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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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寶水洞冊房- |
영어의미역 | The joy of the people who still visit the bookstore alleys in Bosu-dong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1가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선미 |
[보수동 책방 골목 풍경과 형성 과정]
부산은 골목의 도시이다. 동서로 길게 뻗은 형상에,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겪으며 급격히 늘어난 인구 탓에 부산에는 다양한 형태의 좁다란 골목이 도시 지형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는 중구 일대 원도심에 두드러지는데, 이런 지형을 따라 형성된 보수동 책방 골목은 부산의 독특한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은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1가의 대청 사거리에서 보수 사거리에 걸쳐 있는, 길이 150여 미터의 좁은 골목길을 이른다. 45개의 서점이 골목의 양 편으로 마주 보고 줄지어 ‘책방 골목’을 이루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이곳에 헌책을 판매하는 서점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8·15 해방 직후이다. 일본으로 쫓겨 가는 일본인들이 부두에서 압수당한 짐 보따리는 고리짝 채로 인근 국제 시장과 부평 시장 일대에 형성된 도떼기시장에 쏟아졌는데, 이 가운데 책도 섞여 있었다. 더러는 책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올 때도 있었지만, 상인들은 책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이 가져가도 그 뿐이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학생이나 지식인에게 이런 도떼기시장은 대단한 행운이었는데, 책벌레로 유명한 민속학자 김열규(金烈圭) 교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학창 시절 부산에서 마주친 도떼기시장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거기서 쓸 만한 참고서, 사전, 교양서적, 문학 작품을 알뜰하게 챙겼다. … 책을 산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던 탓에 책 갖기가 꿈이던 내게 그것은 여간한 행운이 아니었다. 땅바닥에 흩뜨려진 것에서 마음에 들 책만 골라내면서, 나는 이게 바로 노적가리[露積가리, 곡식 등을 수북이 쌓아둔 더미] 같은 보물이라고 생각했다. 고르고 골라 줄로 묶어 둘러매고 가도 누구 한 사람, 막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나의 ‘공짜 돗따[とった, 챙겼다]’였다.”
그러니 도떼기시장 바로 옆에 책방 골목이 형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6·25 전쟁을 전후해서 도떼기시장의 난전에는 온갖 상품들이 거래되었고, 피난 온 지식인들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아끼는 진귀본을 팔러 이곳을 찾았다. 뒤늦게야 헌책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장사꾼들이 헌책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 노점 헌책방이 하나둘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쟁으로 구덕산 일대와 보수동 뒷산에는 서울 등지에서 피난 온 학교가 많아서, 학생들의 통학로였던 보수동 골목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유동 인구가 많은 이곳에 책을 팔려는 사람과 책을 사려는 사람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웠고, 이들을 상대로 하는 헌책방이 성황을 이루면서 현재의 보수동 책방 골목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향수, 무궁무진함, 양서협동조합, 문화 공간]
어떤 이들이 보수동 책방 골목을 찾을까? 어떤 이유로 이곳을 찾을까? 이곳에서 고서·고미술 전문 책방을 운영하는 양수성[‘고서점’ 대표]에 따르면, “책방 골목 전체로 보면 평일 2,000 명 정도, 주말에는 그 2~3배 정도가 찾아온다.”고 한다. 책방 골목을 찾은 사람들을 만나봤다. 아들과 손잡고 온 40대의 중학교 교사 조원태는 “고등학교 때 이 녀석 『수학의 정석』 때문에 골머리 꽤나 앓았지요. 이 골목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이 책 한 권이 고교 시절을 떠 올리게 합니다.”라며 학창 시절을 추억한다. 60대 주부인 이삼순은 인터넷으로 모든 것을 검색하는 요즘 세대를 떠올리며, 헌책방 속의 “손 때 묻은 사전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 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50대 남성 둘은 이곳에서 『동아 전과』를 사서 숙제를 했던 기억, 그리고 부산대학교 앞의 서점에도 없던 책이 이곳에 있던 것을 기억해 내곤 향수에 젖었다.
1990년대까지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한 번 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기웃거리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교과서는 물론 전과 종류, 『성문 종합 영어』나 『에센스 영한사전』 그리고 각종 전공 서적을 찾아 헌책방을 뒤졌던 일은 그 시절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겪었을 일이기 때문이다.
부산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오는 이도 있고, 전문적인 서적을 구하러 보수동 책방 골목을 찾는 이도 있다. 경북대학교 이정우 교수는 ‘직접 책을 만지면서 책방 주인과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할 수 있는 헌책방’이 너무 좋아, 외국에 나갈 때도 반드시 헌책방을 가본다고 한다. 1년에 서너 차례씩 부산에 온다는 그는 헌책방의 매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산 갈 때마다 보수동에 가요. 약속 시각 2시간 쯤 전에 부산에 미리 가서 보수동 책방 골목부터 찾습니다. 헌책방 뒤지는 건 수십 년 전부터 계속해 온 내 취미 생활이지요. 미국이나 영국 갈 때도 헌책방에 가지요. 일본 진보쵸[神保町, 동경에 있는 고서점 거리]에도 물론 가봤습니다. … 헌책방은 무궁무진하다. 지난번에 뒤졌으니 이젠 없겠지 하고 가보면 살 게 또 보여요. 그러니까 또 가게 되지요. 어디서 자꾸 나오는지. 우리 출판문화가 예전부터 저력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그 어려운 시절에도 그런 책들을 만들었으니.”
한때 이 보수동 책방 골목에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과 청년들의 문화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1978년 4월 문을 연 협동서점이 그것이다. 협동서점은 지역 사회의 지적 풍토를 쇄신하고 민주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설립된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약칭 ‘양서조합’ 또는 ‘양협’]의 직영 서점이었다. 여느 서점과 달리 협동서점은 ‘양서(良書)’들을 취급했으며, 그 이익금은 전액 사회 운동에 사용되었다. 당시 부산대학교 학생으로 양서조합의 조합원 교육에 함께 했던 김종세[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 부원장]도 협동서점을 드나들던 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협동서점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고서점(古書店) 맞은편입니다. 조심스럽긴 했지만 서점 입구의 가판대 같은 곳에 유인물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동일방직 유인물을 본 기억이 나네요. 대의원 대회를 열려는 여성 노동자들을 향해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성 노동자들이 똥물을 퍼부었던 사건이거든요. 그걸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함석헌(咸錫憲) 선생의 『씨알의 소리』 같은 월간지도 있었고요. 서점의 2층은 조합원들이 세미나 장소로 사용했는데, 각종 소모임이 굉장히 활발했습니다. 소모임 가운데 농촌 문제 연구반이 있었는데, ‘아우성’으로 유명한 구성애도 그때 이 연구반에 속했어요. 지금의 남편과 만나게 된 것도 함께 연구반 활동을 하면서였지요.”
소모임에는 대학생과 사회의식이 있는 지역 청년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크게 어학, 지역 사회 개발, 전문 학술, 종교, 예술 연구 모임이 있고 각 연구 모임에는 여러 개의 소모임이 속해 있었다. 농촌 문제 연구반은 사회·여성·청소년·아동·공해·도시 문제 연구반과 함께 지역 사회 개발 연구 모임에 속한 소모임이었다. 대청동으로 이전한 1979년 3월까지 협동서점에는 500명이 넘는 대학생과 청년들이 ‘양서조합’의 조합원으로 쉼 없이 찾아들었다. 참된 지식과 정보에 목마른 지역 청년들은 협동서점을 통해 그 갈증을 해소했던 것이다.
최근 오륙 년 전부터는 이곳을 문화 공간으로 인식하며, 문화적 산책을 즐기러 오는 이들이 늘어났다. 서울 등 다른 지방에서 이곳을 찾는 이들이 부쩍 눈에 띄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현재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문옥희[‘우리글방’ 대표]의 말이다.
“부산 구경을 오시는 분들은 부산의 보수동 책방 골목을 보고서야 부산을 보았다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책방들이 마주보고 있는 좁은 골목길, 보수동 책방 골목은 한국 전쟁의 상흔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탐스러운 것들은 상처를 겪은 후에야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속에 안으로 깊은 상처가 있기에 우리의 마음을 붙잡으며 발길이 머물게 합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은 가난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에, 느린 시간 속에서 지나간 세월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옛 것은 아름다우나 요란하지 않고 잔잔한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오늘 걸어가는 이 길을 향한 희망을 말없이 선물합니다.”
이처럼 보수동 책방 골목은 찾아오는 사람도 다양하고, 찾아오는 이유도 가지가지다. 중년층과 장년층은 향수를 느끼고, 학자는 뒤져도 뒤져도 또 나오는 무궁무진함 때문에 이곳을 찾는다. 한때는 ‘양서조합’의 성원들이 민주적 열망을 조직하고자 한 장소이기도 했었고, 요즘은 문화 공간 또는 관광 상품으로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수동 책방 골목을 바라보는 이들이 등장했다. 카메라를 앞세워 책방을 탐색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책방 풍경과 책방 골목 공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들은 헌책방으로 상징되는 ‘옛 시절’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것이다. 부산디자인고등학교에서 사진반 특별 활동을 하는 박은경[3학년] 학생의 작업 노트는 보수동 책방 골목에 대한 이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거의 사라져 가는 책방 골목을 찍으러 갔다. 책방 골목에 처음 갔을 땐 무슨 문화재처럼 주위엔 오래된 것들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삭막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분위기 있어 보이는 이곳을 어떻게 찍으면 잘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느낀 이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하였다. 아주 오래된 책들 사이에 한 사람을 보았다. 정리된 책장 뒤로 가니, 한 할아버지께서 손엔 옛날 한자[와] 한글로 적힌 책을 들고 졸고 계셨다. 정말 잊혀져가는 옛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요즘 나오는 책조차도 읽지 않는다. 더더욱이나 옛날 책은 표지도 예쁘지 않고 글자도 작고 종이 색깔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때까지 옛날 책은 나에게는 별로 소중한 가치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촬영을 통해 이제는 나도 책을 읽어볼 용기가 생긴다. 옛날 책은 아니라도 나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책, 그런 책을 읽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번 기회를 통해 책과 사람의 어울림을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어떤 이는 헌책방 풍경이 가만히 들려 주는 인문적 메시지를 즐기기도 한다.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의 인문 기행에 참가한 20대 학생 이민희는 헌책방이 지닌 또 다른 측면을 말해 준다.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책들 사이로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정말로 불쑥인지라 마치 책의 낱장들 틈으로 비집고 솟아난 듯, 나를 놀래켰습니다. 나타난 그대로 잠시 멈춰 있던 작은 거미는 내 집요한 시선이 거북스러웠는지 첩첩이 쌓여 있는 책들을 타면서 빠르게 올라갔습니다. 그 동선을 따라 카메라의 렌즈가 뒤쫓았지만 그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진 작은 거미는 제가 누빌 수 없는 곳에서 다시 살아가겠지요. 글자 무더기에서 생활을 하는 그 작은 거미는 특별해 보였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벌레 하나에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곳, 그 곳이 보수동 책방 골목인 것 같습니다.”
[40년 가까이 책방 골목의 매력에 빠져있는 이성훈]
대체 무엇이 이처럼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걸까. 40년 가까이 보수동 책방 골목의 마니아로 살면서 4,000여 권에 이르는 책을 소장하게 된 이성훈을 만나서, 헌책의 매력은 무엇인지, 그에게 보수동 책방 골목이란 어떤 곳인지 들어보았다.
이성훈은 1961년 부산시 서구 완월동에서 태어나 사하구 괴정동과 하단동에서 사는 동안 충무초등학교, 영남제일중학교, 대동고등학교, 한국해양대학교를 다녔다. 현재는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서 살고 있으며, 부산과 남미를 오가는 외항선인 유조선의 선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보수동 책방 골목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고, 처음으로 책을 산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이때 이성훈이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샀던 것은 『신동아』 신년 별책 부록 3권이었다.
이성훈이 『신동아』를 알게 된 것은 이청준(李淸俊)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 때문이었다. 여름방학 때 그는 『당신들의 천국』이 포함된 독후감 도서 목록을 받았는데, 때마침 형이 사 온 『신동아』에 『당신들의 천국』이 연재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대동고등학교의 국어교사는 성균관대학교 출신의 박성열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난쏘공’[조세희(趙世熙)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황석영(黃晳暎)의 『장길산』과 같은 소설을 소개하면서 학생들에게 사회인식을 심어주려 했다. 이런 박성열 선생님에 대해 이성훈은 “요즘 말로 하면, ‘참교육’ 선생님이었던 듯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보수동 책방 골목과 인연을 맺었다.
“그 때는 ‘철학 명저 100선’ 이런 식의 제목으로 별책 부록이 나왔어요. 가격은 고등학교 때니까 아주 쌌겠죠. 당시 무가지로 나왔기 때문에 돈에 비해 상당히 가치가 있었습니다. 현재도 집에 『신동아』, 『월간 조선』의 별책 부록을 50권 넘게 가지고 있지요.”
그렇다 해도 학생 시절에는 책을 사는 것보단 ‘보수동 책방의 느낌이 좋았고, 흔히 우리가 묵향이 흐르는 곳 자체의 정서가 좋았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책을 구입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1980년대 중반이었는데, 이는 외항선을 타면서 가지게 된 ‘10개월 승선에 3개월 휴가’라는 생활 주기와 관련이 있다. 휴가를 나와도 친구들 대부분이 그와 같은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항해 중일 때가 많았다. 혼자서 음악 감상, 독서 등으로 인문학적 갈증을 해소하며 보내던 중 그는 ‘양산박’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제가 좀 어린 나이에 ‘양산박’ 문화를 접하게 된 것도, 휴가 나오면 만날 사람은 없고 [더러 있다 해도]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로 대화할 방법이 없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양산박의 말석에 앉아서 어르신들 말씀을 듣곤 했어요. 그러다가 내 맘에 느낌이 있는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보수동 책방 골목으로 가서 관련되는 책을 찾아보고, 이렇게 해서 어른들의 말씀과 책의 내용을 결합을 시키곤 했지요.”
양산박은 부산 중구 광복동에 있던 주점인데, 부산 지역 문인과 예술인의 아지트로 유명했다. 1970년대, 1980년대 부산의 문인과 예술가 대부분이 이곳을 거쳤다고 말할 정도로, 부산 문화에 활력과 소통을 공급한 곳이었다. 양산박의 문화적 영향을 보수동 책방 골목의 책과 결합시킴으로써 그는 자신의 지적 세계를 형성해 갔던 것이다.
이때부터였다. 새 책보다 헌책과 가까워진 것은. 연중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 굳이 새 책을 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신간 서적이나 새로운 사조를 접하더라도 1년 가까운 항해를 끝내고 귀국하면 그것은 이미 헌책, 1년 전의 경향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후 보수동 책방 골목은 이성훈의 지적 자양분을 공급하는 보고가 되었다.
[헌책방 골목은 금서의 저장고]
이 무렵 그가 금서(禁書)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헌책방을 찾는 원인이 되었다.
“창비사[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정희성(鄭喜成) 선생님의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그리고 양성우(梁性佑) 선생님의 『겨울 공화국』도 책방 골목에서 샀어요. 창비 시리즈[창비 시선]로 나온 것 중에 금서가 몇 권 있거든요. 그런 걸 어쩌다가 우연찮게 접하게 됐지요. 그게 일반 서점에서는 싹 거둬들였는데, 헌책방에는 좀 남아 있을 그럴 때였으니까요. … 그리고 85년돈가? 85년도로 기억하는데, 『말』지 창간호, 스테플[staples]로 찍어 나온 정본, 꺼풀[표지] 없이 나온 창간호를 책방 골목에서 구입하였고. … 그리고 그 당시의 부평 대우자동차 노조[운동]와 같은 것들을 사건별로 정리한, 그런 거[자료집]도 있었어요. 또 서울대학교에서 노래 운동 하는 [동아리] ‘메아리’에서 나온 책을, 복사를 한 노래책도 있었는데, 악보에다 ‘스팔타쿠스’라고 하면 ‘스팔타쿠스가 어떤 사람이다.’ 라는 설명도 붙여놨더라고요. 그거는 지금도 집에 복사 된 걸 가지고 있고. … 그러니까 그 당시는 사전 검열 제도가 있을 때니까, 그런 검열을 거쳐서 나온 책보다 아웃사이드에 있는 것들이 어쩌면 그 당시에 [양서였다고 생각된다.]”
이성훈에 따르면, 금서의 전성 시대였던 1980년대 후반에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는 각종 금서들이 유통되고 있었다. 그 종류도 시집과 잡지를 비롯하여 노동 운동 단체의 팸플릿과 학생 운동권의 노래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일반 도서와는 전혀 다른 유통 경로를 지닌 ‘헌책의 길’을 따라 금서들은 독자에게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헌책방 골목은 비매품 도서 장터]
헌책방의 매력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비매품 도서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이성훈은 생각한다. 그는 여느 학생과 달리 학습 참고서가 아니라 시사 잡지의 부록을 매개로 책방 골목과 인연을 맺었다. 이 경험은 그의 도서 구입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비매품 도서에 눈뜨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개인이나 공공 기관이 발행하는 비매품들은 개별 시민이 관련 정보를 알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이들 가운데 일부는 헌책방으로 들어오게 마련이고, 헌책방에 들어오면 그것은 구매할 수 있는 도서가 되는 것이다.
“어제 산 책 중에 이 책은 비매품인데, 『시기별 지역별 우리 바다 어류』라는 책입니다. 어느 시기에, 어느 지역에서, 어떤 고기가 잡히고, 어떤 방법으로 잡는다 하는 걸 다루고 있어요.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이거든요. 근데 이런 책은 이제 헌책방이 아니면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가진 자료를 개인적으로 출판하는 비매품 도서들도 있거든요. 그런 책은 찾는 사람에게는 귀한 자료지만, 어떻게 돈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없거든요. 그런데 그런 게 헌책방에 들어오면 우리가 사서 가질 수 있게 되지요.”
실제로 공공 기관에서 발행하는 비매품 도서 가운데는 문헌적 가치나 전문성은 높지만 상업성이 낮다는 이유 때문에 일반 출판사에서 발행할 수 없는 책이 상당수 존재한다. 최근 들어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어, 수록하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가치는 물론 도서의 품질 수준도 더욱 높아지는 추세이다. 비매품 도서의 유통 경로에 관한 이성훈의 발견은 예리한 데가 있는 셈이다. 몇 년 전부터 이성훈은 부산과 부산학 관련 책의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이를 수집하는 데 보수동 책방 골목만큼 좋은 데가 없다고 한다. 근대 도시 부산에 관한 공공 출판물이나 개인이 낸 출판물은 헌책이 되어 죄다 보수동 책방 골목으로 들어온다고 보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뭍에서 보내는 기간 중에 보수동 책방 골목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그러는 동안 서점 간의 차이와 서로 다른 특징도 눈에 들어오고, 책방 주인의 안목과 개성이 그런 차이와 특징을 만든다는 것도 느껴졌다. 자연스레 단골 책방도 생기고, 책방 주인과도 친해졌다. 책을 소장한 이가 사망한 뒤 유족이 그 책을 처분하는 사례가 대표적일 텐데, 한 사람에게서 한꺼번에 다량의 책을 구입하게 될 경우 헌책방에서는 한동안 그것을 한 곳에 모아 꽂아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임시적이긴 하지만 일종의 컬렉션인 셈이다. 관련된 취향을 가진 단골이 찾아오면 책방 주인은 이를 소개한다. 책의 임자를 찾아주는 것, 이럴 때 헌책방 주인의 역량이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요즘 들어 인터넷 헌책방이 생겨나서 편리함을 더해주고 있지만, 이성훈은 보수동 책방 골목과 같은 오프라인 책방을 고집한다. ‘헌책방은 이쪽저쪽 뒤지는 게 맛’인데, 인터넷 헌책방은 그런 재미가 없다는 게 이유이다. 직접 책을 뒤적이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거나 뜻하지 않은 책을 만나게 되는 행운 또한 책의 제목만을 보고 선택해야 하는 인터넷 헌책방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재미라고, 그는 말한다. 책방 골목이 주는 묵향, 골목의 느낌, 인간적 교류 등 만만찮은 매력도 덤으로 얹혀있는. 어느덧 그의 휴가에서 보수동 책방 골목은 빠트릴 수 없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작은 책이지만 반복해서 보거나 오래 볼 수 있는 책]
배에 오를 때도 이성훈은 책방 골목의 책들과 함께 올랐다. 그는 한국에는 거의 안 들어오는 미국 국적의 유조선을 주로 탔고, 이 때문에 승선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 바꿔 타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가야 했다. 배에 오른 뒤까지 생각하면 짐은 최소한으로 꾸려야 했다. 그래서 책을 가져가는 데도 요령을 가지게 되었다. 승선할 때 그는 부피는 작지만 내용이 많아 오래 볼 수 있는 사전 종류의 책을 챙겼다. 철학 사전, 음악 용어 사전, 미술 용어 사전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작은 책이지만 반복해서 보거나, 오랫동안 음미할 수 있는 책을 즐기는 버릇이 생겼다.
시집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런 버릇과 관련이 있다. 시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어서, 반복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는 주로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한 시집을 즐겼는데, 차츰 취향이 바뀌어 최근에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 시집을 주로 읽게 되었다고 한다. 창비의 시집은 강렬하게 느낌을 주지만, 문지의 시들은 두고두고 새로운 느낌을 준다는 것이 이유다.
처음 배를 타기 시작했던 24살 때부터 37살에 결혼을 할 때까지 그는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독서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무관한 분야의 책을, 그것도 다양하게 읽는 것은 통섭(通攝)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전혀 별개라 생각했다가도, 어느 순간에 이것들이 서로 결합되는 게, 요즘 부쩍 이런 재미가 많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현재 중학교 사회과 교사인데, 그녀를 소개한 이로부터 ‘음악 선생보다 음악을 더 많이 아는 사회과 교사여서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것’이라는 말에 호감이 갔다고 한다. 이 역시 통섭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해 휴가 기간에 그는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에서 개설한 ‘부산 원도심 세르파 아카데미’라는 인문학 강좌를 수강했다. 이 강좌는 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에 이르는 부산의 원도심 일대의 인문 지리적 성격과 역사 문화적 특징을 인식함으로 원도심의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기획된 것이다. 그런데 이 강좌에서 그는 색다른 즐거움을 맛보았다. 강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소장하고 있는 도서 가운데 관련되는 책이 있는지 확인했는데, 그럴 때마다 최소한 세 권 이상의 관련 도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강좌가 모두 28개 주제, 14회로 진행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님에도 강좌마다 빠짐없이 관련 도서를 그만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책 대부분이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구입한 것임은 물론이고, 통섭이라는 관점에서 지녀왔던 독서 패턴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책방 골목의 헌책방이 맺어주는 사람들과의 인연]
헌책이 이어주는 사람과의 인연은 그 느낌이 각별하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지우를 만난 기분이랄까. 보수동 책방 골목의 헌책방 덕에 이성훈은 때때로 그런 짜릿함을 맛본다. 이번에는 ‘부산 원도심 세르파 아카데미’ 강좌에서였다. 여기서 그는 이전에 책으로 만났던 이들을 직접 대면하는 즐거움을 가졌다. 강좌를 맡아 준 부산대학교 사회학과의 김희재, 이동일 교수가 그들이다. 두 사람은 부산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퇴직한 박재환 명예 교수의 제자들로서, 박재환 교수와 함께 부산 지역의 생활사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중진 연구자이다. 그리고 평소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성훈은 일찌감치 김희재, 이동일 교수의 저작을 접했던 터수였다.
“몇 년 전부터 부산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요, 『부산인의 신생활 풍속』[부산발전연구원, 2004], 『부산의 산동네』[부산발전연구원, 2008] 같은 책을 되게 재밌게 읽었어요. 그게 다 박재환 교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쓴 책이더라고요. 그런데 여기서 김희재, 이동일 교수님을 만나 이렇게 얽히게 되니 놀랍고 반가웠지요. 강의의 내용도 책하고 비슷하니까, 책을 볼 때 궁금했던 걸 질문도 하게 되고요.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다음에도 제가 가진 책의 저자 분을 어디선가 마주칠 거라는 기대가 생기네요. … 그리고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제가 단골로 가는 책방 가운데 ‘우리글방’이라는 책방이 있는데요. 우리글방 대표인 문옥희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게 되었는데, 문 사장님이 박재환 교수님 아래서 부산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다녔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도 ‘참, 묘한 인연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는 자신이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구입한 책과 같은 책을 역시 책방 골목에서 산 사람을 만났을 때도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함께 ‘부산 원도심 세르파 아카데미’ 강좌에 참여한 동의대학교 건축학과 신 모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긴 일이다.
“강의 후 뒤풀이 자리에서 제 맞은편에 동의대 건축학과 신 교수님이 앉으셨지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며칠 전에 보수동에 가서 『양산박 - 최화수 넌픽션』[지평, 1990]을 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마침 제 가방 안에 그 책이 있었어요. 물론 저도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샀지요. 그래서 꺼내 보여드렸는데, 그 순간 어떤 진한 교감 같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근데 그 분은 그날 처음 강좌에 오신 거였어요. 그래서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받았어요, 며칠 뒤에 대우서점[보수동의 헌책방]에 갔더니 사장님이 저한테 ‘동의대 건축과 교수라고 하면서 얼마 전에 와서 책을 사 갔다’고 하시데요. 알고 보니 그 분이었어요. 보수동 책방 골목이 아니라면 금방 잊혀질 만남인데 … 하는 생각을 하니, 그 분과의 인연은 헌책방이 만든 거란 생각이 들데요.”
거꾸로, 우연히 만난 사람이 나와 헌책방의 인연을 맺어주기도 한다. 지금도 그는 강의를 듣거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관련 서적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 곧바로 책방 골목으로 달려가곤 하는 것이다.
“어제 보수동 헌책방을 들린 이유는 지난번 홍순연 박사의 ‘근대 건축물’ 강의를 듣고, 예전에 그와 관련된 책을 대우서점에서 보고는 살까말까 하다가 그냥 온 기억이 나서였습니다. 근데 다시 가 보니 책이 없더라고요. 원래 그 책이 꽂혀있던 곳은 책방의 바깥쪽이었거든요. 그래서 책이 팔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장님이 다른 구석에서 찾아 주데요. 강의를 듣거나 남의 이야기를 듣던 중에 이런 식으로, ‘아! 저 이야기는, 저 주제에 관한 책은 어느 서점 어느 위치에서 본 적이 있는데’라는 생각이 번쩍 들 때가 있어요. 그러면 바로 그 책방으로 달려가, 그 책을 찾고, 그리곤 삽니다. 이럴 때 큰 즐거움을 느낍니다.”
헌책을 매개로 맺어진 인연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다시 그 인연을 쌓아가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사소한 일에 불과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에 큰 기쁨과 때로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헌책방 마니아가 아닐까. 그런 희열이야말로 헌책방 마니아의 전유물이 아닐까.
[책방 골목의 변천]
이런 책방 골목도 세월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3~4년 전부터 보수동 책방 골목의 변화는 더욱 뚜렷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책방 수의 감소이다. 한창 전성기 때는 책방 수가 칠십 개가 넘었는데 지금은 마흔 다섯 개로 줄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더 이상 줄어들지는 않고 있다. 내리막 추세가 멈춘 것이다. 이성훈도 최근 3~4년 전부터 책방 골목의 변화를 뚜렷이 느낀다고 한다.
“과거 2005년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변화의 기미가 없고 계속 세태의 변화와 동떨어진 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커피 붐이 불면서 커피 전문점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어제 제가 세어보니 커피점이 여덟 개 생겼더라고요. 그러더니 디아이와이(DIY)라고, 빈티지 나무를 가지고 가구 만드는 집도 생겼지요. 그래도 이건 헌책방 이미지하고 잘 맞아떨어지는 거 같은데, 프랜차이즈 커피점은 이 거리에 잘 안 맞는 느낌이네요. 그리고 전에 없던 레스토랑도 한 개 들어왔고 …”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투다. 이런 변화가 사람들을 책방 골목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를 도서 구매로 연결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인 셈이다.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거래되는 책의 종류가 달라진 것도 변화이다.
“제가 [이 보수동 책방 골목을] 다니던 시기에는 학생들 사전류, 교과서류가 주종이었죠. 신학기가 되면 동네 서점이나 학교 앞 서점들은 그 두 달 장사해서 일 년 먹고 산다고 얘기했을 정도였지요. …… 지금은 그런 거 내놓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사전류 그거, 요즘 누가 종이 사전 봅니까? 그래서 책방 골목 안에 계신 분들도 그런 트랜드를 따라서, 말하자면 물건이 달라진 것이죠.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새 책으로 된 게 되게 많아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공공 기관에서도 일정 시기가 되면 보존할 데가 없으니 책을 내놔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어느 도서관에서 나왔다고 도장이 찍힌 책도 [나옵니다].”
책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책방 골목을 찾는 발길이 잦아진 것도 변화라고 할 수 있다. 3년 전인 2010년 텔레비전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보수동 책방 골목을 소개한 이후에 이곳을 찾는 발걸음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케이티엑스(KTX)를 타고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책방 골목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른바 ‘향수 마케팅’ 상품으로서 보수동 책방 골목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사례이다.
한편 최근 들어 보수동 책방 골목의 서점들도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개별 서점의 경우로는 ‘우리글방’처럼 책방 안에 북 카페를 두어 안락함을 추가하거나 복층을 활용하여 책방 내부를 미로처럼 만들어 탐색하는 즐거움이 있는 공간을 연출하기도 하고, ‘책의 마음’과 같이 간판부터 색다르게 바꾸어 분위기를 바꾸는 책방들도 늘어나고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책방 골목의 책방 전체가 참여하는 축제를 진행하기도 한다. 2004년 고서점의 양수성 대표가 주도하여 시작된 이래, 올해로 10년째를 맞고 있는 보수동 책방 골목 축제가 그것이다.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가 주최하는 이 행사는 책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활동과 각종 전시회, 주민이 참여하는 공연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 축제로 책방 골목은 단순히 헌책을 사고파는 데 머물지 않고, 책을 매개로 하는 문화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썰렁하던 책방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는 효과를 발휘했고, 시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성과를 거두면서 보수동 책방 골목의 재생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2010년 책방 골목에 문을 연 보수동 책방 골목 문화관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책방 골목이 지닌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려는 책방 골목 상인들의 노력과 중구청의 입장이 합치되어, 전국 유일의 책 문화관 개관이라는 결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곳에서는 헌책과 책방 골목이 지닌 역사성을 지역 사회에 알리고 시민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전시와 공연 및 관련 강좌 등 책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그것이다. 동시에 북 카페는 책방 골목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하여 편의를 돕고 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
보수동 책방 골목은 오래된 정보와 새로운 정보가 교차되는 길목이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이곳에 모여진 책들을 매개로 책방 골목은 지역 공동체의 정보와 지식의 창고로 역할을 해왔고,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로써 책방 골목이 지닌 인문적 상상력은 지역 사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함께 할 것이다.
한때 한국 도서 문화의 주축을 담당했던 헌책방 골목이 전국 대도시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지금, 보수동 책방 골목은 ‘전국 유일의 헌책방 골목’으로서 비교 불가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20세기와 21세기 격변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변신을 통해 거듭나려는 보수동 책방 골목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책방 골목을 찾는 사람들의 즐거움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