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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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萊府國債補償一心會 |
영어의미역 | Dongrae Branch of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경숙 |
1907년 부산 동래 지역의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한 단체.
1907년 1월 30일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난 후 같은 해 3월 10일 동래 지역에도 부산항상무회 회원이었던 문병희, 김문주, 정한정, 송상종, 최륜하, 오덕근, 이상근, 신명록, 추두영, 윤철병, 김원숙 등 14명이 발기인이 되어 취지서를 발표하고,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를 설립하였다.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의 취지서를 통하여 전국에서 맨 처음 국채 보상을 제기한 곳이 동래의 ‘부산항상무회’란 것을 알 수 있다. 부산항상무회는 부산상무회의소로, 초량 객주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이 전국 최초로 국채 보상을 제기하였고, 나아가 동래 지역 국채 보상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다.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는 지역의 계몽 운동을 주도한 동래기영회, 대한자강회에 관여한 개명 인사 그리고 동래 수면 노소 신사 총회(東萊首面老少紳士總會)와도 어느 정도의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는 식산흥업과 교육 진흥을 통한 자강(自强)이라는 논리 위에서, 동래기영회를 모체로 한말 개명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단체이다.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는 단연(斷煙) 금연 운동을 통해 자금을 모아 국채 보상을 하자는 취지에서 조직되었다.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 시행 규칙」에 단체의 구체적 활동 계획이 나타난다.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는 국채 1300만 원 보상을 목적으로 기부금 모집 및 그 독려를 위한 거리 연설, 수전소[모금 장소] 설치 등의 활동을 계획하였다. 또 의연금 납입자의 명단과 금액을 매월 말 신문에 공포하는 일도 하였다. 회원들은 단연 동맹을 결성하고 의연금으로 각 30전을 기부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은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서상돈(徐相敦), 김광제(金光濟)가 최초로 시작했다고 알려졌으나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의 취지서를 통해 국채 보상 운동을 최초로 제기한 곳이 부산이라는 점이 밝혀진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상업회의소 회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광범위한 동래 지역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었고, 민족의식과 독립 의식을 앙양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지도 원리가 미비하고 운동 주도층의 사회 경제적 기반이 미약하여 일제의 탄압에 부딪치자 효율적으로 운동을 지속시켜 나가지 못하였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