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29 |
---|---|
한자 | 辛明錄 |
영어음역 | Sin Myeongrok |
이칭/별칭 | 자명(子明),우당(宇堂) |
분야 |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민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동철 |
[정의]
근대 동래부 무임 출신으로 동래부학교를 세운 교육자.
[가계]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자명(子明), 호는 우당(宇堂). 10대조 신진(辛震)이 임진왜란 때 동래로 피난 오면서 세거하였다. 할아버지는 신경찬(辛慶燦)이고, 아버지는 신영수(辛永壽)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신명록 모두 동래부의 상급 향리 명단인 『부청 선생안(府廳先生案)』에 수록되어 있다.
[활동 사항]
신명록(辛明錄)은 1838년(헌종 4)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민동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대대로 동래부 상급 향리 집안이었으나 신명록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달리 운도당 행수 집사, 기지 군관, 별군관청 행수, 장관청 천총 등 다양한 무임직을 역임하였다. 1886년 9월 동래기영회에 입회하였다. 신명록은 무임 중 최고위 직책인 중군(中軍)직을 맡은 경력을 기반으로 1895년 8월에는 동래부 읍내면 면장에 임명되었다. 면장은 당시 동래 지역의 유지로 구성되었다.
1898년에는 동래기영회 회원을 중심으로 동래부학교를 설립하였다. 동래부학교는 동래고등학교로 지금까지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데, 동래고등학교에서는 신명록을 학교를 세운 교조(校祖)로 보고 있다. 1907년 1월 삼락학교 설립과 관련된 동래부수면 노소 신사 총회에도 수석 회원 104명 중 한 명으로 참석하였다. 1907년 3월 국채 보상 운동의 일환으로 동래 지역에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가 설립되었을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동래 지역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8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883년(고종 20) 5월 11일 동래부의 난민이 동래 관아를 습격한 동래 민란이 발생하였다. 동래부 전 별장 김한기는 변장에 임명되었고, 가선 이기영과 전 첨사 이우경은 오위장직을 받았다. 천총 신명록 또한 동래 민란을 진압하는 데 공로를 세워 포상을 받았다. 이 같은 동래 민란 진압의 공으로 받은 포상은 동래 지역에서의 신명록의 위상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