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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60
한자 -釜山-生活-新石器東三洞-
영어의미역 The life of the Busan people recorded in the shell mound: Dongsam-dong in the Neolithic Period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태종로 279[동삼2동 749-8 ]
시대 선사/석기
집필자 김수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연표보기 - 동삼동 패총 전시관 건립
관련 시설 동삼동 패총 전시관 - 부산광역시 영도구 태종로 279[동삼 2동 749-8]지도보기

[해운대를 찾아온 몽골리언 사냥꾼]

100년 전만 해도 변방의 어촌 마을 부산이 이 정도 덩치를 불린 것은 개항, 전쟁, 산업화 물결과 함께 부산으로 이주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이주민의 역사가 부산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새삼 궁금해지는 질문 하나, 부산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을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의 출발은 부산의 대표적 신도시 해운대구 좌동우동의 구석기 유적에서 시작된다. 신도시 유적을 비롯한 부산의 구석기 유적지인 해운대구 청사포금정구 노포동은 석기를 제작하고 필요한 도구를 만들던 장소, 그러니까 주거지가 아니라 동물의 이동을 감시하던 야외 캠프 등으로 쓰였던 흔적이다. 유럽의 크로마뇽인들처럼 해운대 일대를 무대로 사냥을 하던 구석기인들이 말 무리나 매머드를 절벽으로 몰아넣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작은 사슴이나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빙하기 혹한과 맹수들을 피해 이주하던 시베리아의 구석기인들은 매머드를 쫓아 베링 해를 건너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 되었고, 일부는 동해안을 따라 한반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다부진 체구, 옆으로 찢어진 눈, 납작한 코, 튀어나온 광대뼈를 가진 사람들의 예술품 중에는 작은 키에 엉덩이와 허리가 지나칠 정도로 강조된 여성상들이 발견된다. 작고 옆으로 찢어진 눈은 눈부신 설원에서 살아야 하였던 이들의 실명(失明)을 막기 위한 신체 구조가 진화한 결과였고, 혹한 속에서 내장의 기능과 원활한 혈액 순환을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피하 지방은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었다. 지금이야 부산 사람, 아니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외모지만 부산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들은 바로 이들 빙하기의 승리자, 몽골리언이었다.

그렇다면 해운대에 처음 흔적을 남긴 이들 구석기인을 최초의 부산 사람으로 임명해도 될까. 이들이 살았던 지금으로부터 1만 2000년 전의 지구는 평균 온도가 지금보다 16° 정도 낮은 빙하기로, 수분의 상당량이 얼음 또는 눈의 형태로 남북 양극과 고산 지대에 쌓여 있었다. 이 때문에 해양에서 증발한 수분이 비가 되었다가 민물로 바뀌어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양은 감소하였다. 그 결과 대륙붕이 넓게 퍼져 있는 대한 해협은 육교로 바뀌어 한반도는 일본 열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사냥감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본능을 지닌 몽골리언 사냥꾼.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 가면서 매머드 같은 동물들은 멸종하거나 더 이상 남하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이들의 선택은 그들이 마지막 목격한 거대 포유류의 흔적을 따라 남쪽으로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실은 해운대 지역 구석기 유물들이 일본 규슈 지역의 후기 구석기 시대 유물에서 발견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무덤 아닌 신석기 타임캡슐, 조개더미]

요동치던 구석기 시대의 지형과 기후 변화가 점차 지금의 지형과 기후를 갖게 된 것은 후기 구석기 내지 신석기 초기에 와서다. 그로써 빙하기에 적응하도록 진화해 온 대형 동물들은 서서히 전멸해 가고 대신 플랑크톤의 대량 서식으로 해산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대략 6000년 전의 어느 단계에선가 해수면은 현재 높이까지 상승하였고,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육로는 사라졌다. 해수면의 상승으로 신석기인들의 생활 가운데 어로 활동은 주요 생업 기반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를 특징짓는 지표가 되었다. 이러한 어로 활동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신석기인들이 생활하면서 먹고 버린 각종 생활 폐기물이 쌓여 형성된 조개더미[貝塚]이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만큼 동·서·남해안의 여러 곳에 조개더미가 남아 있는데, 분포 지역은 두만강 어구의 서수라(西水羅)와 웅기(雄基)에서 시작하여 경상남도에 이르고 압록강 어구에서 서해 연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형성되어 도서 지역에서도 간혹 발견되고 있다. 이들 조개더미는 신석기 시대에 형성되었다가 농경 생활이 본격화되는 청동기 시대에는 거의 형성되지 못하였으며, 어업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철기 시대에 들어와 김해·웅천·양산 등에 남아 있다.

조개더미는 과거 인류가 식량으로 채취하며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오랜 기간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신석기 시대 옛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바닷가에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해안가에 지천으로 널린 조개들은 신석기인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식량 자원이지만, 속살을 발라낸 조가비는 지금이나 그때나 처치 곤란한 음식물 쓰레기였다. 지금과 달리 별다른 법적 제제가 없던 구석기인들이 조가비를 마을 부근 일정 장소에 내다 버린 쓰레기가 지금의 조개무지, 조개더미, 조개 무덤, 패총이라 불리는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땅은 산성이 많이 함유되어 동물 또는 물고기 사체나 뼈 등의 유구(遺構)나 유물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석회질을 주성분으로 한 조개껍데기는 토양을 알카리성으로 바꿔 조개더미 안에 제 모습을 갖춘 유구나 유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오랜 세월 내린 비는 조개 속의 칼슘을 녹여 조개더미가 품고 있는 유기체의 뼛속을 채워 주고, 흙 입자 속에서 규산이 흘러나와 뼈 자체를 코팅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개더미에서는 파손된 토기와 석기, 뼈 연모, 토제품 등 생활 도구뿐만 아니라 무덤과 화덕 시설 심지어 집자리까지 발견되었다. 조개더미는 그 이름과 달리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과 각종 정보를 보관한 살아 있는 타임캡슐인 셈이다.

부산은 해양 도시답게 바닷가도 넓고 섬도 여럿이어서 조개더미가 많다. 부산 동삼동 패총을 비롯하여 100년 전통 송도 해수욕장에서 서쪽으로 2㎞ 떨어진 곳에 암남동 조개더미가 있고 1934년 부산고고학회에 회원들에게 발견된 다대포 조개더미사하구 몰운대 입구에 있다. 바다뿐만 아니라 강물을 따라서도 조개더미는 만들어졌다.

1972년 양계를 하던 사람들이 닭 사료로 쓰기 위해 퍼 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고하면서 발굴에 들어간 금곡동 조개더미는 독특한 집자리 때문에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금정산 산줄기 바위가 만든 그늘에서 살았던 금곡동 조개더미의 주인공들은 신석기 마지막 단계인 기원전 3000년~기원전 4000년경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삼면으로 둘러싸인 동굴 집에서 바라보던 낙동강 하구는 지금의 북구 금곡동 율리 근방이고 지금의 강서구가 아직은 바닷속에 잠겨 있을 때였다.

부산 동삼동 패총영도 대교를 지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태종대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육지가 된 조도[와치섬]에 들어선 한국해양대학교 진입로와 태종로의 약간 경사진 고갯길에 올라서면 2002년 세워진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동삼동 패총 전시관이 위치한 곳이 원래 패총이 있던 자리다. 그런데 영도에는 부산 동삼동 패총 외에도 동일한 성격의 유적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약 1.5㎞ 떨어진 동삼동 상리 조개더미는 제2의 동삼동 패총으로 불리는데, 이곳은 동삼동 패총 사람 가운데 이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밖에도 부산 동삼동 패총과 마주보고 있는 조도 조개더미는 신석기 이전의 생활 흔적이 보이기도 하고, 철기 시대 고리 자루 큰 칼[環頭大刀]를 껴묻은 것으로 보이는 인골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영선지구대 근처의 영선동 조개더미에서는 다수의 덧무늬 토기[隆起紋土器]가 발굴되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덧무늬 토기는 한반도 남부 지역의 조기 즐문 토기(櫛文土器)[빗살무늬 토기]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학계에서 특정 토기 이름인 융기문 토기를 조기 즐문 토기 양식명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발굴된 자료의 다양성과 풍부함, 유적의 규모와 대표성, 타 지역 토기 문화와의 차별성 등에서 볼 때 ‘동삼동식 토기’로 명명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이런 덧무늬 토기 가운데 둥근 공을 마치 반으로 자른 듯한 반구형의 바리때 모양에 토기 입 둘레의 한쪽에 물을 따를 수 있는 구멍인 주구(注口)를 만들고 윗부분에 돌아가면서 W자 형태로 진흙 띠를 붙인 뒤 띠 모양의 눈금을 새긴 덧무늬 주구 토기[隆起紋注口土器]는 보물 597호[문화재명 토기 융기문 발(土器隆起文鉢)]로 지정되었다.

[한국 고고학이 시작된 부산 동삼동 패총]

동삼동이 자리한 영도의 주봉인 봉래산은 세 개의 봉우리를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동남쪽 봉우리 끝에서 바닷가로 내려오는 지점에 원래 3개의 동네, 즉 상리·중리·하리가 있었는데 이들 세 곳을 행정적으로 통합한 명칭이 동삼동이다. 부산 동삼동 패총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29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의 교사인 오이가와 다미지로[及川民次郞]와 요코하마 쇼사부로[橫山將三郞]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이듬해인 1930년과 1932년에 두 차례씩 모두 4차례 시굴 조사를 벌여 빗살무늬 토기와 흑요석 등 신석기 유물을 발굴하였다. 일제 강점기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일본인에 의해 소개된 부산 동삼동 패총의 진가가 확인된 것은 광복이 되고 십 수년이 지나서였다.

40대 초반 고고학의 길로 들어선 미국인 A. 모아와 L. L. 샘플 부부가 한국행에 오른 것은 1962년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해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될 정도였으니 고고학 발굴, 특히 신석기 시대에 대한 연구나 연구자는 손에 꼽을 정도의 시절이었다. 당시 발굴에 참여한 원로 고고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외국인에 의한 발굴 조사라는 점에서 문제점도 있었지만, 당시 발굴에 참여한 한국 연구자들이 최신의 발굴 기술을 접할 수 있었고 한국의 신석기 문화가 해외에 알려지는 등 고고학적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부산 동삼동 패총의 발굴 결과는 1966년 한국학 관련 학술지인 『조선 학보』에 중간보고 형식으로 게재되었다. 당시 최신 기술인 리비의 탄소 연대 측정 방법으로 측정한 부산 동삼동 패총의 연대가 기원전 3000년까지 올라간다는 보고는 우리 고고학계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마침내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대학교가 3차에 걸친 공동 발굴한 결과 부산 동삼동 패총의 전모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발굴 결과 패총은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하면서 남해안 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유적임이 밝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 조사를 통해 당시까지는 가장 오래된 토기로 알려져 있던 빗살무늬 토기보다 시대가 앞서는 덧무늬 토기와 지두문 토기(指頭文土器)가 확인되었다. 나아가 이를 통해 신석기 시대 전기(前期)에 앞서는 또 다른 신석기 시대 문화층을 ‘조기(早期)’라고 설정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9년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패총의 문화층은 크게 조기·전기·중기·말기의 5개 문화층으로 나누어지며, 기원전 8000년부터 기원전 4000년까지 약 4000년 동안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 문화층에는 일상생활과 생업 활동에 필요한 각종 토기류와 석기, 골각기, 조개 제품 토제품, 의례구를 포함하여 당시 자연환경과 식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다양한 자연 유물이 출토되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층인 제1문화층[기원전 8000년~기원전 7000년]에서 출토된 흑요석제 석기는 부산 동삼동 패총 사람이 이른 시기부터 바다 건너 일본과 교류하였음을 알려 준다. 부산 동삼동 패총 문화가 가장 활발한 제3문화층[기원전 5500년~기원전 5000년]에서는 전형적인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투박조개를 가공한 조개 팔찌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특히 1호 집자리에서 발견된 불에 탄 조, 기장은 당시 신석기인들이 어패류뿐 아니라 잡곡 농경을 통해 식량 자원을 확보하였음 보여 준다. 말하자면 부산 동삼동 패총은 신석기 문화의 전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적이다.

[동삼동 패총인의 생활과 문화]

해안가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여 집단을 이룬 동삼동 패총 사람들은 사계절 변화에 적응하면서 한 해의 살림살이를 마련하였다. 그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가장 큰 관심사인 먹거리는 계절별로 필요한 생업 활동을 통해 해결하였다. 봄에는 조·기장의 파종, 야생 식물의 채집, 조개 채취, 여름에는 고기잡이, 가을에는 도토리 등의 견과류 채집, 겨울에는 사슴이니 멧돼지 사냥을 하였다. 이 중에서 가을은 식량을 획득하는 데 1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이었다. 또한 일상생활에 필요한 토기·석기 만들기와 집짓기, 때로는 먼 거리를 이동하여 다른 집단과 특산품을 교환하는 원시적인 교역 활동도 하였다.

1. 주거와 유적

처음에 인류는 동굴이나 바위 그늘[岩蔭住居]처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동굴이나 바위 그늘이 아닌 곳에서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껴 인위적으로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대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집은 움집[竪穴住居], 동굴 주거, 부석 주거(敷石住居), 바위 그늘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움집이다. 부산 역시 다른 곳과 같은 양상을 띠었을 것으로 보인다. 움집이란 땅 밑을 1m 정도 파고 벽 가까이에 기둥을 세워 원뿔 모양의 지붕을 씌운 것을 말한다. 움집 내부에는 가운데 화로를 설치하고, 한쪽에 음식물을 저장하는 시설물을 만드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확인된 주거지는 1999년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조사에서 3기가 전부이나 출토 상태로 보아 패총 아래에는 다수의 주거지가 분포할 것으로 생각된다. 2호 주거지의 경우 직경 6m, 깊이 70㎝ 정도인데 주거지에서는 3개의 화로 시설이 발견되었다. 화로의 크기는 50㎝ 정도인데, 주위에 작은 돌을 돌려 원형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주거지 내부에 설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동삼동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 시설의 일부였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 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의 1970년 2차 조사에서는 여러 기의 야외 노지(爐址)가 발견되었다. 노지 형태는 둥근 할석을 원형으로 여러 겹 집석한 것[集石遺構]과 한 겹으로 둥글게 만든 것이 있다. 노지의 규모는 파괴되어 자세하지 않으나, 고리 모양 노지는 직경 60~70㎝이다. 특히 집석 유구는 어패류나 육고기를 익혀 먹는 조리 시설로 추정된다. 노지의 축조 시기는 주변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 토기의 특징으로 보아 신석기 말기로 보인다.

구석기 시대 일반적인 주거 시설의 평균 크기는 대개 직경 5~6m이고, 이는 5명 내외의 가족이 생활할 수 있는 면적으로 보고 있다. 이 시대 한 취락의 호수(戶數)를 10가구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면 전체 인구는 50명 정도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부산 동삼동 패총 같은 큰 유적은 얼마나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생업과 도구

1) 수렵과 어로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는 신석기인들의 수렵, 어로 활동을 보여 주는 많은 어패류와 동물 뼈 그리고 이들을 잡는 데 사용된 여러 종류의 도구가 출토되었다. 사냥용 도구로는 화살촉·창끝 등이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멧돼지나 사슴 등을 포획하였다. 지금이야 사냥 도구로 활과 화살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부분 덩치 크고 사나운 동물들을 에워싸고 소리를 지르며 절벽으로 몰던 사냥 방법을 구사하던 구석기 시대를 상상해 보면 화살촉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였던 신석기 시대 수많은 ‘발명품’ 가운데 하나였다.

빙하가 물러난 기원전 만년의 어느 때, 대지를 뒤덮은 풀들 사이로 어느새 넓은 활엽수가 들어서면서 숲들이 생겨났다. 거대한 동물들이 사라진 숲 속을 날렵하게 내달리는 애민한 청각과 후각을 지닌 사슴과 멧돼지를 잡기 위해서는 이전의 방법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채취와 발소리를 들키지 않은 채 사냥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였다. 동물들이 다시 네 발로 뛰지 못하게 하지 않은 한 사냥은 실패였다. 먼 거리에서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무기, 활과 화살은 이렇게 발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흑요석을 갈아서 만든 화살촉이 사냥에만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도 바닷가 여울을 헤엄치던 물고기도 동삼동 패총 사람들의 화살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저항·마찰·속도의 함수를 이해하고 이를 실생활에 적용한 치명적 사냥 도구 흑요석제 화살촉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어로용 도구로는 결합식 낚싯바늘, 역T자형 낚싯바늘, 고정식 작살, 회전식 작살, 빗창, 조개추 등이 있으며 이 밖에 실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토기에 찍힌 그물 흔적을 통해 볼 때 그물도 어로 활동에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동삼동 패총 사람들은 상어·방어·다랑어·대구 등의 큰 고기를 잡기 위해서 결합식 낚싯바늘을 준비해 먼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였으며, 강치·바다표범·작은 고래 등은 바닷가에서 회전식 작살이나 창을 이용해 직접 포획하였다.

굴·소라·가리비·전복·투박조개·개조개·피조개·밤색무늬조개·참굴·암굴·토굴·보말고둥·피뿔고둥·꼬막·털탑고둥·홍합·매끈이고둥·두드럭고둥·눈알고둥·따개비·왕전복·백합·새꼬막·가무락조개 등등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조개만 42종에 달한다. 신석기 동삼동 패총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쉽게 채취 가능한 굴과 홍합을 많이 먹었을 것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전복이나 소라는 암초 지대의 깊은 곳에 서식하므로 잠수해야 채취가 가능하다.

부산 동삼동 패총은 아니지만 통영 연대도 패총에서는 잠수부들의 직업병인 외이도 골종(外耳道骨腫)[수압으로 뼈에 생긴 염증이 혹처럼 딱딱한 조직으로 굳어지면서 바깥귀길(외이도)의 일부가 좁아지는 증세가 나타남]을 가진 인골이 5구 발굴되었는데, 그중 3명은 남성이다. 지금이야 해녀들의 독무대가 되어 버렸지만 신석기 시대만 해도 영도 바닷속에서 빗창[조개 채취를 위한 도구, 동삼동 출토 빗창은 특별히 고래 늑골로 만들어졌다]을 든 해남들이 암초 사이를 누비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으리라.

2) 식생활

동삼동 패총인들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조개를 많이 먹긴 하였지만, 주식으로 하지는 않았다. 조개가 운반, 채집, 계절성 면에서는 뛰어난 식료품이지만 폐기율이 높고 열량이 낮은 단점이 있다. 비교적 식용 비율이 높은 바지락의 겨우 1㎏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은 약 15%인 150g으로 거대한 조개더미를 만들었던 신석기 패총 마을도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소규모였을 것이다.

그런데 동삼동 패총인들은 주로 채집한 굴과 홍합은 바지락에 비해 폐기율이 더 높다. 그뿐만 아니라 조몬 시대 일본 패총의 예를 들면 열량 면에서 조개에서 얻을 수 있는 비율은 전체 열량 가운데 10% 이하였다. 그래서 동삼동 패총인은 사냥과 채집을 통해 먹거리를 마련하였다. 도토리나 나무 열매·뿌리 같은 야생 식물을 채집하거나 조·기장 등을 재배하여 기본적인 식생활을 해결한 것이다.

도토리는 서울 암사동에서 탄화된 도토리가, 창녕 비봉리에서는 저장공이, 그리고 창녕 부곡에서는 채집용 망태기가 출토될 만큼 신석기인들의 대표적인 먹거리였다. 하지만 도토리는 타닌이라는 쓴맛을 내는 성분이 많아 바로 먹기 어려운 음식 재료이다. 그래서 도토리는 맷돌에 간 가루를 여러 번 물에 걸러 쓴맛을 제거하고 말린 앙금을 물에 끓여 묵으로 만든다.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맷돌의 조상인 갈돌이나 갈판도 이런 공정에 쓸 수 있지만 묵으로 만들어 먹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 하나 경상도 지방에서는 덜 익은 감을 소금물에 여러 날 담가 타닌 성분을 제거하기도 하는데, 바닷가에 살던 동삼동 패총 사람도 시도해 봤을 방법이다.

1991년 부산 동삼동 패총 집자리 1호에서는 조, 기장, 강아지풀 등 40여 개체의 식물 유체가 발견되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신석기 중기인 기원전 3360년[오차 범위 ±50년]에 재배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나 기장의 원산지는 모두 동북아시아 지역이지만, 조는 기장보다 다소 해양성 기후에 적합하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700년경 신농에 의해 오곡(五穀)이 되었지만,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조는 그 이전 야생종으로 볼 수 있다. 조는 생물학적 계통상 그 원형이 강아지풀로 알려져 있는데, 두 식물은 염색체 수도 같고 잡종도 교배될 정도로 유전적으로 가깝기 때문이다.

최근 이루어진 한일 공동 조사에 의하면 동삼동에서 출토된 토기에서 신석기 조기로 추정되는 기장과 신석기 전기로 추정되는 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기장의 눌린 자국은 기원전 5000년 전후 신석기 조기로 추정되는 덧무늬 토기 조각 표면에서, 조의 눌린 자국은 기원전 4000년 전후로 추정되는 압날문 토기(壓捺文土器)[눌러 찍은 무늬를 한 토기]의 조각에서 나왔다. 동삼동 패총 사람들이 기장이나 조를 직접 재배하였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지만, 곡물이 토기를 만들 때 들어갈 정도라면 당시 마을 내부에 기장이 흔하게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고 이는 한반도 내 잡곡 농경의 기원이 신석기 조기로 올라갈 수 있는 증거다. 동삼동 패총 사람들은 이 땅 최초의 농사꾼이란 영예도 누릴 수 있을까.

이 밖에도 패총인들은 식물성 단백질로 부족한 부분을 사냥과 어로 활동을 통해 채워 나갔다. 사슴·멧돼지·다랑어·상어·대구·숭어·고래·참돔 등의 먹거리를 확보하였는데 그 가운데 동삼동을 비롯해 수가리, 조도, 상노대도, 욕지도 조개더미에서 발견되는 많은 양의 고래 뼈가 눈에 띈다.

몇 개의 해가 건너편 바닷속으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그동안 고래가 나타나기는 하였다. 그런데 얼마나 빠른지 통나무배를 끌고 다가가자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작살 한 번 제대로 꽂지 못하였다. 이튿날에 물 뿜는 것이 보였지만, 물을 뿜는 높이로 봐서 내가 바라던 참고래는 아니었다. ……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점박이 할배가 준 뼈 작살을 본떠 여러 개의 작살을 만들었다. 또 돌을 깨뜨려서 세모로 조각이 난 것을 골라 갈고리 모양으로 갈았다. 그다음 묵직한 나무를 끊어다 자루를 만들고, 자루 끝에는 칡넝쿨로 줄을 이었다. 놈의 숨통에 꽂아 넣고 줄을 당겨야 하기 때문이다. …… 고래는 자꾸 물속으로 들어갔고 줄이 점점 짧아지자 나까지 놓는다면 다시는 놈을 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 줄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옥태권의 소설 『고래 사냥』은 동삼동에서 발견된 고래 뼈를 모티브로 하여 울진 반구대 암각화의 내용을 토대로 당시 패총인의 고래잡이를 재구성하였다. 지금까지도 교과서에는 한반도에서 포경이 가능한 시기를 청동기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대형 작살이나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고래 뼈, 울산 황성동 유적에서 발견된 뼈 작살이 박힌 고래 어깨뼈와 등뼈 등은 신석기 시대 포경이 가능하였음을 보여 주는 유물들이다.

최근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고래 귀 뼈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주로 연안을 따라 느리게 이동하는 대형 고래인 혹등고래와 참고래임이 확인되었고, 직접 사냥한 고래를 동삼동에서 해체하였음이 밝혀졌다. 신석기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고래 사냥에 적극 뛰어든 이유는 고래가 생업 도구와 식료로서 효용 가치가 높고 고기와 껍질, 기름과 뼈 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 최초의 대일 수출품, 조개 팔찌]

신석기 시대는 생업 형태와 생존 방식이 다양화되면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기도 하였지만, 신체 장식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여러 장신구가 출현하였다. 동삼동 패총인 역시 일상 활동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동물 뼈나 이빨·조개·옥·돌·흙 등의 재료로 목걸이·팔찌·귀걸이·뒤꽂이 등 각종 장신구를 만들어 몸을 치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술적인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조개는 오래전부터 인류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식량 자원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한편으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의 생식기와 유사성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탄생이나 재생과 결부되기도 하고,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조개의 종류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외형적 모습과 희소성 등 여러 특성을 사회·문화적 가치와 결부시켜 다양한 기능과 의미가 있는 조개 제품을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조개 팔찌와 조개 가면[貝面]이다.

먼저 조개 팔찌는 신석기인들이 가장 애용하였던 장신구이다. 팔찌의 재료로는 조개껍데기가 주로 이용되었는데, 부산 동삼동 패총에는 유독 투박조개로 만든 팔찌가 집중적으로 발굴되었다. 1999년 조사에서 1,500여 개에 이르는 조개 팔찌는 완제품, 파손된 제품과 제작 이전의 원형 형태 등으로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제작 과정에서 폐기된 것으로 마연(磨硏)이나 마무리 단계에서 깨져 있어 조개 팔찌 만드는 과정이 의외로 어려웠음을 보여 준다. 수천 개의 조개 팔찌가 각각의 제작 과정이나 언뜻 완제품 상태로 보이는 것도 동시에 폐기되었다.

복천동 박물관에 보존된 조개 팔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표면을 매끄럽게 간 자국 하나를 찾아보기 힘들다. 0.01㎜ 흠집도 인정하지 않던 조선의 도공들의 오기가 교차되는 장면이다. 부산 동삼동 패총의 조개 팔찌는 스스로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팔기 위해 대량 생산한 것이다.

일본 규수 사가[佐賀] 패총에서 투박조개 팔찌가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투박조개는 우리나라 남해안에서는 자라지만 대마도(對馬島)나 일본 서부 해안에서는 서식하지 않는다. 일본 규슈 패총에서는 동삼동식 덧무늬 토기도 발견되었고 일본산 팔찌의 원료 제작 방식 및 형태 등도 동삼동 팔찌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런데 부산에서 200㎞나 떨어진 일본 서북 지방 규슈까지 동삼동산 조개 팔찌가 어떻게 건너갔을까? 해답은 대마도에 있다. 요즘도 맑은 날에는 영도뿐만 아니라 용두산 공원에서도 대마도 언저리 정도는 누구나 볼 수 있다. 대마도 고시다가[越高] 유적에는 일본계 조몬 토기[繩文土器]보다 한반도산 덧무늬 토기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최소한 대마도에는 한일 간의 중개 무역을 담당하던 집단이 존재한 것이다.

동해를 둘러싸고 있는 환동해권은 일정한 해류와 해풍으로 항해 도구와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선사 시대에도 항해 도구만 있으면 대마도를 축으로 한 양국 간의 중개 무역이 충분히 가능하였다. 동삼동 패총 사람들이 대마도 중개상에게 건네주고 받은 물건은 일본산 흑요석이었다. 흑요석은 말 그대로 ‘검은색을 띤 반짝이는 투명 돌’로 화산 활동이 있었던 곳에서 만들어진다. 암질의 특성상 날카로운 날을 만들 수 있어 연장으로 가치가 뛰어나며,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정빛에 매혹되어 호신부(護身符)로도 각광받았다.

흑요석은 성분 분석을 통해 원산지 판별이 가능한데,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지에서 나온 것은 거의 백두산 흑요석이었다. 그러던 것이 동삼동을 비롯해 남해안 조개더미 유적 18곳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대부분 일본 규슈 고시다게[腰岳] 산이다. 8000년 전 나침판 하나 없이 대한 해협을 건넜던 동삼동 패총인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왠지 불안해지는 현대인들보다는 훨씬 스마트한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조개 가면과 사슴 무늬 토기가 말하는 것]

조개는 연체동물로 하나 또는 두 개의 껍데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조개는 그 생김새 때문에 여성의 성기 및 성애를 상징하였고, 그 뜻이 확장되어 생명의 탄생·모성·다산·풍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풍요와 다산을 주관하는 아프로디테,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아는 여신 비너스는 이탈리아 화가 보티첼리의 붓끝에서 커다란 조개 속에서 탄생하였고, 두 장의 조개껍데기가 꼭 붙은 모습은 한 쌍의 남녀가 포옹하는 장면으로 상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조개란 말은 그 모양과 상관없이 만들어졌다. 원래 한자 차거(硨磲)는 불교의 전륜왕이 가진 일곱 가지 보물의 하나로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라고 한다. 후에 차거는 장식에 사용되는 조개껍데기, 즉 자개가 되고 중세 우리말에서 쟈개·죠개 등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원래 우리말에 조나 개는 모두 조개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개는 조개껍데기인 조가비를 말한다. 그러니까 자개나 조개라는 말에서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식용과 상관없는 조개껍데기를 중요하게 여겨 왔음을 알 수 있다.

가덕도 신석기 유적에서는 모두 48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여기서 조개 팔찌를 착용한 완전한 형태를 갖춘 2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41호 무덤에서는 정확한 개수를 알 수 없지만 무덤 중에서 양팔에 조개 팔찌를 착용한 인골은 겨우 2명이었다. 일본 신석기 문화[조몬 문화]의 사례와 착장자의 성별, 조개의 상징성 등으로 보아 신석기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담당한 여성이 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개 팔찌와 함께 조개가 가지는 특성을 사회·문화적 가치와 결부시켜 다양한 기능과 의미가 있는 상징물은 바로 가면이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는 커다란 가리비 조개의 껍데기에 눈·입 등을 나타내는 듯한 구멍을 뚫어 마치 인면상(人面像)으로 보이는 조개껍데기가 발견되었다. 크기가 12.9㎝, 11.8㎝ 정도밖에 되지 않아 성인이 착용하였다기보다는 어린아이에게 만들어 준 장난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는 두 눈과 커다랗게 벌린 입의 모양이 어떤 상징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진다. 집단의 공동체 의식이나 축제 때 사용하였거나 벽사의 의미를 담은 주술구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소 엽기적인 영화 「10,000 BC」[롤랜드 에머리히, 2008]에서 자기 무리의 ‘왕따’였던 주인공을 단숨에 벼락출세시킨 것은 그 어렵다는 매머드를 사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석기 시대 부산 땅에서 이런 사냥이 가능하였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대신에 아마도 붉은 사슴이나 호랑이 같은 맹수를 멋지게 사냥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구석기인들의 생업을 이어간 동삼동 패총 사람들 역시 구석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슴 그림이 새겨진 토기가 발견된 것은 발굴 현장이 아니라 박물관의 유물 정리함이었다. 1999년 발굴된 부산 동삼동 패총의 유물은 토기를 포함해 300상자가 넘어 아직도 여전히 ‘정리 중’이다. 그러던 2003년 길이 9㎝, 너비 13㎝밖에 되지 않는 토기 조각이 하인수 실장[현 복천박물관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자세한 묘사는 생략한 뼈나 날카로운 나뭇가지로 사슴의 특징을 묘사한 수법은 울진 반구대의 그것과 일치하였다.

신라 금관의 사슴뿔 형상은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사슴뿔이 인간의 바람을 하늘에 전해 주는 신통력을 지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슴뿔은 봄에 돋아나 자라면서 딱딱한 각질로 변해 1년이 지나면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나뭇가지가 봄이 되면 다시 잎을 틔우듯이 사슴의 뿔은 영원한 생명력 또는 재생을 상징한다. 복원된 사슴 모양 토기를 보면 토기 입구를 삥 돌아가며 사슴들이 줄지어 뛰어가는 형상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개 가면과 사슴 모양 토기는 혹한과 맹수들의 위세에 숨죽이던 빙하기를 이겨 내고 풍요와 번영을 기원한 동삼동 패총 사람들의 소망이 담겨진 유물이다.

[신석기 동삼동, 그때 그 시절]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막을 내렸다. 북쪽 고원의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남쪽의 강과 바다의 수면은 점점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 어느 이른 봄, 한반도의 끝자락 영도는 따뜻한 공기와 풍부한 물 때문에 숲에서는 도토리와 각종 열매들이 계절마다 색깔을 달리하였고, 지천에 널린 조개들과 물고기는 아무리 잡아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풍요와 축복의 땅이었다. 이맘때쯤 동삼동 바닷가에는 움집들이 마을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구석기를 이동의 시대라고 한다면, 신석기 시대의 삶은 정착의 시대였다.

장면 1. 출출함이 파도치는 정오 무렵 바닷가

마을 앞 바닷가에는 삼삼오오 조개로 만든 추를 단 그물을 들고 물고기를 몰아가는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고, 삼각형 미늘을 단 최신형 작살을 실험하는 청년들이 심각하게 물속을 응시하고 있다. 구부정한 허리를 숙이고 빗창으로 능숙하게 조개를 거둬들이는 노인들을 따라다니는 개구쟁이들 머릿속엔 잠시 후 맛보게 될 특별한 요리 생각뿐이다. 땅을 약간 파고 만든 야외 노지, 검붉게 달아오른 돌무더기에 온갖 조개를 얻고 갖은 향기로운 풀들을 덮는다. 물에 잘 이긴 찰진 흙으로 열기가 빠져나올 곳을 단단히 막음질하더라도 한두 곳 숨구멍은 살려 둔다. 숨 가쁜 고래가 물을 뿜듯 올라오던 증기가 잦아질 무렵 흙과 풀을 걷어 내면 풀 내음과 비린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조개 찜, 애들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아직도 머리가 터질 것 같고 귓속은 먹먹하다. 평소 구수하기만 하던 조개 찜 향기도 역겹기만 하다. 그놈의 승부욕이 이 사단을 낸 것이다. 할배들은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깊이만 잠수해야 된다고 신신당부 했건만, 사실 자맥질은 내 장기가 아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특기인 나는 마을 최고의 발명가.

한 번은 마을 바닷가에 출몰하는 물개나 바다사자가 연구 대상이었다. 놈들의 가죽은 두텁고 미끄러워 작살이 쉬이 빠지고 어찌해서 명중해도 죽을힘을 다해 바다 밑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허탕 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물에 가라앉더라도 그놈들을 끌어올릴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동료들을 위해 내가 발명한 것은 다름 아닌 회전식 작살. 요놈은 몸통과 작살 촉이 튼튼한 줄로 연결되고 촉이 몸통에서 분리되어 사냥감 몸속에 수평으로 박히는 바람에 아무리 요동쳐도 빠질 염려가 없다. 물론 바닷속 깊이 가라앉은 사냥감을 건져 내는 것도 손쉬워졌다. 그런데 얼마 전 의뢰받은 고래잡이용 작살은 만만치가 않다. 워낙 덩치가 커서 녀석을 물 위에 띄우려면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해 보인다.

장면 2. 봉래산 자락, 상념에 잠긴 사냥꾼

화기애애한 마을 풍경과 달리 봉래산의 어느 깊은 협곡 사이에는 긴장감이 흐른다. 얼마 전부터 사냥에 나선 개들도 덩달아 숨을 죽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겨울 저장해 놓은 도토리 냄새를 맡은 멧돼지가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지금 쓰고 있는 화살촉도 녀석들 이빨로 만든 것이다. 요즘은 흑요석을 갈아서 쓰지만 워낙 고가품이라 웬만한 사람은 쓰질 못한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마을 사람들은 사냥에 개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사냥하고 남은 뼈와 내장 맛에 길들여진 녀석들은 멧돼지 사냥에서 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개들과도 친해질 수 있다면 멧돼지도 언젠가는 길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우리 집 사고뭉치 막내 놈이 마눌님이 제일 아끼는 갈판을 두 동강 내 버렸다. 남정네들한테 창과 활이 소중한 만큼 아낙들에게 소중한 것이 갈판인데, 그놈 오늘 저녁은 쫄쫄 굶어야 되겠다. 희한하게도 온몸이 부르르 떨 만큼 입 안이 얼얼해지는 도토리를 물에 불려 갈판에 갈아 놓으면 색깔도 변하고 떫은맛도 없어졌다.

요즘 마눌님은 새로운 요리를 개발 중이다. 도토리 가루를 저으면서 한참 끓인 후 식히면 씹을 것도 없이 뱃속으로 넘어가는 것이 요상한 음식이 된다. 요놈 이름이 뭐라고 하던데? 어쨌거나 그 맛난 것을 얻어먹으려면 큼지막한 갈판부터 만들어야겠다.

장면 3. 마을 최고 토기장이의 독백

사람들은 저마다 꿈이 있다. 그래서 사냥꾼은 살찐 사슴 떼가 뛰놀고 어부들은 튼튼한 그물이 새겨진 토기를 구워 주기 원한다. 원래 도토리나 곡물 그리고 생선과 조개를 담아 놓던 토기는 언제부터인가 그것들을 삶고 끓이고 찌는 도구가 되었다. 700℃의 열기가 빚어 낸 신기한 용기, 토기는 우리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토기 하나 만들기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흙이면 다 토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흙을 구하였다면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풀, 굵은 모래, 운모, 조개껍데기도 적당히 섞어야 한다.

오늘은 특별한 토기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얼마 전부터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고 있는 족장님 외아들을 위해 곰 모양 토기를 만들기로 한 날이다. 서쪽 바닷가를 따라 해가 수십 번 바뀌어야 닿을 수 있는 북쪽, 온통 붉은색을 뒤집어쓴 산[홍샨(紅山), 중국 뉴허량(牛河梁)에서 시작된 기원전 4500~기원전 3500년경 번성한 신석기 문화의 터전]에서 살던 사람들이 해 준 이야기가 족장의 귀를 솔깃하게 한 모양이다.

그 사람들은 집에 흙으로 만든 곰 모양 토기를 모셔 놓고 몸에 옥으로 만든 곰의 형상을 꼭 지닌다고 하였다. 조상신 곰이 악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병을 낳게 해 준다나 어쩐다나. 믿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효험만 있다면야.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만들 곰 모양 토기는 족장의 아드님이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나라는 의미에서 두 발로 꼿꼿이 서서 포효하는 형상으로 특별히 솜씨 좀 부려야겠다.

장면 4. 한반도와 대마도 사이 어디쯤?

이상한 일이다. 바다가 숨을 쉬지 않는다. 바람 한 점, 갈매기 한 마리 우리 배를 찾지 않는다. 분명 조상신이 노하신 것이 틀림없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차근차근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본다. 배를 타기 전 분명 마을 무녀한테 액막이를 받았고, 배 한편에는 우리 집 수호신 물개 토기도 정성스럽게 모셔져 있다. 설마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 몇 해 전 죽은 우리 어린 딸의 뼈를 수습해 옹관으로 옮겨 담다 아기 팔에 채워 주었던 조개 팔찌가 부러진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화근이 되었을까. 무심한 아비를 원망해서일까. 그러고 보니 마을에서 가장 실하다던 내 결합식 낚싯바늘이 오늘만 해도 3개나 부러져 나갔다.

아가야 아빠가 재미있는 이야기해 줄 테니 그만 화를 풀겠니?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이 죽은 해, 희한하게 옆집 움막에서 큰불이 났단다. 마침 마을 제사에 가느라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불길이 삼켜 버린 그 집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건 이듬해 봄이었단다. 마치 자신을 버린 주인이 봐 달라는 듯 그 집터에서 파릇파릇 새순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어른 키만한 조와 기장이 자라기 시작하였단다. 그걸 보고 아빠도 엄마도 매일 기도하였어. 우리 딸도 그렇게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게 해 달라고. 아빠가 만들어 준 못생긴 조개 팔찌만 유독 좋아하던 우리 딸, 아빠를 용서해 줄래?

현재 동삼동 패총은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신석기 취락 유적으로 유명한 서울 암사동 유적 그리고 결합식 낚시의 고향으로 유명한 강원도 오산리 유적도 함께 한다. 신석기 조기 문화라는 학술적 가치로도 손색없지만 부산 동삼동 패총은 국제 도시 부산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부산의 랜드마크로 손꼽을 만하다. 다만 심사 과정에서 주목하는 주변 경관과 연구 및 관람 시설 수준 등은 많은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부분이다. 취재 과정에서 부산 동삼동 패총의 가치를 꾸준히 높여 온 집념 어린 고고학자를 만났다. 그 한 사람의 노력은 우리가 알고 있던 선사 시대 상식을 바꿔 놓기에 충분하였다. 그 열정이 ‘감기’처럼 번져 나가 부산에서도 세계 문화유산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신석기 시대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것은 인간 삶의 가장 원초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사계절이 뚜렷한 신석기 시대 한반도나 부산에서 먹거리나 삶의 방식은 강력한 계절의 입김 아래 있었다. 이 하나만 놓고 본다면 8000년 전 신석기 사람들의 관심사는 몇 십 년 전 부산 사람들의 관심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인간에 의해 왜곡된 기후는 지구를 그리고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 덕분에 신석기 사람들이 누리던 사계절의 혜택과 정취는 빙하가 내려온 길을 거슬러 북상하고 있다. 아열대 기후가 자리 잡아 가는 부산은 어쩌면 뜨거운 빙하기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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