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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031
한자 釜馬抗爭
영어의미역 Uprisings in Busan and Masan
이칭/별칭 부마 사태,부마 의거,부마 민주 항쟁,부마 민중 항쟁,부마 민중 봉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 항쟁
관련인물/단체 신재식|이진걸|정광민|전도걸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9년 10월 16일연표보기 -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내에서 반정부 시위 발생,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격렬한 도심지 시위 전개
종결 시기/일시 1979년 10월 20일연표보기 - 정오를 기해 마산,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시위 진압
발단 시기/일시 1979년 10월 15일 - 부산대학교 선언문 살포, 교내 시위 실패
전개 시기/일시 1979년 10월 17일 - 동아대학교 등 부산 지역 대학생 시위에 합류, 시민이 본격 가세하는 시민 항쟁으로 확산
전개 시기/일시 1979년 10월 18일 - 자정을 기해 부산에 계엄령 발동, 시위대는 공수부대에 진압됨
전개 시기/일시 1979년 10월 18일~20일 - 마산의 경남대학교에서 시위 발생, 시민 항쟁으로 확산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9년 - 부산대학교에 부마 항쟁 발원지 표지석 건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4년 10월 16일 - 부산대학교에 10·16 부마 민중 항쟁 기념탑 건립
발생|시작 장소 부산대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산30지도보기
종결 장소 부산광역시
종결 장소 경상남도 마산시
부마 항쟁 발원지 표지석 부산대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산 30지도보기
관련 유적지 부산대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산 30지도보기

[정의]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전개된 시민과 학생들의 유신 반대 투쟁.

[역사적 배경]

1970년대 후반 유신 체제는 억압의 강도를 더해가고 경제적 위기와 불평등은 심화되었으며 지배층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였다. 특히 부산과 마산에서는 지역 경제의 침체로 지역민의 생활이 위기로 치닫는 한편 민주화 운동의 발전으로 지역 내 민주 세력의 성장과 결속이 강화되고 있었다.

[경과]

부마 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대학교 교내 시위에서 발화되었다. 10월 15일의 부산대학교에서는 신재식과 이진걸을 중심으로 시위가 시도되었으나 불발로 끝났다. 하지만 시위는 이튿날 다시 시도되었고, 이는 부마 항쟁의 발단이 되었다. 10월 16일 오전 10시경 경제학과 정광민이 앞장 선 시위는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삽시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교내 시위가 저지되자, 부산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현 부산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의 담장을 허물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세 갈래로 나뉘어 시내로 진출한 시위대는 오후 2시경 도심지인 부산직할시 중구 남포동으로 집결하여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도심 시위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고신대학교동아대학교 학생들도 참여하였다.

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들은 열렬한 지지와 응원으로 화답하였다. 저녁 6시가 넘어 서자 퇴근길의 직장인과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삽시간에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항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경찰은 무차별적인 최루탄 발사와 강경 진압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밤 10시부터 통행금지가 발표되었지만 항쟁의 불길은 더욱 거세어졌다. 이날 밤 1시까지 시위대는 11개의 파출소를 파괴하고 부상자는 110명으로 집계되었다.

10월 17일에는 동아대학교에서 학내 시위가 발생하여, 동아대학교 학생이 대규모로 가두시위에 합류하였다. 하오 6시경부터 시작된 도심 시위는 수십 갈래로 나누어진 시위대에 의해 새벽 1시 30분까지 이어졌다. 시위 과정에서 21개소의 파출소가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고,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다. 또한 경상남도청, 중부세무서, 부산일보와 KBSMBC 부산방송국 등 언론사, 일부 동사무소 등이 시위대로부터 투석을 받았다. 항쟁이 격렬해지자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10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2개 여단의 공수부대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18일 저녁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저녁 8시경 동명 극장 앞에 집결해 있던 학생, 시민들은 삽시간에 2,000명의 대열을 형성하여 ‘계엄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청으로 전진하였다. 하지만 시청 앞에서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되고 말았다.

10월 18일에 항쟁은 마산으로 번졌다. 하오 2시 경남대학교 학생들은 교내 시위를 전개한 후 하오 5시에 3·15 의거탑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도심지의 야간 시위는 퇴근길의 노동자와 직장인들이 가세하여 대규모로 불어났다. 새벽 3시까지 전개된 이날 시위에서 시위대는 파출소 7개소, 마산경찰서, 시청, 공화당 사무실, 검찰청, 법원, 우체국, MBC 마산방송국 등을 파손하며 격렬하게 유신 체제에 항거하였다. 이날 시위로 경찰 25명이 부상하였으며, 시위대는 3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부상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10월 19일 경찰은 인근 지역의 경찰 병력을 지원받아 반격에 나섰고, 19일 저녁 1개 여단의 공수부대가 마산에 급파되었다. 내무부는 통금 시간을 밤 10시부터라고 발표하였다. 마산 시내는 불이 꺼져 암흑천지였다. 밤 8시경 다시 시작된 항쟁은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전날과 달리 참여자는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실업자, 노동자가 중심이었고 고등학생들도 많았다. 동사무소, 전신전화국, MBC 마산방송국이 공격받았다. 다음날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박정희 정권은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함으로써 항쟁은 군대의 힘으로 진압되었다.

[결과]

부마 항쟁으로 연행된 시민은 총 1,563명으로, 이 가운데 부산이 1,058명이고 마산이 505명이었다. 부마 항쟁으로 계엄군법회의에 회부된 사람은 87명[학생 37명·일반인 50명]이었고 그 중 단순 가담자 67명은 소가 취하되었고, 20명[학생 7명·일반인 13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반 검찰에 송치된 31명[학생 26명·일반인 5명]은 전원 소가 취하되었고, 651명은 즉결 심판에 회부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마 항쟁의 가장 큰 의의는 열흘 후에 일어날 10·26 정변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유신 체제를 몰락시켰다는 점이다. 부마 항쟁은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민중 항쟁의 지평을 열었으며,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 결산인 동시에 그간 일부 학생이나 지식인, 명망가에 국한되었던 민주화 운동의 주체를 일반 시민에까지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1980년대의 대규모 반독재 민주 항쟁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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