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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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傷痍軍人-釜山定着記 |
영어의미역 | The story of old Bak Wonho, disabled veteran, who settled in Busan |
분야 | 생활·민속/생활,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만일 |
[덕천동에서 만난 박원호 어르신]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여자중학교 인근 주택에 거주하고 계시는 박원호 어르신은 1933년 구미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좌우익의 대립, 6·25 전쟁을 몸소 겪으신 분이다. 특히 6·25 전쟁 자원입대로 참전하여 북한군과의 전투 도중 큰 부상을 입으시고 부산에 있는 후송 병원에서 1950년대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분의 삶을 뒤돌아봄으로써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 6·25 전쟁에 대한 개인의 체험을 통해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되짚어 보고자하고, 6·25 전쟁 이후 상이군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유년 시절 일제 강점기의 기억]
“아무튼 일본 사람들이 너무 악하게 했어요. 누구는 일본놈 때문에 발전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고통을 많이 느꼈어요.”
“학교 가면 우리 나이로는 해방되고 1회 졸업생인데 일본놈들이 한국말을 못하게 하고 학교 가면 일본말 하라고 했거든요. 협박도 많이 했어요.”
“공출 많이 했지요. 10마지기 농사지으면 몇 가마니 내라 하고, 안 내면 집을 뒤지는 것이에요. 그거는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다 겪었어요. 머 산골자기 지리산 골짝이 같으면 모를까. 아무튼 그 사람들이 그것뿐 아닙니다. 무명 목화 그것도 다 바쳐야 됩니다. 왜냐카면 군인들 방화복 옷을 입어야 안 됩니까. 안 핸기 없다카이. 심지어는 토종 벌꿀을 달이면 …… 하는 게 있어요 건더기요. 그거 있으면 몇 통 바치라고 하는데 그거는 군인들 군화 칠 한다고 다 필요해요. 공출 가마니 그것도 몸서리나게 쳤어요. 한 집에 몇 장씩 치라고 하면 치고 그랬어요. 나는 솔직한 말로 일본놈 바로 안 봐요. 물론 그렇다고 욕은 안하지만 내 속으로는 너희가 그렇게 까지 했는데 요새까지 있었으면 공기 좋고 살기 좋은데 대한민국 땅 느그가 차지하고 있었지 않겠어요. 악독해요 악독해.”
유년 시절 어르신께서는 일제 강점기를 상당히 고통스러운 시기로 회상하고 계셨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제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조선 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의 이름과 교육 과정 등을 일본 본국 학교와 같게 하였고, 조선어과를 폐지하여 조선어와 조선 문자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따라서 이후 일제의 초등 교육은 일본어로 진행되었고, 이에 1940년대에 초등 교육을 받으신 어르신께서도 일본어를 배워 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폭압적인 교육은 당시 어렸던 어르신에게는 상당히 큰 스트레스였다. 따라서 학교를 빼먹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광복과 큰형의 귀환]
“그날 알았어요. 그날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해방이 1945년 8월 15일인데, 우리 큰형이 징병 1기로 군에 갔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면, 해방되면 우리 형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동네에서 두 사람 갔거든요. 근처 동네 한 사람 맹 같은 동네인데. 해방 된지는 몰랐는데. 밭에 바람 세로 갔다 오니. 맹 한동네라서 옆 동네까지 가보니 그래 형님이 곧 돌아오실꺼라고 해방되었다고 그 동네에 갔다 오니. 그 때만해도 티비도 없지요. 신문도 안보지요. 라디오도 없지요. 그래도 그 옆 동네 좀 밝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그러더라고요. 해방 이후 며칠 만에 돌아왔어요.”
어르신은 3남 1녀 중 막내였다. 위로는 형 두 분과 누님이 한 분 계셨다. 일제 강점기에 형제 중 큰형님께서 징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셨고, 작은형과 어르신께서 집안의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해방과 형의 귀환은 어르신에게 있어서 큰 사건이었고,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계셨다.
특히 해방 이후 구미에서 벌어졌던 일본 경찰과 부일 협력자들에 관련된 사건들도 잘 기억하고 계셨다.
“그 때 개판이죠. 해방되고서는 파출소 불 지르고. 일본놈한테 잘 보일라고 일본놈 앞잡이 안합니까. 그런 사람들은 누구 집에 머 어떻고 저떻고 이야기한 사람들은 해방되고 줄에 묶어서 시장에 끌고 다니고 했거든요. 일제 시대 때 그런 일들 말을 못하죠. 왜정 때는 왜놈 때문에 그렇죠. 육이오 때는 전쟁 때문에 그랬죠.”
“해방 당시에 일본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경찰관들 다 묶어서 죽인다고 협박하고 그랬죠. 아무튼 일본 사람들이 너무 악하게 했어요.”
[구미에서 경험한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해방되고 난 이후에 대구에 10일 사건이라는 게 있었거든요. 미군은 총칼로 한다하고, 우리는 맨주먹으로 한다고, 그 때 당시에 음력으로 9월 9일일 꺼에요. 거기에 협조한 사람이 소위 말하자면 빨갱이다 보도연맹에 가입됐다 해서 실태 파악할 게 있다고 해서 경찰서에 잡아가서는 죽었는기라요 [고문을 당해서] 우리 집안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그래 가지고마 많이 고통을 당하고 사건 사건 말 못해요. 그 때 당시 가입된 명단 있으면 보도연맹 빨갱이에요. 그 때 밤 되면 내려오잖아요.[거기도 빨치산이 있었습니까?] 거 청송 중앙선 있는 데로 해서 많이 넘어와요 장날 되면 장을 털어가고 말 못해. 왜 그 사람들을 밤손님이라 했냐면 밤에 내려오거든요. 밤에만 내려와서 털어가거든요. 못 산다 안합니까. 밤에는 빨갱이 내려와서 털어먹고, 낮으로는 경찰관이 드나드는 건 좋은 건 아니거든요. 경찰관이 행패 부리면 잘 봐달라고 닭 잡아 주고, 술 받아 주고, 담배 사주고, 사는 게 머 할라고 사는지. 우리 동네가 당신 때문에 우리가 고초를 당한다고 해가지고 대구 사건에 관련된 사람 집에 불 질렀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대구 사건 당시에 경찰이 한 트럭 왔는데 동네를 둘러싸고 총을 막 쏘니 그냥 가만있으면 괜찮은데 놀래서 들판으로 도망가서 총에 맞아 죽었거든요. 그 시체는 누가 치웁니까. 그 집안사람이 치우죠. 그 때 당시에 대구 사건 때 구미군에 있는 군대 몇 대대 몇 중대가 와가지고 했지요. 대구 사건 때 우리 동네가 고초를 많이 겪었어요.”
1946년 미군정기와 노동자의 갈등은 극에 달해 있었다. 해방 이후 식량난, 실업, 물가 상등 등으로 당시 38도선 이남 지역의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1946년 9월 13일 경성 철도 공장 노동자들이 ‘적자 해소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운수 노동자 25%의 감원과 월급제의 일급제로의 전환을 결정한 미군정청 운수부에 항거하여 파업 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9월 23일 부산철도국, 9월 24일 서울철도청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남한의 노동계는 미군정에 대항하는 총파업을 벌였다.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총파업의 여파는 대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10월 1일 발생한 파업에 대한 군, 경 테러단의 폭행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10월 2일 대구에서 발생하였다. 10월 2일 시위는 경찰과 시민의 대규모 유혈 충돌로 이어졌다. 이후 미군정과 경찰에 대항한 시위는 경상북도 각지로 번졌으며, 결국 전국적인 규모의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10월 항쟁이다.
이 사건은 대구 인근 구미에도 영향을 상당히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어르신이 사시는 인근 마을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고, 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경험을 어르신께서는 상당히 이상한 상황이라고 회상하고 계셨다. 해방되면 편안하게 사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매일 정치 논리에 의해서 험상궂은 상황이 벌어져 같은 민족이 서로를 죽이고, 밀고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지리산 그 좌익이다 하고 죽은 사람도 많은데, 우리 동네에서도 가만 보면 어떤 마을에는 150호 되는 동네에서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면서 서로 죽이고, 보도연맹에 가입도 안했는데 했다. 했다 안 그래요 그렇게 덮어씌우고 잡아가고 소식이 없으니까 어디 가서 하소연하고, 누구한테 원망할꺼에요. 누구라고 하면 알지만. 그때 당시에 마을 사람이 아버지 찾으로 형사 짓 하던 사람한테 찾아가서 사람을 찾을라고 했어요. 다 서로서로 알고 고향 사람인데 그 사람도 모른다고 하고 어디 가서 알아봐야겠어요. 그 사람이 잡아갔는데.....그 사람은 파탄 났어요.”
[6·25 전쟁의 발발과 1차 피난의 경험]
“상황이 그렇다 보니까 며칟날까지 어느 동네는 나가라고 피난 가라고 하고 안가면 안 된다고, 갔다 오면 머 있어도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그래도 경찰들이 다 쫓차내고 그랬죠. 안 가면 좀 곤란했겠죠. 갔다 오면은 피난 갔다 왔다고 하는 피난 확인 거 도장[피난민 신분증]을 받고, 안 가면 왜 안 갔나. 너희는 좌익계 사상 가진 사람 아닌가 했죠.”
“머 그냥 피난 갔었으니까. 비행기가 폭격해서 집이 많이 파손되었죠. 피난은 내가 알기로 대구 금호강 근방에 와촌인가? 동네 이름이 기억 안 나는 데 거기에 갔었어요. 그 때 대구 팔공산에 화산이라고 하는 데가 있어요. 밑에 기찻길이 있고 위에는 버스길이 있는데 지금 3사관학교 있는데 거기서 마지막 치열하게 싸웠거든요. 거기서 일로 못 넘어왔거든요. 거기를 고개를 경계로 해서 영천, 구미, 낙동강이 있었죠.”
전쟁 기간 남북한 주민들은 크게 두 차례의 피난을 경험하였다. 우선 전쟁이 발발 하면서 인민군이 남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38선 인근 주민과 서울·경기 지역의 민간인들이 대규모로 대구, 부산 등을 향해 이동하였다. 이후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국군, 유엔군이 수세에 몰리면서 북한의 민간인들은 군과 함께 남쪽으로 월남하게 되고, 또 1·4 후퇴 시기 서울과 이남 지역의 주민들이 대규모로 피난하게 되었다. 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된 피난을 ‘1차 피난’이라 하고, 중국군 참전으로 인해 이북과 서울·경기·충청 지역 주민의 대규모 피난을 ‘2차 피난’이라 한다.
전쟁은 시작 된지 한 달여 만에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진격하여 쉽게 결말을 맺는 듯 했다. 그러나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두 달여 동안 낙동강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펼치게 되었다. 북한은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기 위해 후방에 있는 병력까지 낙동강 유역으로 집결시켰다.
그러나 미 공군의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폭격은 서서히 효과를 거두었고, 북한군은 물자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은 전쟁을 조기 종결짓기 위해 병력을 무리하게 운용한 탓에 병사들도 매우 지쳐있는 상태에서 연합군의 후방 공격으로 인하여 보급마저 끊기게 되었다. 그래서 낙동강 유역까지 전진했던 인민군은 전쟁의 중요한 동력을 잃고 전투에서 계속 패하게 되었다. 9월 28일 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하였다.
전황(戰況)이 불리했기 때문에 정부는 피난민들에 대한 검열을 더욱 강화하고자 하였다. 특히 낙동강 유역의 격전 지구에서 피난한 사람들을 정부는 극도로 경계하였다. 이 시기 정부에게 있어서 피난민을 가장한 인민군의 유격대 또는 간첩의 유입은 전황이 불리한 상황에서 치명적이었다. 특히 임시 수도인 부산과 대도시인 대구에서 인민군의 유격대 또는 간첩에 의한 혼란은 남한을 전쟁의 패배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피난민 속에 인민군이 섞여서 후방으로 침투할 가능성에 대해 극도로 우려하였다. 따라서 낙동강 유역에서는 전투가 발생하기 전 마을을 소개해서 민간인을 피난시키는 한편, 교통로를 끊어 피난민이 후방으로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종의 행동 지침을 적은 유인물을 비행기로 살포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격전 지구에서 피난하지 못한 민간인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격전 지구에서 개인적으로 피난한 피난민들은 엄격한 절차를 거처야만 피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개 정책에 협조하지 않고 잔류한 민간인과 미처 피난하지 못한 피난민들은 적으로 간주되어 학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나갈 때는 나락이 누랬는데, 갔다 오니까 나락이 시퍼런 데가 있는 데가 있어요. 전투를 해서 시체가 있는 데는 그랬어요. 우리 동네 앞에는 중앙선 철길이 있는데. 그 철길 가에도 많이 죽었어요. 왜 많이 죽었나 하면 철길을 경계로 전투를 해서 많이 죽었어요. 그때 당시만 해도 누가 그렇게 요새 같으면 그렇게 안하겠지만 시체가 시냇가에 뒹굴고 있는데 그 어느 누가 묻어 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가을에는 나락 타작해야 하는데 시체가 있으니까 마 사람들이 다 산에다가 묻었어요. 그래 가지고 묻어 버리니까 산이 몇 십 년 지나서 산림이 우거지니까 표시해 논 데도 없어지고 그랬죠. 공동묘지 같은 데 묻었는데. 우리 동네 한 집에는 한 1년 동안 비어 있었어요. 귀신 나와서 못산다고요.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집에는 방에도 시체가 있었고, 마당에도 시체가 있었고, 온통 있었거든요. 생각해보면 거기에 야전 병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에는 그 시체들도 다 산에 묻었죠. 온 마을에 시체가 있고 그래요.”
어르신의 마을도 전쟁터가 되는 바람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CIA 보고에 따르면 당시 수확량은 전년도 대비 예상 목표치에 26%밖에 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농가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군 입대와 훈련]
“1950년도 전쟁이 났거든요. 나는 1951년에 참전했습니다.”
“자원입대입니다”
“제주도로 훈련을 나왔거든요. 그때 당시에 논산은 없었고요. 제주도 2연대에 훈련을 받으로 갔어요. 연대만 기억이 나요. 거기서 3주간 훈련을 받고, 거기서 나와서 동래 유락국민학교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요. 거기서 제주도로 하루 1,500명씩 나갔거든요. 군사 보안이라고 해서 얘기를 안 해주는데...갈 때는 포항에서 갔거든요. 포항 해수욕장인 것 같아요. 백사장에 그때 LST라는 밴데 안에 들어가니까 화물을 싣는 배더라고요. 나무를 깔아 놓았더라고요. 바닥에 다 깔려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제주도로 들어갔는데 미군들이 텐트를 쳐 놓았더라고요. 전기는 있는 데도 있고 없는 데도 있더라고요. 총 딱는 기름이 병에 있는데, 그걸 총 딱으라고 준 기름으로 안에 불을 켰어요. 옛날에 촌에 보면 정월 보름날 보면 산 밑에 잔불을 때잖아요. 불 킨다고 하는데 기름을 실에 묻혀서....얏튼 그래서 방에 불을 켰어요. ”
군대 입대 과정을 살펴보면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전쟁 직전 생계형 자원입대, 둘째 전쟁 직후 무조건 강제 징집, 셋째 전쟁 후 자원입대, 마지막으로 비정상적 입대 즉, 국민방위군, 길거리 검문을 통한 강제 징집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어르신의 경우 전쟁 후 자원입대 하였고, 작은형도 어르신보다 먼저 전쟁 직후 자원입대 하였다고 한다.
한국 전쟁기 전장에 투입할 신병의 교육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신병의 기본적인 훈련을 체계적으로 담당할 훈련소로 1950년 7월 중순 대구에 ‘제1 훈련소’가 창설되었다. 8월 20일 부산의 ‘제2 훈련소’가 뒤를 이었으며, 이후 부산 근교 구포리에서 ‘제3 훈련소’가 제주도에는 ‘제5 훈련소’가 문을 열었으며, 삼랑진에서는 ‘제6 훈련소’가 개소되었다. 훈련소의 훈련병 수용 능력을 보면, 대구의 제1 훈련소는 1만 명 수용에 매일 1,000명의 신병이 출소하였고, 제2·3·5 훈련소는 각각 5,000명을 한 번에 훈련할 수 있었으며, 일일 500명의 신병을 각각 배출하였다.
이들 훈련소에서의 신병 훈련은 10일 과정의 훈련이 실시되었다. 10일 동안, 훈련병들은 사격술, 분대 전술 등과 같은 기본적인 훈련과 ‘왜 싸워야 하는가’ 등의 정신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각 훈련소들은 전투 부대의 신병 보충의 요구를 충족하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훈련의 질적 수준보다는 가능하면 많은 신병을 배출하려고 노력하였고, 위급 시에는 이러한 10일 주기의 훈련도 마치지 못하고 전선에 배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주먹구구식의 훈련은 전투력 상에 많은 취약점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미 8군과 미 군사 고문단은 국군의 전투 효율성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우선 교육·훈련 체계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951년 4월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가 미 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에 더욱 빠른 속도로 힘을 얻어갔다. 모든 신병 훈련소를 제주도의 모슬포로 통합하여 ‘제1 훈련소’를 1950년 2월 6일에 개소하였으며, 제1·2·3 교육 연대와 수용 연대로 편성된 훈련소의 초대 소장으로는 백인엽(白仁燁) 준장이 임명되었다.
통합 이후 2월 13일부터 교육 주지는 3주에서 4주로 1주 연장되었으며, 매일 500명씩의 신병을 배출하였다. 이는 전투 손실 이외에는 부대 신설과 같은 특별한 병력 소요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4월 1일부터는 교육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나 8주가 되었으며, 1만 3,800명의 훈련병을 수용하여 훈련을 시킬 수 있었다. 이중에서 매일 250명의 신병이 훈련을 수료하고 전투 부대 또는 후방 부대로 배치되거나 다른 병과 훈련소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은 후 해당 부대로 배치되었다.
제주도의 자연적인 조건이 대규모 신병의 훈련에 어려움을 초래해 왔다. 식수의 부족과 강풍 이외에도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병력과 물자의 수송이 어려웠다. 동시에 전선이 안정되자 굳이 제주도를 ‘최후의 보루’로 고려할 필요성도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9월 정부와 미군은 제2의 신병 훈련소를 내륙 지역에 창설할 계획을 세웠으며, 최종적으로 선정된 지역이 논산이었다. 논산의 제2 훈련소는 1951년 11월 1일 창설된 후, 1952년 2월 2일 훈련이 개시되었다. 제2 훈련소는 우선 보병 부대의 충원보다는 보병을 제외한 다른 병과의 충원에 집중하였다. 보병 부대의 충원은 제1 훈련소가 배출하는 인원으로 충당하고, 제2 훈련소는 포병이나 기술 및 행정병과의 신병 훈련에 전담하였다. 따라서 제주도의 훈련소는 축소되었다. 어르신의 증언을 보았을 때 1951년 여름에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 가니까 아차 싶어요. 정신이 바짝 돌아와요. 밥을 미군들 통조림에 주거든요. 이빠이[많이] 안 주고 그냥 떠 가지고, 콩나물 건더기는 없고 국물만 주지요. 안 그러면 새우젓을 주는데 다 먹어도 그건 못 먹어요. 소금이 막 확신확신해요. 와 짭아요. 물이 나빠서 이질이 걸리고, [훈련 중에요?] 예 이질이 많이 걸리고 일사병도 걸리고 굉장했어요. 그때 당시는 병원 시설이 요즘 같지 않거든요. 텐트 안에서 아카쟁키나 바르고 그 모양이지. 환자들이 육지로 호송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거기서 안 되니까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앞에서 언급한 보급품의 부족과 식수의 부족은 훈련병들을 괴롭히는 부분이었다. 당시 상당수의 훈련병들이 훈련 도중 이질에 걸리는 등의 문제로 제대로 된 훈련을 이수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전선으로의 투입]
“[부산]유락초등학교에서 군인들은 우리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주로 밤으로 이동을 많이 하거든요. 부대 이동을...하는 줄도 몰랐는데 억수로 춥지는 안 하고, 그래서 거기서 우리는 저 부대 이동한다 카는 거는 모르거든요. 말을 안 하니까네. 정확하게 비행기로 가는지 기차로 가는지도 말을 안 하니깐요. 대부분은 열차로 가거든요. 근데 거기서 밤에 한 7시나 되니까 밥풀 몽친 거를 주고, 그거를 2갠가 3개를 주고, 건방을 하나씩 주고 단 실탄만 소지를 안 하고, 그거는 주면 위험성이 있으니까. 그래 가지고 아마 동래역에 가가지고 아마 기차에 탄 것 같아요. 화차에 [부산에 오셔서 그러셨습니까?] 제주에서 부산 2 부두 부산진 있는데요. 거기서 사람들을 막 화차 같은데 실으니까. 불이 화차에 잘 없어요. 없으니까. 여기 같으면, 울산이다. 경주다 하는 그 위치를 잘 몰라요.[전투에 투입될 때 어디로 가는지 모르셨나요?] 전방에 투입 시킬 때요. 저쪽 구석에 불 하나를 켜서 양 문 앞에 헌병들이 섰거든요. 가다가 내리가 걸어가 또 타고 이래했는데.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열차 철길이 폭격을 받아서 열차가 못 가니까 내려가 걸어가다가 저쪽에 차를 대놓으면 타고 그런 것 같아요. 그래 가지고 춘천이라고 군인들이 막 트럭을 타고 많이 와 있었어요. 그러니까 니는 몇 사단 몇 연대 간다는 말을 안 해주어요. 그때 당시는 가면 다 죽는다 하는 말이 나왔어요. 나오니까 막 피하고 이랬거든요. 그때는 겨울 되었어요. 춘천보다 위로 올라간다고 막 기압을 주는 거에요. 총을 쏘고 야단치고 막 그랬어요. 그래 가지고 사람을 막 100명 같으면 100명, 200명 같으면 200명 사 열 종대로 세워서 트럭에 막 싣는 거에요. 실으면 화천으로 가는 사람, 양구로 간 사람들 말을 안 해주어요. 그때 당시만 해도 참 위험성이 많거든요. 싣고 가다가 인민군이 기습하면 다 죽는 거에요. 다 죽는 거 아닙니까 강원도 거기 다 산인데.”
“사실 머 고생이라는 건 말 못하지요. 배고프고 춥고, 옷은 머 미군들 양말 한 켤레하고, 미군들 내의 한 벌 하고 작업복 광부들이 입는 옷들 하고, 그래가 날이 되게 춥고 하면, 군화가 얼어가지고 꼬당꼬당해요. 그래 가지고 사실 동상 걸린 사람도 많고 환자도 많이 발생하고 직접적으로 싸워가지고 부상당하기 보다는 동상 걸려서 다리 절단하고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사실 배고프고 춥고 하니까 싸울 힘도 없어요. 배가 고프니까 안 그래요. 몸에 동상이 와가지고 얼어빠져 가지고 손이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어떡해요. 요새 같으면 요새 군인들은 그랬으면 다 들고 일어났을 꺼에요. 요새사 잘 먹고 잘 입고 하잖아요.”
당시 군인들은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보급품은 부족하고 먹는 것 또한 부실하여 과연 제대로 전투를 치룰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자신이 어느 지역으로 가는지도 모른 체 전선에 투입될 뿐이었다. 40여 년이 지난 이후 어르신은 자제분의 면회를 가면서 자신이 어디에서 전투를 치렀는지 대략 짐작을 할 뿐이다. 그리고 보급품이 부족하다보니 미군의 보급품을 훔치는 사례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군과 한국군은 종종 이런 문제로 시비가 붙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대가 홍천에 있으면 계속 홍천에 있는데 원래 그런지 알아요. 요새는 그렇지요. 또 5사단 같으면 화천에 있고 그런데 그 때는 대개 지역은 몇 사단 지역이다 몇 사단 지역이다 하는 것은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 때는 자꾸 부대가 계속 이동을 하거든요. 무슨 등산 다니듯이 집도 절도 없으니깐요. 집이 없거든요. 그래 가지고 막사를 지어 놓으면 나무와 짚으로 지어 놓으면 또 있다가 그랬죠. 처음에는 화천 무슨 면인지는 몰랐는데 그게 우리 아들이 거기 있었어요. 면회 가서 알았어요.”
“거기서 그때 보니까 산해면에서 그 때 당시는 캐러멜? 캐러멜? 미군들이 그렇게 불렀거든요. 거기서 넘어가면 면회 가서 알았는데 여기서부터는 강원도고, 여기서부터는 경기도다 하는 팻말이 있더라고요. 군인들도 있고, 거기를 넘어가니 1동, 2동이라는 데가 있어요. 거기 못 가서 고개를 넘어가니까. 밤이 되었는데 오후 늦게 출발해서 부대가 방공호를 파서 나무를 쳐서 풀을 뜯어서 놓아놨는데. 그 천막에 덮어 놓았는데, 눈이 와서 폭삭 내려 않았어요. 그래서 낮에 어디로 갔는가 하면 도로를 따라 얼마를 가니까 포천이라고 해요. 그 어디 가니까 이정표가 있어요. 포천이라고 돌에다가 그때 여기서 몇 사단이 싸웠다. 거기서 한 10일 있었을까. 나무를 쌓아서 집을 원두막같이 지어서 있는데 또 부대가 이동한다고 하더라고요. 여기는 마 눈 와서 얼어붙어서 신발 다 얼었는데. 경기도 포천이라고 하는데 이름도 못 들어 봤어요. 그 때는 포천 시도 아니고 군인데, 지도를 보고 있는데 포천에서 문산까지 얼마 안 되고 머 파주고 그렇더라고, 자꾸 여러 번 보니까 기억이 나요. 거기서 미군들하고 교대를 하게 되었어요. 원래 아군 진지 뒤에 미군 진지가 있고, 그런데 거기서 미군들이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 안 했어요. 본래 교대는 즈그가 그 진지에 있는 것 같으면 우리가 들어가면 전방 진지 저기는 인민군 몇 사단 몇 대대가 있다. 그렇게 인수인계를 하게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와 없는가 하면 입구에 골자기에 들어가니까 못 들어가게 해요. 추운 데서 떨고 있는데 미군들이 마 한국군들 다 도둑놈 들이라고, 군수 물자고 옷이고, 저기 도둑질 할라고 하는 게 아니고,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죠. 미군들은 머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말라 카데요. 미국놈이 한국군 보고 도둑놈이라고 한다고 해요. 그 말이 어디서 나왔냐고 하면 미군 부대에 있다가 넘어온 고용택이라고 한 사람도 있었고, 또 미군들하고 싸움을 해가지고 한국군으로 편입된 사람도 있고 그랬거든요. 만나서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러면 한국군 무시하고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고 하고 정말 죽겠다고 그래서 고용택이라는 사람은 싸움을 했다고 하데요. 그러니 미군이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외국까지 와가지고 목숨 버릴라는 넘이 어디 있냐고, 그래서 칼빈 총 옆구리에 대고 하니 손을 번쩍 들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미군들이 한국까지 와서 목숨 걸라고 하겠어요. 그래가지고 사건이 커져서 한국군에 넘어왔다고 하더라고요. 차라리 굶어 죽어도 미군들한테는 그런 서러움 받고는 못 산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사람들 무시한다고.”
[부상과 부산 병원 생활]
“조그만 한 산에 골짜기가 패이고 봉우리는 높고 했는데, 야간 수색을 나갔는데, 보기는 즈그가 미리 봤는 텍이죠. 그런데 머 즈그가 미리 퍼부우니까 우리도 퍼부었는데, 그 지역이 정말 가까웠어요. 어둡고 비는 오는데 날이 추운데 머 압니까 미리 본 놈이 임자지요. 즈그가 기관포를 막 쏘는데, 우리도 산탄총 쏘고 수류탄 떤지고 엉망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부대에서 응원 부대가 왔거든요. 그래서 이후 잠잠해 졌는데, 그 전투 중에는 나는 다리가 그렇게 된지 몰랐어요. 그래가 내가 알기로는 한 사람은 죽었고, 아마 죽었을 거에요. 복부 파편을 맞았으니까. 전부 한 병원을 가면 알지만은 그렇게 안 되거든요. 그래가 응급 처치는 어떻게 한지는 모르고, 헝겊으로 막 감아 놓았더라고요. 이게 붕대를 감아야 되는 그게 아니고 왜 이걸로 감았는지... 그 때는 급해서 없으니까. 안되면 옷을 째서 피가 안 나오도록 막아야 되는데요. 머 어디를 다쳤는지 본인은 모르는 거에요 되게 아프면은 세상 분간 모르고 구르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같은 부대에 있는 사람이 빨리 봐서 호송을 하면 괜찮은데, 모르면 피가 흘러서 죽는 거에요. 머 상황이 그렇게 되면 위생병 부르고 난리가 나지. 그래서 끌어안고 감아서 데리고 뛰어 내려오는데 그때 당시에는 아픈 줄을 모르겠어요. 야전 병원에 오니까 하늘이 팽팽 돌데요. 전구가 하나 달려 있는데 사람이 잘 안보여요. 이렇게 죽나 했는데, 부산 360병원에 오니까 죽을 수도 있다고.”
“전방에서는 부상을 입었을 때는 규정이 위생병이 따라 다니게 되어 있는데 되게 급하면 위생병이 머 제대로 준비 안 되어 있으면 옷을 찢어 가지고 감고 지혈을 시키거든요. 피가 안 나오도록. 나무를 꺾어가지고 사다리 같이 만들어가지고 싣고 후방에 내려오면 응급조치 해가지고 부산으로 빼지요. 대구로 머 그런데 부산으로 뺄 때는 내가 알기로는 지금 부산대학교 뒤에 삼일정양병원이라고 있었어요. 거기 환자들이 다소 치료가 어느 정도 된 사람들이 가는 곳이에요. 나도 거기 갔는데. 그리고 부산시청 뒤에 560병원이고 있었거든요. 거도 있었고, 그 다음에는 포로수용소[거제리] 360병원이라고 있었어요. 저 남해초등학교[정확하게 어디인지 확인되지 않음]에도 군인이 있었고요. 그게 왜 그렇냐면 전방에서 막 실고 기차로 내려오면 놔둘 데가 없거든요. 그래 가지고 나도 처음에는 혜화국민학교에 있었어요. 그때 내가 헬리콥터로 원주까지 와가지고 거기서 넘겼었나... 혜화국민학교 오니까 비가 쓸쓸히 와요. 그런데 사람을 이따 이렇게 놔두면 어떻게 하느냐...내가 다리 절단 되가지고 파편 맞아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운동장에 갖다 놓은 사람도 천진기라요. 기차로 헬리콥터로 실어놓고 갖다 놓고 가뿌는 거에요. 그래 가지고 혜화국민학교에 학교 통로에 갔다 놨다가 인제 또 560병원에 넘겨서 가지고 치료 해 가지고 그 다음에 포로수용소 360병원이었어요. 거기 미군들이 있었는데 텐트를 해놓고 그 안에 있었는데. 그래 가지고 인제 부산대학교 삼일정양병원에 있다가 다시 거제리 360병원에 갔어요.”
“그래 가지고 부산에 혜화초등학교[현재 혜화여자고등학교]에 있었는데 한 이틀 있었던 것 같아요. 날짜 기억이 확실히 잘 안 나요. 그때는 상처가 들 났고. 이 사람들이 운진다니까 여기 그냥 깁스를 했거든요. 내가 생각했을 때는 깁스하면 안 되는데. 우선 지혈한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혜화국민학교에서는 안 되고 거기는 우선 수용소고 그래서 360병원에서 한쪽 다리는 절단이 되었으니까 다리를 띠어 내고 쌌고, 미군들이 처음부터 다리가 떨어졌는가 그런 거는 기억이 잘 안나요. 너무 아프고, 그러니까 전방에서 후송되고 안 될 것 같으면 잘라내고 그러니까.”
“아무튼 깁스를 푸니까 안에서 고름이 막 터져 나와요. 공기가 안 통하니까. 내 그래서 깜짝 놀랬었어요, 보니까 뼈가 보이더라고요. 처음에는 미군들 말을 잘 모르는데 잘 들어보니 절단 이런 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내가 의사를 잡고 미군들이 머라고 했냐고 물었죠. 절단 머 하는 말을 했지요. 그러니까 미군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내가 생각을 했을 때 절단을 할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절단을 하는 게 말이 되냐고 그랬죠. 그러니까 의사들이 미군들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안된다고 했지요. 그래서 내가 미군들 오라고 했죠. 미군이 머라고머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미군을 딱 잡고 당신 지금 머라고 했냐고, 이 다리 절단하면 니 죽고 내 죽는다고 했죠. 나도 가만 안 있는다고 하니까. 잠시만 하더라고요. 그때는 엑스레이만 찍었는데 그걸 보고 고개를 끄떡끄떡 하더라고요. 치료해 가지고 또 놔두더라고요. 그래가지고 괜찮아서 놔두는 갑다 했죠. 며칠 되니 자꾸 치료만해요. 의원들 말만 들었으면 끊었어야 되었죠. 그때는 또 골치 아픈 게, 혜화국민학교 그 학교에 있을 때 사방 마 내 죽는다 고함을 지르고 막 야단이거든요. 전방에서 다쳐 가지고 끊고 절단되어가 마 와 가지고 오면 사방 시끄러워 내 자신도 아파가지고 못 참겠지마는 그러니까네 그때 당시에는 그때 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사실 그때 당시에는 자살해 가지고 죽는다는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왜 그러냐면 많이 다치고 많이 당해 가지고 밥 못 먹고 하면 요새는 수술하면 무통 주사를 맞으면 다소 나은데 물론 아프지 않는 거는 아니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거든요. 그때 주사는 머를 놓느냐면 모르핀을 많이 맞으면은 그게 제대로 안 나아 가지고 곪아 터져요. 원래 하라카며는 미군들이 606호 카는데 나왔는데 그게 양이 다 안 돌아가거든요. 그러면 그거 놓아 달라고 붙들고 하거든요. 간호사들 의사 붙들고 놓아 달라고, 어떤 사람들은 욕도 하고 하거든요 너무 아프니까. 되게 심한 사람들은 수면제를 놓거든요. 노란색 약인데 그거 전부 미제입니다. 그거는 잘 안 줄라고 하지요. 간호사들하고 의사들하고 잘 안 줄라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낮에 놓으면 먹고 자거든요. 그러면 밤 되면 아파 죽는다고 막 병원이 떠나가요. 다리 없는 사람들은 바닥에 기어 다니고 그래요. 마 사정하면 11시쯤에 2개 이상은 안 주어요. 2개 정도 먹으면 환자들이 먹고 낫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11시쯤에 먹으면 한 5시까지 자거든요. 그게 낫는 게 아니고 약의 힘에 자는거죠. 모르핀 놓듯이 놓으면은 그것도 내가 알기로는 모르핀이라는 거는 한국 전쟁 때 그게 막 들어오거든요. 한국군들은 별로 그것도 없었어요. 미군들한테는 그게 많았는데.”
“미군들은 우리하고 합동 근무를 안 하거든요. 그런데 미군 부대에서 와가지고 의사들이 수술하고 그것도 잘 만나면 괜찮아요. 왜 그렇냐면 잘 만나면 헬리콥터로 빨리빨리 후방으로 후송을 해서 치료를 하고 수술을 하고 하는데, 한국 군부대의 야전 병원이라 해봐야 텐트 쳐가지고 있는데 그거 수술해 가지고 후방으로 뺄라고 하면 힘들어요. 그런데 미군들은 비행기로 헬리콥터로 빼내고 그렇거든요.”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르신은 전방 순찰 도중 북한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양쪽 다리와 엉덩이에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었다. 따라서 우선 전방의 야전 병원에서 우선 치료를 받은 다음 부산으로 후송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참전한 병사가 전투 중 부상을 당하면 야전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한 뒤 후방의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군 병원은 부상당한 병사들을 일정 기간 치료한 뒤 전투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상이자는 소속 부대 또는 보충대로 보내고 나머지 병사들은 상이 정도에 따라 구호병원, 정양원 등에 입원시키거나 제대 조치했다. 당시 어르신의 부상 상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한 쪽 다리는 전투 시 절단되었고, 남은 다리마저 의료 시설과 의약품, 의사들의 부족 등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절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어르신은 병원 퇴원 이후 우선 삼일정양원에 수용되었고 이후 전라도의 정양원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당시 부상의 고통과 시간적으로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정확하게 기억을 하시지 못하거나 시간 순서가 엉켜있는 부분도 있지만, 우선 증언을 종합해 보면 어르신은 부상당한 이후 원주로 헬리콥터로 이동한 이후 기차로 부산에 도착, 당시 혜화초등학교[현재 혜화여자고등학교]에 임시 수용되었다. 이후 560병원, 거제리 포로 수용소의 360병원을 거쳐 부산 삼일정양원[정양병원]에 입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다. 그 중에서 특히 상이군인의 경우 의료 시설과, 의료품, 전문 의사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더 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증언에서도 나오듯이 전문 의사와 의약품의 부족으로 제대로 치료를 못 받는 경우는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보이고, 상당 부분 수면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양반 이름을 잊어버렸네. 그 양반 병원에 다녔어요. 날 보고 돈이 많이 있느냐고 하더라고요. 치료할 돈이 있다고 하니까. 그때 360병원 있을 때에요. 그러니까 의사가 군인은 군 병원에서 치료하는 게 원칙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무슨 말 나오는 거 들어 볼라고 글쎄요 내가 군부대를 비판할 수도 없고, 내가 원장님한테 치료를 받아 볼라고 왔다고 하니까. 보자 카데요. 왼쪽에 여기에 몰핀 주사를 놓은덴가 거기가 터졌어요. 터졌는걸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냐면 그걸 째 가지고 닦아내고 솜을 넣어서 닦아내고 해야 되는데 그냥 잘라냈어요. 치료를 잘 했다고 하지는 않더라고요. 한 이틀에 한 번씩은 오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말은 안 하고 내가 50일간 받았죠.[그건 언제 이야기 입니까?] 육군병원 있을 때에요. 원장님 치료비는 얼마나 들었습니까? 그러니까 많다고 해요. 돈도 별로 없다고 했죠. [그때 육군병원에서 왜 치료를 안 받았습니까?] 거기서 치료를 하는 게 못마땅하고 치료 자체가 잘못 되어서 처음부터 이걸 치료를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그걸 대충대충해서 상처가 곪아 버렸어. 그래서 민간 병원에서 치료 받았지.[어느 병원이었습니까?] 어디더라 범일동에 있었던 것 같은데. 병원이 아니고 요새 같으면 의원이었죠. 의원이라도 정형외과가 있고 외과가 있고 그랬거든요. 그래가 인제 새살이 나서 어느 정도 나았으니 육군병원에서 나머지 치료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치료비는 얼마나 됩니까 물어보니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 이 분이 돈을 안 받을라고 하는 갑다 했죠. 그 원장이 치료비는 놔두고 얼른 완치나 하라고 해요. 완치하면 제대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재복무 하면 싶다고 내가 그때 이등 상사였거든요. 그러면 어디를 가도 고통 받고 힘든 일은 안하지 싶다고 하니까.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나이도 있고, 사회에 진출하라고 하더라고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르신은 당시의 군 의료 체계를 신뢰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총상을 입은 다리를 치료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좋은 의사를 만나 한쪽 다리는 의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남은 다리는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철도 공무원으로의 취직과 부산 정착]
“[제대는 언제 하셨습니까?] 57년도인가 58년도인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래가지고 철도청 부산 공장창에 거기에 인제 32년 근무했지요. 그래가 거기서 정년퇴직했죠. 57세에 무조건 정년퇴직 시켰거든요 공무원 규정에 의해서. 거기서 머 큰 만족을 느껴서 거기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 먹고 살라고 할 수 없어서 그 때 공무원들한테는 밀가루도 한 포대씩 주고 하니까. 처음에는 가니 월급이 너무 적고 해서 사표 낼까 말까 하다가 자꾸 몇 년 더 있고 하니까. 급수도 오르고 호봉도 오르고 하니까 조금조금 나아지니까 약간의 취미가 붙더라고요. 급수도 오르고 처음에 우리는 철도 기능직 받았어요. 거기도 행정직 있어요. 관리직에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 쪽에 있어도 직접적으로 나는 그 차 밑에 들어가서 정비를 하고 그런 일은 안했거든요.”
“먼 친척 어르신 중에 한 분이 행정직인데 3급인데 날 부르더라고요. 보훈청에서 오셨죠 하면서.... 다소 공장의 사무실에서 일하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나는 못한다고 했죠. 왜 못한다고 했냐면 디젤 기관차의 설계도를 볼 줄 알고 해야 하는데, 대강은 알았는데 잘 모르니까. 그거는 사실 고등학교 나와도 못 봅니다. 그런데 철도고등학교 나온 애들은 알죠. 그기도 또 오래 근무한 사람이 알고 하는데, 그래서 나는 디젤 기관차 제동 장치 시험실에서 근무 한번 해보지 않겠냐 해서 거기서 일하기로 했죠. 제동 장치니까 자동차나 배나 제동 장치는 배우면 되겠지 싶어서요. 거기서 32년간 일했어요. 거기는 전부 기름밥 먹고 차 밑에 들어갈 일도 없고 하니까. 주로 제동 장치 부속을 기관차에서 떼 와서 우리가 보고....혹여나 목욕탕 같은데 보면 보일러 게이지가 있는데 전부 다 그리로 들어와요. 그리고 기차 디젤 기관차 속도계, 부산역에서 디젤 기관차가 출발했는데 사상역에까지 몇 마일 나왔나 하는 카는가 그런 거.... 가만 보니 책도 있고, 제동 장치 시험실 그 맨 앞에 타이어에 붙어 있어요. 이후에 기관사 있는데 [게이지가] 떼보면 계량기가 있는데 100, 200, 300, 400 연필로 표시를 해놓는데 그거를 우리가 보고 서울서 부산 내려오면 그걸 보고 책에다 기록해 놓고 필름을 빼고 새로 넣어주고 필름은 보관소에 넣어 놓거든요. 그러면 대구역에서 내려올 때 몇 킬로로 내려왔다 하는 걸 알 수 있어요. 심지어 머 기차에 옛날에는 나팔 소리가 나지요 그것도 공기로 소리가 납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제동 장치라고 해서 우리가 관리했지요. 그것도 발로 디디는 게 있고, 손으로 땡기는 것도 있고 한데 그것도 머 그런 거는 머 배운 게 있으면 해요. 그래서 여기 머 보일러실에 게이지 같은 거는 한 가지 참 웃긴다고요. 시중에 장사꾼들이 저울을 이렇게 해서 속이는가를 알 수가 있었죠.[세상에 돌아가는 것도 알게 되네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보일러 게이지나 시중에 저울이나 눈금의 기준은 똑같거든요. 안에 기어로 돌아가는데 그걸 풀어가지고 놔 놓고 봤거든요. 보니까 안되는 게 아니라 아 이렇게 해서 속이는구나. 거 같이 있는 사람이 장사하는 사람이 있어서 가져갔어요. 세상이 다 그렇게 돌아가는구나 했죠.”
“[취직은 국가 보훈청에서 주선해 준겁니까?] 예. 맨 처음에 일단 공무원들로 취직시킬라 카면 일단 시험은 응시해야 되거든요. 안 그래요. 확실히 내 자신도 그렇지만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도 많았어요. 제주도 갔을 때 지 군번도 못쓰고, 이름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자기가 써야 되거든요. 그걸 누가 써줍니까. 그러면 자꾸 옆에 있는 사람들이 써 주고 그랬어요. 그런 사람들이 약 3분의 1은 돼요. 그건 확실해요. 자기 이름은 자기가 써야 되는데 군번하고.... 모르는 사람이 많고, 시골에 다 못 사니까. 자기 집에 농사도 물론 짓는 사람도 있었지만 남의 집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1년간 일하면 얼마다 하고 일하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고향에 편지도 못 쓰고, 명찰에 이름도 못 쓰고......그러고 우리 그 때 남해초등학교[현재 위치는 알 수 없음]에서 150명 모아놓고 시험을 봤거든요. 그게 그렇고 그렇지 뻔한 거 아닙니까. 일단 시험에 응시를 해야 공무원 발령을 받을 수 있으니까. 머 웃기지. 그냥그냥 넘어가다시피 해가지고 그래서 인제 공무원 발령이 내렸거든요. 기능직 공무원이라는 거는 내가 알기로는 특채라는 게 있잖아요. 특채라 카는 게 있는데 우리들 때는 잘 없었어요. 특채라는 게 무슨 기술이 있어서 그걸 뽑겠어요. 그래서 대략 그래가 묻데요. 자기의 희망지가 어디인지 쓰라 해서 썼지요. 웃기죠. 세무서, 농산물 검사소, 교통부 그렇게 썼거든요. 그랬더니. 교통부를 잘 못 쓴 게 옛날에는 배, 비행기 전부 교통부 소속이었었던거든요. [아 그래서 철도청에 가게 된 거네요?] 예. 나중에 가니 어딜 가고 싶냐 묻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농산물 검사소 가고 싶다고 했지요. 충무동에 있었는데. 거기에 사실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랬는데 마 그리로 발령나니까. 어쩔 수 없고 본부에 명단이 올라가서 교통부에 갔죠. 큰 실력은 없어도 내가 생각할 때는 농산물 검사소 같은 데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집에서도 많이 생각해 보고....머 좋다 어떻다 생각해 본 거는 아니고요. 그냥 이래저래 알아보고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고요. 오기만 오면 자기가 알아서 해주겠다고, 농산물 검사소 충무동에 있는데 그 소장이 고향 사람이라서 원래 알아요. 고생 많이 했다하면서 적극적으로 되도록 힘써주겠다고 했는데 그렇게는 안돼요. 운이 없으니 그렇나. 교통부만 안 썼으면 되는데 마 실수를 해서 사람이 머 그라고 학교 경비로 많이 갔거든요. 그 때 학교 경비로 간 사람들은 고용원으로 갔거든요, 고등학교나, 대학교나 기능직 대우를 받고 갔는데 그 사람들은 괜찮았고 아주 늦게 간 사람들이에요. 그냥 경비로 갔으면 형편없었어요. 그 때 당시로 내가 알기로는 부산대학 경비로 간 사람은 경찰이 돼서 경비로 간 거에요. 그래도 대학교 같은 데는 아무리 경비지만 좀 알아야 되요. 전화만 받아서 어디 되나요. 법원에 간 사람도 있는데, 너무나도 힘이 부족해도 돌아온 사람도 있어요.”
이승만(李承晩) 정권하에서는 상이군인 원호 정책은 상이군인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으며 상이 정도와 노동 능력으로 상이군인을 분류하고 그 정도에 다른 정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호 제도가 본격적으로 바뀐 것은 박정희(朴正熙) 정권하에서였다. 먼저, 1961년 8월 5일 독립된 원호 기관인 군사원호청이 설치돼 여러 부서로 흩어져있던 원호 업무를 일원화했다. 그리고 종래 연금 지급, 각종 부조 사업 등을 정비하면서 원호 대상자 일제 조사 및 상이군인 신체검사, 취업 알선 따위의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어르신의 증언에서는 제대와 취직의 시기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승만 정권에서도 일부 상이군인에 대한 취직이 국가 기관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자신들이 첫 상이군인으로서 채용되었기 때문에 이득을 많이 보았다고 강조하는 부분과 이후 취직을 하신 분들과는 대우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인제 부산보훈청장이 중령인가 군인이 와가 있었어요. 부산철도청장도 군인이 와가 있었고, 파출소 소장은 머 대위인가 상사가 와가 있었는데, 시장에도 군인이 와가 있었고요. 그라고 박 대통령 딱 되자마자 보훈청 이런 데는 군인들이 점령했어요. 먼고 말해 보니까. 저 저 군인들도 말도 잘하고 실력이 있던데요.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거든요. 그 중령이 말을 팍팍 놓아요. 그래서 보세요. 당신이 나이 몇 살 먹었으며, 현재 계급이 중령이라고, 나도 계속 군대 있었으면 중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환자는 진급 안 시켜서 내가 제대한 거지, 말 좀 조심하라고, 당신은 현역이고, 나는 예비역인데, 군사 혁명 나고 교육을 받을 때 그렇게 밖에 못 받았냐고 했거든요. 조심하라고 하니까. 그 옆에 장엽이라고 이북 사람인데, 작대기로 확 패뿔라 했거든요. 그 사람도 다리 관통해서 불편하고 한데 대접이 그러니 신경질 난다 아닙니까. 그 옆에 대위가 있다가 좀 이해하면 안 되냐고 그렇게 말하더라고 서로가, 좀 있다가 가니까 청장이 머라 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가니, 나쁜 말은 안했어요. 당신이 군대 생활은 했고 내 선배인지 후배인지 모르는데 잠시만 이해하면 괜찮을 건데. 참.....이 나라를 차지한 사람 아니냐고 그러면 안된다고, 서로 이해하라 카데요. 알겠어요. 이해하소. 카데요. 그 사람은 말 딱딱 안 놓아요. 그래서 악수하라 하데요. 그게 그렇잖아요. 나도 할 말 있지요. 건방지게 그러면 안 되죠.”
“마 인제는 공무원하고 살았죠. 아들 셋 키우면서…….”
부산의 철도청 공무원으로 생활하시면서 어르신께서는 아들 셋을 키워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상이군인의 분류에 따라서 박정희 정권 이후에도 생활을 보장받지 못 하신 분들도 있고, 운 좋게 정식 군대를 복무하여 어르신처럼 생활을 보장 받으신 분들도 계신다. 어르신께서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으로 인해 파란만장하신 삶을 사셨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현대사의 증인으로서 남은 생애를 보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