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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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70年間持續-東萊-契-東萊耆英會- |
영어의미역 | The people who frequented Dongnae Giyeonghoe Association |
분야 | 생활·민속/생활,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05[명륜동 450-2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류지아 |
[동래기영회 사무실의 하루]
정원규 옹의 하루는 동래기영회(東萊耆英會)[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450-28번지]의 사무실에서 시작한다. 11년째 동래기영회의 사무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정원규는 매일 오전 10시면 사무실에 마련된 자신의 책상 앞에 앉는다.
“동래기영회 가입한 게 2004년인가? 하여간 지금 11년이거든. 와 가지고 바로 이거 뭐 사무국장을 맡았으니까 국장을 한 게 10년이 조금 넘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원규는 동래기영회의 소소한 일들을 챙기는 것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은행과 관공서가 모두 휴무이기 때문에 마침 자신도 휴무라며 웃는 모습이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다. 그 연세에 체력적으로 힘드시겠다는 인사에도 한사코 괜찮다며 오히려 함께 업무를 보는 주임을 걱정한다. 적은 월급에도 성실히 일을 맡아 하는 주임에게는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봉사 정신이 없으면 누가 이 사무실에서 근무를 해 주겠냐며 주임에게 공을 돌린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10원이라도 아껴서 장학금을 조금 더 주는 마음이 동래기영회의 마음이라 말하는 정원규의 말에 따뜻함이 묻어난다.
점심도 사무실에서 간단하게 해결한다. 가끔 걸려 오는 전화를 받거나 책을 읽다 보면 점심시간을 넘기는 일도 흔하다. 어찌 알았는지 사무실을 찾아와서 동래기영회에 가입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이런저런 손님맞이에 회원 명부며 장학 사업 계획이며 해야 할 일들을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인 오후 4시가 된다. 사무실을 나가는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동래기영회 소유의 재산 중 하나인 건물에 들어와 있는 입시 학원 학생들의 목소리다. 손자, 손녀 뻘인 아이들의 힘찬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의 옛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동래기영회 회원이 되기까지]
조선 시대부터 유지되었다고 하는 단체들은 대부분이 강릉 김씨, 동래 정씨 등의 문중 조직이다. 그런데 동래기영회는 성격이 다르다. 각자 성이 다른 동래 지역 유지들이 모여서 함께 활동하는 모임이라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다. 예전에는 동래 지역이라고 하면 부산 전체를 말하는 거라 부산 지역에 내로라는 사람들이 모였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동래 지역 군반층이 중심이 되고, 아전이라고 하는 이서층(吏胥層)이 함께 하는 형식이었다. 그렇게 동래에서 활동하는 관인들의 친목 단체로 시작하였다. 50여 명이 초기 회원으로 결성을 했는데, 그저 친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활동도 많이 했다. 학문이 깊은 회원들이 많아 시도 읊고 친목도 하면서 상부상조하는 단체로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단체 중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원래 동래기영회의 회원 자격은 ‘유자유손(遺子遺孫)’이라고 하여, 선조가 회원이면 그 아들이 회원이 될 수 있는 형식이었다. 수백 년 동안 ‘유자유손’의 원칙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기존의 원칙을 유지하되 조금은 변화를 주었다. 회원 수가 많이 줄어들면서 마냥 원칙만 고수할 수는 없었다. 유자유손을 원칙으로 했지만 자격이 차마 안 되는 유자유손이 있을 수도 있고, 유자유손은 아니지만 충분히 회원이 될 만한 인물도 있을 수 있었다.
이제는 동래기영회의 정신에 찬성을 하고,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래 지역에 연고가 있는 인물이면 더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부산을 지역 기반으로 한다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 회원이 되고 싶은 사람이 지원을 하게 되면 기존 회원들의 심사를 거친다. 자격이 된다고 여겨지면 입회를 허락한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동래기영회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이 50세 이상이었다. 200여 년 전에는 50세 이상이 되면 노인으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50세는 동래기영회에 가입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가 되었다. 처음의 50세 이상에서 55세 이상, 60세 이상으로 점차 상향되다가 지금은 만 61세 이상이 되면 가입 연령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기영회(耆英會)’의 ‘기(耆)’자가 ‘늙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듯이 기영회는 노인들이 뿌리가 되는 모임이다. 그래서 만 61세 이상은 되어야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정원규에게 동래기영회에 가입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내같은 경우는 나는 뭐 여기 고향이 동래도 아니고 진주야. 근데 대부분 우리 회원들이 한 절반 가까이가 동래고등학교 출신이에요. 동래고등학교를 세웠으니까. 또 동래에 고등학교는 하나밖에 없었고 학교가. 동래 지역에 있는 분들이 자연히 많이 들어오게 되어 있다고, 부산상업고등학교 회원들도 몇이 있었고.”
본인의 사연을 묻는데도 기존 회원들의 사연이 줄줄이 함께 나온다. 각 회원들의 출신 학교며 고향까지 훤히 꿰고 있다. 고향은 진주이지만 그가 부산으로 와서 생활한 지도 50여 년이 흘렀다고 한다. 부산교육대학교에서 35년간 교수로 재직을 했다. 굳이 동래와의 연관성을 찾으라면 부산교육대학교가 동래에 있었기 때문이라며 웃는다. 대학 총장에 교육 위원, 동래문화원의 고문까지 꽤 많은 활동을 하면서 부산에 기여한 바도 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사무국장을 하게 된 계기는 상대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무국장을 하기 위해서는 회계 업무나 기본적인 경리 업무처럼 장부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이 회원 중에 없었다. 그에게 사무국장 업무를 맡기기 위해서 억지로 가까운 친구들이 동래기영회에 가입을 시켜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들어오고 보니 회원들 모두가 참 좋은 사람들이고, 사무국장 일을 잘 해나가는 것에 스스로 만족하게 되면서 즐겁게 활동하고 있다. 그렇게 동래기영회 사무실에서 생활한 지가 만 10년이 넘었다.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동래부 이임(吏任)과 무임(武任)들의 후손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유자유손이라는 원칙은 유명무실하게 된 것이 맞지만 여전히 대를 이어 동래기영회 회원이 된 분들도 남아 있다. 동래기영회 내규 중 입회 자격으로 가장 먼저 나오는 항목은 지금까지도 ‘유자유손’이라고 되어 있다.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찬 회원도 그중 한 분이다. 김영찬은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한 유공자라고 한다. 그 외에 한우식, 이태조, 박수근 등 유자유손의 원칙으로 가입한 회원들도 제법 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보니 세월 흐르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다. 가끔 사무실로 걸려 오는 전화는 부고인 경우가 많다. 회원 명부에 연필로 줄을 그을 때면 유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오랫동안 만나오던 회원들의 부재를 직접 실감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많을 때는 50여 명 정도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는 회원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새로 들어오는 회원들도 생기면서 회원 수의 변동이 꽤 있다. 어림잡아 10년 동안 30명 정도의 회원이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사무실이 크지도 않아 회의 같은 일로 회원 전원이 모이려면 이 정도가 딱 좋다. 날씨 좋은 날 버스를 타고 바람이라도 쐬러 가려면 인원이 너무 많아도 힘들다.
[동래기영회 사람들]
동래기영회의 사무실은 장관청(將官廳)에 있다. 그곳을 본관이라고 부른다. 정기 총회나 회원들이 모두 모일 일이 있으면 항상 장관청에서 모인다. 옛 조상들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곳에 모일 때면 유난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회원들도 장관청에서의 모임을 반긴다. 장관청은 동래기영회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로 사무를 보는 곳은 지하철 수안역 근처의 학원 건물[4층]이다. 이 건물이 동래기영회 소유 재산이기도 하고, 큰길가 옆에 있어 사람들이 오고 가기가 조금 더 편리해서 그러하다. 이곳을 임시 사무실로 쓰면서 본관과 함께 오가며 사용하고 있다.
장관청을 사무실로 사용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동래 지역 무관들이 장관청에서 동래기영회를 창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장관청은 동래부 소속 군장관(軍將官)들의 집무소이다. 동래 부사 아래 군사 업무를 맡은 군장군은 장관(將官), 군관(軍官), 포교(捕校) 등으로도 불렸으며, 이들이 업무를 보는 곳이라 무청(武廳)이라고도 했다.
1846년(헌종 12) 동래부에서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친목 모임이 바로 동래기영회이다. 처음에는 계 모임의 성격이 강하였는데, 중국 송대 부필(富弼)과 사마온공(司馬溫公) 등이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조직하여 시 짓고 술 마시며 즐기던 낙양 고사에서 ‘기영계(耆英契)’라는 이름을 빌려 왔다고 한다. 원래 있던 다른 모임들이 동래기영계에 합쳐지면서 더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구성원 중에 동래부의 퇴임 이서(吏胥)[서리, 이속, 아전 등]와 무임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이 때문에 이서와 무임의 인사 문제 등 여러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동래기영회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한다.
동래기영회는 시사(詩社)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회원들이 함께 즐기는 시회를 자주 열었다. 기영회의 시회는 서울의 사대부들까지 참가할 만큼 유명했다고 한다. 사회·문화적으로 지역에서 높은 명망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기영회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동래기영회는 설립 초기부터 이서 무임직을 지내온 사람들이 주로 가입해 왔다. 하지만 개항기가 되면서 향반층 등 지역 사회의 공론을 주도한 인물들이 가입한 경우도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기영회 회원들은 교육 사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고, 이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동래기영회가 주도적으로 진행한 교육 사업뿐만 아니라 기영회 회원들이 개별적으로 교육 사업을 진행하거나 재원을 기부하는 등 많은 기여를 하였다. 지역의 이서 무임층이 본래 담당하던 역할과 권한이 시간이 흐르면서 근대적 교육 활동과 같은 새로운 사회적 활동 영역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근대 동래기영회 회원 중, 박필채(朴苾彩)[1842~1925]는 공립소학교 교원 및 동명학교 초대 교장, 면훈장 등을 지내며 동래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박필채는 송공단(宋公壇)의 중수 등을 주도하며 지역의 의례 행위와 정치 문제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학교 설립 등에도 적극 나서 찬조금을 내어놓는 등 교육 사업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신명록(辛明錄)은 대동계의 재원에 자신의 재산을 더하여 동래부학교를 설립한 인물이다. 신명록은 자신이 참여하고 있던 대동계의 재산을 기영회에 기부하여 동래부학교의 재원으로 삼았다. 송상종(宋商宗)은 1906년 기영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근대 학교인 삼락학교를 세워 사립동명학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일제 강점기 애국 계몽 운동과 교육 운동 등으로 지역을 이끌어 나간 동래의 대표적인 명망가로는 이광욱(李光昱)을 들 수 있다. 그는 다양한 사회단체 활동과 학교설립 및 증설 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의 확립과 국권 회복을 주도해 나갔다. 이광욱의 집안은 대대로 동래에서 이서·무임을 맡고 있어서 대대로 기영회 회원으로 활동하여 할아버지부터 부친,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까지 무려 15명이 동래기영회 회원이었다. 기영회에서도 5대째 회원의 자격을 유지한 집안은 그리 흔치 않다. 1946년 동래기영회에 가입한 이광욱의 아들은 1963년부터 1966년까지 기영회 이사장을 지냈고, 증손자도 2004년 기영회에 가입하여 이사를 역임하였다.
[동래기영회에서 하는 일]
그렇게 크지 않은 규모의 모임이지만 세월이 쌓인 만큼 해낸 일들도, 해야 할 일들도 많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송공단 등의 각종 제사를 담당하는 일이다.
송공단은 임진왜란 뒤인 1742년(영조 18) 동래 부사 김석일(金錫一)[1694~1742]이 임진왜란 당시 동래 부사였던 송상현(宋象賢)[1551~1592]이 순절한 정원루(靖遠樓)가 있던 자리에 설치한 제단(祭壇)이다. 이곳에는 송상현 공을 비롯해 순국한 많은 선열의 넋이 잠들어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기영회에서 매년 향사를 지내며 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송공단 제향 이야기가 나오자 정원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제향 행사에 대한 자부심이 꽤 높은 듯하다.
“그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보면 선조께서 위무를 하시기를……, 충렬공 송상현……, 문열공 조헌, 그 다음에 고경명……,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 4분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그 임진왜란 때에 공도 컸고……, 모든 격식을 갖춰 가지고 4분의 제사를 다음날에 치렀어. 그래서 그 지방에서 제일 어른이 주관을 해가지고 제사를 모시라. 그거를 단제라고 하는데, 단을 뭐라고 하냐면 비석 같은 거를 세워 가지고 순절하신 바로 그 장소에 비석을 세워서 우에 천장도 없고 집을 짓지를 않는 기야. 그 옆에 같이 순절한 장군들 가솔들 이런 사람들도 같이 제사를 지내라 하는 게 단제. 이 단제를 지내는 4분 중에도 송상현 공이 제일 어른이야. 바로 송공단이라는 동래 시장 가로수 옆 고게 바로 그 자리가 정원루에서 왜놈들의 칼에 이래……, 거기에 단이 세워져 있지.”
처음 왕명에 따라 관에서 제사를 지내게 된 동기가 줄줄이 나온다. 단제(壇祭)처럼 중요한 임무를 기영회에서 담당하게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그렇게 왕명을 받고 지내 오던 단제는 일제 강점기에 와서 끊어질 위기에 처한다. 식민지의 암울한 시기에, 특히 임진왜란처럼 일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역사 인물의 제를 지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관에서 주관하던 단제가 사라지게 되자 동래지역의 명망가들이 동래기영회를 중심으로 단제를 지내게 되었다.
동래기영회가 단제를 맡게 되었지만 식민지라는 현실 때문에 서러운 일도 참 많았다고 한다. 말이 단제였지 일제의 탄압으로 송공단까지 갈 수 없어 단과 멀리 떨어져 제를 지내기도 많이 했었다. 아예 단이 보이지 않는 산에서 단이 있는 방향으로 제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설움을 이겨내며 지켜온 단제이기 때문에 동래기영회 회원들이 가지는 마음은 각별하다.
단제와 함께 임진 동래 의총에서 진행하는 제향 행사도 동래기영회에서 담당했었다. 동래 의총은 1731년(영조 7) 동래 부사 정언섭(鄭彦燮)[1686~1748]이 동래성을 증축할 때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던 남문 터에서 나온 수많은 유해를 한 자리에 모신 무덤이다. 매년 동래성 함락일인 음력 4월 15일에 단제와 제향 행사를 함께 진행하다 보니 준비할 때는 정신이 없었다. 급히 단제를 마치고 동래 의총으로 가서 제향을 하였다. 그러다 동래문화원이 설립되면서 임진 동래 의총의 제향은 문화원이 주관하게 되었다. 하던 일이 없어지니 허전하기도 하지만 동래를 기념하는 일이니 동래문화원에서 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와 함께 동래기영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이 교육과 장학 사업이다. 이 또한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것으로 일제 강점기 학교를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교육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울분 때문이었다.
“왜놈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당하고 더더구나 부산에 임진왜란을 겪고 우리가 이렇게 당한 것은 오로지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해가지고 신교육에 우리가 좀 노력을 해야 안 되겠느냐……. 무슨 동맹학교[동명학교]니 무슨 한문 학교니 하는 게 있었지만은 차차 발전해 가지고 학교가 된 게 현재 동래고등학교. 요것을 우리 동래기영회에서 만들었다고. 설립자가 동래 동래기영회야.”
회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 교육에 힘을 쏟았다. 동래한문소학교를 시작으로 학교명이 여러 번 바뀌다 지금의 동래고등학교가 되었다. 이와 함께 동래원예전수학교[현 동래원예고등학교], 동래보통학교[현 내성초등학교], 동래제2보통학교 등의 설립과 운영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동래유치원을 세운지도 80년이 넘었다. 어린 아이부터 학생들까지 동래 지역 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지고자 한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학교 설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고문서들이 남아 있어 동래기영회가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문서를 보기 위해 동래기영회를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래기영회는 교육 운동과 함께 국채 보상 운동 등 개항기 동래 지역의 애국 계몽 운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에 대항하여 우리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중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국채 보상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동래에서는 1907년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東萊府 國債補償一心會)’가 조직되었는데, 이 모임에서 정한정(鄭漢禎), 송상종, 이상흔(李相昕), 신명록 등 동래기영회 회원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지방 금융 기관인 구포은행[1912년 설립]의 설립과 운영에도 장우석(張禹錫), 윤병준(尹炳準), 윤상은(尹相殷) 등 동래기영회 회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육과 문화를 중시하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동래기영회는 동래 문화 회관의 건립과 운영 등 각종 문화·장학·사회사업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계 모임에서 법인으로]
지방의 소읍에서 시작한 평범한 계 모임이 어떻게 백 년이 넘도록 유지가 될 수 있는지 참 신기한 일이다. 해방 이후에도 혼란했던 현대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자연스레 사라질 법도 했지만 여전히 건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처음 ‘기영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을 때에는 이름처럼 장관청에서 친목 도모를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회원으로 가입을 할 때에는 회비를 냈다. ‘계’로 시작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얼마간의 회비를 내었던 듯도 하다. 그래서 처음 설립했을 때에는 살림이 꽤 넉넉했다.
“논도 닷 마지기, 열 마지기, 또 마 이래해서 기금을 내고, 회원을 가입할 때에는 또 조금 해가지고 재산이 제법 있었지. 이제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데…….”
지금도 내규에 정해져 있는 회비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처음 가입할 때 얼마간의 입회금을 내는 것이 전부일 뿐 다른 회비가 없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선조들이 모아둔 기금을 활용하는 것이 수입의 대부분이 되었다.
“이게 옛날에는 부자였지. 토지 개혁 이전에는 부잔데, 토지 개혁이 되고 나서 뭐 있나 그런 게. 이런 땅덩어리 있는 거……, 근데 이것만해도 유지가 되는 게 어디야.”
친목 모임으로 있을 당시에는 회원 관리를 잘 못하는 등의 이유로 동래기영회의 재산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재단 법인으로 전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추월영이라고 유명한 살아 계시면 110세? 111세? 그분이 동래고등학교 교장도 하고 또 경남고등학교 교장,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도 하고, 하여간 유명한 분이야. 이분이 이거 재산을 법인화하자. 그래서 재단 법인이 되었다고.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돈 10원을 사무국장인 내 마음대로 못쓴다고. 국가가 전부 감사오제, 일일이 결산보고 다 하제, 예산 승인 얻어 가지고 편성하제. 이게 개인 재산이 아니고, 사사로운 친목 단체가 아니고 법인체니까.”
재단 법인으로 바뀌면서 동래기영회의 재산 관리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물론 많지 않은 재산이지만 임시 사무실이 있는 4층 건물의 임대료 등 모든 수익을 관리한다. 작은 모임이지만 지출도 꽤 많다.
동래기영회에서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장관청은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호로 원래 있던 동래 시장 입구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지금의 위치는 원래 동래기영회 소유의 대지가 있던 자리로, 장관청과 동래기영회의 인연이 워낙 깊어 그 곳으로 옮겨올 수 있도록 땅을 내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소소하게 유지비가 드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어려운 학생들을 더 많이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사무실에서 쓰는 종이 한 장도 아껴 가며 성금을 모은다. 이렇게 모은 수익금은 대부분 장학 사업에 쓰인다. 부산 지역 결식아동을 위한 성금이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교복비와 급식비 지원 등 어린 학생들을 위한 사업이 주가 된다.
요즘은 대기업들이 한 번에 1억씩 성금을 내어 놓기도 하는 세상이라 천만 원 정도의 금액이 크게 소용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백 년이 넘게 이어져 온 동래기영회 회원들의 마음을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다른 장학금 보다 더 뜻깊고 소중하다는 인사를 할 때면 그 마음이 고마워 저절로 힘이 난다.
이제 동래기영회는 장관청과 동래 문화 회관, 동래유치원 등을 소유하면서 장학 사업과 사회사업에 힘쓰고 있다. 예전보다 그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이 모임이 유지되어 어린이들부터 성인까지 동래에서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또 다시 100년]
1846년(헌종 12) 처음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1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렇게 지내온 세월만큼 후손들이 계속 ‘동래기영회’라는 이름을 유지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다.
“우리 거 동래기영회의 원래의 첨 창설할 때의 정신. 이것을 계속 우리의 후손들이 회원들이 끝까지 정신을 살리면서 지속적으로 이 사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을……, 유지가 돼야지. 앞으로 계속 뭐 영원히 유지가 될끼야.”
자제들도 동래기영회에 가입시킬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동래기영회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회원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고 한다. 회원들이 연배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서로 친목을 나누는 모임인데 부자간에 들어오는 것은 서로 불편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예전에는 동래기영회 회원으로 들어오기 전에 참여할 수 있는 예비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아직 나이가 회원 자격에 못 미치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중간 단계처럼 활동하기도 했었다.
“가령 동래 정씨 같으면 동래 정씨 화수회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거든. 거기에 청년회라고 조직을 안 하던가배. 옛날에는 요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건 없고 한데…….”
1920년대 동래 지역 청년 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동래기영회 회원 및 이서·장교 자제들이 모여 동래속영회를 만들었다. 30여 명의 근대 교육을 받은 유지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말끝을 흐리는 정원규의 목소리에 지금은 사라진 예비 모임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숨어 있는 듯하다. 동래속영회가 지금까지 지속되었다면 자신의 아들도 참석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이제는 아들이 회원 자격이 될 만큼 나이가 들어 자신을 이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모든 회원의 아들이 대를 이어 가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들이 언젠가는 이 모임에 들어왔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