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016
한자 十月維新
영어의미역 October Revitalizing Reforms
이칭/별칭 유신쿠데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박정희|이후락|신직수|최형우|김영삼 등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2년 10월 17일 - 박정희 대통령, 유신 체제 선포
종결 시기/일시 1972년 12월 27일 - 유신 체제 출범
발단 시기/일시 1972년 4월경 - 유신 체제 수립 계획 추진
전개 시기/일시 1972년 5월~1972년 10월 17일 - 극비리에 유신 체제 수립 계획 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2년 7월 29일 - 최형우 의원,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2년 10월 21일 - 김영삼 자택 연금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9년 10월 16일연표보기 - 10월 유신 종식의 도화선이 된 부마항쟁 발발
발생|시작 장소 청와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종결 장소 청와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정의]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朴正熙)가 단행한 10월 유신에 대한 부산 지역 민주 세력의 저항.

[역사적 배경]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전역과 개헌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집권을 연장하다가, 1972년 드디어 영구 집권을 위한 작전을 감행하였는데 이것이 10월 유신이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 곧 유신 체제의 정당성을 강변하며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다.

이후 비상 국무회의를 통해 11월 21일 유신 헌법의 가부(可否)를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신 헌법을 확정하였다. 유신 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비약적으로 강화하고 국회를 무력화시켰으며, 대통령 중임 조항을 폐지하여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12월 15일 유신 헌법에 근거를 둔 2,359명의 대의원들이 선출되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하고, 12월 23일 제8대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경과]

유신 정권의 출범 이후 전국적으로 민주 세력의 유신 반대 투쟁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야당 도시이자, 1979년 10월 부마 항쟁으로 유신 정권의 조종을 울리게 되는 부산에서도 1970년대 전 기간을 통해 반유신 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73년 12월 유신 이후 최초의 학생 시위가 부산대학교에서 일어났고,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부산대학교 학생과 기독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1974년 10월 14일에는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10월 16일에는 동아대학교 학생들이, 10월 30일에는 부산수산대학 학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 무렵 부산일보, 국제신문 기자들이 언론 자유 수호 선언을 발표하고 집회를 가졌다. 천주교 등 종교 단체들은 인권 기도회 등을 통해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1975년 10월 부산대학교에서 반정부 유인물 배포 사건이, 1976년에는 중부교회 청년부 회지 『책방 골목』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8년 4월 17일 부산대학교에서 선언문 배포 사건이, 7월에는 반정부 구호를 부산대학교 구내에 페인트로 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무렵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이 부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출마한 섬유 노조 위원장 김영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구속되었다. 또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 관련하여 박상도 등이 구속되었다. 1979년 4월에는 노경규, 조태원이 삼일절 유인물 배포와 관련 구속되었다.

한편 제도권 야당인 신민당은 당권의 향배에 따라 유신 체제에 대한 대응이 달랐다. 유신 직후 부산 출신 국회 의원 최형우(崔炯宇)는 기관원들에게 연행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는 7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종필(金鍾泌) 총리에게 항간에 청와대가 드골 식 헌법과 유사한 영구 집권의 개헌 시안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최형우는 헌병대로 끌려가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다.

부산 지역의 국회 의원이자 유력 정치인이었던 김영삼(金泳三)은 유신 선포 당시 하버드대학교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 있다가 소식을 듣고 10월 21일 귀국하였다. 귀국 길에 김영삼은 곧바로 집총한 군인들에게 가택 연금을 당하였다. 그러나 유진산(柳珍山) 체제 하의 신민당은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은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된 1974년 8월부터 시작되었다. 김영삼은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 개헌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1975년 4월 박정희와의 면담 이후 김영삼은 투쟁을 자제했고 이 회담의 후유증과 비주류 측의 공세 등으로 1976년 9월 당권을 잃었다. 당권을 잡은 이철승(李哲承)은 이른바 중도 통합론을 내세워 유신 체제와의 타협 노선을 걸었다.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 의원 총선거에서 신민당은 사상 처음으로 공화당을 득표율에서 1.1% 앞서면서 크게 승리하였다. 자신감을 얻은 신민당은 대여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1979년 5월 전당 대회에서 개헌 노선을 천명한 김영삼이 다시 총재에 당선되었다.

김영삼은 잇달아 유신 체제에 도전하는 발언을 했고, 1979년 8월 YH무역 농성 사건, 9월의 총재 직무 정지 가처분 파동을 거쳐 『뉴욕 타임즈』 기자 회견의 발언을 문제 삼은 유신 정권에 의해 국회 의원 제명 처분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는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부마 항쟁이 발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결과]

10월 유신의 결과, 부산에서는 전 시민적인 저항인 부마 항쟁이 발발하였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일어나 마산으로 번져간 부마 항쟁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전면적 저항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발동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가까스로 항쟁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부마 항쟁을 목격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박정희차지철(車智澈)을 사살하는 10·26 정변을 일으켰다. 결국 부산에서 불붙은 부마 항쟁으로 인해 김재규가 권총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유신 체제는 붕괴되었다.

[의의와 평가]

10월 유신은 무력을 동원한 친위 쿠데타로서 헌정 사상 오점을 남긴 유신 독재 체제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전국의 다른 지역과 함께 부산 지역에서도 유신 반대 투쟁은 줄기차게 일어났고 마침내 부마 항쟁이 발발함으로써 유신 체제를 종식시켰다. 10월 유신박정희 정권의 영구 집권을 획책하였으나 국민의 강력한 반독재 투쟁을 불러일으켜 결국 파탄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