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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34
한자 書洞住民-定着記
영어의미역 The story of the people who settled in Seo-dong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서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철욱

[서동의 연혁]

서동은 부산광역시 금정구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뒤로는 윤산, 앞으로는 중군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동쪽으로는 사천을 경계로 해운대구 석대동과 접하고 서쪽은 고개 너머 부곡동, 북쪽은 회동동, 남쪽은 동래구 명장동과 접한다. 1740년(영조 16)의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동면 서동으로 나온다. 훗날 동면동상면동하면으로 분리되면서 동상면에 속하였다.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상면읍내면에 편입되었다. 광복 후인 1959년 서동, 금사동, 회동동을 병합하여 동상동이라 하였다. 1982년 동상동의 명칭이 영도 동삼동과 발음이 비슷하여 시민 불편이 많아지자 원래대로 명칭을 복원하였다. 이곳에는 전통적으로 섯골 마을안골 마을이 있었고,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해 김씨(金海金氏), 이씨, 박씨, 정씨, 송씨들이 살았다.

1965년 동상동 인구는 2,013명이었다. 1968년 영주동충무동의 고지대 철거민들 이주가 시작된 직후인 1971년에는 2만 4,039명으로 급증하였다. 서동으로 복귀된 직후인 1983년에는 8만 4,388명이나 되었다. 토박이들이 오랫동안 살아오기는 해도 오늘날처럼 커다란 도시 마을로 성장한 것은 도심지에 살던 사람들의 이주와 관련 있다. 당시 이주해 와 터를 잡고 식육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수일씨의 기억에서 서동에 정착한 사람들의 생활을 더듬어 본다.

[갑작스런 이주]

여섯 살에 지나지 않았던 이수일씨가 서동으로 이사 오게 된 기억은 아주 어렴풋하다. 이사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물난리 때문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영주동에 물난리가 크게 난 것으로 기억나는데, 미세한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아버지가 여기를 떠나야 한다. 아버지가 우리만 가는기 아니고 영주동 판자촌 사람들이 몽땅 동래구로, 온천장 주변으로 가야 된다고 하는 걸 얼핏 들었어요. 있다가 몇 달이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트럭을 구해 가지고. 사람들이 속속 떠나더라고요. 우리가 떠난 게 내 기억으로는 초창기야.”

실제로 이수일씨 가족이 살았던 영주동 부산 터널 위쪽은 경사가 급해 큰 폭우가 내리면 위험한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가끔 커다란 화재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수일씨 기억을 따라 필자가 조사해 본 바로는 이 지역 이주와 물난리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실제로 영주동 철거민 이주는 부산시의 토지 구획 정리 사업과 관련 있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유랑민이 증가해 1960년대까지 부산 도심지 주변 산동네에는 불량 건물들이 급증하였다.

이에 도심 환경과 생활 여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1950년대부터 부산시에서는 도심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가운데 이수일씨 가족이 살았던 영주동 또한 1968년 ‘영주 지구 토지 구획 정리’라는 이름으로 재정비되었다. 불량 주택을 없애고 4층 높이 아파트를 건설하는 한편 철거민들은 동상동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운 것이다. 동상동의 택지 조성 면적은 34만 7692.56㎡[10만 5,177평]였으며, 전신주와 도로, 공동 화장실 10개를 설치할 계획이 세워졌다.

서동으로 이사 온 철거민 가운데 이수일씨 가족이 가장 먼저 온 것으로 보인다. 부모님과 밑으로 동생 둘을 합쳐 다섯 식구가 미군 트럭에 짐과 함께 서동으로 향했다. 동래에서 안락동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비락우유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명장동을 지나 서동으로 들어왔을 때 주변은 늪지대였고 미나리 밭이었다. 뒤쪽으로 대포산과 윤산이 둘러싸여 있었다. 부곡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을 정비하여 택지로 만들어 놓았다. 택지는 세 골목에 소방 도로 한 개, 이것이 한 블록이었는데 모두 여섯 개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비된 택지에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쳐서 한 가구의 집터를 구분해 놓았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가구당 49.59㎡[15평].

“오자마자 행정 관계자가 보더니만 당신은 어느 땅, 땅만 배정을 해 주는 거라요. 땅만 배정을 해 주니까, 중간에 어머니한테 들었죠. 그게 어느 땅인지, 앞으로 어떻게 배정될 것인지 몰랐지. 땅에다가 거적때기 펴 놓고, 하여튼 어머니가 오니까 황당하더라, 피난 온 기분이더라 그랬어요…. 급한 대로 공사장에서 나무 판때기 주워서 재빠르게 지어서 겨우 잠자리 만들고, 보로고 몇 개 걸쳐 놓고 솥단지 걸고, 화장실이 없었는데, 세 블록마다 공동 화장실을 운영했답니다.”

철거민이 이주해 오자 행정 담당자만이 나와서 땅을 배정해 주고, 나머지는 이주민이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집을 짓는 것도, 먹고 사는 것도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이주민 가운데 돈이 좀 있고 형편 좋은 사람은 건축업자 불러 블록으로 벽을 쌓고 슬레이트를 올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좋은 집이었다. 아니면 보통은 각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합판으로 벽을 만들었다. 지붕은 당시 가장 많이 사용하던 루핑으로 비를 겨우 막는 장치만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열 집, 내일 열 집,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주변에 금세 동네가 만들어졌다. 2차는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3차는 금사초등학교 방면, 4차는 대포산 아래, 5차는 대포산 위로 주택지가 형성되었다.

아이들끼리 너희 집 어디냐고 물으면 들어온 순서에 따라 조성된 택지를 부르는 명칭인 1차, 2차 등으로 동네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아무래도 1차가 가장 먼저 들어왔고 위치도 마을에서 가장 중심이다 보니 가장 우월 의식을 가졌다. 이수일씨는 경제적으로도 1차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나았고, 4차나 5차에 사는 사람들이 더 열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동 철거민 정착이 공식적으로 진행된 것 외에 객지에서 이주해 온 주민도 많았던 것 같다.

[부모님 농촌 탈출기]

이수일씨 부모님은 경상남도 사천에서 부산으로 삶터를 옮겨 왔다. 대부분 부산 토박이보다 이주민이 더 많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아버지 이야기 들어 보니까 사천, 고성, 진주만 해도 낫는데, 우리 동네 사천에는 공항이 생겼는데, 사천 그쪽이 산이 우거져 가지고 산림 녹지율이 전국 1위라 할 정도로 산동네라. 그서 조금 나간다 하며는 한 30리 길을 걸어가며는 삼천포, 그서 조금 더 나오며는 진주 쪽으로 가는데. 사천 쪽에서는 벌어먹고 살 만한 게 없다. 토지 조금 가지고는 살길이 막막하더라. 그래서 63년도 내를 막 낳아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인자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이래 가지고는 우리가 살길이 그렇다 해 가지고, 일자리 찾아 부산에 내려왔어. 누구 소개로 부산공동어시장에 취직을 했지.”

시골에서 부산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수일씨 아버지도 집안 아저씨가 도시로 나오라고 설득해서 나올 수 있었다. 아무 연고 없이 도시로 나온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당시 시골에서 도시로 나오는 것을 잘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어쨌든 집안 아저씨 도움으로 살 집도 구하고 직장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수일씨 아버지가 부산공동어시장에 취직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공동 어시장 업무도 다양했는데, 이수일씨 아버지는 중매 일을 담당하였다. 공동 어시장 일은 서동으로 이사한 후에도 계속되었고, 정년퇴직까지 하였다. 아버지 직장 덕분이 이수일씨 가족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생선은 다 먹을 수 있었다. 아주 비싼 참조기도 보통 사람은 제사상에나 올릴 수 있으나 이수일씨 가족은 매일 반찬으로 먹을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직장을 구하자 이수일씨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 이사한 동네가 영주동이었다.

이수일씨가 당시 살던 집 주변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공동 우물이었다. 경사가 급해 조금이라도 큰 비가 오면 물난리가 난 기억이 생생하다. 한 번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고랑이 넘치자 아버지가 이수일씨와 동생을 장롱 위에 올려놓았던 기억이 있다. 동네가 언덕이었기 때문에 위험한 일도 많았다.

영주동에서 놀았던 친구들 기억은 없는데, 우리 집이 약간 영주동 언덕배기였거든요. 내가 좀 별났어요. 지금도 내 그 밥그릇을 버리지 말라고 했는데. 쇠 밥그릇, 얼음 갈아 가지고 팥빙수, 얼음을 갈아서 팥은 안 들어가고 물 색소 넣어 가지고, 그걸 구멍가게에서 많이 팔았죠. 내가 그 밥그릇 들고 그거 사러 내려가다가 넘어져가지고 심하게 다친 기억이 나요. 네다섯 살 정도 되었을 거예요.”

색소만 들어간 팥빙수를 사 먹으러 가다가 언덕에서 둥근 밥그릇과 함께 굴렀을 이수일씨 모습이 상상된다. 당시 부산 사람 대부분이 산동네에서 살았고, 이수일씨처럼 굴러 다친 사람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산동네다 보니까 시내까지 쉽게 다닐 수도 없었다. 가끔 사진사가 산동네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 준다. 이수일씨가 갖고 있는 사진 가운데는 이 마을에서 찍은 것도 있다.

“내가 사진을 보니까, 동생하고 모형 비행기 안에 타 가지고 내가 헌병이라고 모자를 쓰고, 그 저 옛날에 기억날 겁니다. 동네에 사진사들이 미니 비행기를 끌고 다니면서 ‘사진 찍어요.’ 합니다. 애들이 엄마 사진 찍어 달라 하면…. 내가 비행기에 앉아서 조종사라고, 애들 옷을 맞춰 가지고 와요. 하이바 쓰고, 썬글라스 쓰고, 옆에 여동생은 서가 있고, 말괄량이 삐삐처럼 머리 땋고.”

도시에 살면서 도시 문화를 누리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릴 때 비행기 조종사처럼 폼을 잡은 기억은 그나마 시내에 가까운 영주동에 살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서동 전성시대]

1968년 이주가 시작되어 1970년을 지나면서 서동에는 대부분 집들로 채워졌다. 인구도 급증하였다. 서동에서 가장 중심지는 뭐니 뭐니 해도 서동 시장이었다. 서동 시장부곡동으로 넘어가는 도로 안쪽에 길게 형성되어 있다. 시장 가장 아래쪽에서 가장 위쪽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길다. 너무 길다고 해서 ‘기차 골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시장 출발이 이곳이었는데, 이후 시장이 옆으로 확대되었다. 시장에는 서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판매하는 가게들로 하나 둘 채워졌다. 누가 먼저 가게를 차리면 그 품목은 피하고 다른 것을 차렸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그다지 경쟁이 심하지는 않았다.

“설이나 추석이나 명절 되며는 이 시장을 보는데, 사람이 말도 못 합니다. 여기 서 가지고 밀려서 다녔어요. 이 뭐, 지금도 우리 가게가 반 칸 자리 아닙니까. 그 당시에 시장을 보러 나오며는 사람이 저 위에 서면 몸을 꼼짝 못 할 정도로,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고, 각 가게에 사람들이 열댓 명씩 서 가지고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다 보니까 말도 못 합니다. 그래 가지고 약 3, 4일 동안은 이 길을 못 다닐 정도로…. 때가 72, 73년부터 85, 86년까지…. 그라고 나서는 동네가 부산은행 쪽으로 개발되면서 마트도 생기고, 연쇄점도 생기고, 슈퍼도 생기고…. 그때만 해도 슈퍼도 없었어요. 하여튼 우리 요쪽 골목이 서동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골목이었어요.”

이 무렵 서동 경제와 사람들의 생활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누가 먼저 영업을 시작하느냐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얻느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실제로 앞에 요 집이 신발집이었어요. 손훈식이라는 아저씨가 아버지 연배인데, 1970년 말에 신발집을 채려 가지고 엄청 많이 벌었어요. 그때는 신발이라는 개념이 명절 되며는 우리 데리고 가서 신발 하나 꺼집어 내어서, 그때만 해도 국제상사 거 운동화에 끈 있는 거, 신발도 무조건 이만큼씩 크게, 신고 헐렁헐렁해야 오케이. 엄마는 발이 금방 크니까 큰 거를 사라 그랬어. 사서 집에 가져가서, 당시 신발은 만화 영화 같은 거, 요괴 인간 같은 거, 아톰 같은 거 그린 신발이 인기가 많았다이. 그런 운동화가 판박이가 박히며는 그 또래에서는 짱이라. 그 운동화는 올려놓는 거라. 운동화 끈을 십자로 한 번 매어 봤다가 일자로 매어 봤다가, 빨리 추석이 되면 친구들한테 자랑도 하고 한 번 뛸 텐데, 한 기억도 있다.”

엄마 손잡고 신발 사러 가던 풍경이나 손가락 한 마디쯤은 더 큰 신발을 골라 주면서 신을 것을 강요하는 엄마와 벌였던 실랑이를 기억나게 한다. 한 번쯤 이런 기억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마는, 서동에 살았던 이수일씨에게는 좀 더 남다른 추억이 있다. 가정 형편도 좀 좋은 편이었고, 항상 친구 또래에서는 대장 노릇을 한 탓에 뭐든 자랑할 것이 많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도 많고 경기가 좋았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금사 공단이 만들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금사 공단이 조성된 것은 1974년이다. 공단에 입주한 기업 가운데 이수일씨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회사는 삼화고무 동래 공장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979년 현재 약 3,000명의 종업원이 종사하고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풍영을 비롯해 동일고무벨트 같은 규모가 큰 회사가 많았다. 신발 공장 월급날은 10일, 15일, 20일이었다. 월급날은 서동 시장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금사 공단과 여기에 입주한 회사와 종업원들 때문에 변화한 서동의 풍경은 집 구조였다.

“보통 서동의 집들에는 1층에 세 가구가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쪽방처럼. 지금 집들은 그 이후 세를 놔도 안 나가니까 싹 터 가지고 세 가구짜리를 한 가구로 만들어서 그렇지, 지금도 세놓은 집을 보며는 한 층에 개구멍이 세 개 있어. 부엌, 방 등이 따로 있고, 그런 집들이 서동에 많습니다. 그만큼 근로자들이 많았다는 뜻이고, 그만큼 경기가 좋았습니다. 월급날 되며는 장사가 잘 되었고, 돈이 남아돌았고.”

서동의 집들 구조가 판잣집에서 양옥으로 바뀌는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집 주인들이 늘어나는 금사 공단 종업원들에게 세를 놓기 위해 집을 양옥으로 새로 짓기 시작하였다. 1층에는 가능한 방을 많이 만들고, 2층에는 주인이 살았다. 집세만 받아도 만만찮은 수입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놀이 문화]

1970년대 서동 주변에서 초등학교는 금사초등학교뿐이었다. 이수일씨는 이 학교 28회 졸업생이다. 이수일씨가 다닐 때는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었다. 학교 가는 길은 ‘미꾸라지 고개’라고 불리던 조그마한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다. 비가 오면 열에 아홉 명은 미끄러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는 운동신경 좋은 남학생들 사이에 여학생을 끼워서 함께 넘어갔다. 이 무렵 비가 온다고 하면 장화 신고 다니는 게 최고였다. 장화는 아무나 신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흰 고무신 정도 신고 나올 정도였다. 물론 가난한 집안 아이들은 검정 고무신을 신기도 했다. 흰 고무신에는 멋을 낸다고 황금 박쥐를 그려 넣기도 하고, 통풍시킨다고 다이아몬드 무늬를 만들기도 하고, 별표를 만들어 칼로 도려내기도 했다. 그러다 찢어지면 엄마한테 야단맞는 일은 1970년대 이수일씨 주변 친구들에게서 흔히 있던 풍경이었다.

당시 한 학급에는 보통 90명에서 100명 정도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요즘에 동창회에서 같은 또래를 만나도 모두 기억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수일씨는 당시 반장을 오래 했고, 전교 학생회장 선거에도 출마했던 경력 때문에 많은 친구가 알아본다고 한다. 여학생과 남학생 교실은 분리되어 있었다. 여학생 교실은 멀리 떨어져 있어, 간혹 남학생들이 그쪽으로 가려고 하면 규율 선생님의 제지를 받았다.

학교 주변에서 생각나는 것으로는 ‘봉수 문방구’가 단연 으뜸이다. 이 무렵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 중 그곳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 문방구가 유명한 것은 점심시간에 라면을 끓여 주었기 때문이다. 오전 수업 중에 문방구 아저씨에게 라면 끓여 줄 것을 약속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대여섯 명이 담을 뛰어 넘는다. 이 아이들은 대개 학교에서 조금은 힘을 가진 권력자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때만 해도 라면이 최곱니다. 라면, 아무나 못 먹었어요. 라면 한 개, 그때 20원인가 15원 했는데. 당시만 해도 집에 손님 오면 파 넣고 계란 넣고, 손님에게 라면 대접해도 괜찮을 정도였으니까. 라면, 그거 하면 넘어오고. 선생님한테 걸리며는 담임선생님 눈에 띄면, 너 임마 하면 도망가고. 나중에 종례 시간에 나가서 대표로 엉덩이 몇 대 맞고.”

하굣길에 반드시 들르는 곳 중 하나가 번데기 파는 곳이었다. 당시 학교 앞에서 번데기 파는 아저씨는 그냥 한 봉지씩 파는 게 아니라 야바위를 하였다. 원판을 돌려 찍게 해서 거기에 적힌 숫자대로 주는 것이다. 아이들 재주라고 해 봐야 어른들 상술에 당할 수는 없다.

“빙 돌리면서 찍어라 하면 꽝이 나오더라고. 찍어서 세 봉 걸리면, 봉지도 뾰족해 가지고 꼬깔콘처럼 해 가지고, 퍼는 척하면서 다 흘리 버리고. 입구에만 걸쳐 있어 가지고, 아저씨하고. 한입에 털어 넣어 버리고. 국물 더 달라카며는 봉지에 국물 떠 주며는 밑을 뜯어 가지고 국물 쪽 빨아먹고.”

학교 앞에는 불량 식품도 많았다. 아주머니가 파는 빙수도 있었는데, 삼각형 모양으로 비닐에 색소 넣어 얼음 띄운 것, 아니면 양주 위스키 통처럼 생긴 곳에 얼음을 돌려서 달걀처럼 생긴 것에 이쑤시개 넣어서 만든 것, 조그마한 용기 안에 색소 넣고 이쑤시개 넣어서 얼음 넣고 물 넣고 돌려서 얼려 만든 것, 주머니 모양에 물과 색소 넣고 아래에 구멍 내 짜 먹는 것 등등. 친구가 좀 달라고 하면 밑에서 받아먹게 하거나, 아니면 장난친다고 입으로 쏘지 않고 눈으로 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불량 식품이었지만, 당시에는 배가 아픈 친구를 본 적이 없다.

[마을에서 병정놀이]

서동은 양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동네 아이들이 산에 가서 노는 일이 많았다. 요즘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하는 것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놀이들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이수일씨는 친구들과 윤산에 자주 갔다. 어릴 때 불이 많이 나 나무가 없었기에 ‘대머리산’이라고 아이들끼리 부르기도 했다. 아이들이 모이면 윤산에서 앵두 같은 거, 망개 같은 것을 많이 땄다. 특히 망개는 소쿠리 가득 따 와 목걸이, 팔찌 만들어 동생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아니면 윤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계곡에서 가재도 잡고 물놀이도 하였다.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흔적도 없어졌지만.

어릴 때 윤산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기억은 병정놀이다. 동네 형들 따라 산에 올라가서 전쟁놀이를 한다. 산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상대편과 싸우기 위한 솔방울을 모으는 일이다. 당시 산에는 예비군 훈련 때문에 파 놓은 진지가 많았다. 아이들은 여기에다 수집한 솔방울들을 쌓아 전쟁 준비를 하였다. 또 전쟁놀이에서 필수 도구는 나무칼이었다.

“칼을 집 지을 때 보며는 모서리에 대는 잣대 같은 것이 있어요. 나무. 납작한 나무가 있어요. 지다란 거. 이게 칼 만드면 참 좋아요. 우리는 집 지을 때 쓰는 나뭇가지고, 그거를 사포 사 가지고 갈아요, 갈며는 나무색이 나와요. 세멘이 없어지고, 앞에는 뾰족하게 만들고, 또 일부 이만하게 잘라 가지고, 칼 손잡이 만들고, 그라고 인제, 저기 연탄불에다가 연탄 집개 벌겋게 달궈서, 손잡이에 엑스 모양을 만들고, 조금 더 멋 내는 놈들은 집에 저거 엄마 장식품, 옛날 집에 가며는 노리개 달아 놨다 아닙니까. 노리개 실을 거다 끼는 거라. 진짜 칼 멋진 거라.”

건축 자재를 이용해 정성스럽게 칼을 만들고 계급에 따라 여러 가지 장식도 꾸미면 정말 조선 시대 어느 장수가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하여 전쟁 준비가 대충 갖추어지면 아이들 가운데 조직이 만들어졌다. 대장이 있고, 부대장이 있고, 사령관이 있고, 참모가 있었다. 만화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익힌 지식들로 전투를 위한 작전도 구상하였다. 전쟁 상대는 이웃 마을 또래들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먼저 솔방울 던지기로 주고받고, 다음에는 칼을 들고 나가서 칼싸움을 하고, 이것도 좀 지나면 육박전을 한다. 갈수록 위험해지는 놀이지만 같은 편끼리는 의리를 쌓고, 선배는 후배를 챙기는 아량도 이 놀이에서 배우게 된다.

[문화 체험, 텔레비전과 영화]

이수일씨 집은 아버지가 공동 어시장에 다니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로웠다. 그래서 동네에서 가장 좋은 집에 살았다. 이수일씨 가족은 서동에 이사 오면서 분양받은 곳에서 어느 건축업자가 지은 양옥집으로 이사해 살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건축업자가 자기가 살 거라고 양옥집을 지었어요. 그때가 1971년도로 기억나는데, 우리가 그 집으로 세를 들어갑니다. 그 집의 구조가 1층에 방이 세 개 있었는데, 그 방 세 개가 중앙에 큰방, 작은방은 주인이 살고, 우리는 단칸방인데, 집 건물 자체는 양옥집이라서, 계단 뽑아 올려 가지고 옥상 있고, 당시 우리 집이 제일 좋았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이 저 밑에 우체국보다 더 좋은 기라. 사람들이 우리 집 부를 때 저 위에 가면 우체국 집 있다, 우체국 집보다 더 좋다고 했어요. 다음 해 그 집을 우리가 샀어요.”

이수일씨 집은 동네에서 가장 좋은 집이기도 했고 동네에서 가장 먼저 텔레비전이 들어온 집이기도 했다. 이주해 온 직후 동네에서 가장 먼저 텔레비전이 있었던 곳은 ‘아폴로 만화방’이었다. 당시에는 만화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려면 돈을 줘야 했다. 엄마로부터 용돈을 받지 못했던 이수일씨는 친구 도움으로 만화방에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매일 친구에게 의존할 수만은 없어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다.

“만화방에 돈을 주고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미안하니까 엄마한테 거짓말을 했어요. 내가 학교 가는데 학교 유리창을 깨어 가지고 그걸 물어 줘야 한다, 그래서 돈을 받아 가지고 친구들 온나 해서 만화방에 가서 텔레비전 봤지. 텔레비전을 보고 나서 집에 오니까…. 책상 다리에 나를 허리띠 가지고 묶아 놓고는 엄마가 회초리 갖고 때리는데….”

이 사건 때문에 이수일씨는 이후로 부모님 말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텔레비전은 보고 싶고 돈은 없을 때라 경험할 수 있음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은 부모님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파동이 있은 후 부모님께서 텔레비전을 사기로 결심하였다. 시기는 1971년 무렵쯤 되었겠다. 텔레비전을 파는 곳이 동래 부근에는 없었기 때문에 서면까지 나가야 했다. 지금은 교통편이 발달하여 서면이라는 공간이 그다지 먼 곳이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다른 도시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갈 때는 다른 교통편을 이용했더라도 돌아올 때는 텔레비전을 싣고 와야 하기 때문에 택시를 타야 했다. 당시 서면서동의 택시 요금은 미터제가 아니라 서로 합의해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택시 타는 것은 보통 사람은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수일씨 부모님이 텔레비전 사러 갔다는 소문은 금세 온 동네에 퍼졌다. 이수일씨는 친구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집 앞에 친구들 40여 명이 모였다. 해가 거의 저물어 갈 무렵 부모님이 탄 택시가 서동 골짜기를 향해 올라왔다.

“해가 으스럼 하이 지니까 택시 한 대가 왔어. 택시가 안 지나 다니는 길인데, 한 대 올라오더라고. 주로 그때 다니는 기 삼륜차가 있었고, 버스 정도가 우리 동네로 다녔는데. 보니까 엄마 아버지가 탔데. 차가 대는데 친구들이 택시를 둘러싸더라고. 기사 하나가 따라왔더라고. 텔레비전이 지금 이런 텔레비전이 아니고 옛날 텔레비전. 나무로 해 가지고 밑에 네 발이 달려 있고. 대한 토시바 거 텔레비전인데. 텔레비전 앞에 문도 있더라고, 안방에 제일 센타에 놓았지…. 친구들은 우리 집 앞에 벌떼같이 서 있고. 기사가 안테나를 조립하더라고. 안테나 선 넓은 거 연결해서 물리 가지고 돌려 싸면서 텔레비전을 켜는데, 금방 안 나오더라고. 진공관식이니까. 그때만 해도 흑백 아입니까. 지지직하다가. 오늘의 방송 스케줄이 나오는 시간이었어. 방송 안내 시간 되고, 뉴스하기 전인데. 친구들은 못 들어오고 밖에 서 있고, 나는 우쭐거리고.”

시골 같은 서동 마을에 택시 한 대가 들어오고, 텔레비전 기사가 안테나와 텔레비전을 맞추면서 마침내 텔레비전이 나오던 날, 이수일씨는 이 모든 광경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던 동네 꼬마들 대장으로 등극하였다. 친구들은 저녁에 텔레비전 한 번 보기 위해 이수일씨에게 아부하고, 맛있는 것 생기면 상납하는 그야말로 텔레비전을 매개로 한 권력 관계가 만들어졌다.

1972년부터 인기 있던 드라마 「여로」 덕분에 이수일씨 집은 매일 저녁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들로 가득했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 먹을 공간조차 없었다. 이로부터 약 3년 정도 지나자 이웃에도 한 집 두 집 텔레비전 안테나가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이수일씨의 대장 노릇도 재미를 잃어 갔다.

한편 초등학교 다닐 무렵 영화도 많이 보러 다녔다. 문화 혜택이 없던 시절에 영화는 최고 오락거리였다. 서동에서 사람들이 영화 보러 주로 가던 곳은 온천 극장, 동성 극장, 국보 극장 등이었다. 당시 온천 극장은 다른 영화관보다 영화가 조금 일찍 들어오는 특징이 있었으나 비좁았다. 반면 동성 극장은 명절 때 새 영화가 들어오기도 하고, 2본 동시 상영도 하였으나, 스크린이나 객석이 완만하여 영화 보기에 좋았다. 국보 극장은 어린애들이 보기에 적당한 영화도 아니었지만 시설도 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명절 때 되며는 새 영화 같은 거, 그 와 가지고 한다고 온 동네에다가 포스터를 붙인다 아닙니까. 우리가 극장 구경 간다고 가며는, 가는 길에 지금 온천천을 건너야 했어요. 지금은 세멘트로 도로를 만들었지만, 당시에는 부곡동에서 동성 극장 방면으로 바로 건너기가 힘들었어요. 지금처럼 길이 없었고, 온천천 건너는 길이 공사장에 사용하는 구멍 난 철판으로 만들었어. 당시 어린애들은 영화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은데 그 다리 건너는 게 무서웠어.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고 하니까 느낌에 다리가 무너질 것 같으니까 공포심에 못 건너가는기라. 그러면 마 운다꼬. 이거를 건너야 동성 극장 나오는데, 그라면 눈을 깜아라 손잡고 내 뒤만 따라 온나 하고 그랬어요.”

서동에서 걸어서 고개 넘어 부곡동을 지나 온천천 흐르는 물을 건너 동성 극장까지 갈 수 있었다. 동성 극장은 1980년대 후반까지 영화를 상영했던 오래된 극장이었다. 이곳은 규모도 커서 영화뿐만 아니라 쇼도 많이 하였다. 특히 이수일씨가 기억나는 것은 남진 리사이틀이었다. 작은엄마가 시집왔을 때 온 가족이 남진 쇼를 보러 간 기억이 있다. 극장에 지정 좌석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였다. 모두 서서 관람했는데, 요즘처럼 남진이 노래할 때 누나들이 속옷을 벗어 던지기도 했다. 물론 쇼를 보기 위해 보림 극장에도 자주 갔다. 보림 극장에서는 하춘화 쇼를 많이 했다. 혼자서는 못 가고 부모님이나 친척들이 올 때면 극장이나 유명 가수들 쇼를 보는 일이 한 해에 한두 번은 있었다.

[서동을 떠나다]

중학교는 동신중학교로 진학했다. 이때부터 이수일씨는 초등학교 때의 화려함에 비하면 뭔가 삐거덕거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중이염을 앓았는데, 경상남도 사천에 계시던 큰어머니가 진주로 데려가 수술을 시켰던 게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부산에도 좋은 의사가 있었을 텐데 부모님이 왜 진주까지 보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수술이 잘못 되어 시간이 걸렸고, 2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는 수업일 수를 채우지 못했다.

중이염이 어느 정도 낫자 복학을 하려고 했으나 2학년 복학이 불가능했다. 담임선생님께 부탁도 하고, 그동안 공부한 내용도 이야기했으나 수업일 부족을 내세운 학교 측 입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유급되어 1학년에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이수일씨에게 놀러왔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니까 반가웠을 테지만, 이수일씨에게는 마음 상하는 일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2학년 배지를 달고 있었지만 본인은 한 학년 낮은 1학년 배지를 그대로 달고 있었으니 창피스럽기도 하였다. 그래서 오후에 집에 오자마자 교복을 찢어 버리고 학교를 그만뒀다.

“학교 안 간다고. 검정고시 한다고. 그 해에는 내가 시험을 안 치고. 내가 충격을 많이 받았는 모양이라. 그래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 이듬해 검정고시 준비를 해가지고, 그때 책이라고 별기 있습니까. 『완전 정복』 사다가 거의 다 외웠어요. 시험을 쳤는데, 그 검정고시 그거는 합격했어요. 쉽게, 고등학교 진학을 할라 그러니까 또 내가 제도적인 걸 싫어하고 이탈하게 되더라고. 대입 검정까지 하자. 내 기억에 공부는 하여튼 내가 하고 싶어서 했고, 내가 독을 품었으니까 합격을 했어. 그래 가지고 우리 친구들 고 1 될 때 나는 대학 진학을 했죠.”

제도적인 교육의 틀을 싫어한 이수일씨는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 대학 입학 검정고시에 연달아 합격하였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친구들은 인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자신감이 충만할 수밖에 없었다. 뭘 해도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구속도 되었다. 이러한 구속 경력 때문에 군대도 안 갔다. 1984년 친구들은 대학 간다, 군대 간다 하는데 이수일씨는 사회에 진출하였다. 특별히 다른 취직은 하지 못하고 사촌 형과 구포에서 전축 판매업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전축이 별표, 독수리표, 천일표 이런 게 있었는데. 84년도인데 당시에는 태광에로이카, 롯데파이오니아 이런 식으로, 이래 가지고 오디오 같은 거, 나는 롯데파이오니아를 팔아서 상당히 장사를 잘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경제가 부흥기고, 좀 좋은 게 근로자들 평상시 월급이 16, 17만 원 할 땐데, 오디오가 벌서 200만 원대 가는 게 많았으니까. 마진도 많았고, 돈도 많이 벌었어요.”

이 무렵 오디오는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그다지 보편화되지 않았다. 반면 돈이 좀 있다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대쯤 있어야 할 정도로 부의 상징이었다. 돈은 많이 벌었으나 부모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이수일씨가 어릴 때부터 똑똑했으니까 뭔가 큰일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친구들 중에는 잘된 친구도 많은데 시장통에서 장사나 하니까 말로 표현하지 못할 심정이었다. 하지만 구포 시장에서도 열심히 살았다. 상가 번영회 총무를 맡아 시장을 위해 여러 가지 업적을 쌓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죄책감, 어릴 때부터 좋지 않았던 심장 때문에 구포 시장에서의 생활을 접고 다시 서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시 서동으로]

1991년 당시 연애를 하던 부인과 결혼을 하면서 지금 서동 시장의 현재 위치에 식육점을 차렸다. 부모님을 모셔야겠다는 생각과 건강을 고려한 소일거리 정도로 생업을 유지하자는 생각을 하면서 서동으로 되돌아왔다. 부인과 결혼하여 아들, 딸 하나씩 두고 살고 있었다.

“서동에서 이 일을 하는데, 식육 계통은 처음인데, 식육은 처음이니까, 이 가게가 보다시피 작아요. 내가 더 크게 할 수도 있지만, 내 일부러 이 가게를 하는 게, 이 건물이 작은아버지 건물이거든. 내가 요게서 장사를 하는데, 이거 말고 점포는 딴 데 있어요. 이게 내한테는 정들은 곳이고, 장사의 기반을 쌓아 놓은 곳이어서 여개서 하고 있는데. 91년도에 가게를 오픈해서 보니까, 92, 93년도까지 장사가 참 잘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수입이라는 개념이 없고, 전부 국산 쇠고기, 돼지고기고, 부위별 판매 개념도 없고, 사람 봐 가면서, 저울은 중량을 그대로 해도, 부위별로, 국을 끓인다면 좀 단단한 거…. 주인이 부위별로 조정 가능하고.”

이수일씨는 부모님 모시고 자식들 키우면서 편안하게 살아볼 작정으로 서동으로 돌아왔다. 호구지책으로 선택한 식육점이지만 개업 당시에는 장사가 잘 되었다. 그렇지만 이수일씨가 돌아왔을 때 서동은 과거 초등학교 다닐 때처럼 붐비던 곳이 아니었다. 1993년부터 한두 군데씩 생기던 식육점이 1997년 무렵에는 한 집 건너 식육점일 정도로 많아졌다. 아무리 놀기 삼아 한다지만 심각하였다.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다 1994년 무렵부터 서동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물론 서동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부산 지역 오래된 도심이 모두 비슷한 질병을 앓기 시작하였다. 많은 공장이 인근 경상남도 양산이나 김해로 빠져나가면서 금사 공단 공장들도 인근 도시로 빠져 나갔다. 그런 만큼 이들 공장에서 돈을 벌어 서동에서 소비했던 젊은이들이 사라졌다. 반면 오갈 데 없는 나이든 노인네들만 남게 되었다. 노인들의 소비력이 줄어들면서 시장 통 상인들 수입도 같이 감소하였다.

명절이면 앞뒤가 사람들로 막혀 다닐 수조차 없던 서동 시장에 빈 가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게 세는 싸니까 크게 사업을 해 보려고 생각한 사람들이 간혹 들어와 투자를 하기도 하지만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망해 나갔다. 이수일씨도 지금의 가게에 권리금을 지불하고 들어왔으나 이제는 권리금을 받을 생각은 못 한다. 가게 세도 많이 내렸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서동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이주 1세대들의 경제력도 점차 쇠퇴하였다.

2009년 서동·금사동 뉴타운 조성 계획이 발표되었다. 6개 지구 계획이 발표되었으나 이제 1~5지구는 폐기되고 6지구만 남아 있다. 서동에서 집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집주인들은 뉴타운 조성에 반대한다. 지금 상태로 있으면 온전한 내 집이고, 간혹 달세를 놓아 세를 받을 수도 있어 노후 자금 마련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뉴타운이 조성되면 달세를 놓을 방도 없고, 내 집을 팔고 받은 보상금으로는 새 아파트를 마련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수일씨는 다시 옛날의 서동을 만들어 볼 수 있을까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30, 40대 젊은 친구들이 좀 돌아온다면 자신도 힘을 내어 서동을 살려 볼 생각은 있다. 지금은 지역 경제가 붕괴되다시피 해서 상인들 스스로 개선할 의지를 내지 못한다. 누구 하나 나서 마을을 살려 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수일씨도 쳐다만 보면서 고민만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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