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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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龍珠 |
영어음역 | Hwang Yongju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허윤철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부산 일보』 사장과 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
[활동 사항]
황용주(黃龍珠)는 1919년 1월 3일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다. 1933년 대구사범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였으나, 1934년 학내 ‘독서회 사건’에 연루되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하여 1944년 졸업하였다. 해방 후 귀국한 황용주는 경상남도 밀양에 세종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재직하였으나 학내 분쟁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부산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강의하며 『부산 일보』와 『국제 신보』에 가끔 칼럼을 쓰기 시작하였다.
부산 일대에서 필명을 떨치던 황용주는 1958년 1월 『국제 신보』 주필로 영입되어 본격적인 언론 생활을 시작하였다. 황용주가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58년 5월 실시된 국회 의원 선거에서 김지태가 낙선하고 『부산 일보』 운영에 전념하면서부터인데, 김지태는 『국제 신보』 주필로 있던 황용주를 매우 파격적인 대우로 『부산 일보』에 스카우트하였다. 이후 황용주는 1958년 9월 22일부터 『부산 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부산 일보』의 초기 발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황용주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 동창으로 친분이 있기도 했는데, 5·16 군사 정변 후인 1962년 『부산 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1964년 문화방송[현 MBC 부산문화방송]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방송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4년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있던 『세대』지에 「강력한 통일 정부에의 의지」를 기고한 것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으로 구속되었다. 황용주는 이 사건에 재판에서 집행 유예로 풀려난 후 언론계를 떠났으며, 이후 정수장학회 이사와 한국기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01년 8월 25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