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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159
한자 崔聖黙
영어음역 Choe Seongmuk
이칭/별칭 최핏대
분야 종교/기독교,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1가 11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교인
성별
대표경력 중부교회 목사
출생 시기/일시 1930년 11월 11일연표보기 -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977년 - 목사 안수 받음
수학 시기/일시 1951년 3월 - 서울대학교[부산 전시연합대학] 수학과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59년 2월 - 한국신학대학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68년 2월 -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50년대 - 포항고등학교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59년~1960년 - 충북 제천제일교회 전도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64년 6월 - KSCM 총무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70년대 후반 -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77년 4월 3일 - 부산중부교회 목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85년~1987년 -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부회장 및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87년 5월 20일 - 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 공동 대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91년 5월 - 신민주연합당 최고 위원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92년 3월 22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2년 3월 21일 - 10주기 추모 행사 개최
추모 시기/일시 2002년 - 추모집 『그의 부활을 기다리며』 출간
출생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학교|수학지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 부산광역시 서구 대신동 부산 전시연합대학
학교|수학지 한국신학대학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학교|수학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
활동지 중부교회 -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1가 116지도보기
묘소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정의]

1970~1980년대 부산 지역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이자 종교인.

[활동 사항]

최성묵(崔聖黙)[1930~1992]은 1930년 11월 11일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면 중성동[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흥해제일교회 소년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6·25 전쟁 때 유격대에 붙잡혀 총격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회생하는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1951년 서울대학교[부산 전시연합대학] 수학과에서 수학하고, 포항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으나,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1959년 한신대학교를 졸업하고, 제천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충청북도 제천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였다.

1960년대에는 서울에서 기독교 학생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60년대 초에 한국기독학생회[KSCM] 대학부 간사로 일하면서 대학YMCA, 학생YWCA, KSCM으로 나누어져 있던 기독 학생 조직을 통합하는 사업에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결성된 조직이 한국학생기독운동협의회[KSCC]였고, 최성묵은 총무를 맡았다. 이후 통합 작업은 KSCM과 대학YMCA가 합쳐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을 결성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이 과정에서 최성묵은 헌신적으로 노력하였고, 이사회가 책임지지 않는 부채를 아내가 간신히 마련한 집을 처분하여 정리하기도 하였다. 1968년 2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에 1969년경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부산에서 최성묵은 목회자이자 신학자, 재야 민주화 운동 지도자이자 사회사업가로 활동하였다. 부산으로 이주한 직후 YMCA 총무 취임이 좌절되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최성묵은 미국문화원 학생 담당관을 역임하였고, 1972년 4월 YMCA 총무를 맡아 기독교 청년 운동을 지도하였다. 1970년 후반에 최성묵은 박상도 등과 함께 도시산업선교회를 통해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4월 3일에 중부교회 목사로 취임하면서 인권 운동, 사회사업 등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유신 치하에서 정의구현기독자회, 기독교인권선교협의회, 엠네스티 부산지부 등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최성묵이 취임하면서 중부교회는 각종 시국 강연회나 기도회가 열리는 장소로서 공개적인 민주 인권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한편으로 최성묵은 장애인 자활 교육, ‘생명의 전화’ 사업 등 소외받은 이들에 대한 사회사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1979년 부마 항쟁이 일어나자 유신 정권은 최성묵을 체포하여 부마 항쟁의 배후 주동자로 조작하려 하였다.

다행히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붕괴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5·18 쿠데타가 일어나자 체포를 피해 서울로 갔던 최성묵은 뇌출혈로 쓰러졌으나 위험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다. 이후 중부교회로 복귀한 최성묵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부회장과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서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 공동 대표를 맡아 노무현(盧武鉉) 상임 집행 위원장 등과 함께 앞장서 싸웠다.

하지만 6월 항쟁의 성과로 얻은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정권 교체에 실패하고, 1990년 삼당 야합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김대중(金大中)을 지도자로 하는 신민주연합당의 최고 위원으로 입당하였다. 이는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입당을 반대하였으나 삼당 합당으로 보수 대연합이 형성된 상황에서 자신을 던져 지역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1992년 3월 총선을 앞두고 최성묵은 3월 22일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사상과 저술]

목회자이자 민중 신학자로서 훌륭한 설교 원고를 남겼으나 설교집은 출간하지 않았다. 육필 원고로 남긴 6·25 체험 수기 「그의 앞에 무릎 꿇고」가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선영에 마련되었다.

[상훈과 추모]

사망 10주기를 맞아 결성한 ‘고 최성묵 목사 10주기 추모사업준비위원회’에서 추모집 『그의 부활을 기다리며』[2002]가 출간되었으며, 10주기 추모 행사가 부산에서 거행되었다. 또 민주 공원 상설 전시실에는 부산을 대표하는 민주 열사로서 영정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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