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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 항쟁과 부산 사람들의 기억-민주화의 성지, 부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004
한자 釜馬抗爭-釜山-記憶-民主化-聖地-釜山
영어의미역 The Busan-Masan Uprising and the Memory of the Busan people: Busan, the Mecca of Korea’s Democratiz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개설]

부마 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유신 독재에 반대한 민주화 운동이다.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일어나자 시민들도 적극 호응하여 가세한 대규모 반독재 민주 항쟁이었다. 부산에서는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지속되다가 18일에 계엄령의 발령과 함께 계엄군이 진주하면서 진압되었고, 마산에서는 18일부터 20일까지 지속되다가 20일 정오에 위수령(衛戍令)의 발령으로 역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부마 항쟁은 10·26 정변을 불러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김재규(金載圭)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부마 항쟁의 현장을 직접 보고 민심이 정권을 떠났음을 확인하고 유신 체제의 종식을 위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암살을 결행하게 된 것이었다. 10·26 정변으로 인해 유신 체제는 붕괴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육성해온 군부 내 일군의 정치군인들이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민주화가 지연되었고, 이에 반대한 5·18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부마 항쟁의 원인]

부마 항쟁의 원인은 정치적 원인, 경제적 원인, 사회 문화적 원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정치적 원인은 유신 체제의 억압성이었다. 유신 체제는 대통령 1인에게 고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정상적인 정권 교체가 불가능한 체제였다. 또,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와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지속적인 긴급 조치를 통해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를 철저히 억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각계각층의 국민들의 저항과 투쟁이 긴급 조치 하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둘째, 경제적 원인은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된 중화학 공업화 정책이 1979년 제2차 오일 쇼크를 계기로 불어 닥친 세계적 불황과 함께 심각한 파탄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중화학 공업화 정책을 선포하고 각 분야별로 재벌들에게 투자를 독려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과잉 중복 투자로 경제에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했고, 때마침 시작된 세계적 불황 속에서 수출 중심의 노동 집약적 경공업이 집중되어 있던 부산과 마산은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들이었다.

셋째, 사회 문화적 요인은 급격한 산업화 및 도시화와 함께 성장의 과실이 불평등하게 분배됨으로써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이것이 대중의 고통과 불만을 야기한 것이었다. 또한 유신 체제의 권위주의와 군사 문화는 새로운 문화적 감수성을 가진 청년 세대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청년 세대는 합리성, 민주성, 주체성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는 유신 체제에 끊임없이 반발했다.

부마 항쟁은 이러한 유신 체제의 모순들이 김영삼(金泳三) 당시 신민당 총재의 국회 의원직 제명 사태로 표출된 정치적 억압과 경제 불황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합쳐지면서 일거에 폭발적인 민중 항쟁으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부마 항쟁의 전개 과정]

1. 10월 16일

1) 부산대학교의 학생 시위

부마 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되었다. 시위가 일어났던 16일 이전, 정국은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민심은 이미 유신 정권을 떠나 있었다. 경제 상황은 무리한 중화학 공업화의 후유증과 제2차 오일 쇼크의 충격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979년 5월,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전당 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되면서 유신 정권과 야당의 대결이 격화일로를 걸었다. 8월에 있었던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에 대한 경찰의 폭력 진압, 9월의 신민당 김영삼 총재 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법원의 판결, 10월의 김영삼 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명 등이 이어지면서 유신 정권의 야당 탄압은 절정에 이르렀다. 바로 이 시기에 오랫동안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던 부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다.

(1)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시작하다

시위 하루 전날인 15일에도 시위 기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진걸[부산대학교 공대 기계설계학과]과 남성철이 오전 10시 본관과 도서관 등에 유인물을 배포하고 시위를 기도했으나 학생들의 호응과 결집이 기대만큼 신속하지 못해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실패라고 판단하고 철수했다. 끓어오르는 울분을 터뜨릴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은 그 소식에 땅을 치며 아쉬워했다. 바로 그날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정광민이 데모 주동을 자청하고 나섰다. 정광민은 김종세를 통해 부산대학교 내의 학생 운동 그룹들에게 조직 동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선언문을 만들 등사기를 구하러 분주히 움직였고 그날 밤 자신의 집 다락방에서 친구 전도걸과 함께 선언문을 만들었다.

10월 16일 오전 9시 30분, 정광민은 상대 강의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선언문을 배포하면서 학생들을 모았다. 정광민은 인문 사회관 앞에 모인 학생들을 이끌고 ‘자유’라고 쓴 종이를 두 손에 든 채 상대 건물을 지나 도서관으로 행진했다. 그들은 “우리의 소원은 자유”라고 노래 불렀다. 당시 도서관 앞에는 약 4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 있었고 그 주변에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잔디밭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학생 운동 조직이 사전에 동원한 인원들이었다.

오전 10시 경, 도서관 앞에서 학생들을 불러내려 애썼다. 그때 학생들 속에 섞여 기회만 엿보고 있던 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래경찰서 소속의 이성희, 김성수 형사가 자기네들끼리 “이제 깨어버리자”라고 속삭였다. 옆에 서있었던 공대 학생 이규헌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이 형사라는 것을 알았다. 형사 5, 6명이 동시에 앞으로 나가 “이제 그만 하자”면서 주동자 정광민을 붙잡으며 시위를 중지시키려 했다. 그들이 교수인지, 교직원인지 분간할 수 없어 학생들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정광민이 끌려가려는 상황이었다. 이때 이규헌이 나서 그들이 경찰이라고 소리쳤다. 이 소리에 학생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욕설을 퍼부으며 두 형사를 끌어내었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떠밀려 3m 높이의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형사들의 기습은 학생들은 격분시켰다. 시위 대열은 삽시간에 500~600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다섯 명씩 어깨동무하고 대열을 지어 교내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이 운동장에 이르렀을 때 숫자는 2,000명 선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유신 철폐”라는 구호를 외치며 농구 골대를 밀고 와 잠겨있는 신정문[철문]을 열려고 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신정문 앞에는 진압 장비로 무장한 전투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건물 옥상에서는 형사 두 사람이 망원 렌즈로 시위 대열에 참여한 학생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2) 경찰의 시위 진압 부대 교내로 진입하다

오전 10시 15분 경, 신정문 밖에서 동래경찰서장이 진압 부대의 캠퍼스 진입을 명령했다. 검정색 페퍼 포그 차량을 앞세우고 그 뒤로 방석모를 쓰고 방패를 든 진압 경찰의 대열이 따라 들어왔다. 시위 대열이 무너지면서 학생들의 투석이 시작되자 경찰은 최루탄과 사과탄을 발사했다. 진압대는 본관 건물에 최루탄을 발사해 유리창을 파손한 뒤 운동장에 집결했다. 이 진압 행동은 학생들을 자극해 시위 대열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 학생들이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3) 시위대 제1진, 구 정문을 돌파하다

문창 회관 앞에 집결한 700명 정도의 시위대가 구 정문(舊正門)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 대열이 구 정문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1,000명이 넘게 늘어났다. 구 정문에는 철문이 굳게 잠겨 있었고 담 위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철문 옆에 수위실이 있고 수위실에는 밖으로 향하는 창문이 있었는데 바깥의 땅바닥과는 1.5m 정도 높이였다. 수위실의 출입문과 창문이 다 깨졌고 뒤에서 미는 엄청난 압력 때문에 대열의 앞에 있던 학생들이 좁은 수위실 안에 빽빽이 들어차 창문 밖으로 떨어졌다. 사학과 학생 김하원이 보니 대열의 앞에 있던 여학생이 깔려 안전사고가 날 위험 상황이었다. 그는 “멈춰라. 이러면 사람이 죽는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 시위 대열을 진정시킨 후 정문을 돌파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때 벽에 걸쳐져 있던 갈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갈고리를 담 위의 철조망에 걸어 잡아당기자 철조망이 제거되었다. 그리고 큰 돌을 가져와 자물쇠를 두들겨 철문을 열어젖혔다. 일시에 교문 밖으로 몰려나간 300명 정도의 학생들은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지 몰라 잠시 웅성거렸고, 이때 경찰차 1대가 나타나자 모두 주택가 골목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경찰차는 모두 3대 밖에 없었고 나타난 1대도 학생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웠다.

학생들은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금정초등학교 앞으로 모였다. 이때 김하원이 금정초등학교 앞 도로 쪽에 모여 있는 학생들을 정돈시킨 후 금정초등학교 담 위에 올라가서 교대 쪽으로 가자고 선동했다. 교대 학생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였다. 시위대는 대개 남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온천장 방면을 향해 질주하듯 달려갔다. 온천장, 동래원예고등학교를 지나 시외 주차장[현 롯데 백화점]을 통과한 후 산업 도로로 진출하여 중앙 차선을 점거하고 걸어서 동래 방면으로 행진했다. 이 대열이 최초로 교문 밖으로 나간 시위 대열이었다. 연도의 시민들과 버스에 탄 시민들도 열렬히 호응하였다.

(4) 시위대 제2진, 사대부고 담을 부수어 교외로 나가다

부산대학교 캠퍼스로 진입했다가 밖으로 물러났던 경찰 진압 부대가 다시 본관을 향해 들어오면서 학생들은 다시 도서관 앞에 집결했다. 오전 11시 경, 2,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광민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유신 헌법 철폐하라!”, “학원 사찰 중지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 “독재 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선창했다.

이 자리에서 시위의 목표 지점을 두고 온천장, 부산역, 남포동 등이 거론되었으나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교내 곳곳에서 모인 7,000여 명의 학생들은 성난 파도처럼 넘실대는 대열을 이루어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운동장을 돌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사대부고[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당시에는 사대부고가 부산대학교 부지 내에 있었다. 시위대는 출입구에 있던 철제 셔터를 발로 차서 부숴버렸다. 그리고 한꺼번에 몰린 학생들이 좁은 출입구로 들어가려하자 대열이 뒤엉켰다. 학생들은 “질서 유지”를 외치며 차례로 사대부고 건물 2층을 통과하여 운동장으로 내달렸다.

사대부고 정문 밖에는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공대 학생 염태철을 비롯한 세 명의 학생이 농구 골대를 밀고 와서 학교 측면 담장을 몇 번 밀었더니 담벼락 한 곳이 쉽게 무너졌다. 경찰은 측면 담이 뚫린 줄을 모르고 있었다. 염태철은 그 곳을 빠져 나가자마자 바로 맞은편에 있던 주택의 담 안으로 가방을 던져 넣었다. 가방이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많은 학생들이 인근 주택 안으로 가방을 던졌다.

학생들은 곧바로 산업 도로 쪽으로 내달렸고, 산업 도로에서 잠시 멈추었다. 스크럼을 짜야 하는데 모두들 앞줄에 서기를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염태철은 학생 4명을 붙들어 제일 첫 줄을 만들었다. 그러자 모두들 사 열 종대로 대열을 맞추었다. 그렇게 해서 약 2,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산업 도로의 중앙선을 차지하고 구호를 외치며 온천장으로 달려갔다.

(5) 시위대 제3진, 사대부고 담을 통과해 나가다

제2진이 나가자 잔류한 교내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경찰의 공격에 밀려 잠시 흩어졌던 학생들이 다시 대오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가두 진출을 모색하다가 2진처럼 사대부고 출입문을 통과하여 무너진 블록 담을 나와 주택가 골목길을 지나 산업 도로로 진입하였다.

(6) 시위대의 이동 경로

제1진 300여 명은 구 정문을 나와 금정초등학교 옆을 거쳐 온천장, 동래원예고등학교를 지나 시외버스 주차장[현 롯데 백화점]을 통과하여 산업 도로로 나섰다. 당시에는 산업 도로의 교통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시위대는 산업 도로의 중앙선을 따라 양방향 1개 차선씩 2개 차선을 점거하여 교대 방면으로 행진해 갔다. 숫자는 대략 150명 정도였다. 얼마 후 동래경찰서에서 경찰차가 출동하여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진압하지는 않고 대치 상태를 유지하며 더 이상 행진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학생들도 소수 인원으로 무모하게 부딪치기보다 학교 쪽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방향을 돌려 귀교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자 경찰차도 학생 대열의 뒤를 따라 왔다. 시위대는 천천히 걸어서 구 온천장 전차 종점[온천장 입구]을 지나 당시 소방서[현 온천 시장 입구]를 통과하여 구 정문까지 도착한 후 해산했다.

제2진 약 1,000여 명은 사대부고의 담을 넘어 산업 도로로 진출했고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온천장 쪽으로 나아갔다. 시위대가 온천장 사거리 입구에 이르렀을 때 뒤따라온 기동대 트럭이 갑자기 시위대 속으로 돌진하였고, 대열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차에서 뛰어내린 50여 명의 전경들의 곤봉을 휘둘렀다. 갈라진 시위대 중 한 갈래는 온천천을 뛰어내려 명륜동 쪽으로 달아났고, 다른 한 갈래는 금성사 방면의 저지대 주택가로 뛰어 내려 잔류 세력과 합세하여 사직동 쪽으로 향했다.

사직동 쪽으로 향한 400명 정도의 시위대는 만덕 터널 앞 미남 로터리에서 150명가량의 부산진경찰서 소속 경찰 병력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 시각이 정오쯤이었다. 학생들은 인근 하수도 공사장의 자갈 등을 던졌고 방패를 갖추지 못한 전경대는 투석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그 사이에 학생들은 일부는 흩어지고 일부는 야산 등을 넘어 성지곡 수원지 방향으로 넘어갔다. 일부는 거제리 군부대 앞까지 진출하여 진압 부대와 접전하면서 “2시 부산역 집결”을 알리며 각기 시내로 진출하였다. 한편 명륜동 쪽으로 피한 500여 명의 시위대는 산업 도로를 따라 경찰의 공격을 받지 않고 교대까지 산보하듯 행진했다.

제3진 500여 명의 시위대는 1, 2진에 비해서는 조직이었다. 이들은 산업 도로를 타고 나오다 온천 입구 사거리에서 방향을 틀어 명륜동 쪽으로 나아갔다. 앞서 흩어진 2진의 일부를 흡수하며 명륜동-동래 로터리-동래경찰서-교대 입구까지 무난히 진출할 수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기사나 승객 모두가 손을 흔들거나 박수를 쳤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언론 자유, 학원 자유” 등의 구호를 반복하면서 행진했으나 질서 유지에도 노력했다. 차선의 중앙을 차지하고 갔어도 운전기사나 승객,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행진 도중 부득이 해산 당할 시에는 “오후 2시 시청 앞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대열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전달되었다.

경찰은 교대 앞 육교 밑에서 400여 명의 진압 부대를 배치하고 최루탄을 퍼붓고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공격하여 연행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시청 앞 집결”을 외치며 해산하고 버스에 올라 시내로 향했다. 교내에서도 “오후 2시 부산역”이 파다하게 전파되었고, 학생들은 삼삼오오로 교문을 나서 18, 19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버스는 학생들로 초만원이었고, 전 속력으로 내달렸다. 버스 운전기사도 안내양도 한 마음이었다. 제1 방어선인 교문이 무너지자 경찰은 서면을 제2 방어선으로 정하고 버스를 세워 학생 차림의 남녀 승객들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엄청난 교통 체증을 유발하자, 경찰은 검문을 포기하고 부산역을 제3 방어선으로 정하여 부산역 광장 등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부산역에서 대기하던 학생들을 연행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시청, 남포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2) 도심지 시위

오후 1시 30분, 시청 앞은 부산대학교 학생들로 붐볐다. 학생들은 부산 데파트 옆 광복동 입구 화단 주위에 모여 즉석 토론회를 열고 “2시 부영 극장 앞”에 다시 모이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은 모두 걸어서 부영 극장 앞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2시경, 부영 극장 앞, 미화당 백화점, 동아 데파트, 시청 앞 등 네 곳을 중심으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300여 명의 학생들이 어깨를 걸고 연좌시위에 돌입해 “독재 타도!”, “유신 철폐!”를 외쳤다.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때 광복동 입구에 진을 치고 있던 전경대가 서서히 다가와 대열 속으로 뛰어들며 곤봉 세례를 퍼붓자 한 무리는 극장 안으로, 다른 한 무리는 상가 쪽으로 피신했다. 컴컴한 극장 안은 피신한 시위대와 관람객들이 뒤엉켜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화당 백화점 앞에서 시위를 시작한 시위대는 동아 데파트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며 대열을 증가시킨 후 4줄로 스크럼을 짜고 국제 시장 안으로 진입했다. 약 5분 뒤 보수파출소 앞과 창선파출소 앞에서도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경찰과 시위대 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남포동, 광복동, 창선동 국제 시장 전역에서 벌어졌다. 경찰이 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싶으면 어느새 또 다른 시위대가 다른 골목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 일대의 시가지는 소위 ‘도시 게릴라식’ 시위를 벌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시위대는 흩어졌다 모이기를 무수히 반복하며 경찰을 괴롭혔다. 게다가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지원했다. 시위대가 지나는 거리마다 시민들이 환호와 박수로 격려와 성원을 보냈고 경찰에게는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학생들이 경찰에 쫓겨 상점 안으로 들어가면 주인들은 급히 셔터를 내리고 학생들에게 음료수를 내놓았다. 노점상 아주머니들은 학생들에게 빵, 계란, 김밥을 앞다퉈 건네주었다. 이미 시위의 양상은 학생 데모가 아니라 학생과 시민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민중 항쟁의 성격을 띠어가고 있었다.

오후 3시, 미화당 백화점 앞에는 최소한 3,000명 이상의 시위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은 학생들 위로 한 무더기의 태극기가 뿌려졌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선구자」, 「우리의 소원」,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불렀다. 얼마 후 경찰의 최루탄과 곤봉 세례가 쏟아졌다. 그래도 시위대는 지치지 않고 시위를 이어갔다. 이 무렵에는 소식을 듣고 나온 500여 명의 고신대학교 학생들도 합세하고 있었다. 동아대학교 학생들도 나와 있었다. 서로 다른 학교의 남녀 학생들이 함께 어깨를 걸고 도심을 골목길을 뛰었다.

오후 3시 30분경 미화당 입구에서 대청로 쪽으로 행진하는 300명 정도의 데모대 가운데로 황성권이 뛰어 들었다. 황성권은 마산고등학교 출신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황성권은 학생 운동가였는데 부산에 다른 일로 왔다가 우연히 시위 현장을 접하고 대열을 정비하여 시위대를 이끌었다. 여덟 명이 한 줄을 이룬 대열은 삽시간에 2,000명으로 불어났다. 이 대열은 미화당-미문화원-부산우체국- 시청 방향으로 향했는데 시청 앞에서 경찰 저지선까지 접근했다가 다시 돌아서 미화당 쪽으로 행진하기를 반복했다. 행진의 속도는 거의 단거리 달리기 같았다. 그러나 황성권은 얼마 후 대열 속에 들어와 있던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끌려갔다.

오후 4시경,남포동, 광복동, 창선동, 중앙동, 대청동 일대에서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데모대가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시위의 범위가 확대되어 중부경찰서 상황 일지에 보고된 시위 동향 기록은 2시경 광복동, 창선동, 남포동 일대에서 불붙고 국제 시장, 신창동, 보수동, 대청동으로 번져가던 시위가 4시쯤 전후해서는 동광동, 중앙동, 용두산 공원, 동대신동 등지로도 계속 확산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혹은 수천 명의 시위대가 놀라운 자생력으로 흩어졌다 결집되고 흩어졌다 또 결집되면서 남포동, 광복동, 국제 시장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휩쓸고 다녔다.

시위대가 지나가는 골목마다 다방이나 빌딩의 사무실마다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하거나 힘찬 박수로 격려와 성원을 보냈고 경찰에게 재떨이, 화분, 병 등을 내리 던져 진압을 방해하는가 하면 부산 데파트 옥상에서는 시위대 위로 색종이 가루가 뿌려지기도 했다. 몰리는 쪽은 학생이 아니라 경찰이었다. 시위는 학생과 시민이 한 덩어리가 된 민중 항쟁의 성격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시간대별 양상으로 볼 때 투쟁은 오후 2~5시 사이에는 시위형 투쟁이었고, 5~7시 사이에는 항쟁형 투쟁으로 변화되는 과정이었으며, 7시 이후부터는 항쟁형 투쟁으로 변화되었다.

오후 5시경 새부산 예식장 뒤쪽 국제 시장 골목에는 2만 명 이상의 학생, 시민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노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이 무렵 서구 동대신동 쪽에서는 동아대학교 학생들이 5~10명씩 흩어져 시내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시내에 어둠이 깔리고 학생과 경찰도 모두 지쳐 있었다. 학생들은 술집을 찾거나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고, 경찰도 소수 병력만 남긴 채 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영 극장 앞에 앉아 있던 서너 명의 학생들이 일어나더니 애국가와 부산대학교 교가를 계속해서 부르면서 “모이자! 모이자!”를 반복해서 외쳤다.

이를 신호로 골목 곳곳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극장 앞으로 달려와서 대열을 갖추어 앉기 시작했다. 이들은 곧바로 중앙로를 향해 스크럼을 짜고 나갔다. 시청 앞과 충무동 로터리 사이의 중앙로의 6차선 대로로 3~5만 인파의 장렬한 행렬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거대한 조수처럼 넘실거렸다. 시위대 속에는 넥타이를 맨 퇴근길의 회사원, 노동자, 상인, 유흥업소의 종업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과 중학생 등 다양한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려 “독재 타도!”, “유신 철폐!”, “언론 자유!”를 외치며 함성을 울렸다.

3) 시위에서 항쟁으로

저녁 6시가가까워지면서 시위는 다소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학생들도 경찰들도 모두 지쳐 거리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 부영 극장 앞에서 30대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음료수를 상자 째 가지고 와서 학생들에게 일일이 따주었다. 잠시 후 학생 서너 명이 일어나서 돌연히 애국가를 부르자, 학생들 모두가 일어나 목이 터져라 함께 불렀다. 그리고 부산대학교 교가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누군가가 “모이자!”, “모이자!”를 외쳤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300여 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중앙로 큰 길로 나섰다. 경찰이 미처 제지할 겨를도 없이 귀가 길의 직장인과 노동자,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하여 시위대는 삽시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어둠이 짙어갈수록 시위의 양상도 점차 격렬해졌다. 온건했던 낮 시간과는 달리 적극적인 공격 위주의 시위 형태로 바뀌어 갔다.

6시 40분경에는 부영 극장 앞에서 언론의 취재 차량[TBC-TV]이 시위대의 투석에 밀려났다. 관제 언론을 최초의 제물로 삼아 시위대의 물리적 공격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학생과 시민들의 돌이 정의의 화살처럼 날아갔다. “뭣 하러 여기 왔느냐?”고 묻는 질타가 빗발쳤다. 취재 차량은 허겁지겁 꽁무니를 뺐다.

저녁 7시경 도심의 대로가 시위 인파로 흘러넘쳤다. 부영 극장 앞 육교를 중심으로 시청 앞에서 충무동에 이르는 6차선 대로와 광복동 일대를 꽉 메운 5만여 인파의 물결이 도심 사이를 출렁이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이제 대학생은 완전히 소수였고 퇴근길의 회사원, 노동자, 상인, 접객업소의 종업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교생도 포함된 다양한 인파가 계층과 신분을 뛰어 넘어 혼연일체가 되어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언론 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등의 구호를 외쳤다.

밤 8시경, 경찰 진압대가 공격해 오자 곧바로 민중들의 격렬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도심의 밤하늘이 온통 희뿌연 최루탄 가스로 뒤덮였다. 민중들은 돌과 병으로 대항하였고 곤봉에는 가로수 버팀목을 뽑아 맞섰다. 밀고 밀리는 대접전이 벌어졌다. 경찰의 극악한 최루탄 가스와 곤봉 세례에 군중이 밀려나는가 하면 다시 퇴각하는 경찰을 향해서는 군중들이 야유를 퍼부으며 구호를 외쳐댔다. 경찰의 진압이 가혹해지면 민중의 적대 의식도 그만큼 높아져 갔다. 시위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공세의 기선을 잡지 못한 경찰의 진압 행태는 갈수록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시위대는 물리적인 목표물을 겨냥하여 더욱 과감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파출소와 언론 기관이 시위대의 첫째가는 표적이었다. 이날 시위대는 수백 명씩 게릴라식으로 몰려다니며 파출소를 공격했다.

8시 40분쯤 남포동 지하도 근처에서 5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벽돌과 돌멩이로 남포파출소를 습격, 파괴하였다. 이어 부산진경찰서 진압대가 들어오면서 시위대는 남포동 골목으로 일단 후퇴하였다. 100여 명의 경찰 진압 병력이 기동 순찰차와 작전차를 앞세우고 중앙로를 따라 남포동 지하도 쪽으로 진입해 왔으나 오히려 시위대의 좋은 목표물이 되었다. 돌과 병을 손에 든 시위 군중들의 집중 가격이 시작되자 경찰은 차를 버리고 달아났다. 시위대가 각목으로 포니 순찰차의 유리를 박살내고 차를 뒤집어엎고 성냥불을 당기자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뒤따르던 작전차도 화염에 휩싸였고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거리를 메웠다. 치솟은 불길로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밤 9시가 넘어가면서 경찰의 진압 작전은 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단지 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 남포동, 창선동, 광복동, 충무동 입구만은 차단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남포동과 광복동 일원의 중구 중심가에서 폭발한 “독재 타도”의 항쟁 대열은 인접한 서구 지역으로 줄달음치며 확산되어 갔다. 한쪽 거리 차도에 증파되어 오는 경찰 병력이 줄을 섰는가 하면 다른 쪽에선 민중의 대열이 인도를 메우며 이동해 갔다. 격화된 항쟁을 진화하기 위해 경찰이 ‘통금 시간 연장’을 알리며 “밤 10시부터 통행금지를 실시한다.”고 발표했지만 항쟁의 불길은 더욱 확산되어 가기만 했다.

밤 10시경에는 200명 정도의 시위 군중이 던진 유리병과 돌로 부평파출소가 박살이 났다. 그리고 광복동의 시위 군중 속에서는 “김영삼!”, “김영삼!”이라는 연호가 터져 나왔다. 국회에서 제명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시민들의 안타까움이 표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김영삼이 왜 나오느냐? 우리가 김영삼이를 위해 데모하느냐?”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아마 여야를 막론하고 사회 지도층 전체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듯 했다.

밤 10시 30분에는 보수파출소가 파괴되었다. 밤 10시 35분경에는 부민파출소 앞으로 200여 명의 시위대가 몰려왔다. 이기태 경장이 방범대원에게 문을 걸어 잠그게 한 후 자신은 정문 앞에 총을 든 채 버티고 서 있었다. 이기태 경장은 각목, 유리병, 돌멩이를 들고 있던 시위대로부터 유리병과 돌이 몇 개 날아오자, “여러분, 돌아가 주십시오. 파출소는 여러분의 재산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재산을 스스로 부술 작정입니까? 꼭 그러시겠다면 차라리 나를 죽이고 하십시오!”라고 시위대에게 호소했다. 이에 데모 군중들은 방향을 바꿔 대학 병원 쪽으로 갔다.

밤 10시 50분에는 제1대청, 흑교, 중앙파출소가 각각 습격을 받고 크게 파괴되었다. 영선 고개로, 부산우체국으로, 동대신동으로 제각기 진출한 항쟁 대열들은 보이는 대로 파출소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한 시위대가 부수고 간 후 다른 시위대가 남은 것을 파괴했으며, 다시 다른 시위대가 그것을 이어 받았다. 밤 11시 40분경에는 중부경찰서 앞에 모였던 300여 군중들이 영주동 쪽으로 흩어져 갔고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부영 극장과 동아 아케이드 앞의 군중들도 스스로 해산했다. 하지만 시위는 새벽 1시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날 밤 자정을 넘어 새벽 1시까지 계속된 민중들의 항쟁으로 남포, 부평, 보수, 중앙, 제1대청, 흑교파출소 등 모두 11개의 파출소가 파괴되었고, 부산일보, 부산MBC 방송국 등도 투석으로 유리창이 부서졌다. 여기저기 파출소에서 떼어온 대통령 박정희의 사진도 불태워졌다.

부산시에 집계된 16일 시위의 부상자는 총 110명, 그 중 경찰관이 95명, 학생이 5명, 시민이 10명이었고, 경상자가 92명,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자진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한다면 학생과 시민의 피해가 공식 집계보다 훨씬 많았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부산대학교 총학생회가 펴낸 자료집 「거역의 밤을 불사르라」에서는 항쟁 첫날에 부상한 시민, 학생들이 600여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근거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수치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시민, 학생들이 부상 사실이 알려지면 곧바로 체포될 것이 두려워 부상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자료집에서는 이날에 학생 282명을 포함한 시민 4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4) 부산 사람들의 기억

당시 부산대학교 근처에서 슈퍼마켓을 하던 정원섭은 경찰에 쫓긴 학생들을 슈퍼마켓 안에 숨겨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 데모를 하려면 여기서 하지 마라. 남포동에 가서 해라. 남포동이 얼마나 좋노? 여기는 좁아서 데모해도 실패한다. 거기 가면 시민들이 호응할 것이다. 김영삼씨도 그렇게 억울하게 당했는데 시민들은 누가 불만 질러주면 일어나게 돼 있다.”

그리고 다음날인 17일 그는 평소처럼 밀감을 배달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온천2동사무소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동사무소 2층에서 밴드를 불러놓고 유신 헌법 선포 7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불같이 화가 난 정원섭은 자전거를 세워놓고 동사무소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지금 학생들이 저렇게 피를 흘리고 있는데 대낮에 술 처먹고 노래 부르는 미친놈들이 어디 있느냐? 남포동에 나가 봐라. 지금 시민들이 데모를 하고 난린데 동사무소에서 이런 짓이나 하고 있어서 되겠는가?” 그러자 주변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주민들이 박수를 치고 호응했다. 경찰관이 와서 잡아가려고 했는데 지인이 잘 말해서 그냥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그가 온천동의 술집에 갔을 때는 손님들이 모두 흥분해서 시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산서는 학생들이 데모를 한 번도 안 했는데 한번 하면 이렇게 탁 뭉친다. 봐라. 박정희도 끝장이다. 우리가 일어서면 끝장이다.” 라고 하는 등의 자신감에 찬 이야기들을 했다. 그런 이야기에 고무된 정원섭은 자기가 술값을 대신 계산했다.

당시 부산의 삼화고무 노동자였던 추송례는 10월 16일에 회사 측의 임금 체불에 항의해서 동료들과 함께 파업을 벌였다. 이 회사는 당시 대부분의 신발 공장이 그랬듯이 폭력적 노무 관리가 일상화되어 있던 작업장이었고 그런 파업을 벌인 것도 최초의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작업을 중지하고 작업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체불 임금 지급 등 몇 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추송례는 어렵게 파업을 만들어냈지만 회사가 쉽게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쉽게 회사는 퇴근 시간 전에 모든 조건을 수락했고 파업은 승리로 끝났다. 승리의 기쁨에 들떠 회사를 나선 추송례는 그제서야 부산 시내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회사가 그렇게 쉽게 요구 조건을 수락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날 추송례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 현장 안에 진압 경찰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모두 남포동, 광복동, 여기에서 학생 데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회사 밖으로 퇴근해서 알았다. 아, 우리도 그 현장에 1,300명이나 모여 있던 우리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갔으면 어찌 되었을까. 그들과 하나가 되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다음 날인 10월 17일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하니 노동자들이 화장실, 식당, 작업장 등에서 두세 명만 모이면 수군수군 어제 있었던 데모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다. 그리고 시위하다 다친 학생, 시민들을 걱정했다. 퇴근 후에 살펴본 시민들의 분위기에 대해 추송례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7시가 조금 못되어서 퇴근을 했더니 ○○씨가 총각 한 사람과 함께 오셨다. 그래서 분위기도 살펴볼 겸 포장집에서부터 여러 술집을 옮기면서 그들의 화제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 온 시민이 이렇게 열광적으로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 술집에서 듣고 알았지만 부산진역 앞에서 또 일어났단다. 온 시민과 합세하여 KBS 방송국, 경찰서, 파출소 할 것 없이 쑥밭을 만들었단다. 아, 정말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이런 분위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무드는 완전히 잡혔나 보다.”

18일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산시 전역에 비상계엄 선포령이 내려졌다. 비상계엄 사령관에 박찬긍. … 이어 포고령이 내려졌고 통행금지가 저녁에 내려졌다. 그리고 전 부산 전역에는 무장 군인이 배치되었다. 아 두렵다. 두렵다. 어찌 되려는가. …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서면에서 또 일어났다고 한다. 계엄이 선포된 이 시간에 말이다. 그러니 이젠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2. 10월 17일

10월 16일의 대항쟁은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단 하나, 부산기독교방송이 단신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보도했던 것이 유일한 것이었으나 그나마 그날 저녁부터는 그것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에서는 전날의 항쟁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도시 내의 모든 가정과 공장, 사무실, 시장에서 어젯밤의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아침부터 뜨거운 화제로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10월 17일은 유신 선포 7주년 기념일이었다. 오전 10시에 범일동 부산 시민 회관에서는 각급 기관장, 공무원 등 2,500여 명이 모여 10월 유신 7주년 기념행사를 갖고 유신 체제를 더욱 굳게 다져나갈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아침 정부는 이수영 부산시경 국장을 대기 발령시키고 후임에 송제근 치안감을 임명했다. 송제근 치안감은 장교 출신으로 다중 범죄 진압 작전의 권위자로 전날 오후에 부산에 내려와 밤에 열린 야간 참모 회의에 참석했다. 이른 아침부터 경찰 병력과 진압 차량이 요소마다 삼엄한 경계 태세를 펼치고 있었다.

1) 부산대학교의 상황

부산대학교 당국은 전날의 교내 시위와 가두시위에 큰 충격을 받고 임시 휴교 조치를 단행했다. 교문에는 ‘임시 휴교’ 공고가 나붙고 신·구 정문에는 전경들이 배치되어 출입자를 통제하고 있었다. 부산대학교 앞에는 오전 9시경부터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약 1,000명 정도가 모였다. 이에 직원들과 함께 총장까지 나와 돌아갈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10시 30분경이 되자1,000여 명의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구 정문 쪽으로 집결하여 “유신 철폐”, “학원 자유”, “학원 사수” 등의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기 시작했다. 금정초등학교, 식물원 방면으로 진출한 시위대열은 식물원 입구 사거리에서 기동대의 급습을 받았고, 3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분산된 학생들은 다시 시내 진출에 나섰다.

2) 동아대학교의 시위

10월 16일 상당수가 도심 시위에 참가했던 동아대학교의 학생들은 17일 아침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대학교 법대생이었던 이동관에 의하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16일 밤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던 동아대학교 법대, 상대, 문리대의 복학생 친목 모임인 만우회의 멤버들이 17일 아침이 되자 강의를 듣지 않고 도서관 앞 잔디밭에 모여서 각 과별로 학생들을 잔디밭으로 모이게 하는 역할을 분담했다.

오전 11시 30분경 본관 계단 밑 잔디밭에 학생들이 모여 앉기 시작했다. 특히 정외과 2학년생들이 많았다. 2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서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늘어나자 교수들이 나섰다. “너희들 여기서 무엇들 하느냐?” 학생들은 “우 우” 야유를 보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500명으로 불어났다. 아직 리더는 나타나지 않았고 구호도 없었다. 관할 서부경찰서는 낮 12시 20분께 현장에 있던 정보과 형사들의 보고를 받고 영도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3개 소대 병력을 차에 태워 외곽에 대기시켰다.

오후 1시경에 신순기 교무처장이 “여러분들의 지금까지의 행동은 학교에서 책임진다. 즉시 강의실로 들어가 주기 바란다.”라고 방송을 했다. 이어 5교시 수업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잔디밭에 있던 학생들 대부분이 먼지를 털고 일어나 강의실로 들어갔다. 시위 같지도 않은 시위는 이것으로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날 오후 정법대와 경영대 등의 학생들이 이수하는 5, 6교시 교련[군사 훈련] 수업이 있었다. 경영학과 학생 신진에 의하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경영학과 학생들과 법대생들이 뒤섞여 교련 수업에 참석했다. 그런데 전날 시위의 영향으로 학생들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낀 교관[현역 대위]이 “똑 바로 못해?” 하는 식으로 고압적으로 나가자 학생들이 “나가라!”고 고함을 질러 내쫓았다. 그때부터 학생들은 사 열 종대로 대열을 지어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고창하고 「선구자」 등의 노래를 부르며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이 대열에 잔디밭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합세하여 숫자가 근 1,000명까지 불어났다.

그러자 갑자기 정문이 열리면서 대기하고 있던 기동대 3개 소대가 페퍼 포그 차를 앞세우고 사과탄을 던지며 올라왔다. 최루탄 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운동장의 상황을 주시하던 학생들이 갑자기 “나가자!”하는 구호를 외치며 정문 쪽으로 집결했다. 그러자 학생처장을 위시한 보직 교수들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와 학생들의 교문 돌파를 저지하면서 경찰에게 퇴거하도록 요청하였다. 학생들과 경찰은 정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고 보직 교수들이 그 사이에서 학생들을 무마하였다. 얼마 후 학생들은 석당 도서관 앞 잔디밭에 모여 다시 「애국가」, 「봉선화」,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

그때 부산대학교 학생 김홍식이 현장에 있었는데 그는 부산대학교는 휴교라 등교를 할 수 없으므로 일부는 동아대학교로, 일부는 온천장 주변에서 대시민 선전전을 한다고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입에서 입으로 5시 부영 극장 앞으로 모이자는 약속이 전달되었다. 오후 5시 국기 하강식을 기점으로 시위를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해산하여 뿔뿔이 교문을 나섰다. 일단 경찰은 학생들이 귀가하는 것으로 보고 간섭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삼삼오오로 시내를 향해 갔다.

3) 도심지의 항쟁

정오부터 남포동, 광복동 등의 다방과 술집은 학생들과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나온 교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오후 3시, 시청에서는 내무부 장관 구자춘(具滋春)이 기자 회견을 하고 있었다. 전날의 시위 진압 실패의 책임을 물어 이미 아침에 부산시경 국장을 해임했고 경찰 병력을 충분히 증강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구자춘 장관은 “2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는데 100여 명이 불량배였다.”며 단호한 대처를 강조했다. 한 기자가 “이 회견 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긴급 조치 9호에 위반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래서 부마 항쟁은 구자춘 장관의 경고를 보도하는 형식으로 기사화되었지만 실제 사태의 진상은 보도되지 않았고 부산 사태가 불량배의 난동이라는 구자춘 장관의 메시지만 전달되었을 뿐이었다.

오후 3시 45분경 옛 시민관 자리 꽃밭에 80명 정도의 학생들이 앉아서 담소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경찰은 긴장했다. 오후 4시 20분경 동아대학교에서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갈 무렵, 국제신문 앞 버스 정류장에서는 동아대학교 학생들이 무더기로 내려 광복동 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고신대학교 학생들은 2시경에 벌써 광복동 거리로 나와 있었다. 오후 5시가 되자 부영 극장 앞 육교 주위에는 군중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운집했고, 오후 6시가 되자 국기 하강식 애국가를 부동자세로 경청하고 있었다. 이윽고 방송이 끝나자 군중들 속에서 육성의 애국가가 울려나오고 이를 신호로 몇 갈래의 시위대가 형성되어 남포동자갈치 시장 골목길을 누비며 기습적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6시 30분경에는 남포동에서 “모여라!”하는 신호와 함께 4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대를 형성했다. 시위대는 “독재 타도”, “유신 철폐”를 외치며 두 갈래로 나뉘어 충무동 로터리 쪽과 국제 시장 쪽으로 각기 행진해 나갔다. 이것을 시작으로 연쇄적인 데모가 터졌다.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하고 곤봉을 휘둘렀다. 시위대를 뒤쫓는 진압 부대의 머리 위로 연탄재, 화분, 빈병들이 떨어졌다. 고층 건물 위층의 시민들이 던진 것이었다.

충무동으로 진출한 시위대는 시청 방면으로 가서 경찰과 일전을 치른 후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져 부산역 방면과 운동장 방면으로 진출했다. 운동장 방면으로 진출한 시위대는 충무파출소를 박살내고 서부경찰서, 동대신파출소 등의 유리창을 파괴했다. 부산역 방면으로 진출한 시위대는 초량1파출소를 습격하고 부산진역 방면으로 진출했다. 1,000여 명으로 증강된 이 시위대는 동부경찰서에서 경찰과 접전을 벌였다.

옛 남포 극장 자리에서 출발한 데모대는 부영 극장 부근에서 한 차례 경찰의 공격을 받았으나 그 주력은 신민당 서·동구 지구당사 앞을 지나 저녁7시 40분경 충무파출소를 덮쳤다. 경찰관들은 달아나고 없었고 모자만 열 개 남아있었다. 시위대는 모자를 모아 불태우고 몽둥이와 돌멩이로 파출소를 박살냈다. 서부경찰서는 2개 소대를 급히 충무파출소로 보냈다. 400명 정도의 군중이 완월동, 토성동, 초장동 등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밤 9시경 충무동 로터리 쪽으로 몰려가던 시위대는 김영삼 출신구인 신민당 서·동구 지구당사 앞에 멈춰 섰다. 4층 당사 사무실에서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자 시위대는 서른 살 가량의 리더의 선창에 따라 “김영삼”, “김영삼”이라고 몇 번 외친 다음 충무파출소 쪽으로 달려갔다. 뒤이어 중부산세무서와 서대신3동사무소가 습격을 받았다

국제 시장에서밤 8시경에 경찰 포위망을 뚫고 나온 200명의 시위대는 메리놀병원 앞 고갯길로 치달았다. 제2대청파출소를 지나칠 땐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 25장을 모두 부수고 전투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어 과격한 젊은이들이 쳐들어가 방범 오토바이를 길 한 복판으로 끌어내 내동댕이쳤고, 새어 나온 휘발유에 성냥을 그었다. 펑 하고 치솟는 불길을 뒤로하고 데모대는 영선 고갯길을 넘었다.

이 데모대는 가장 과격했고, 대학생들보다는 식품 접객업소 종업원들과 일반인들이 더 많이 섞인 집단이었다. 이 시위대는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을 흡수하여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파죽지세로 동부경찰서 관내를 결딴냈다. 이들은 영주동 육교 앞에서 초량 뒷길로 꺾었다. 8시 20분경 제1초량파출소, 8분쯤 뒤에는 제2초량파출소를 박살냈다. 기물을 부수고 사이카를 불 질렀다. 이들은 달리다시피 고관파출소로 쳐들어갔고, 시위대는 출발 때보다 다섯 배나 불어 1,000명 정도에 달했다. 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고관파출소를 파괴하였다.

밤 8시 55분경 성난 군중은 다시 동부경찰서로 달려갔다. 시위대는 너비 35m의 간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부경찰서와 맞섰다. 부산진역 앞을 차지한 그들은 “독재 타도!”, “유신 철폐!” 등의 구호를 외쳤다. 4·19 혁명 당시 기관총을 쏘아댔던 이 경찰서를 향해 군중들은 유리병과 돌멩이를 던졌다. 그때 동부경찰서 안에 직원은 50명밖에 없었다. 경찰은 계속해서 사과탄을 시위대에게 던졌다. 이때 구조 요청을 받은 제2 기동대의 3개 소대 병력이 작전차를 타고 나타나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 시위대는 남쪽으로 달아났다.

물러난 시위대는 동부경찰서에서 300m 쯤 떨어진 KBS 부산방송국을 덮쳤다. 방송국 건물로 유리병과 돌멩이를 던지며 구름처럼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시위대는 마당에 세워둔 TV 중계차를 각목으로 때려 박살냈다. 이때 한 시위자가 “군인들이 쳐들어온다.”라고 소리쳤다. 동부경찰서 쪽에서 완전 무장한 군인들을 태운 수십 대의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고, 군중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들은 계엄령에 대비하여 미리 시내로 배치되고 있었던 군인들이었으나 군중들은 자신들을 향해 오는 것으로 오인했다. 이 와중에 흩어진 시위대는 KBS 공격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어 다시 2,500여 명의 대규모 대열로 집결하여 부산역과 시청 쪽으로 진출하였다.

밤 9시 30분경 국제 시장의 데모대는 포위망을 뚫고 대청로로 한 가닥씩 뛰어나가고 있었다. 이날 시장 안에서 데모를 이끌었던 동아대학교 학생들 중에는 대신동 쪽에 사는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9시에서 10시 사이에 국제 시장을 탈출한 데모대는 대청로를 따라 부산지방법원 쪽으로 갔다. 거기서 일부는 좌회전하여 대학 병원 쪽으로, 대부분은 오른쪽으로 꺾어 경상남도 도청 쪽으로 달렸다. 도청에도 투석 세례가 퍼부어졌다.

시위대는 밤 9시 45분경에 서부경찰서 앞을 지나가며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을 깼다. 대신 로터리에 다시 모인 시위대는 오른쪽으로 행진, 동대신동에서 시위를 벌인 뒤 다시 중구 쪽으로 내려와 흑교파출소를 습격했다. 이후 시위대는 다시 서부경찰서를 공격했다. 수적으로 불리한 경찰은 사과탄을 있는 대로 던졌다. 그리고 곤봉으로 시위대를 닥치는 대로 두들겼다. 시위대는 서부경찰서에서 물러나 구덕 경기장 쪽으로 진출, 구덕파출소를 때려 부수었다. 이러한 행동의 주체는 학생들이 아니라 영세 상인, 종업원, 노동자 등이었다.

18일 자정에는 서부경찰서 구덕파출소가 습격을 받았다. 400명쯤 되는 군중이 유리창, 자전거, 오토바이 등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 뒤 두 갈래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 군 병력이 대신동으로 배치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데모 군중 2,000명 정도가 법원 앞과 옛 영남 극장 앞에 다시 모여 구호를 외쳤다. 서부경찰서가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해산시킨 시점은 18일 새벽 2시였다.

그때까지 이어진 항쟁으로 모두 21개 파출소가 파손 내지 방화되었고,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경상남도청과 중부산세무서, 그리고 KBS, MBC, 부산일보 등의 언론사가 투석을 당했다. 경찰서, 관공서 등의 피격 상황은 전날보다 훨씬 확대된 것이었다. 당시 시청 옆에 있던 국제신문사는 시청 방어 병력 덕에 겨우 수난을 면했다. 중구, 서구, 동구에 있던 언론사와 공공건물은 거의 모두가 습격을 받았다.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 사령관은 통금을 2시간 연장하고 각 대학은 당분간 휴교한다는 내용의 포고문 제1호를 발표했다. 17일에도 대학생보다 시민들이 훨씬 많이 참여했다. 대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아닌 식품 접객업소, 양복점, 가구점 종사원과 구두닦이, 자유노동자, 운전사 등이 많았다. 이들의 참여로 시위가 과격해졌다고 하지만 매우 도덕적이고 절제된 시위였다. 시위대는 민간인의 점포나 기물을 부수지 않았다. 혼란을 틈탄 범죄도 없었다. 흉기도 없었다.

이날 밤 9시 30분경 2관구 사령관 정상만 소장이 청와대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으로부터 데모 상황을 현장에 가서 알려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비상계엄령 선포를 결정하기에 앞서 지역 관할관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헌병 백차가 앞서고 사령관 차와 시경 국장 차가 뒤따랐다. 이들은 광복로를 지나 국제 시장, 대청로를 통과하던 중 미문화원 앞에서 교통 체증으로 잠시 멈추었다. 이때 부근의 시위대가 유리병,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차에 탄 사람들은 피신했다. 군중은 3대의 차를 박살내 버렸다. 차의 지붕은 데모 대원들이 올라가 쿵쿵 뛰어 내려앉혀 버렸다. 정상만 소장은 서울에서 다시 연락이 왔을 때 군의 투입은 필요 없다고 답변했다.

4) 비상계엄령의 선포

17일 밤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유신 선포 7주년 기념 만찬회가 열렸다. 장관들, 유정회, 공화당 국회 의원들이 모두 참석했다. 만찬과 여흥이 무르익어가던 밤 8시경에 구자춘 내무부 장관이 박대통령에게 귓속말로 부산 상황을 보고했다. 대통령은 역정을 내고 안색이 바뀌면서 표정이 굳어졌다. 만찬은 9시경에 서둘러 끝났다. 박대통령은 밤 10시경에 비상계엄령의 선포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밤 10시 30분에 야간 국무회의 소집 통고가 나왔다. 구자춘 내무장관, 노재현(盧載鉉) 국방부 장관, 박찬현(朴瓚鉉) 문교부 장관 등은 개인적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결심이 강력했고 11시 30분경 최규하(崔圭夏) 총리 주재로 국무회의가열렸다.

구자춘 내무부 장관이 부산 사태를 보고한 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비상계엄령 선포를 제의했다. 김치열(金致烈) 법무부 장관이 강력한 반론을 폈다. “부산 지방에서 데모가 난 것은 김영삼 의원 제명의 후유증이며 민주주의가 짓밟혔다고 생각한 시민들의 감정 폭발이라고 봅니다. 이런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은 정치 도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정부가 마지막 비상수단을 행사하지 않고서는 통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을까 두렵습니다. 관광, 무역,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도 생각해야 합니다. … 각하께선 올바른 정책 건의는 받아들이실 분이니 최총리께서는 비상계엄령 선포의 유보를 진언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김장관의 발언에 동조한 것은 신현확(申鉉碻) 부총리뿐이었다. 토의 10여 분 만에 최총리는 부산에 대한 비상계엄령 선포를 의결, 통과시켰다. 이용희(李用熙) 통일원 장관은 의결 후에도 한동안 서명을 거부했다.

육군 군수 사령관 박찬긍(朴贊兢) 중장은 이날 밤 9시 30분경 차지철 경호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국방부 장관이 청와대에 들어와 부산 사태에 대해 협의 중에 있으니 계엄령 선포에 대비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그는 부산시장, 2관구 사령관, 군수기지 사령부 참모장 등을 사령부로 불러 1차적인 지침을 하달했다. 18일 새벽 2시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부산계엄사령부가 설치된 군수기지 사령부에 나타났다. 김재규는 박찬긍 중장에게 박대통령의 지시를 구두로 전달했다. 골자는 “데모의 징후가 여러 타 지역에서도 엿보이니까 빨리 사태를 진정시키라”는 것이었다. 김재규 부장은 18일 아침 계엄사령부에서 열린 회의에도 참석했다. 최석원(崔錫元) 부산시장을 비롯하여 부산지검장, 시경 국장, 교육감, 관구 사령관, 법원장 등의 계엄 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재규는 “계엄군은 군의 본분에 충실하라”고 말했다.

18일 오전 10시에 김재규부산대학교를 방문하여 박기채(朴基采) 총장을 만나고 부대의 지휘부를 들린 후 당일 오후 항공편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김재규는 곧바로 청와대로 가서 박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계원, 차지철이 동행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김재규는 대통령에게 부산 사태는 체제 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 저항까지 겹쳐 일어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근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라고 발언했다.

3. 10월 18일

1) 계엄 하의 시위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박정권은 18일 밤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2개 여단의 공수 부대를 투입했다. 유신 체제 등장 7년 만에 다시 발동된 비상계엄령이었다. 거리마다 계엄 포고문과 함께 박정희의 담화문이 나붙었다. 대학의 휴교, 집회와 시위 등 모든 단체 활동의 금지, 언론 출판의 검열, 사업장 이탈 및 태업의 금지, 야간 통행금지의 연장, 영장 없는 체포 등을 알리는 포고문이 나붙었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각 대학교와 관공서에 일제히 배치되었다.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 등의 운동장에는 군인들이 캠프를 치고 정문은 착검한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무장한 계엄군을 가득 실은 군 트럭들은 장갑차를 앞세운 채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를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며 시민들을 위협했다.

18일 아침,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각 대학교와 관공서에 배치되고 시내 전역은 살벌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부산여자대학교 학생 100여 명이 굳게 잠긴 교문 앞에서 웅성거리다 시내로 나오던 중 53명이 계엄군에 의해 연행되었다.

18일 저녁 8시 반경,서면에서는 계엄군[공수 부대]이 로터리 안쪽에 차량을 대기시키고 인도와 차도 사이에 착검을 하고 늘어서서 시민들이 조금이라도 차도 쪽으로 들어오면 가차 없이 폭행을 가하고 트럭으로 연행했다. 서면 일대에는 많은 시민들이 운집하여 산발적으로 야유와 구호를 외치는 등 매우 불온한 분위기였다. 계엄군은 도로 변에만 배치되어 있었고 시민들은 여기저기서 구호를 외치고는 골목으로 달아났다. 계엄군은 이들을 쫓아 멀리까지 가지는 못했다. 대신 경계를 서고 있는 도로변을 조금이라도 넘어서면 무조건 폭행을 가했다.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정면으로 저항하지는 못했으나 다수가 운집한 가운데 원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골목으로 빠지는 방식으로 반감을 표현하였다.

당시 금은방에서 세공일을 하던 전병진 역시 당시의 분위기에 자극되어 근무가 끝난 후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서면으로 나갔다. 긴장 속에서 서면 거리의 분위기를 살피며 걷고 있던 중 그는 갑자기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 떠밀려 차도 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경계를 서고 있던 계엄군들이 달려들어 곤봉으로 사정없이 그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전병진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병원을 찾아 걸어갔다. 곤봉에 맞아 터진 머리에서는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내렸고 구두 속이 피로 가득했다. 전병진은 운 좋게 가까이 있는 한독병원을 찾아가 수술을 받아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당시 의사는 사망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당시 부산의 각 언론 기관에는 공수 부대의 폭행을 고발하는 제보가 빗발쳤으나 언론사들은 이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빗속에 어둠이 깔린 18일 저녁 8시경 남포동 동명 극장 부근 인도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야!”하는 고함을 지르며 찻길로 나섰다. 이에 시민과 학생들이 순식간에 “와!”하는 함성과 함께 300여 명이 집결하여 “계엄 철폐!”,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왓샤!”, “왓샤!”를 외치며 남포파출소 쪽으로 행진하여 파출소에다 돌 세례를 퍼부어 유리창을 박살내고 시청 쪽으로 치달렸다.

그들이 남포동으로 나오자 더욱 많은 시민들이 가담했다. 2,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시청을 향해 전진했다. 이날은 “김영삼 제명 철회” 구호가 다른 때보다 특히 많이 나왔다. 시청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200명 정도의 공수 부대 병력이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양쪽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공수 부대가 차렷 자세로 돌격하고 사과탄도 날아가자, 데모대는 흩어져 광복동, 남포동 쪽으로 달아났다.

합동통신 부산지사의 취재 차량이 현장에 나타났을 때는 데모대가 흩어진 뒤였다. 그런데 취재 차량이 동명 극장 앞 지하도 입구에 잠시 멈췄을 때 건너편 남포동 입구 골목에서 함성과 함께 300명 정도의 시위대가 우루루 몰려나왔다. 이들은 한 청년의 신호에 따라 찻길을 가로질러 취재차에 다가와서 차를 부수기 시작했다. 돌멩이와 유리병이 소나기처럼 날아왔다. 가로수 버팀목을 뽑아든 군중은 이 차에 몽둥이질을 했다. 책가방을 낀 고교생이 창 쪽으로 오더니 손가락질 하면서 “야! 이 새끼들아! 보도 똑똑히 해!”라고 소리쳤다. 이에 기자가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등학생은 “똑똑히 하란 말이다, 새끼들아!”하고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에 겁에 질린 기자의 입에서 “알았습니다.”라고 하는 높임말이 절로 나왔다.

한 청년이 몽둥이로 운전사를 찔러대자 운전사는 문을 열고 달아났다. 뒷좌석에 앉은 기자들도 끌어 내려졌다. 기자가 군중들에게 폭행을 당하기 시작한 순간 사과탄이 터지면서 군중들은 흩어져버렸다. 파출소 앞에 있던 50명 정도의 병력이 사과탄을 던진 것이었다. 남은 데모대는 차를 모로 세우고 있었다. 불을 지르려는 것이었다. 그때 공수 부대가 시청 쪽에서 행진해 오자 데모대는 흩어져 버렸다. 기자를 폭행한 데모대는 8시 40분까지 두 차례 더 시청으로 접근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이어 걸어서 귀가하는 시민들 속에 들어가 중부서 앞을 지나 영주동 육교 앞까지 와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경찰은 이들이 사라질 때까지 뒤따라가면서 일일이 그 동태를 보고했다. 상황이 종료된 것은 밤 9시 10분이었다.

2) 계엄군의 폭력

부산 사태에서 부산시가 집계한 일반 시민과 학생 부상자들 65명[자진 신고 기준] 가운데 11명이 중상으로 분류되었다. 65명 중 37명이 18일 밤에 시청 부근에서 군인들에게 두들겨 맞아 크게 다친 사람들이었다. 데모에 가담하지 않은 시민들인데도 구타를 당한 경우가 많았다. 군인들의 폭행은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데모 군중에게 곤봉을 쓸 때는 어깨 밑을 때리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군인들은 데모 군중도 아니고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는 양민들도 머리를 주로 때렸다.

군인들에게 맞아 다친 시민들의 80% 이상이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구타의 강도와 머리를 맞은 피해자의 수를 생각할 때 사망자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다친 시민들의 병명을 늘어놓으면 군인들이 어떻게 사람을 폭행했는지 알 수 있다. 병명은 주로 창자 파열, 뇌좌상, 뇌진탕, 전두부 파열상, 후두부 열창, 안면 열창, 안면부 내부 열창, 전신 타박상, 뇌경막 손상 등이었다. 부산시가 발표한 부상자 통계에 따르면 16~19일 사이에 197명이 다쳤다. 경찰 부상자의 88%인 117명은 16~17일의 데모 진압 과정에서 다쳤다. 반면 시민과 학생 부상자의 66%는 계엄군이 주둔한 18일 이후에 다쳤다.

노동자 김종길은 계엄령이 선포된 10월 19일 퇴근길에 사소한 문제로 계엄군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계엄 업무의 목적이 질서의 유지에 있다기보다 보복 감정의 발산과 가혹 행위를 통한 공포 분위기의 조성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육교를 건너 갈라니까 군인이 딱 막아. 못 가게 하는 거야. 왜 못 가느냐고. … 그때부터 시비가 붙은 건데 … 내가 보니까 낙하산 마크가 있으니까 공수특전대 겉더라고. … 왜 못 가느냐 하고, 이래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깐 … 뭐 이야기 끝에 뭐가 막 날라 오는 거야. 그냥 어깨 요쪽으로 진압봉으로 맞은 거 겉애요. 팍 때리니까 사람이 그대로 주저앉더라고. 앉아갖고 이 두 놈, 두 사람이 내를 잡고 일으켜 세우는데 뭔가 시커먼 게 날라 오는데 그때부터 인자 간 거지. 사람이. 정신을 잃어 뻔거지”[김종길 구술].

김종길은 심한 폭행을 당한 후 경찰에 인계되었지만 급성 장 파열로 고신대학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가까스로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입원비였다. 조갑제(趙甲濟)는 부산시가 경찰 부상자는 물론이고 학생과 시민 부상자들까지 아무 병원에서나 치료를 받게 한 뒤 그 병원에 의료 보험 수가로 쳐서 치료비를 지급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김종길은 그의 아버지가 통사정해서 계엄사령부가 딱 한번 찾아와 위로금을 주긴 했지만 결국은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병원에서 강제로 퇴원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구술하였다.

4. 마산의 항쟁

10월 18일부터 부마 항쟁의 불길은 마산으로 옮겨 붙었다. 마산에서는 경남대학교 학생들의 교내 시위를 시발로 하여 18, 19일 이틀간 격렬한 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20일 정오에 마산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이렇게 부마 항쟁은 군대의 동원으로 진압되었지만 그 파장은 10·26 정변을 낳았고 유신 체제의 붕괴를 불러왔다.

[부마 항쟁의 결과와 의의]

부마 항쟁은 직접적으로 유신 체제를 붕괴시키지는 못했지만 유신 체제의 모순과 민중의 분노를 극적으로 표출시킴으로써 김재규의 손을 빌어 유신 체제를 붕괴시키는 뇌관의 역할을 했다. 즉 부마 항쟁은 10·26 정변을 촉발함으로써 유신 체제의 붕괴를 초래했던 것이다. 부마 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5 공화국이 권위주의적 성격을 제한하고 궁극적으로는 민주화를 약속하는 과도기적 성격의 정권임을 내세우게 했다. 둘째, 5·18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학생 운동의 강력한 투쟁성을 촉진했다. 셋째, 5·18 민주화 운동과 함께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민중 조직화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제시했다. 넷째 유신 체제의 선전 프레임을 깨뜨리고 민주화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민주화 프레임을 제시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빵*** ☆*^!^-", 70~80년대 이야기 쉽지 않읍니다 편하게 쓸 수 있도록 기재사항 줄이면 좋겠읍니다. 2017.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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