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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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正熙 |
영어음역 | Bak Jeonghui |
이칭/별칭 | 박통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차성환 |
[정의]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을 지낸 군인이자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117번지[현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171]에서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의 저명한 항일 운동가인 박상희(朴相熙)는 박정희(朴正熙)의 형이다. 5·16 군사 정변을 함께 감행한 김종필(金鍾泌)은 박상희의 사위로, 박정희의 처조카이다. 부인은 육영수(陸英修)이고, 자녀는 딸 박근혜(朴槿惠), 박서영[본명 박근영(朴槿令)]과 아들 박지만(朴志晩)이 있다.
[활동 사항]
1. 군사 쿠데타 이전의 전력
박정희는 1932년 3월 25일 구미공립보통학교[현 구미초등학교], 1937년 3월 25일 대구사범학교[현 대구교육대학교], 1942년 3월 25일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1944년 4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박정희는 1937~1939년까지 문경공립보통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하고 만주군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듬해인 1945년 7월에는 만주군 중위로 승진하였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박정희는 중국으로 가서 1945년 8월 29일 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2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8년 11월 남로당 관련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무기 징역에서 감형되고 다시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1950년 6월 25일 소령으로 복귀했으며, 1958년 3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2. 쿠데타의 단행
박정희는 자유당 말기인 1960년 1월 21일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부산으로 오면서 쿠데타 모의를 구체화하였다. 그는 동래 온천장 별관 등에서 김동하, 이주일, 홍종철, 전두열 등의 군인들과 모의를 거듭하였다. 부산을 방문한 장도영 2군 사령관에게 쿠데타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때 장도영은 원칙적으로는 찬동하면서도 시기와 방법은 더 연구하자고 하였다.
박정희는 송요찬(宋堯讚) 육군참모총장이 미국으로 건너가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또 박정희는 부산에서 『부산 일보』의 주필로 있던 황용주(黃龍珠)와 자주 만났다. 황용주는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에 깊숙이 관여하며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은 3·15 부정 선거로 촉발된 학생과 시민들의 4·19 혁명이 폭발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4·19 혁명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전국 주요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고, 박정희는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장을 맡게 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오자 부산 전역이 데모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몽둥이와 사이다 병으로 경찰서, 파출소, 자유당 의원 집, 자유당 사무실, 구청, 소방서, 반공 청년단 사무실 등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일부 학생들이 시민에게 자제를 요청했으나 민중의 분노를 막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도청 앞으로 나와 “군은 데모를 보호하기 위해 나왔다.”, “이성을 잃지 말고 폭행과 파괴를 말자.”고 외쳤으나 시위는 더욱 강하게 번졌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군중들은 원정 시위대를 조직하여 경상남도의 농촌 지역과 마산까지 휩쓸었다.
이로부터 1년여가 지난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는 5·16 군사 정변을 감행하였으며, 1961년 7월 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 취임하였으며, 1967년 7월 1일 제6대 대통령 취임, 1971년 7월 1일 제7대 대통령 취임, 1972년 10월 1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3. 부산과의 관계
박정희와 부산과의 관련을 보면, 1962년 3월 27일 군사 정부는 부산의 대표적 기업가이자 2~3대 국회 의원을 지냈던 김지태(金智泰)를 부정 축재 처리법과 재산 해외 도피 혐의로 입건하였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김지태에게 부일장학회를 강제로 국가에 헌납하도록 하였다. 부일장학회는 (주)삼화와 『부산 일보』, 한국문화방송 등을 창업한 김지태가 1958년에 설립한 재단이었다. 이때 김지태는 부일장학회의 땅 약 33만㎡[10만 평]와 『부산 일보』 주식 100%, 한국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100%를 군사 정부에 넘겼다. 이 부일장학회는 이후 5·16장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2년 박정희와 부인 육영수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만든 재단 법인 ‘정수장학회(正修獎學會)’로 바뀌었고 박정희의 큰딸 박근혜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가 정치적 쟁점이 되자 공식 사퇴하였다.
박정희가 부산과 관련되는 또 다른 사안은 김영삼(金永三)의 제명과 부마 항쟁이었다. 1970년대 내내 박정희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대립 관계에 있었는데, 김영삼은 부산광역시 서구에 지역구를 가진 부산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 헌법을 선포했을 때 김영삼은 미국에 가 있다가 소식을 듣고 10월 21일 귀국하였고, 곧바로 군인들에게 가택 연금을 당하였다. 이때 김영삼의 오른팔이라고 불리던 부산의 국회 의원 최형우(崔炯宇)는 헌병대로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면서 김영삼의 정치 자금 출처 등을 추궁 받았다. 1978년 12월 27일 박정희는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와 김영삼이 최고도로 격돌한 것은 1979년 5월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재선된 이후였다. 김영삼은 정면으로 유신 헌법의 철폐를 요구하였고, 박정희 정권은 정치 공작을 통해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YH 사건과 총재 직무 정지 가처분 등의 사태를 거쳐 마침내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 제명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독재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부산에서 먼저 분출되었다.
1979년 10월 16일과 17일 양일에 걸친 분노한 시민들의 항쟁을 직접 시찰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는 부마 항쟁을 ‘민란’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로부터 열흘 후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에 의한 10·26 정변이 발생하여 박정희의 처참한 죽음과 함께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지도자도-혁명 과정에 처하여』[1961], 『국가와 혁명과 나』[1963], 『조국 근대화의 지표』[1967],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9], 『민족의 저력』[1971], 『민족 중흥의 길』[1978] 등이 있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의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79년 10월 26일 서거한 후 국장이 치러졌으며 매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1999년 7월 26일에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기념관 설립을 비롯한 여러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