던 것이다. 한편으로 양서협동조합에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한 학생들도 있었다. 1978년 ‘지역 사회의 지적 풍토 쇄신’을 내걸고 설립된 양서협동조합은 이후 부산 지역 민주화 운동의 저수지와 같은 구실을 했다. 보수동 책방 골목에 있던 직영의 협동서점에는 동일방직 오물 투척 사건과 같은 시국 사건의 소식을 전하는 유인물을 비치하기도 해서 민주화 운동의 동향을 시민들에게 전달했다. 시국 강연회 역시 대부분 양서협동조합과 중부교회 청년부가 기획하고 주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1978년은 부산 지역 청년 학생들의 사회 인식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기였고, 그것은 이듬해인 1979년에 이르러 체계적인 조직 정비로 결실을 맺었다. 이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들이 부마 항쟁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즉 부마 항쟁은 1979년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평지돌출처럼 등장한 것이 아니다. 부마 항쟁은 1970년대 후반 한국 사회가 배태하고 있는 모순을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고 고민한 결과이고, 그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실천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부마 항쟁의 주역들 사이에는 유신 말기의 수년간에 걸쳐, 동일한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둔 강한 공감대와 동질성, 이를 바탕으로 한 연대 의식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양서협동조합과 중부교회 등 양심적 지식인과 종교계는 학생 운동에 직접 또는 간접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민주 세력과 부산이 교류·연계하는 데 매개 고리로 작용하는 등 중요한 환경을 제공했다. 이렇게 형성된 부산 지역의 학생 운동은 그 자체로서 부산 지역 민주 세력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고, 그 성장은 민주화 운동의 확대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79년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양상은 급격히 가시화되었다. 부산대의 경우 1979년에 들어와서 학생 운동 세력의 조직화가 가속화되는 등 민주 역량이 급속히 확충되었다. 동아대학교를 비롯한 다른 대학에서도 운동권이 확대되었다. 이 때문에 양서협동조합은 뒤에 부마 항쟁의 배후로 지목되어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으며, 중부교회의 최성묵 목사는 연행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날지 않는 독수리와 울리지 않는 자유의 종]

이런 가운데 1979년 하반기에 들어서서는 유신 체제의 억압적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10월 16일 시위를 주도한 정광민[당시 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은 그 시절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79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사회·정치적으로 유신 독재의 말기적 증상이 YH 사건, 재야인사와 청년 학생의 구속 사태, 야당 탄압 등으로 이어지면서 국민들 속에는 반(反)유신, 반박정희 감정이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학내 분위기 역시 꼭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처럼 술렁이기 시작했다. 서울 등 다른 지역의 투쟁 소식이 몇몇 뜻 있는 학생들의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면서도 우리 대학교에서도 ‘무엇인가 해야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학생들 속에서 번져 나갔다”

YH 사건은 1979년 8월 11일 국내 최대의 가발 제조업체 YH무역의 부당 폐업에 반대하는 YH 노조가 제1 야당인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고, 이에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농성 중인 여공들을 폭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경숙이 추락사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당사가 파괴되고 소속 의원이 폭행을 당한 신민당이 무기한 농성에 돌입하자,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金泳三) 총재의 의원직을 제명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이보다 앞선 5월 5일에는 경상북도 영양의 불량 감자 피해 보상 운동을 주도한 농민 운동가 오원춘(吳元春)이 백주대낮에 기관원에게 납치되는 ‘오원춘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 안동교구가 농성에 들어간 사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알려졌다. 농민 운동 탄압과 노동자 인권 유린, 야당에 대한 정치적 박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으로, 1970년대 말 한국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유신 정권에 대한 분노 역시 팽배해졌는데, 이 무렵의 분위기에 대해 윤준걸[1988년 부산상공회의소 경제조사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는 정말 숨 막힐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암울했고, 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 정도였죠. 모든 것이 통제된 상황에서 무력감에 빠지기도 하고 자포자기 상태에 젖어들기도 했습니다.”

이에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학생 시위가 서울과 광주, 대구 등지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하지만 대도시 가운데 유독 부산만이 유신 반대 투쟁의 무풍지대로 남아있었다. 부산대 언더 서클의 일원이었던 유장현[당시 부산대 기계공학과 2학년]은 그 무렵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서울에 갔던 우리 [고등학교] 동기들, 친구들 있잖아요. …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갔던 친구들이 방학 때 [부산에] 많이 내려온다 아닙니까. [만나면] 맨날 데모 이야기밖에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부산 너거는 왜 그렇냐, 데모도 못하고’[라고 힐난했어요]. … 우리보고 ‘빙신’, ‘바보’[라고] 하면서. … 자존심 상하죠. 불의에 저항하지 못하고, 어려운 점을 헤쳐 나가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데모라도 하고 마 이래야지, 서울에서는 [데모가] 일상으로 돼 있는데, ‘부산 너거는 친(親)유신이가?’ 하고, … 뭐 이런 소리 참 많이 들었어요. 그러면 그런 분위기가, 내부적으로는 무르익는 거죠.”

이 무렵 부산대에서는 이런 자괴감을 드러내는 자조어린 표현으로, ‘날지 않는 독수리’와 ‘울리지 않는 자유의 종’에 대한 미스터리가 회자되고 있었다. 부산대 구 정문에서 구 도서관[현 건설관]으로 올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무지개문에는 ‘자유의 종’이 매달려 있고, 조금 더 올라가 맞닥뜨리는 ‘웅비의 탑’에는 비상하는 독수리의 입상이 얹혀 있다. 물론 조각품인 종과 독수리가 울리거나 비상할 리 없다. 그럼에도 당시 부산대 학생들은 자유의 종이라고 하면서 왜 울리지 않는지, 웅비의 탑이라면서 독수리는 왜 날지 않는지, 비난하고 비웃었던 것이다. 기실 그것은 스스로를 비웃는 것으로, 당시 부산대 학생들을 휘감고 있는 자괴감이 만든 우스갯소리였다. 반민주적인 악법의 극치인 유신 헌법과 그것이 만든 체제에 순응하여 저항 한번 하지 않는 대학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유신 대학’이라고 자기 비하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런 부산대학교도 유신 말기의 한국 사회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그때는 누구라도 폭압적 상황을 폭로하고 시위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진걸의 말처럼, 유신 반대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당시 부산대 학생 사이에 널리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79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이진걸 그룹과 신재식 양 갈래에서 시위 선도를 자처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시위를 결심하게 된 과정을 이진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79년에 들어와서 비리 사건이 굉장히 많이 터졌습니다. [생략] 수많은 인권 탄압 사례들이 누적이 되고. 그래서 이런 조건에서 학생인 우리가 그냥 있을 순 없는 건 아니냐, 그래서 ‘뭔가를 현 정부에 대해서, 또 우리 학생들이 어떤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여줘야 된다는 생각들이 79년 들어오면서 굉장히 강하게 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2학기 되면서, 그러니까 79년도 하반기 되면 뭔가 나하고 같이 뜻이 맞는 사람들하고, 뭔가 의사 표시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생략] 1차적으로는 책 땜에 자주 만나는 황선용씨, 그 다음에 강연회나 이래저래 남성철씨하고 얘기를 하고. 두 사람은 비록, 두 분은 학생은 아니지만, 진짜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 인권 상황이 정말 심각하다[고 공감했다], 그래서 제가 생각을 얘기하니까 두 사람도 흔쾌히 같이 도와주겠다고, 같이 해보자고 얘기가 됐었죠.”

황선용은 당시 서면서림의 직원이었고, 남성철은 공원 출신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진보적인 현실 인식을 가진 청년으로서, 공감대를 가진 학생이나 지식인과 교유하고 있었다. 이진걸과도 이런 과정에서 연계를 가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부산대 학생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신재식의 현실 인식 또한 이진걸과 다르지 않았다.

“방학 지내고 오원춘 사건, 감자, 그때 사건 있었죠? 씨감자 사건하고, 그 담에 동일방직 사건, YH 사건 등이 진행이 되면서 우리가 느끼기에, 정말 ‘이거는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학생이지만, 뭐 세상을 다 알았던 건 아니고, 또 이론적으로 성숙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 우리의 생각, 우리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이거는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서울에서는 간간히 시위도 있다, 유신에 항거를 한다는 그런 일도 있었지마는 부산대학교는 전연 없었다,’ ‘우리 한번 이렇게, 그런 데 의기투합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측면에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자취방을 중심으로요.”

이렇게 하여 시위를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다. 우선 학내에 조직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진걸과 신재식은 이념 서클에 연락을 취했다. 당시 부산대의 상황에서는 이진걸 그룹이든 신재식 그룹이든, 시위를 벌이기 위해서는 이념 서클과 연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김종세 부원장을 통해 들어본다.

“학기 초인 9월이었다고 기억됩니다. 문창대[건설관 뒤]에서 운동권 정책 회의가 열렸어요. 학내 운동의 지도급 모임으로 참석자는 10명이 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언더 서클 회원이 다수였고, 아카데미에선 저 혼자였는데, 이외의 참석자가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이 날 ‘누군가 시위를 하려 한다’는 게 보고됐습니다. 하지만 회의에서는 시위는 시기상조라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이 회의는 부산대 내 언더 서클과 공개 서클을 포함하여 운동권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단체를 포괄하는 연대 모임으로, 부산대에서는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날의 회의는 2학기 학내외의 전반적인 정세를 조망한 뒤 이에 대한 대응을 협의하고, 학내의 움직임을 점검하면서 정보와 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날 보고된 시위 계획은 이진걸 그룹의 것이었는데, 이에 대한 언더 서클 내 선배 그룹의 견해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당시로서는 시위를 하고서도 조직을 유지할만한 역량이 못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부산대 언더 서클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던 3학년인 이호철, 노재열 등은 시위를 반대하는 선배들과의 논전을 통해 데모를 지원하기로 논의를 모았다. 이때 언더 서클의 대외 창구역을 맡고 있던 이호철[부산대 행정학과 3학년]의 구술이다.

“79년 9월 말 이진걸이 ‘데모 한번 하자’고 제의하였다. 나는 이진걸의 제의를 안건으로 서클에서 회의를 하였으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이 터진 상태라서 경색 경향이 있고 아직은 우리 조직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결론은 ‘불가’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진걸과 만나겠다고 하여 [이진걸을 만나니], 이진걸은 데모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내가 ‘좋다. 언제 할 거냐’고 이진걸에게 물으니, 이에 이진걸은 ‘대강 10월 중순 쯤 하자’고 대답하였다.”

신재식의 경우는 김종세를 통해 연결되었다. 신재식은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아카데미 회원이었기 때문에 김종세의 아카데미 선배였다. 당시 상황에 대한 신재식의 구술이다.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들어간 것은 9월 말, 9월 말 정도 되겠구나..... 막상 10월 7, 8일경 되면서 좀 위축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구체화된 것이 김종세한테 내가 부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김종세는 아카데미 회장을 맡고 있었던가, 그랬을 거에요. 그러니까 데모할 동안, 데모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인원이 있어야 하는데, 그 인원을 동원을 해 달라, 그런 부탁을 내가 했어요.”

시위를 위해 두 사람이 만난 시점에 대해 신재식은 10월 7, 8일 경으로 구술하고 있지만, 김종세 부원장의 기억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9월 말인가? 10월 초쯤 된 것 같은데, 신재식 선배가 시위를 하겠다면서 지원을 부탁해 왔습니다. 이호철과 논의한 결과, 이진걸 그룹과 함께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시위하기 1주일 전에 이호철, 이진걸과 [박물관 옆] ‘콰이강의 다리’ 부근 숲 속에서 만나서 실행 계획을 점검했어요. 이때 두 그룹의 시위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실수 없도록 하자’는 등 서로를 격려하고 진지한 의지를 확인하고는 자리를 파했어요. 시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건 이틀 전인 10월 13일이었습니다. 이 날 이진걸과 신재식 선배를 만나게 하려고 했지만, 재식 형과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어쨌건 15일 오전 10시에 시위를 한다는 것까지는 확인된 상태였고, 장소는 도서관과 문창 회관 둘 중 하나일 테니, 두 경우에 모두 대비하자고 이야기를 맞추어 두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애초에 별개의 경로로 진행되던 두 갈래의 시위 계획이 ‘15일 오전 10시 도서관 앞’이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될 수 있었다. 시위 날짜와 장소를 ‘10월 15일 도서관’으로 잡은 것은 학내 사정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 시기는 중간고사를 앞둔 시기여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도서관[현 건설관]에 몰려 있었고, 도서관 바로 근처에는 부산대 학생들의 자취방과 하숙집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시위의 주역들은 시위를 성공시키고 규모를 최대화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착수했다. 학우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소문을 퍼트리고, 동시에 경찰이 헛갈리도록 역(逆)정보를 흘리는 작업이 그것이다. 당시 부산대에는 ‘서울의 모 여대에서 부산대에 소포를 보냈는데, 가위가 들어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학생들을 자극했는데, 이는 기실 신재식 그룹이 퍼트린 것이었다. 한편으로 ‘[시위가 임박했으니] 운동화를 신고 다녀라’는 말과 함께, 데모 날짜가 17일이라는 소문을 은밀히 흘리기도 했다. ‘운동화’ 운운은 학우들로 하여금 시위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고, 시위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17일 데모설’은 허를 찌르기 위해 경찰에 흘리는 역정보였는데, 경찰의 관심을 17일에 쏠리게 해두고 15일 시위를 감행하던 것이었다.

10월 15일 이진걸, 신재식 등은 각각 준비한 「민주 선언문」과 「민주 투쟁 선언문」을 부산대학교 구 도서관[현 건설관], 본관[현 인문관], 상대[현 자연 과학관], 미리내골 등 교내 곳곳에 배포하고 도서관에 이르렀다. 도서관에는 100여 명의 운동권 학생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깃발이 오르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날의 시위가 몰고 올 역사적 전환에 비해 실천 주체의 역량이 미숙했던 탓일까, 박정희 정권의 18년 철옹성을 무너뜨리기에는 단 한 번의 결심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여러 날 가슴 졸이며 갖추었던 만반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채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어처구니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도서관에 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대가 몰려들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진걸은 학우들의 호응이 지체되자 성급하게도 시위가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몸을 피해버렸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지 않아 도서관 앞에 학생들이 모였을 때에, 학내에 상주하고 있던 사복 경찰이 뒤늦게 사태를 눈치 채고 허겁지겁 달려왔던 것이다. 신재식이 도서관에 도착한 것은 경찰이 운집한 학생들을 강제로 해산시킨 직후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물경 5년 만에 시도된 부산대의 시위는 무산되고 말았다.

시위가 무산되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역시 우리는, 부산대학교는 데모가 안 된다’ 하는 자괴감과 냉소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 날의 사건이 전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즉 15일 시위의 좌절은 학생들에게 자조적인 패배감을 안겨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격한 분노의 몸부림을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뜻하지 않은 움직임이 나타났던 것이다. 정광민[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 그룹이 그들이다. 예정에 없던 시위를 주도하게 된 그날의 상황에 대해 정광민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15일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시위를 계획했던 사람들이거나, 도서관[현 건설관] 앞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무엇인가 예사롭지 않은 폭풍 전야의 적막과도 같은 분위기가 캠퍼스 곳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투쟁 의지가 솟구쳤다. ‘다시 싸워야 한다.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준비하여 내일 또 다시 투쟁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다.”

[부마 항쟁의 시작...]

산이 높으려면 골이 깊어야 하는 걸까. 16일의 시위는, 그리하여 부산대학교의 10·16 항쟁은 이렇게 15일의 좌절을 딛고 서는 데서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15일 시위의 실패로 인한 좌절이 이튿날의 시위를 더욱 자극했던 것이다. 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심한 정광민은 전도걸 등 경제학과 학우들을 규합하는 한편 운동권 조직과 연계를 도모했다. 이때 만난 것이 당시 아카데미 회장이었던 김종세였다. 당시 상황에 대한 김종세 부원장의 구술이다.

“오후 2시 수업을 들으러 본관[현 인문관] 뒤 길로 걸어가는데, 정광민이가 헐레벌떡하면서 날 찾아다니다가 만난 거예요. 거기서 광민이가 ‘내일 하겠다’고 한 거예요. 내일 결행을 하겠다면서 인원 동원을 부탁하는 거지요. 내가 그 친구하고 활동을 같이 했거나 한 건 아닌데, 내가 아카데미 회장이란 건 아니까 온 거죠. 그래서 호철이를 찾으러 구 정문 아래 술집으로 갔죠. 갔더니 도깨비집 애들이 술 먹고 있는 거야, 격분해서. 그래 호철이를 불러냈죠. ‘야, 정광민이가 내일 시위한단다. 동원해야 된다. 하자!’ 하니까, ‘그래?’ 하면서 호철이도 놀라는 거예요. 그러고, ‘좋다, 그리 하자!’ 하더라고요. 다음날 아침에 구 공대[현 재료관] 옥외 화장실에서 호철이를 만나 인원 동원을 점검했어요. 거기서 ‘오케이,’ ‘됐다!’고 된 거지요.”

같은 시각 교정 반대편에서는 지난밤을 뜬눈으로 새운 정광민이 운명의 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가방에는 밤새 만든 300여 장의 ‘선언문’이 들어 있었다. 정광민은 강의실에 들어가 학우들에게 ‘선언문’을 뿌리고 강단에 올라서서 시위에 나설 것을 호소했던 그날의 광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여러분 우리 이제 투쟁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 나가서 투쟁합시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짧게 말하면서 학생들을 선동하였다. 일부는 ‘무슨 일이냐’며 어리둥절하였지만 다수의 학생들은 순순히 호응하여 나를 따라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상대 뒤쪽의 인문 사회관 앞에서 상대 건물 앞으로 줄을 지어 나왔고, 상대 앞에 머물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다 같이 감격해 마지않으면서 뜨겁게 불렀다. 수업을 받고 있던 학생들도 놀라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다보았고, 학교는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우리는 4열로 줄을 지어 도서관 앞으로 행진하였고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교내를 가로질러 도서관 쪽으로 가니까, 거기에는 이미 4~500여 명이 잔디밭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등의 구호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10월 16일 학생들의 눈빛은 이미 어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한 차례 시위의 무산으로 좌절을 맛본 탓인지, 이 날 시위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은 사뭇 뜨거웠다. 애국가, 교가, 「선구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투쟁 의지를 불살랐고, 몇몇이 스크럼을 짜고 달려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시위 대열이 형성되었다. 얼마지 않아 시위대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페퍼포그와 경찰이 교내에 진입하여 미친 듯이 최루탄을 난사하고 학생들을 구타하자, 드디어 시위대는 학교 담을 넘었다. 굳게 잠긴 철문은 자물쇠를 깨부수고, 가로막힌 담장은 힘을 모아 허물어뜨리고, 시위대는 거리로 나섰다. 바야흐로 부마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날의 궐기가 민중 항쟁으로 이어질 것임을, 박정희 정권의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될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모르는 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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