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식민지 시대 광복동 거리의 볼거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68
한자 植民地時代光復洞-
영어의미역 The attraction of the Gwangbok-dong street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생활·민속/생활,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성현

지금도 부산의 번화가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도심의 중심가로 다시 부흥하고 있는 광복동 거리는 개항 전후 부산으로 몰려든 일본인에 의하여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광복로라는 명칭은 해방과 동시에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았다[光復]’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전까지는 일본인들이 ‘긴 길’이라는 의미의 장수통(長手通)이라 부르던 거리였다.

[장수통 거리의 탄생]

개항 이전의 초량 왜관 시절 장수통은 왜관의 동대청(東大廳)과 서대청(西大廳) 사이 길로 앵천(櫻川) 또는 중천(中川)이라는 조그마한 천이 있어 불결할 뿐만 아니라 교통에도 지장이 있어 1880년(고종 17)대에 예산을 들여 복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이 거리에는 새로운 땅 조선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며 건너온 일본인의 상점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러일 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야간에 노점들이 등장하면서 야점(夜店)을 형성, 상점들과 어울려 수많은 인파들을 거리로 끌어들이는 부산의 번화가 장수통이 탄생하였다.

장수통은 주로 변천신사가 있던 변천정(辨天町)의 거리 이름이었지만 일제 강점기로 들어가면 점차 서쪽으로 행정(幸町), 서정(西町), 동북쪽으로 대창정(大倉町)까지 상점가와 야점을 확장시키면서 그 일대를 포괄하는 부산의 중심 거리로 변모하였다. 평상시 장수통은 상설 점포들이 지키고 있는데 주로 직물 등 의복류를 파는 오복점(吳服店), 각종 생활 잡화를 파는 잡화점(雜貨店), 그리고 신발류 등을 파는 이물점(履物店)을 중심으로 다양한 상점들이 각각의 상점 장식과 상품 진열 및 손님 유인책을 통해 영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몰 이후에는 여기저기서 야점이 출현하는데 주로 생활 잡화를 노상에 늘어놓고 떠들썩한 소리로 손님을 유인하며 번성을 구가하였다. 야점이 번성하게 되자 상점가의 작은 잡화점에 타격을 주는 일도 있었지만 상점가와 야점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 속에서 장수통의 번화를 주도하는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다.

그간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장수통 상점가의 영업 방식은 한일 합병을 계기로 집단적인 거리 축제의 방식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공동의 매출 향상을 위하여 상점들은 연합하여 대 바겐세일[할인 판매]을 수시로 펼쳤다. 그중 대표적인 바겐세일은 연말 대 바겐세일과 봄·가을 변천시(辨天市)였다. 상점들의 연합 대 바겐세일에는 염가의 상품이 준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꽝 없는 경품이 준비되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장수통으로 불러 모았다. 더불어 상점과 노점이 즐비한 번화가에는 상품 판매와 관련된 행사 이외의 새로운 볼거리들도 넘쳐 났다.

상점들과 백화점은 상품 판매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전시 및 행사들을 통해 손님들을 매장으로 불러 모았다. 특히 1916년 장수통에 들어선 삼중정(三中井)은 오복점으로 시작했지만 백화점으로 확장하면서 수많은 살거리, 먹거리, 볼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또한 장수통 곳곳에 영화관이 들어서고, 각종 거리 축제들이 잇따랐다.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진행되던 용두산 신사의 축제인 신여(神輿) 행렬은 물론이고, 봄에는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한 하나마츠리라고 하는 꽃 축제가, 가을에는 부산의 상공업 발달을 기원하는 상공제가 장수통을 수놓았다. 따라서 장수통은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구경할 상품과 문화들이 항상 넘쳐 났다. 이로 말미암아 장수통에는 새로운 근대적 인간 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던 보이(modern boy)’, ‘모던 걸(modern girl)’, ‘유한마담’, ‘샐러리맨(salaried man)’ 등이 할 일 없어도 산책하며 구경할 수 있는 근대적 거리로 변모하였다.

부산의 일본인들이 자부하듯이 ‘부산의 긴자’인 장수통은 도쿄의 긴자 거리처럼 번화하기 시작하였고, 이른바 긴자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긴부라’라든가 경성의 번화가인 ‘혼마치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혼부라’와 마찬가지로 장수통을 어슬렁거리는 ‘나가부라’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이제 부산의 번화가인 장수통을 상점 거리, 문화 거리, 축제 거리로 구분하여 살펴보자.

[상점 거리]

1. 연말 대 바겐세일

1910년 제1회를 시작으로 장수통 상점가가 연합한 연말 대 바겐세일은 경품 행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는 줄곧 대체적으로 12월 5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전쟁과 물자 부족, 그리고 소비 억제로 말미암아 경품 행사는 축소되거나 아예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 바겐세일은 일제 강점기 시기 내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연말 대 바겐세일을 위하여 장수통의 각 상점들은 연합하여 11월부터 상점 안팎의 장식은 물론 거리 장식에도 열을 올리며 손님맞이에 분주하였다. 12월의 장수통에는 대 바겐세일을 알리는 적색의 깃발과 함께 가로 조명이 들어오기 전까지 아크등을 비롯한 가스등이 양 가로에 설치되어 흡사 깃발과 등불의 터널을 이루며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1928년 드디어 장수통에도 가로 조명이 설치되면서 야간에는 네온등,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전구나 네온관을 이용해서 조명한 장식이나 광고], 은방울꽃 등으로 거리가 화려하게 수놓이며 더욱 다채로운 연말 대 바겐세일의 모습을 자아냈다.

“장수의 거리를 비추는 등과 적기(赤旗)는 터널처럼 찬바람에 펄럭거리며 소리를 내고 광고기(廣告旗)는 가게 앞에 산같이 쌓인 상품의 부스러기처럼 매달려 있다.”[1917]

“빛의 비, 센티멘털한 은방울꽃 모양의 장식용 전등은 처녀의 눈동자처럼, 화려한 샹들리에는 처녀의 마음처럼 12월의 장수는 빛의 비, 세말 대매출의 행운에 따라 흔들린다.”[1932]

장수 거리 의 깃발 및 등불 장식과 함께 각 상점은 손님을 더 많이 끌기 위한 독특한 가게 장식에 공을 들었다. 또한 기발한 쇼윈도의 상품 진열 방식과 화려한 상품으로 지나가는 손님을 유혹하였다. 나아가 각 상점마다 제각각의 손님 유치 방법을 고안하여 염매회(廉賣會)[물건을 싼값에 팖], 즉매회(卽賣會)[상품을 벌여 놓은 그 자리에서 당장 팔아 버림], 특매회(特賣會)[평소에 팔지 아니하는 물건을 특별히 팖] 등을 수시로 진행하는가 하면 거리에서는 호객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복영(福榮) 상점은 연말 대 바겐세일을 위하여 쇼윈도를 완전히 바꿨으며, 연말연시 선물용 건포도와 초콜릿을 아름다운 상자에 넣어 진열하였다.

고야옥(高野屋)은 점두(店頭)[가게의 앞쪽]를 붉고 흰 포(布)로 싼 장식문에 꽃 전기를 점화하여 연말의 기분을 자아냈고, 빈뢰(濱瀨) 오복점은 큰 아크등을 점화하여 경기를 북돋으며 손님을 불러들였다. 한편 하천(夏川) 부인용 잡화점은 인형을 이용하여 부인 장신구를 교묘하게 진열하여 부인 손님을 유혹했으며, 굴구(堀口) 오복점은 신축의 점두에 보물을 실은 돛단배 모양의 창문 장식을 통해 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기분 좋은 인상을 주는 등 다양한 방법의 장식과 손님 유인책을 전개하였다.

특히 삼중정(三中井)과 같은 대형 백화점은 다른 상점들이 따라할 수 없는 근대식 건축물과 각종 장식, 독자적인 할인 상품 및 경품 등을 통하여 손님들을 끌어들였다. 1916년 장수통에 문을 연 삼중정은 연말 대 바겐세일에 참여하는 한편, 독자적인 경품 행사와 바겐세일을 진행하였다. 그렇기 위하여 점두는 불야성을 드러내는 대규모의 일루미네이션으로 장식하였고, 내부는 도안 모양 전람회를 개최하여 점내는 사람으로 메워져 아침부터 번성하였다.

1926년에는 옆 건물을 사들여 새로 증축하였는데, 정면 출입구가 13간(間)이나 되는 멋진 서양식 3층 건물을 축조하여 건물 자체만으로도 장수통의 이채로움을 자아냈다. 신축 건물의 3층에는 가족들의 회식 장소로 제공하기 위해 식당부를 설치하고 일식 스시와 찻집을 개업하였다.

한편, 옛 점포 입구에는 다이아몬드형 유리로 쇼윈도의 전면을 장식하여 모든 진열을 길 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손님 끌기 전략은 여자 손님을 상대하기 위하여 붉은 X자 멜빵을 멘 미소년을 상점 앞에 배치하여 빈번히 애교를 날리며 손님을 유인하였다는 점이다. 이미 장수통에서 따라올 수 없는 매장과 상품 및 매출력을 보여 주던 삼중정은 1937년 장수통 입구에 5층의 서양식 건물[일부 6층]을 새로 축조하여 상품 판매뿐만 아니라 5층에 큰 홀과 갤러리를 두어 문화적 볼거리까지 겸비하는 명실상부한 부산의 백화점으로 거듭났다.

장수통 상점가의 연말 대 바겐세일은 이처럼 화려한 볼거리와 살거리, 그리고 먹을거리를 구비하였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장수통으로 장수통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 때문에 거리에는 할 일 없이 산책하는 ‘나가부라’는 물론이고 모던 보이, 모던 걸, 유한마담, 샐러리맨 등 산보객의 천지가 되었다. 당연한 관경이겠지만 물건을 사기 위하여 상점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의 행렬이 어디에서나 목격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 물건을 살 수 없어 그저 바라만 보며 만족하거나 현실을 감내하며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는 거리였다.

“12월[시와스, 師走]의 A, B 양선(兩線)은 이 크리스마스를 어떻게든 축복할 것이다. 매해 1회 크리스마스를 장식하고 그 아래에 즐겁게 얘기하고 즐겁게 춤추며 하룻밤을 보내는 인간들에게는 이것은 사랑하는 자를 소중히 할 기회이며 사랑의 다리를 걷는 사람들에게는 또 해피 데이다. 나의 그에게, 나의 그녀에게, 나의 베이비에게, 그런 말의 교차는 하나의 큰 힘이 되어 장수(長手)의 다리에 수많은 사람들을 내보낸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A, B 양선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핸드백, 콤팩트, 넥타이, 장난감 등등의 물건들은 인플레 경기로 시세는 앙등하고 있다고 해도 보너스 기분과 크리스마스 기분이 섞여 있는 그, 그녀들에게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나의 그에게는 넥타이’, ‘나의 그녀에게는 콤팩트’, ‘나의 아이는~’ 그런 말을 하면서 달력을 바라보며 사랑의 날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철도 호텔에서도 크리스마스 데이가 있고 부내의 각 카페에서도 역시 크리스마스의 장식을 끝냈고, 교회에서도 거룩한 신의 아들의 손에 의해 크리스마스트리는 장식되고 크리스마스 전주곡은 화려하게 연주될 것인데 12월의 C선(線)에 우글거리는 사람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어떤 것인가? 우리들은 이 해가 되기까지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아사 전선에 우글거리는 사람에게는 그냥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날의 빵을 어떻게 해서 얻을 지가 문제이다. 크리스마스, 그것은 멀리 떨어진 세계가 아니면 안 된다.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히로인은 눈 내리는 밤에 크리스마스의 0를 보고 그대로 죽어 갔는데 동양의 아이들, 이 계급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0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그것은 축복할 날이며 매해 한 번의 행복한 날이지만 크리스마스에 모이는 사람들은 우선 그 C선에 우글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1932년]

위에서 말하는 C선의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 곧 노동자 등을 일컫는다. 반면 A, B 양선의 사람들은 부르주아와 프티부르주아로 장수통 상점가를 제집 드나들 듯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장수의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긴 했지만 이처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민족적 구별도 계급적 구별과 더불어 뚜렷한 모습을 나타냈다.

한편, 12월 장수통의 연말 대 바겐세일은 신문 지상의 광고와 함께 시작을 알린다. 광고에는 ‘대경품부 세말 대매출(大景品附歲末大賣出)’이라고 해서 경품 추첨을 전제로 한 대 바겐세일을 광고하였다. 즉 일정 액수의 물건을 사면 경품 추첨권을 제공하고, 추첨된 경품은 많게는 100원에서 적게는 10전까지 금액별 상품권으로 교환해 줬다. 그리고 이러한 경품 추첨은 꽝이 없었기 때문에 손님들을 유혹하는 중요한 상술이었다.

또한 삼중정 같은 큰 상점은 연합 경품 이외에 독자적인 경품을 걸고 손님을 유인하였다. 특히 삼중정은 많은 손님을 끌어들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삼중정의 경품은 조선과 일본의 수많은 지점 어디에서든 교환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경품의 통합 상품권은 장수통 어느 상점에나 사용 가능한 것이었다. 매해 경품의 액수와 매수는 조금씩 틀렸지만 대체적으로 총액 1만 원 정도 준비되었다.

1930년 연말 대 바겐세일의 경우, 경품 총액은 1만 3,000원이고 1등 50원이 16매, 2등 25원이 34매, 3등 10원이 70매, 4등 5원이 120매, 5등 1원이 1,960매, 6등 50전이 5,000개, 7등 20전이 1만 5,700매가 준비되었다. 그 밖에 등외도 수 만개가 있어 말 그대로 꽝 없는 경품 행사였다. 그러나 해마다 연말 대 바겐세일은 경품 광고와 함께 시작했지만 1938년이 되면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연말 대 바겐세일 자체의 중지가 제기되자 경품을 뺀 상태로 진행하도록 논의되는 등 변화를 겪게 되었다.

2. 봄·가을 변천시

1929년 장수통에 새로운 명물이 탄생하였다. 그간 연말에만 진행되던 각 상점 연합의 대 바겐세일이 상당한 번성을 구가하자 장수통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변천정 2정목의 각 상점들이 연맹하여 번영회를 조직하고 봄·가을에도 ‘변천시’라는 이름의 대 바겐세일을 4월, 10월에 각각 5일간 또는 7일간 열게 된 것이다. 처음 참여한 상점은 용두산 돌계단 아래를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사안교까지의 27점과 남쪽으로는 장수통 입구까지의 26점으로 오복점, 식량점(食糧店), 이물점, 양복옥(洋服屋), 소간물점(小間物店), 시계상 등 잡다한데, 이발과 약종 등 가격 인하가 불가능한 상점을 제외하고 모두 대 할인 행사에 참가하였다.

이후 변천시는 더욱 확대되어 변천정 1정목까지 가세하면서 또 다른 장수통의 명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변천시의 주최 측은 주간의 장식은 물론 야간의 화려한 전등 장식, 그리고 신취향의 장식을 시설했다. 또한 멀리서 오는 손님과 아이들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휴게소를 갖추는 한편, 부산부립병원 아래에 변천 식당을 특설하고 우동, 소바, 스시, 단팥죽 등을 준비하였다. 연말 대 바겐세일과 마찬가지로 경품 행사도 동시에 진행하였다.

“부산 장수통 2정목 번영회 ‘봄의 변천시’의 첫날은 번성하게 다가왔다. 50여 개의 각 상점이 취향을 집중시킨 쇼 윈도우의 진열, 가게 앞의 장식, 점내의 정돈, 그리고 염가전을 표시한 붉은 딱지 등 찬란한 봄의 빛에 젖어 사람의 마음을 끈다. 오복옥(五服屋)의 유행옷, 잡화상의 모자와 양산, 이물상(履物商)의 산보 조리, 그리고 소간물(小間物)에서 가정용구, 도기, 양복옥의 양복, 시계와 반지, 인형점의 큐피[큐핏을 본떠 만든 인형]까지 춤추는 것처럼 점두에 나란히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역시 부산 긴자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가로의 광경이다. 시중의 사람들도 이 날의 도래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침 10시 무렵에는 이쪽 윈도우 저쪽 가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로 뜻하지 않게 혼잡한 거리[町]을 만들었고, 각 상점은 이에 승부를 다퉜다. 염매의 1일은 예상외의 번성을 보아 역시 봄을 압도하였다.”[1929년]

변천시가 제자리를 잡자 다른 행사들과도 결합하면서 장수통은 한층 더 볼거리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변천시는 봄과 가을 용두산 신사 대제(大祭)와 동시에 또는 연이어 진행되었고, 1932년 10월 제8회 가을 변천시에는 새롭게 부산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대광고 행렬 행사까지 진행되었다. 변천시에 참여하는 상점 70여 개가 제각각 자신의 상점을 뽐내는 기발한 광고 퍼레이드를 남빈 매립지에서 시작하여 장수통 등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대장관을 이루었다. 광고 퍼레이드 행사는 이후 부산일보사 주최 상공제의 한 행사로 고착화되었다.

변천시 또한 연합 대 바겐세일이면서 경품을 걸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는데, 매회 경품으로 1등 50원의 공통 상품권을 비롯하여 꽝 없는 경품 행사를 진행하였다. 1933년 가을 제10회 변천시부터는 경품 추첨뿐만 아니라 상품을 산 손님 1,000명을 초대하여 영화와 무용을 보여 주는 행사도 진행하였다. 영화는 주로 일본 영화사의 유명한 영화를 수입하여 상영했으며, 무용은 부산권번 등 부산 예기들의 춤 공연을 보여 줬다.

1934년 제11회 봄의 변천시부터는 경품 추첨 대신 2원 이상 물건을 산 고객 중 추첨하여 3,000명을 공회당에 초대하고 주야로 나눠 남빈 예기의 무용과 일본 영화사의 배급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초대에 누락된 사람들에도 조그마한 상품을 증정하였다. 다시 1934년 제12회 가을의 변천시에서는 경품을 물건으로 바꾸었으며, 물건 구입 3원당 추첨권 1장을 배급하고 1등에 백미 2표를 비롯하여 9등까지 물건으로 경품을 지급하였다. 다만 등외의 경우 5전의 공통 상품권을 증정하여 빈손이 없도록 하였다. 이처럼 번성을 구가하던 변천시도 연말 대 바겐세일과 마찬가지로 전쟁과 물자 부족 등에 따른 통제 경제에 의해 명맥은 유지했지만 예전처럼 번성하지는 못하였다.

3. 야점

만주와 조선에서 제일이라고까지 일본인 사이에서 자부되던 부산의 명물은 장수통 야점이었다. 야점은 야간의 노점을 의미하며, 부산의 경우 1904년부터 장수통에 하나둘씩 야점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거리의 만보객(漫步客)[한가롭게 슬슬 걷는 손님]들을 상점가와 함께 이끌어냈다. 때문에 장수통에 전차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하자 상점가는 야점이 없는 장수통은 장수통이 아니라며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부산의 명물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전 조선에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고까지 할 수 있는 장수통의 야점은 봄부터 여름에 걸쳐 어슬렁거리며 걷는 것[만보(漫步)]의 정착지이다. 겨우 입을 열 정도의 아이조차 엄마에게 청하는 것은 장수에 가자고 하는 말일 정도로 야점은 번성하고 있다. 삭풍이 불어대어 뼈를 찌르는 극한에도 야점 상인은 노점의 가게를 앞에 두고 작은 화로를 둘러싸고 손님을 부르는데, 야점은 일 년 내내 밤의 장수통을 물들이고 있다.”[1918]

“‘도쿄의 긴자로부터 야점을 빼면 그것은 긴자의 생명선에 대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누군가 말하여 도쿄 시장을 움직였는데, 장수로부터도 야점을 빼면 장수 전선(長手戰線)에도 대이상(大異狀)이 벌어진다. 낮의 피로를 나가부라[長ブラ]로 달래며 그렇게 노래하는 샐러리맨의 수는 줄어들 것이며, 밤의 행진곡의 시작은 장수라고 말하는 모던 보이, 모던 걸 무리들의 슬픈 사랑의 세레나데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야점의 형태를 만든 노점 상인, 통속에서 말하는 향구사(香具師)[길가에서 싸구려 물건을 팔거나 요술 등을 보여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 또는 야바위꾼[テキ屋]들은 ‘거리의 웅변가’이며 말로써 나가부라의 사람들로부터 호주머니 돈을 토해 내게 한다.”[1932년]

하지만 장수통의 야점이 무분별하게 범람하면서 자본력이 적은 소상점의 영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자 장수통의 상점가는 야점의 제한을 주장하게 되었고, 따라서 1915년 새롭게 「야점 규제 규칙(夜店取締規則)」을 제정하였다.

「야점 규제 규칙」

1) 사용 구역은 변천정 3정목 사안교에서 동 1정목 주방은행 앞 금평정 입구에 이르는 도로 중앙부 길이 110간, 폭 2간으로 한다.

2) 사용 기간은 허가일로부터 1개년, 사용 시간은 일몰로부터 오후 12시까지로 한다.

3) 사용의 목적은 노점 영업에 한하는 것으로 한다. 단, 노점이라 해도 음식점[빙수를 제외] 또는 어류, 기타 심하게 노상을 불결하게 하는 것은 이를 허가하지 않는다.

4) 노점을 내는 자는 좌의 제한에 의거해야 한다.

(1)출점자 1인의 간구(間口)는 9척(尺) 이내로 한다.

(2)출점 구역은 길이 10간 마다 1간의 간격을 두고 도로 양측의 내왕에 편리토록 할 것.

(3)출점 때에 도로면에 말뚝을 박거나 처마[屋根] 혹은 울타리[園]를 치지 않을 것.

5) 도로 사용료는 주관 관청의 지정에 따라 납부하는 것으로 한다.

6) 출점 전 사용 구역 및 그 부근에는 반드시 물을 뿌려 먼지의 날림을 방지하고, 또 매 새벽 사용 구역은 물론 그 부근은 엄중히 청소를 행하여 교통 상 지장이 없기를 기하고 또한 청결을 유지할 것.

7) 출원자는 매일 밤 사용 구역 내를 순찰하여 제4항의 제한에 대해 감독할 것.

8) 취체상 필용하다고 인정할 때는 수시 명령 사항을 발할 수 있다.

9) 사용 기간 내라고 해도 필용이라고 인정하는 때는 일부 또는 전부에 대해 임시로 그 사용을 정지하거나 본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야점 규제에 따라 야점 설치 구역은 장수통 중 변천정 거리로 한정되었고, 영업시간도 일몰에서 밤 12시까지로 정해졌다. 그리고 영업 종목 중 노상을 더럽히는 음식점과 어류 판매 등은 제한되었다. 더불어 상점가가 가장 강력하게 요청했던 노점 규격과 위치는 상점가의 영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로 한정되었다. 이후 장수통을 중심으로 야점이 활발하게 영업 활동을 전개했고, 시기와 경우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었다.

1917년 결국 장수통에 전철이 부설되면서 야점은 장수통과 대창정통을 잇는 지금의 신창동 거리로 옮겨 갔다. 그러나 이 거리는 상점가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야점 출원자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야점이 사라진 장수통 상점가는 예년만 못한 상태로 경기는 시들해졌다. 장수통 상점가는 장수통의 번영을 위해서는 야점이 필요하다고 인식했고, 전철의 반대편 상점가를 가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야점을 다시 허가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921년부터 다시 장수통에 야점이 들어섰고, 장수통 거리는 예전과 같이 번화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장수통의 야점 상인은 식민지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에 정착했던 일본인 중 자본이 없는 영세 상인도 있었겠지만, 그 연원이 향구사 또는 야바위꾼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모습도 존재하였다. 즉, 일본은 신농회(神農會)가 야점 상인을 통제하였고, 부산의 경우에도 신농회 지부가 통제하였다. 따라서 야점 상인의 일부는 부산에 정주하던 영세 상인이 아니라 제국과 식민지의 연중행사를 파악하고 약간의 하물(荷物)[짐]을 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조직적인 ‘자유인들’이었던 것이다.

“전국 각지의 연중행사를 상세하게 적은 책을 가지고 금일은 부산에서, 내일은 시모노세키, 그 다음은 오이타 등 자유롭게 약간의 짐을 들고 여행을 계속하는 이것이 진짜 자유인. 그러나 향구사도(香具師道)의 규칙 위범자는 철저하게 제재를 당하며 다시는 이 직업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해진다. 불황이 되면 ‘들치기’라고 해서 두목의 상품을 가지고 도망치거나 매상을 사기 치는 자도 있는데 만약 발견된다면 재차 설 수 없게 혼이 난다. 여행을 떠나면 그 땅의 두목 아래에 일하고, 그 사람이 모른다고 해도 두목의 동지가 안다면 생활[빵]은 염려 없다. 이때 ‘우리는 누구누구의 식구입니다’라는 말이 쓸모 있는데 현대의 사회에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인의(仁義)가 있다……. 호경기 시대 향구사는 엉터리 물건을 팔아 폭리를 취하는 자도 있는데 불황이 되면 손님이 파는 자보다 현명하기 때문에 엉터리 물건은 내놓지 못한다. 또 엉터리 물건을 판다면 경찰의 손이 미치기 때문에 상품은 뭐래도 박리다매로 팔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엉터리 물건을 팔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향구사는 집단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 인해 전체가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두목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현대는 하나의 소자본 가두 상인이 된다. 향구사 기질을 조망해 보면 그들만이 가진 장점도 있다. 또 그들이 협객의 혈통이고, 대개 교도(敎道)가 아닌 자가 많아 그다지 수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목으로 얼굴을 알리며 장사하는 부산선교신농회(釜山船橋新農會) 회장의 말을 빌리면 ‘엉터리로 해서 지나가는 시대는 아닙니다. 역시 성실하고 정직하게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만큼 부하에 대해서는 상점의 자식[子僧]을 양성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함으로 가두의 웅변가도 점차 향상해 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세틸렌(アセチリン) 아래에서 웅변을 토설하는 그들, 이는 현대 소자본 프롤레타리아 상인의 대표이며 씩씩하게 빵을 위해 일하고 있다.”[1932년]

부산의 명물인 장수통 야점도 상점가와 마찬가지로 1930년대 후반부터 전쟁과 물자 부족, 그리고 소비 억제의 전시 경제 체제로 말미암아 이전의 번영을 구가하지 못했고, 점차 명맥만을 유지해 가는 실정이었다. 특히 1940년대에는 가격 표시와 공정 상장의 인식이 없다는 당국의 조사와 함께 엄중한 경고를 받았으며, 제대로 지키지 않는 상인들은 처분까지 받는 등 위축되었다.

[문화 거리]

1. 상점의 개별적 전시 및 행사

장수통 상점가는 상품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쇼윈도와 매장의 상품 진열 이외에 상품 매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전람회, 실연회, 강습회 등을 자주 개최하여 고객을 상점 안으로 유인하였다. 대체로 오복점을 중심으로 한 대형 상점이 주도했는데, 의복과 관련된 전람회, 실연회, 강습회를 상점 내에서 개최하였다.

삼중정은 자주 기모노나 유가타의 새로운 무늬 도안을 전시하는 ‘도안 모양 전람회’를 점포 내 홀에서 열었다. 또한 기모노 천을 창작하는 삼우회(三優會)의 작품을 홀에 진열하여 새로 유행할 기모노 천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더불어 천을 가지고 옷을 만드는 양재법 강습회도 개최하였다. 산본 오복점은 새롭게 발명된 순 일본 옷[純和服] 미싱을 상점 내에 여러 대 설치하고 일반 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친히 실연하는 등 이를 통해 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상점으로 불러 모았다.

상품과 직접 연관되는 각종 전람회, 실연회, 강습회와 달리 간접적이지만 더 효과적이고 인기를 구가한 전시회도 개최되었다. 상품과 관련은 없지만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좋아할 만한 것들을 점내에 전시함으로써 상품 매출에도 기여하는 한편,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통해 상점의 명성을 더 높일 수 있는 간접 광고 효과도 있었다. 코마야 오복점은 당시 세간에 유행하며 관심을 끌고 있었던 ‘미스 조선’에 응모한 사진을 자신의 상점에 전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내방을 이끌어 냈다.

“조선 전체를 대표하는 여인(麗人)을 선발하는 오사카마이니치[大阪每日] 경성지점 모집의 ‘미스 조선’은 발표와 함께 과연 굉장한 인기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터질 듯한 환영을 받으며, ‘미스 조선’의 영관(榮冠)을 얻을 자라고 흔연히 이에 응모한 내선의 여인은 실로 200여 명의 다수에 이른다. 현재 나날이 신문 지상에 미스 조선 후보자의 브로마이드를 연재하며 영예의 당선자가 과연 누구일지에 100% 흥미의 꽃을 피우고 있는데, 부산 장수통 코마야 오복점에서는 앞서 경성 미스코시 백화점[三越] 4층 홀에서 일반에 공개하여 호평을 받았던 각 여인의 브로마이드를 한곳에 모아 22일부터 28일까지 동점 계상(階上)에서 전시하고, 미스 조선 응모 사진 대 전람회를 개최하여 일반에 공개한 첫날 이래 관중이 쇄도하는 모양으로 이상한 성황과 인기를 환기시키고 있다.”[1931년]

하지만 이와 같은 전시는 대형 상점이 아니면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개최할 수 없었고, 그럴 만한 장소 또한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을 대표하는 백화점인 삼중정은 상업적 전시는 물론이지만 점차 문화적 전시를 통해 고객을 백화점으로 유인했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로 가면 점차 정치적 선전과 교육장으로 각종 전시가 적극 활용되었다.

2. 삼중정 백화점의 전시 및 행사

장수통 상점가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삼중정은 상품의 진열과 판매는 물론이고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근대적 경영 방법을 도입하였다. 서구 및 일본 백화점의 영업 방식을 벤치마킹하며 상점 내 식당과 찻집을 두었으며, 문화적 전시와 전람을 할 수 있는 홀까지 설치하였다. 1929년 경성 본점을 백화점 체제로 정비한 삼중정은 1926년 서양식의 3층 건물을 증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1937년 서양식 5층 건물[일부 6층]을 새롭게 신축하였다.

1층 식료품, 조선 토산, 화장품, 장신구, 신발, 신사양품, 연초, 상품권, 관광 안내소

2층 부인 아동 신사복, 부인 아동용품, 운동용품

3층 오복류 일반

4층 가구류, 잡화, 악기, 전기 기구, 시계, 귀금속, 사진기

5층 문방구, 완구, 대식당, 행사회장

6층 낚시 도구, 도예 소도구

옥상 전망대[부산항을 한눈에 조망]

신축 건물 중 5층이 주로 전시와 전람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즉, 5층에는 그랜드 홀 또는 갤러리가 있었고, 전시 공간이 더 필요할 경우 6층의 일부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문화적 전시 및 행사는 이른바 서구식 백화점 경영 방식의 일부로 도입되었지만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발발에 따른 시국 선전의 전시 및 교육장으로 변모했음을 아래의 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위의 표는 이미 살펴본 상업적 전시, 전람이 아닌 문화적 전시 및 행사 등을 전시 기간, 전시 주최 및 주관, 그리고 전시 내용별로 정리한 것이다.

1937년 신축 5층 건물의 그랜드 홀과 갤러리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주로 상업적 전시와 더불어 문화 전시 또는 행사로는 특별한 것이 없고 대중에게 인기 있는 만화전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는 본격적으로 문화적 전시와 행사가 백화점의 영업 방식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 점도 있지만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추고 있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37년 신축 건물 5층에 그랜드 홀과 갤러리를 마련하면서 본격적인 문화 전시와 행사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그러한 전시와 행사들은 대부분 언론 기관이라든지 전시 체제에 부합하는 관변 단체의 시국 선전 및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었음을 위의 표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문화가 정치와 군사적 선전에 이용된 것이다.

주목되는 전시 또는 행사를 살펴보면, 1937년 신관이 오픈되고 첫 전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의 교유였던 이치이[一井爲次郞]가 개인적으로 그린 유화 80점이 5층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그리고 전시된 작품은 판매되었고, 모두 애국기 건조 자금에 헌금되었다.

1938년 11월 20일부터 26일까지 대대적인 선전을 통해 백화점 5층과 6층에 ‘적색소련을 폭로하는 대 전람회’가 개최되었다. 아직 소련과 전쟁하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잠재적 적국인 소련을 제대로 알려 향후 전개될 전쟁의 당위성을 선전하기 위한 이 전람회는 부산일보사가 주최하고 조선군 보도부 및 조선방곡협회가 후원하여 부산 부민의 방공, 방첩 교육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전시된 내용은 소련 비밀경찰인 게페우, 소련군인 적군, 집단 농장인 콜호스, 피의 5개년 계획 등을 상세히 소개하며 소련의 실상을 부민들에게 교육시켰다.

1939년 4월에는 동맹국인 독일과의 친선을 도모하는 일독 문화 교류전을 전시하며 일독 친선이 가지는 의미를 부민에게 전시를 통해 설명하였다.

1940년 3월 25일부터 31일까지는 부산일보사, 대일본수산회사, 부산 중앙 도매 시장, 임겸(林兼) 상점 후원으로 ‘포경 일본’ 전람회가 개최되었다. ‘포경 일본’전은 남쪽으로 진군하는 일본의 상징이며 밖으로는 거액의 외자 획득, 안으로는 대용품 공업에 크게 공헌할 전시 하 일본의 각광 받는 산업인 포경을 전시하였다. 각종 파노라마, 디오라마, 사진, 통계 등을 통해 포경선의 활약 실황, 동서고금의 포경법, 고래에 관한 각종 통계, 실물 포경 용구, 해부 용구, 국책 신제품, 고래의 종류별 기타 대용품 고래 고기, 대용 피혁 및 실물 도표에 의한 고래에 관한 모든 지식을 모두 전시하였다. 전쟁과 물자 부족에 따른 대체 산업의 필요를 강조하기 위한 전시였다.

1941년 11월 13일부터 18일까지는 국민총력경남연맹 주최, 부산일보사 후원의 ‘전시 생활 강조 포스트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지금까지 모집한 전시 생활을 강조하고 총후의 각오를 드러낸 우수 포스터를 전시하였다. 1942년 9월 22일에는 조선국방항공대 경남지부와 부산일보사 주최로 ‘항공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항공 전람회는 항공 사상의 함양을 도모하고 항공 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였는데, 전시 가운데는 대동아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과 비행기 등 관련 물품과 사진을 전시하였다.

이처럼 삼중정의 5층 그랜드 홀과 갤러리에서 전시된 전시회 및 전람회는 모두 전시 체제를 강조하고 총후 국민으로서 갖춰야 할 신체 및 정신을 교육하는 정치 군사적 선전 및 교육장으로 활용되었다.

[축제 거리]

1. 하나마츠리[꽃 축제]

봄의 장수통에는 상점가와 야점의 변천시와 더불어 또 다른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른바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며 치러진 하나마츠리, 즉 꽃 축제가 그것이었다. 하나마츠리는 부내의 사찰과 신도들로 이루어진 봉찬회에서 행사를 주관하였다. 매년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사찰 주직들의 강연회와 일요 학교 아동들의 무용대회 등 각종 대회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하나마츠리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하얀 코끼리상[大象]과 석존강탄불(釋尊降誕佛)을 봉안한 꽃으로 치장된 가마를 앞세운 행렬이었다.

“5일의 꽃 축제부산부내 각 일요 학교 생도 수백 인이 모여 순백의 종이로 만든 큰 코끼리상을 끌며 역전에서 대창정 경유하여 대정 공원으로 향하는 대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오후 2시 25분 무렵 변천정 1정목 대지 여관 앞에서 무슨 사정인지 공교롭게도 전차의 고가선에 코끼리의 장식물이 접촉되고 순식간에 감전되어 무참히도 하얀 코끼리상은 순식간에 불타버렸다.”[1931년]

“오후 1시부터 대승 회관 앞에 전 아동이 집합하여 손에 소기(小旗)를 흔들며 장식된 하나마츠리의 노래를 합창하면서 대행진을 하여 대청정, 장수통을 거쳐 묘심사(妙心寺)에 도착하여 해산하였다.”[1939년]

“정오부터 수백의 꽃 같은 어린이에 들려진 석존강탄불을 봉안한 화어당어여(花御堂御輿)를 중심으로 수천의 청소년들이 각각 히노마루 소기를 손에 들고 그 전후에서 따르며 꾸불꾸불한 깃발 행렬의 부내 행진 순로는 공회당 앞에서 대창정, 장수통 부평정 버스통(通)을 거쳐 대청정 전차통 산하통에서 동본원사 구내의 대곡여자전수학교 교정에 들어온다.”[1940년]

2. 용두산 신사 축제

장수통과 관련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축제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수호신이라고 여겼던 용두산 신사의 봄·가을 대제였다. 용두산 신사의 봄·가을 대제는 가장 오래된 부산 일본인들의 축제로 장수통 상점가의 봄·가을 변천시와 어우러지고 새롭게 진행된 또 다른 행사들과 연이어지면서 수많은 일본인들을 용두산 신사와 그 행렬로인 장수통 및 시내에 쏟아져 나오도록 하였다.

용두산 신사 대제는 3일에 걸쳐 진행되었고 제전 순서는 재야제(齋夜祭)를 시작으로 어례제(御例祭), 신행발여제(神幸發輿祭), 신행소제(神幸所祭), 어발행제(御發幸祭), 어환행제(御還幸祭)로 마무리되었다. 대제의 제전은 모두 신행과 관련된 것으로 신행 행렬이 용두산 대제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행 행렬은 이틀에 걸쳐서 이루어졌고, 가는 순서는 매년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부산부 시내를 모두 순행하였다. 순행 행렬은 선두에는 맨 선두에 기마 경관 두 명을 배치하고 맨 마지막에는 일반 봉공자가 따르는 엄청나게 긴 행렬로 장관을 이뤘다.

“오전 10시 불꽃 3발을 신호로 흰옷의 가마꾼 80명에 의하여 신여는 메어져 기마 순사의 경호 아래 태고의 음(音), 거문고의 향(響)도 거룩하게 행렬은 곧게 표참도(表參道)에서 하산, 참배자의 파도를 만들며 장수통에서 동쪽으로 상생관 코너에서 본정으로 조용조용히 봉배자(奉拜者) 가운데를 국기(國旗)와 헌등(獻燈)과 만막(漫幕)으로 완전히 장식한 봉축의 거리 가운데를 도어(渡御)하였다. 이때부터 표참도 아래 장수통에 대기했던 각 마을의 어린이 신여들은 영차영차 장단 소리도 우렁차게 계속하여 축제 기분을 흘러넘치게 하였다. 신여는 제일은행 지점 앞에 휴게, 본정 2, 3, 4, 5정을 통과 영주정 비탈길에서 초량정으로 나와 지나정을 거쳐 초량역전 휴게소에 도착, 중식 후 전차통을 한길로 부산진역전 휴게소에 도착, 동소 발행 귀환에 들어가 소화 공원, 철도유치원 부근, 초량 시장 부근, 교본 제재소 옆, 부산역전 광장의 각 휴게소에 도착했고, 저녁 때 남빈 매립지 어여소(御旅所)에 도착하여 제1일 동부의 신행을 끝마쳤다.

용두산 신사 대제 제3일 17일은 활짝 갠 하늘을 건넨 절호의 제례 일기[祭禮日和]로 산상에는 아침 일찍부터 신고(神皷) 소리를 탕탕 건네며 참예(參詣)의 부민이 산상을 메워 비상한 번성을 초래하였다. 이날 서부 어신행(御神幸)의 신여는 오전 9시 어여소 발행 남빈 본정통에서 저축 관리소 휴게소 도착한 뒤 관리소 정면에서 출발 부평정 휴게소 도착, 동소 발행 보수정 3정목 정류소에서 왼쪽으로 돌아 송도 가도로 나아가 삼복 아래에서 녹정 휴게소[조합사무소] 도착, 동소 발행 6소학교 휴게소 도착, 중식 후 여학교 앞에서 부민정 휴게소 도착, 도청 구내 휴게소 도착, 중도정 휴게소 도착, 12간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대신정 휴게소[청년 회관] 도착, 동 어발(御發) 보수정 휴게소[고등여학교] 도착, 보수정 교차점에서 왼쪽으로 돌아 대청정 휴게소 도착, 식산은행 코너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본정 참도로(參道路)까지 환행(還幸)한다.”

위 신행 행렬은 1934년의 행렬로 1933년 대제가 서부를 첫 순로로 선택하였다면 이번에는 동부를 첫 순로로 선택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시내를 일순하는 신행 행렬은 동일하였다. 그런데 1935년부터는 영도로 건너갈 수 있는 도개교가 설치되면서 신행 순행로가 변경되어 동부, 서부, 남부의 세 곳을 매년 교대로 신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변경의 첫 번째 신행은 남부의 영도 도어가 결정되었다. 그때까지 바다가 가로막혀 신행의 도어가 불가능했지만 다리가 생겼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첫 순로로 영도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부산방송국도 신행의 영도 첫 도어를 방송하기로 결정하고 부산 대교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신행 행렬의 모든 소리를 녹음하여 마치 눈으로 보는 것 같이 명료하게 지방의 라디오 팬들에게 전달하였다.

“제1일 오전 10시 반 본사 발행(發幸) 표참도 석단에서 장수통으로 나와 상생관의 앞을 지나 본정교번소 앞으로 나와 우회전 신 부청사 앞을 전차로에 붙어서 대교를 건너 대교 부근 휴게소 도착[대교 부근 광장], 동소 발행 전차로에 붙어 진행 가본가 좌회전 전차 종점 부근 휴게소 도착[전차 종점 부근}, 동소 발행 살마굴교를 건너 한길로 삼도 신사 앞으로 나와 우회전 주갑 휴게소 도착[중식, 도선장 부근 광장], 동소 발행 해안 도로를 진행 황석제염소 앞 우회전 이등철공소 앞 좌회전 다시 살마굴교를 건너 상업은행 출장소 좌회전 대송가 앞 휴게소 도착[대송가 앞], 동소 발행 일직선으로 진행 전차로를 횡단하여 적성가 앞 목도회관 앞을 지나 구(舊) 도선장 부근 휴게소 도착[구 도선장 부근], 동소 발행 정관가 앞 좌회전 한길로 서조 조선소 부근 휴게소 도착[서조 조선소 부근], 동소 발행 다시 앞의 길을 되돌아 정관가 부근 휴게소 도착[정관가 부근], 동소 발행 정관가 앞에서 일직선으로 전차통으로 나와 가본가 부근 휴게소 도착[가본가 부근], 동소 발행 전차로에 붙어서 대교를 건너 신 부청사 앞에서 등천과자점으로 나와 동소에서 길양가 앞을 지나 미기김물점 앞 우회전 우송가 우회전 대도가 앞을 지나 중촌선구점 앞을 우회전 조선음식점 우회전 복도가 앞을 지나 남빈 어휴게소 도착[イリコ시장], 동소 발행 산전가 앞 산중가 앞을 지나 청물 시장에서 간선 도로로 나와 진행 우회전 가등가 앞을 지나 적판가 좌회전 간선 도로를 횡단하여 평야이발관 앞으로 나와 동소에서 하무천 권번의 앞을 지나 부산 극장 부근 휴게소 도착[부산 극장 부근], 동소 발행 암기상점 옆에서 우회전 전차통으로 나와 우회전 소화관 앞 무진회사 앞을 지나 삼중정 앞까지 휴게소 도착[사안교 부근], 동소 발행 행정교번소 앞에서 변천정 1정목을 진행 대청정 전차통으로 나와 우회전 전차로에 붙어서 진행 대청정 어휴게소 도착[동척 옆 광장], 동소 발행 전차통에 붙어서 진행 제7소학교 옆의 자동차 도로에서 용두산 광장 휴게소 도착[어일박(御一泊)]. 제2일 오후 4시 어여소 발행 한길로 본사에 환행.”

전시 체제로 들어가면서 용두산 신사 대제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이른바 축제의 떠들썩함은 피하면서 황군 장병의 무운 장구 기원제와 함께 자숙 대제로 계획되었다. 따라서 1938년 가을 대제부터는 이틀에 걸쳐 진행되던 신행 행렬은 하루로 단축되어 그날 바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용두산 신사를 중심으로 가장 짧은 시내 일주의 신행 행렬에 그치게 되었다. 전쟁이 점차 더 심화되자 용두산 신사 대제는 더욱 축소되었다. 1940년 봄 대제부터는 신여의 도어는 볼 수 없게 되었고, 국면이 더욱 심화되자 용두산 신사 대제의 백미인 신행은 아예 없어졌다. 그나마 있던 행사도 1941년 가을 대제부터는 사라지고 신사 참배와 함께 국위의 선양과 황군 장병의 무운 장구를 기념하는 정도로 그치게 되었다.

3. 부산 상공제

1932년 장수통 상점가의 가을 변천시를 북돋기 위해서 부산일보사가 후원한 대광고 행렬 행사가 성황리에 끝나자 아예 부산일보사는 부산의 상공 진흥과 불경기 해소를 목표로 ‘부산 상공제’라는 대대적인 행사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1933년 가을 변천시와 용두산 신사 대제의 사이에 제1회 부산 상공제를 실시하였다. 상공제는 경상남도 장려관, 부산부, 부산상공회의소의 후원 아래 상품제(商品祭), 선전 가장행렬, 그리고 축하회 및 여흥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상품제는 부산 상공업 제품을 용두산 신사에 바치며 신과 상품에 상점의 번영을 감사하는 제사였다.

“우선 상품제라고 하는 식전(式典)을 당일 정오부터 용두산 신사에서 진행. 참가 상공업자로부터 제공된 상공 생산품을 제단에 바치고, 집행 참례자는 신과 상품에게 상점의 번영을 감사하고 부산 상공업의 진흥을 기원하며 폐식.”

다음으로 상공제의 백미인 선전 가장행렬은 참여 상점 및 단체의 선전 가장물 제작을 독려하고, 한편으로 심사까지 하여 부산 상공계의 번영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선전 가장행렬은 용두산 신사의 신여 행차와 비슷한 순로를 따라 진행되었는데 대체로 부산 시내를 일주하였다.

“부산측우소의 관측에 의하면 당일은 가을 하늘 드디어 청증(淸澄)하여 절호의 상공제 날씨이다. 심사 1등의 영관(榮冠)을 목표로 참가자 고심의 결정인 기상천외, 참신 기발한 생각들로 만든 제작물이 탄생하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상공제의 금일이야말로 별항과 같이 오전 11시부터 용두산 신사 신락전에서 엄숙한 식전에 이어 인기를 끄는 선전 출품 가장 대행렬은 가을바람 쏴쏴하는 가을 하늘 아래 오후 1시 용두산상 광장을 출발하여 상공제의 대기(大旗)와 악대를 선두로 대행진을 개시한다. 상공제의 색채도 화려한 산차(山車)[축제 때 끌고 다니는 장식한 수레], 잡옥대(囃屋臺), 가장, 변장, 갖가지 분장의 선전 행렬은 상공제의 노래도 고창하며 사미센(三味線)[일본 고유의 음악에 사용하는 세 개의 줄이 있는 현악기], 태고(太鼓), 제각각 악기의 주악리(奏樂裡)에 완정장사(蜿蜓長蛇)의 열을 만들며 기정의 코스를 부민 환호의 소리에 상호 응답하며 행진하고 돌아다녔다. 축제에 열광한 항구 부산에서 현란 화려한 상공제의 대회권(大繪卷)을 차례차례 펴며 ‘대부산 가을 호화편’을 극채색으로 묘출하였다. 선전 가장행렬의 행진 순로는 대청정, 보수정, 중도정, 부평정을 거쳐 행정, 변천정, 본정에서 대창정을 북빈의 신 간선 도로로 나와 역전에서 영정, 초량정에 이르고 초량역전에서 되돌아서 지나정을 거쳐 다시 역전에 귀환.”

선전 가장행렬 이후에는 공회당에서 축하회가 진행되었고, 다시 저녁에는 남빈 매립지에서 불꽃 대회가 개최되어 가을 밤하늘을 수놓으며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부산 상공제의 최후를 장식한 불꽃 대회는 16일 오후 6시부터 부산 남빈 매립지에서 몇 발의 불꽃을 신호로 개시되었다. 공교롭게도 비에 의해 연기되어 24시간을 기다리며 초조해한 부민은 초려(焦慮)를 기려(綺麗)로 떨쳐 버리며 때마침 겨울의 외투까지 입지 않으면 안 되는 계절을 벗어난 한풍(寒風)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밀어닥친 수만의 군집에 의해 매립지는 사람의 장벽, 사람의 소용돌이로 입추의 여지도 없는 모양이다. 이윽고 정각에서 20분 지체된 제1의 채비 불꽃은 수양버들에 노는 반딧불들처럼 불이 점화되어 어둠의 매립지를 한낮처럼 밝게 비췄고, 불꽃으로 나타난 ‘부산일보사’의 다섯 문자는 찬연히 관람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바로 그때 빵빵 연속하며 울리는 올라가는 국화의 불꽃으로 오직 아~ 아~ 하는 한마디 외 감탄의 말도 나오지 않는다. 이 첫 번째 불꽃에 완전히 매료된 군집은 움직일 수 없다. 두 번째 불꽃은 그로부터 40분 후 8시 ‘조선와전(朝鮮瓦電)’과 ‘경남무진(慶南無盡)’의 문자로 화투 놀이[花競] 후 쏟아지는 별들, 세 번째 불꽃은 8시 40분부터 ‘비가[ビガ]’와 ‘적옥회관(赤玉會館)’의 문자로 일루미네이션 후 난발(亂發) 금비단 등 형편없는 의장(意匠)을 집중하였다. 약 3시간에 걸쳐 연속적으로 쏘아 올린 수십 발의 불꽃은 네온의 빛과 해상의 파도에 비춰져 이중의 색채를 보인 등나무 꽃의 채비 불꽃에 이어서 나가노부[永延] 본사 총무의 종료 인사말과 함께 오후 8시 45분 성황리에 제2회 상공제를 종료하였다.”

부산일보사 주최의 상공제도 1930년대 중후반부터는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고, 아마도 몇 회로 중단되었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8.27 법정공휴일 명칭 변경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