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328 |
---|---|
한자 | 釜山放送局- |
영어공식명칭 | JBAK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보영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개국한 라디오 방송국.
[설립 목적]
조선방송협회는 1934년 중반부터 ‘제1기 방송망 구성 계획’에 따라 전국의 일곱 군데를 대상으로 지방 방송국을 설치할 도시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부산이 제1의 후보지로 유력시 되었다. 1934년 12월 지방에는 최초로 부산에 방송국을 설립한다는 계획이 확정되어 1935년부터 방송국 청사 건립이 시작되었다. 조선방송협회가 14만여 원의 자본을 투여하고 부산에서도 2만여 원의 기금을 모집하고 부청 소유 토지를 무상 대부하여 청사 건축과 장비 도입이 이루어졌다. 1935년 5월 28일에는 체신국으로부터 부산방송국의 설립이 인가되어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하였다.
[변천]
1935년 7월 23일부터 시험 방송을 시작하여 9월 21일에 부산방송국이 첫 전파를 발사하며 정규 방송을 개시하였다. 호출 부호는 JBAK, 출력은 250W였다. 여기서 호출 부호 JB는 일본 내 각지의 고유 호출 부호 중 하나였다. 당시 부산방송국의 위치는 부산부 대청정 1정목 7번지 복병산 기슭이었으며 초대 방송국장은 조선방송협회의 총무부장이던 야기[八木]가 취임하였다. 개국일인 9월 21일에는 개국식을 성대히 거행하면서 그 실황을 부산방송국과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중계하였다. 초대 국장 야기에 이어, 1937년 부산방송국장에 취임한 인물은 부산우체국장 출신의 고시로[小城文八]였다. 그 이후는 미노가 국장을 지냈다.
1차 지방 방송국 건설 사업이 완료되자 조선방송협회는 바로 이어서 제2차 지방 방송국 건설에 착수하였다. 부산의 제2 방송은 제2차 방송망 확충 계획에 포함, 추진되어 시험 방송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실시한 전파 관제의 일환으로 1942년 4월 27일에 조선어 제2 방송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산의 제2 방송은 1942년도에는 계획대로 집행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43년 11월 10일 다시 조선어 제2 방송이 부활하여 방송되었다. 그러나 전파 관제 중이었으므로 그 주파수를 통일하여 동일 주파수 1,080㎑로 방송하였다. 이때에는 아마 부산에도 제2 방송이 시작되어 경성의 방송을 중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8·15 해방 당시 전국 지방 방송국의 현황을 보면 부산에도 제2 방송 주파수가 1,080㎑로 할당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부산방송국 JBAK의 프로그램은 지방 방송 자체적으로 제작한 로컬 프로그램과 경성방송국이 제작한 것, 그리고 일본에서 제작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방송의 편성은 경성방송국의 편성을 기본으로 하면서 경성중앙방송국에서 정한 기본 횟수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로컬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하였다. 초창기 방송의 편성은 정해진 시간 스케줄에 따라 정확하게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편성은 오전과 오후 그리고 야간의 3구분으로 편성되었다. 주식이나 쌀값 시세 방송, 정오와 저녁 7시 뉴스 등 몇몇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임의적으로 시작하고 임의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1936년 1월에는 부산부 내의 저명인사들을 초빙하여 취미나 실생활에 유익한 강연을 방송하는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 1936년 6월에는 가요 방송을 제작하여 이를 전국에 방송하며 만주 지역까지 프로그램을 교환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실제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가수도 있었으며 반주도 부산의 악단이 맡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로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부산방송국은 연예인 발굴을 위한 이벤트도 진행하였다. 노래와 만담 등 12개 종목에 걸쳐 신인들을 발굴하여 11월에 ‘신인의 밤’을 개최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신문을 통해 보도되기도 하였다.
부산방송국의 프로그램을 전국으로 중계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1935년 말 부산의 이와오 아나운서와 경성방송국 아나운서가 공동으로 진행, 부산항에 입항하는 관부 연락선의 이모저모를 스케치하며 부산 중앙 시장의 활기찬 모습을 현장에서 전국으로 중계하기도 했다. 또한 부산의 스포츠 행사를 전국에 중계하기도 했다. 1936년 6월 20일, 21일 부산에서는 부산체육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 부산지국이 후원하는 전조선 축구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의 실황을 부산방송국이 전국에 중계했다.
1937년 7월에는 그해 봄 조선방송협회가 출력을 50㎾로 증강한 기념으로 청취자 배가 운동에 나선 것에 발맞춰 부산방송국도 이 운동에 나섰다. 부산부, 경상남도와 협의하여 경상남도 도내 각 군의 경찰과 학교, 기타 사업소에 협조 공문을 발송하였다. 이어 1938년 연말에는 조선방송협회의 청취자 배가 운동 사업의 일환으로 경상남도 도내 농촌 지역에 무료 라디오 시설을 설치하는 계획이 확정되기도 하였다.
라디오 수신기 보급이 꾸준히 확대되었으며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는 1935년부터 지방 방송이 개국하기 시작했고 1937년 4월 제2 방송의 출력이 50㎾로 증강되어 전국적 방송 청취가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라디오 보급이 점차 늘어나면서 청취자에 대한 서비스를 위해 라디오 상담소를 설치 운영했는데, 부산에는 영정 1정목 28번지에 설치하여, 라디오를 샀을 때 설치해 주고 고장 나면 수리해주고, 청취 상태를 조사하고 청취료 수금과 같은 여러 역할을 담당했다.
[현황]
부산방송국 JBAK는 해방 이후에도 몇 차례 명칭을 변경하면서 운영되었으며 현재의 KBS 부산방송총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부산을 시초로 전국의 방송망 구성 계획에 따라 평양[JBBK, 1936년 4월]과 청진[JBCK, 1937년 6월], 이리[JBFK, 1938년 10월], 함흥[JBDK, 1938년 10월] 등지에 방송국이 속속 개국하여 지방의 방송망이 확충되어 갔다. 그리고 조선방송협회는 1차 지방 방송국 건설 사업이 완료되자 바로 이어서 제2차 지방 방송국 건설에 착수하였다. 사업 확장이라는 기본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중일 전쟁의 격화 속에 선전의 필요성에 따라 서두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4월에는 경성방송국의 제2 방송 출력을 50㎾로 증강하였는데, 이는 조선어 방송의 수신 확대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중국이나 만주 지역에서 오는 전파를 차단하고, 전시 체제로의 전환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부산방송국은 1936년에 학교 방송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통해 동경의 학교 방송을 중계하기도 하고 음악 방송을 청취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를 계기로 마련된 학교 방송은 1930년대 후반부터 전시 체제로 돌입하면서 선전의 주요 채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 개국된 방송은 일본이 전쟁의 주요 선전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청취자의 입장에서도 신속한 정보에 대한 요구가 있었기에 많이 필요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당시 라디오 수신기 보급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던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