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588 |
---|---|
한자 | 張起呂 |
영어음역 | Jang Gi Ryu |
이칭/별칭 | 성산(聖山),기창(起昌),살아 있는 성자,바보 의사 |
분야 |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춘식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의사이자 사회 활동가.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성산(聖山), 기창(起昌).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 793번지에서 아버지 장운섭(張雲燮)과 어머니 최윤경(崔允卿)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기려(張起呂)의 집안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독교를 신앙하였는데, 특히 할머니 이경심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장기려에게 종교적 영향을 미쳤다. 집안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할아버지 장정식은 마름 출신으로 400석을 타작할 정도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아버지 장운섭은 한학과 서예에 능하였고, 고향에서 의성소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였으며, 마을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향유사’였다. 장기려는 1932년 김봉숙[아버지는 의사 김하식]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지만, 둘째 장가용(張家鏞)만을 대리고 월남하였으며, 이후 평생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북한에 있는 자녀들은 대부분 의사와 약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부인 김봉숙은 2004년 4월에 사망하였다. 현재 남한에는 큰아들 내외와 손녀 2명이 살고 있다.
[활동 사항]
장기려는 1923년 고향에서 아버지가 세운 의성소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 교실 백인제 교수의 조수로 의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0년 평양연합기독병원[기홀병원]의 외과 과장으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의사 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일본 나고야제국대학[名古屋帝國大學]에서 「급성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45년 11월 북한 제1인민병원[평양도립병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1947년에는 김일성대학의 초빙을 받아 강의하였으며, 김두봉 등과 함께 북한 최초로 수여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6·25 전쟁 초창기에 그는 김일성대학 부속병원의 의사로 근무하면서 미군의 폭격으로 소위 ‘친자 폭탄’의 파편이 박힌 환자를 하루에만 49명을 수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기려는 후퇴하는 북한군의 퇴로를 따르지 못하고 평양에서 체류하다 평양에 들어온 국군병원과 유엔 민사처의 병원에 근무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동기로 작용하여 장기려는 1950년 12월 3일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하였다. 부산에서 그는 제3육군병원 의사로 재직하는 한편 미국에서 귀국하여 고려신학 계통의 장로교회에 ‘경남구제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던 전영창(全永昌)[거창고등학교의 설립자]을 만나게 된다.
전영창에게서 무료 구제 병원의 설립과 원장 직을 제의받은 장기려는 그와 함께 1951년 7월 1일 복음병원[고신대병원]을 설립하였다. 복음병원은 처음에 영도구 남항동에 설립하였다가 서구 암남동에 현대식 건물을 지어 옮겼다. 장기려는 1976년까지 복음병원의 원장으로 재직하였다.
한편 장기려는 1952년 4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1956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 1965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1979년 부산백병원 명예 원장 겸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또한 1943년 간암의 설상 절제 수술에 성공하고, 간암에 대한 대량 간 절제술에 성공하는 등 의사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한국간연구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다수의 저서를 남겨 외과 의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장기려는 사회 활동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일찍이 북한에서 사회주의 의료 보험 제도를 체험했던 장기려는 농촌 운동가 채규철[두밀리자연학교 교장]을 만나 덴마크의 의료 보험 상황을 듣고 취지에 동의하여, 1969년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 보험 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였다. 1969년에는 ‘간질환자회[장미회 전신]’를 설립하여 간질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에 앞장섰고, 1975년에는 가난한 환자를 돌보기 위해 수정동에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였으며, 1976년에는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설립하여 영세민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장기려는 제1회 부산시 ‘선한 시민상’을 수상했고, 1979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는데, 상금으로 받은 2만 달러를 청십자사회복지회에 기금으로 출연하였다.
장기려는 한국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며 무교회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1942년 그는 역시 무교회주의를 강조한 함석헌(咸錫憲)과 함께 ‘성서 조선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평양에서 그는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목회했던 평양 산정현교회에 나갔는데, 이런 인연으로 월남한 후에는 부산과 서울에 산정현교회를 건립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당시 기성 교단에서 배척당했던 함석헌을 산정현교회에 초빙하여 강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런 연유로 장기려는 성서 읽기 모임인 ‘부산모임’ 활동을 주도하였고, 1987년 산정현교회를 떠나 ‘종들의 모임’에 나가 1988년 새롭게 세례를 받았다. ‘종들의 모임’은 무소유로 일관하면서, 예수 당시의 믿음으로 생활하며 전도를 실천하는 모임으로, 전 세계 160개국에 걸쳐 활동하는 단체이다. 결국 장기려는 기독교인으로 태어나 기독교인의 실천을 의미를 되새기다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한편, 장기려는 이산가족의 일원으로 누구보다 분단을 아파했고 가족을 그리워했지만, 1985년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 때 천만 이산가족을 내버려 두고 혼자 특혜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끝내 가족과의 상봉을 마다하였다. 평생 가난한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준 탓에 집 한 채 없이 생활한 장기려는 끝내 가족과 만나지 못한 채 1995년 12월 25일 새벽 1시 45분에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평소에 ‘살아 있는 성자’, ‘바보 의사’라고 불렸다.
[저술 및 작품]
장기려는 생전에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외과학』, 『간 및 담 관계 질환』, 『평화와 사랑』, 『나의 회고록』, 『요한복음 강해』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장기려는 생전에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러한 활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1973년 MBC 선행상 수상을 시작으로 1974년 제1회 선한 시민상 수상, 1978년 인도장금상 수상[대한적십자사 총재 수여], 1979년 라몬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 부문 수상, 1980년 제23회 부산시 문화상 지역 개발 부문 수상, 1981년 국제 라이온스 인도상 수상, 1990년 인간 상록수상 수상[지역사회개발상록회 수여], 1991년 제1회 호암상 사회봉사 부문 수상, 1992년 제1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수상, 1995년 제4회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 수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수여]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