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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 범일동 극장 트리오, 삼일·보림·삼성 극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56
한자 追憶-凡一洞劇場-三一-寶林-三星劇場
영어의미역 Memory of the three top cinema in Beomil-dong: Samil Cinema, Borim Cinema, and Samsung Cinema,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영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시설 설립 시기/일시 1944년연표보기 - 삼일 극장 개관
관련 시설 설립 시기/일시 1955년연표보기 - 보림 극장 개관
관련 시설 설립 시기/일시 1959년연표보기 - 삼성 극장 개관
관련 시설 해체 시기/일시 2006년연표보기 - 삼일 극장 폐관
관련 시설 해체 시기/일시 2007년연표보기 - 보림 극장 폐관
관련 시설 해체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삼성 극장 폐관

[추억의 장소 범일동 극장 트리오를 아시나요?]

삼일 극장[1944~2006년], 보림 극장[1955~2007년], 삼성 극장[1959~2011년]. 이들 극장은 동구 범일동에 위치한 이른바 ‘극장 트리오’, 한때 부산에서 잘나가던 극장들이었다. 이제 이 극장들은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극장이 되었다.

이들 극장은 60년 가까운 세월을 영화의 바다, 부산을 지켜 왔다.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중년의 남자라면 누구나 ‘범일동 극장 트리오’와 관련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리라. 누군가에게는 학창 시절 일탈을 꿈꾸게 하는 장소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허름한 건물, 두 편 동시 상영, 낯 뜨거운 에로 영화 간판으로 대변되는 오래된 삼류 극장으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시절 청춘의 시름을 잠시 달래던 극장 거리, 그곳에 삼일 극장과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영상 문화 도시 부산에서 개발에 밀려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범일동 극장 트리오에 대한 기억을 추억해 본다.

[극장 트리오의 탄생]

1940~1950년대에 잇따라 개관한 삼일 극장과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은 부산 동구 범일동 영화 거리를 형성하며 유명세를 탔다. 범일동 극장 트리오 가운데 가장 먼저 문을 연 것은 삼일 극장이다. 삼일 극장은 일제 강점기인 1944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 문을 열었다. 광복 후 삼일 극장은 조일 극장과 제일 극장 등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다가, 1950년대에 다시 삼일 극장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영화 「친구」 촬영지로도 유명한 삼일 극장은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수용소로 쓰여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품은 공간이기도 하다.

1959년에 개관한 삼성 극장은 삼일 극장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삼성 극장은 인근의 삼일 극장, 보림 극장과 함께 범일동에서 재개봉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단층이었던 삼일 극장에 비해 삼성 극장은 2층 건물에 제법 넓은 관람석을 갖춘 극장이었다.

1955년에 문을 연 보림 극장은 원래 남포동에 위치한 보림 백화점 내 2층에 자리했었다. 그러다 1968년 당시 범일동 조양 직물 공장 부지를 매입하여 현재의 자리에서 새로이 개관했다. 개봉관으로 출발했지만 당시 영화가 남포동 극장가를 중심으로 우선 배급되었기 때문에 보림 극장의 영화 배급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개봉관의 체면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보림 극장은 1970년대 톱스타 나훈아, 남진, 하춘화 등의 쇼 무대 중심 극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면서 한때 새로운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보림 극장은 톱스타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부산 전역에서 몰려든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범일동 극장 트리오의 전성기]

1960~1970년대 국제고무 공장[1953~1990년], 삼화고무 공장[1934~1992년] 등의 신발 공장이 부산진구동구에 자리 잡으면서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이 위치했던 동구 범일동수정동·좌천동 일대 산복 도로에는 인근 고무 공장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거주했다. 범일동에서 60년 넘게 살아온 범일동 토박이 이춘해씨[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거주, 남, 74세]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범일동 일대에는 흔히 하꼬방이라고 부르는 판잣집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산복 도로 일대에 빼곡하게 들어선 하꼬방은 흡사 벌통과 비슷하다고 하여 ‘벌통 골짜기’라고도 불렸다. 가난했던 시절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과 인근 고무 공장 노동자들은 방 한 칸을 빌려 보통 가족 네다섯 명이 함께 살았다.

“여기 이 골짜기를 옛날에는 벌통 골짜기라고 했어요. 벌통 골짜기. 지금은 여기 집이 이렇게 많이 있지만 옛날에는 하꼬방 한 채에 보통 세 가구에서 네 가구가 살았어요. 방 한 칸에 아이들 두셋씩 데리고 살면서 달세 얼마를 주고 그런 식이었죠. 이 위에 하꼬방이 꽉 배겨 있었어요. 이 주변에 삼화고무, 국제고무, 그리고 좀 더 내려가면 동양고무, 태화고무가 있었잖아요.”

이춘해씨가 지금의 부일당 자리에서 장사를 한 지도 벌써 50년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그는 보림 극장이 생기기 전부터 이곳에서 살았고, 보림 극장이 생기고 나서 현재의 부일당 자리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이 부일당 바로 뒤편이 옛날 보림 극장이 있던 곳이다. 그가 운영하는 부일당은 동구 범일동부산진구 범천동 경계인 범곡 교차로 부근에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부산 사람들은 범곡 교차로를 옛 명칭인 교통부 사거리라고 부른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북한군에게 서울이 함락되자 정부는 부산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 그때 교통부 청사가 지금의 범일동에 위치했는데, 이것이 유래가 되어 이 일대를 교통부 사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삼일 극장과 삼성 극장은 부일당에서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있었다. 이춘해씨의 기억에 따르면 삼일 극장과 삼성 극장, 보림 극장 가운데서도 보림 극장에 손님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보림 극장에 손님이 가장 많았던 이유는 두 편 동시 상영에 힘입은 결과였다. 초창기 삼일 극장과 삼성 극장은 두 편 동시 상영이 아닌 한 편 상영이었다. 사람들은 똑같은 돈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던 보림 극장으로 몰렸다.

[인근 노동자들의 유일한 문화 공간]

인근의 번화가인 서면남포동이 아닌 하꼬방이 밀집한 주택가였던 이곳 동구 범일동에는 1960~1970년대 한때 부산 경제를 대변했던 신발 공장이 번성하면서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 외에도 많은 극장들이 들어섰다. 이들 극장의 주요 관람객은 신발 공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이었다. 신발 공장이 호황이던 시절, 교통부 사거리 일대 상권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부산의 신발과 고무 산업이 한창 번창하던 그때, 이들 극장은 고무 분진에 파묻혀 있던 청춘들에게 유일한 안락처가 되어 주었다.

“그러니까 옛날 가장 번화가 하면 남포동, 그 다음이 서면 거기가 제일 번화가였지요. 지금도 서면이 제일 번화가이기는 하지만……. 여기는 지금은 형편없어요. 근데 예전에 여기에 왜 사람이 많이 끓었는가 하면, 고무 공장이 많이 있다 보니 사람들이 많았어요. 옛날에는 삼화고무, 국제고무 사람들 때문에 이 골목을 밀려 올라가고 밀려 내려왔어요.”

이춘해씨의 말에 따르면 그 시절 하루 종일 신발 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젊은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지역 공장 노동자들의 고단했던 하루를 푸는 해방구로서 여가를 채워 줬던 곳이 바로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이었다. 그들은 쉬는 날이면 동료, 친구, 연인과 함께 이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으로 문화적 욕구를 채웠던 것이다. 비록 영화가 끝나면 다시 팍팍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영화를 보는 그때만큼은 그들도 행복할 수 있었다.

“쉬는 날이 되면 극장밖에 갈 데가 어디 있나요. 극장비 싸죠, 하루 종일 갈 데 없으면 극장 들어가서 마지막 영화 상영할 때까지 있다가 나와도 되죠. 하루 종일 극장에 앉아 있어도 상관 안 하니까. 당시 극장표는 쌌어요. 그 당시에는 모든 게 다 싸고 그렇긴 했지만. 그때는 주로 서부 영화, 서부 활극이 많았어요. 내가 본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토니카디스」, 이렇게 지금은 세 개밖에 기억이 안 나네요. 명작이지 명작…….”

[삼류 극장의 대명사]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은 성인 전용관 혹은 두 편 동시 상영관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없어진 이들 동시 상영관은 40대 이후 세대들에게 각별한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 극장이 처음부터 두 편 동시 상영관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개관 당시에는 정식 개봉관으로 수준 높은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또 어린이날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어린이를 위한 영화 「독고탁」, 「로보트 태권브이」와 같은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다른 지역에 영화관이 급증하고 부산의 신발 산업도 점차 쇠퇴하면서 두 편 동시 상영관으로 바뀌었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중심지로 성장한 서면 일대에는 대형 극장들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새롭게 개관한 대형 극장들에 밀려 단관이었던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은 동시 상영관으로 탈바꿈함으로써 어렵게나마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옛날에는 일반 영화를 상영했어요. 그러다가 장사가 안 되면서 성인들 모으고 하려다 보니 주로 성인 영화를 상영했던 거지요.”

[삼류 극장을 찾는 사람들]

지금은 한산하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당시 동구 범일동 일대에는 인근의 번화가인 남포동서면에 버금갈 만큼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은 삼화고무, 국제고무 등 수많은 고무 공장에서 일하는 고무 공장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의 주요 관람객이었다. 인근의 고무 공장이 호황이던 시절에는 극장도 매일매일 손님들로 미어터졌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부산 신발 산업의 침체로 공장 노동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공장들도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가 번화가는 아니지만 공장 지대가 가까이 있으니까 사람이 많았고, 또 사람이 많이 끓었지요. 극장이 세 개 생겨도 극장 안이 사람들로 맨날 꽉꽉 들어찼는데요, 뭐. 그 정도로 사람이 많았어요.”

지금 범일동 일대는 흔히 하꼬방이라고 부르던 예전의 판잣집은 그 흔적조차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다. 그 시절 판자로 대충 사방을 둘러서 벽을 만들어 허술하기 그지없던 판잣집 사이로 난 좁다란 외길은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비좁았던 길은 아침이면 인근 고무 공장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다닐 만큼 좁았던 길은 이제 시원하게 뻗은 도로 속에 묻혀 버렸다. 이춘해씨는 그때 그 시절의 길을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지금은 여기에 이 찻길이 있지만, 옛날에는 여기에 길이 없었고 젤쪽한 외통길이 있었어요. 그러니 아침만 되면은, 꼭 학생들 데모하면 밀고 내려오고 밀고 올라가듯이 사람들이 밀려 내려가고 밀려 올라가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다섯 시 넘으면, 한 여섯 시까지가 퇴근 시간 아닙니까. 참, 말이 인자 밀려 내려가고 밀려 올라가고 한다고 하지만, 사람에 걸려서 잘 댕기지도 못했어요. 길이 좁질하게 그래 가지고요. 지금 이 길 이것도 대로 길이라, 옛날에는 사람 하나 다닐까 말까 했거든요.”

[야자를 빼먹은 학생들이 찾는 곳]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일탈을 꿈꾼다. 불안한 미래와 지긋지긋한 대학 입시에 시달리던 청춘들은 때로 극장 앞에서 방황하곤 했다. 이들 영화관은 사춘기 중·고등학생들의 욕망의 분출구이자 해방구였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야간 자율 학습을 땡땡이 친 고교생들은 어김없이 극장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극장 조명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면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상영되는 두 시간 남짓, 그들은 나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교사 몰래 숨어들어 간 극장에서 본 영화는 세월이 흘러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가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매표소 아저씨와 가볍게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지만, 이 또한 이제는 옛 추억으로 남았다.

“얼마 전 부산 출신의 ‘친구’를 만났습니다. 으레 그들에게 이 세 극장은 안주가 됐습니다. 「차타레 부인」을 보면서 성교육을 받았다는 녀석, 「뽕」을 보러 들어가다 튕겼다는 녀석, 옆에 앉은 게이 때문에 혼절할 뻔했다는 녀석…….”

[출처: 중년의 추억[http://cafe.empas.com/thwndgks456], 한탄강 님]

이춘해씨도 이렇게 기억한다.

“인근 고등학생들도 야자 빼먹고 많이 왔어요. 요즘이야 미성년자, 미성년자 그러면서 잡아내고 그러지만 옛날에는 미성년자를 어데 단속이나 제대로 했나요. 극장 들어가면 미성년자들로 가득했어요. 말은 미성년자 안 된다고 하지만 안에 들어가면 미성년자들로 바글바글한데 뭐. 요즘은 미성년자가 못 들어가지요. 단속을 심하게 해서. 예전에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라고 해도 뭐 누가 단속하러 오나요.”

[서민들의 문화 욕구를 채워 주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증가하고 신발 산업이 쇠락하면서 범일동 극장 트리오는 두 편 동시 상영관으로 바뀌었다. 전성기 때 인근 신발 공장 노동자들이 극장의 주요 관람객이었다면, 1990년대에 들어서서부터는 신발 산업의 쇠락과 함께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실업자들이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들 세 극장이었다.

당시 보림 극장과 삼성 극장 주변의 새벽 일일 노동 시장은 연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실직한 신발 업체 근로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삼화, 진양을 비롯한 국내 신발 업계 간판 업체들의 잇단 도산으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근로자들은 다른 직장을 구하지 못해 날품팔이라도 하기 위해 인력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 인력 시장에서 날품팔이도 구하지 못한 실직자들은 인근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들에게 이들 극장은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공장 노동자들이 평일에는 영화 보러 다닐 시간이 어딨어요. 일 마치면 집에 가서 자기 바쁘죠. 주말이나 되어야 영화 보러 갈 수 있었죠. 그래서 평일에는 일반인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실업자도 많았거든요. 실업자가 많아서 영화관이 맨날맨날 꽉꽉 들어찼던 거예요. 하루 종일 두 편 동시 상영이니까.”

이춘해씨는 딱히 갈 곳 없는 실직 노동자들에게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의 두 편 동시 상영은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고 한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은 물론이거니와 하루 종일 극장에 죽치고 앉아 있어도 아무런 눈치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이미 개봉관에서 상영이 끝난 철 지난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동시 상영되는 영화는 장르, 주제, 그런 건 다 무시되었지만 친절하게도 한 편이 끝나면 10분 정도의 화장실 다녀올 시간은 주어졌다.

“한 편 끝나고 5분에서 10분 정도 쉬고, 또 상영했거든요. 화장실 갈 시간 잠시 주는 거야. 그래서 2부 동시 상영이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팝콘과 콜라다. 특히 영화와 팝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요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는 팝콘과 콜라 외에도 오징어, 핫도그, 나초, 츄러스 등 다채로운 주전부리가 가득하다. 설령 영화가 지루해도 입은 심심할 틈이 없다. 지금처럼 그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 극장에서도 팝콘, 땅콩, 오징어와 같은 주전부리를 팔았다. 물론 지금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세련된 맛은 없었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고소한 땅콩과 오징어가 영화 보는 동안 심심한 입을 달래 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고 이춘해씨는 말한다.

“옛날 극장에서도 주전부리는 팔았어요. 밀고 다니면서……. 요즘은 내가 극장을 안 가 봐서 어떻게 파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극장 안에서 팔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지요? 옛날에는 사람이 목에 걸거나 밀고 다니면서 땅콩, 오징어, 팝콘 등을 팔았지. 그래도 영화 보는 데 방해되니까 상영 중에는 안 팔았어요.”

[극장 트리오의 사라진 옛 추억]

그때 그 시절 극장을 요즘의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어두컴컴한 조명, 퀴퀴한 냄새, 좁고 삐꺽대던 좌석, 그리고 스크린에선 종종 비가 내렸다. 스크린에 비가 줄줄 내리는 수준의 극장이었지만 당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공장 노동자와 학생, 서민들에게는 소박한 문화 욕구를 채워 준 추억의 공간이자 쉼터였다. 요즘은 젊은 층이 영화관 관람객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당시에는 나이 지긋한 관객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주로 평일 공장에서 땀 흘리며 바쁘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신해 극장의 빈자리를 채우곤 했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주로 극장을 찾지만, 옛날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할 일 없고 갈 곳이 없으니까 극장을 찾았어요. 지금으로 치면 피신 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삼성, 삼일, 보림은 평일에는 나이 든 사람들이 주요 고객이었고, 주말이면 공장 노동자들이 좀 있었죠.

그리고 학생들도 땡땡이 치고 많이 왔어요. 학교는 가도 안 하고 극장 오고 그랬지요. 뭐, 그 당시에는 학생들이 학교 땡땡이 치고 학교 안 가고 그래도 선생들이 극장에 잡으러 오고 뭐 그런 거는 잘 없었어요. 미성년자 불가는 해 놓아도, 안에 들어가면 미성년자들이 버글버글했는데요 뭐. 그리고 뭐 순찰 돌고. 하지만 하나하나 붙잡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는 경찰들도 심하게 단속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들켜도 ‘니들 다음부터는 오지 마라, 다음부터는 안 봐 준다’ 뭐 그러는 정도였지요. 요즘은 안 그렇잖아요. 그때는 밖에 미성년자 불가라 써 놓기는 해도 경찰들 오고 그러면 자기들 영업에 지장 있고 그러니까, 점심이나 한 그릇 먹여서 돌려보내 버리고 그랬어요.”

이춘해씨는 당시의 극장 풍경을 이렇게 기억한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범일동 일대의 오래된 동시 상영관은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이들 극장은 1970년대 유명 인기 가수의 극장 쇼 무대 중심으로 잠시 부흥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예전의 화려했던 명성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텔레비전의 대중화와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잇따른 개관, 그리고 동구 경제의 활성화를 이끌었던 신발 산업의 쇠퇴는 그때까지도 힘겹게 버티고 있던 이들 극장이 끝내 시대를 거스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했다. 이춘해씨에 따르면, 이들 극장이 사라지게 된 데에는 중·장년층 사이에 새로운 여가 공간으로 댄스홀이 급부상한 것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신발 산업의 쇠퇴와 함께 줄어든 젊은 관객들의 빈자리를 채워 주었던 중·장년층 관객들조차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줄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손님이 안 오니까, 극장이 슬슬 사라지기 시작한 거지요. 극장이 왜 안 됐는가 하면, 사람들도 사람이지만 사람들 인식이 조금씩 바뀌면서 극장 가서 하루 종일 그러고 있느니 차라리 춤이나 추러 가자, 그러면서 사람들이 전부 그쪽으로 다 빠져 버렸거든요. 극장 말고도 심심풀이가 있으니까. 지금은 1,000원, 또 어떤 곳은 500원 받는 데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가면은 나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해요.”

[전성기, 1970년대 인기 가수의 극장 쇼]

범일동 극장 트리오 중에서도 보림 극장은 1970년대 인기 가수의 극장 쇼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곳이다. 개봉관으로 문을 연 보림 극장은 영화 배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1970년대에 들어 톱스타의 극장 쇼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그 시절 톱스타의 쇼 대부분이 보림 극장에서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극장 가면은 그렇지만, 그때도 극장 좌석이 비스듬하게 경사지게 있어서 영화 보는 데 뭐 불편하고 그런 거는 전혀 없었어요. 그래도 쇼 하고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볼끼라고 머리 치우라고 난리였지만……. 영화 볼 때는 그런 거 없었어요. 옛날에 쇼 하면 단연 보림 극장이었지요. 서울 사람들이 부산에 쇼 하러 내려오면 부산에 보림 극장 말고는 다른 극장에 예약을 잘 안 했어요. 다른 극장에 예약을 하면 우찌된 판인지 사람들이 잘 보러 안 갔거든요. 그러니 부산에서 쇼 하면 전부 보림 극장에서 한 거죠.”

당시 인기 가수였던 하춘화, 남진, 나훈아의 쇼가 열릴 때면 보림 극장 앞은 이들 쇼를 관람하기 위한 관람객들로 넘쳐 났다고 한다. 하루는 톱스타의 쇼를 보러 몰려든 사람들이 먼저 입장하기 위해 밀고 당기는 와중에 보림 극장 옆 담장이 무너지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옛날에 여기 뒤에 부산은행 짓기 전에 쭉 담이 있었거든요. 그때 하춘화, 남진, 나훈아……. 하여튼 일류 가수는 다 왔어요. 사람이 오죽 많았으면 그 담이 무너져 버렸겠어요. 그래가 그 쇼 끝나고 난 뒤에 보림 극장 사장이 담을 새로 쌓아 주기도 했어요. 자기 고객이 와서 밀고 당기고 하다가 담이 무너져 버렸으니, 새로 쌓아 줘야 안 되겠어요? 옛날에 여기 참 재미있었어요.”

1970년대 극장 쇼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 미리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웃돈을 더 주고라도 표를 사고 싶어 했다. 보림 극장 옆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이춘해씨는 자신도 당시 극장 쇼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말한다. 그는 유명 가수의 극장 쇼가 열릴 때면 미리 극장 직원들에게 부탁해 표를 예매해 두었다가 되파는 방식으로 제법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고 한다. 당대 인기 스타들의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사람들은 아침부터 길게 줄을 섰다. 그렇게 늘어선 줄이 보통 150~200m는 되었다고 한다. 특히 당대 최고 인기 가수의 쇼에는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사람들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옛날에 극장에서 쇼 같은 걸 하면 내가 어째 하냐 하면요. 그 당시에 극장에서 쇼 같은 걸 하면 비싸 봐야 500~600원, 아니면 700원 정도 했거든요. 아침 일찍 나와서 줄 서서 있잖아요. 지금도 야구장 가면 암표 있잖아요. 극장 쇼에도 암표가 있었죠. 근데 나도 그걸 공짜로는 못 사죠. 극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술 한잔 받아 주께, 그러고 뒤꽁무니로 표를 받는 거죠.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한 장이나 두 장씩밖에 안 주지만, 내가 술 한잔 받아 주께 하면 열 장이나 스무 장씩 줬어요. 줄을 저 위에까지 쫙 서 있었다구요. 전봇대 서너 개 거리를 줄로 쫙 서 있었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150~200m 정도는 족히 됐죠. 먼저 들어가서 좌석 잡으려고 줄을 쫙 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700원 주고 산 표를 가지고 서 있는 거죠. 좋은 거 나훈아, 남진 같은 거 나오면 500원도 더 붙여 먹고 팔고 그랬어요. 그때는 다 그렇게 먹고 살았어요.”

[단체 관람의 추억이 깃든 곳]

1970~1980년대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은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유명 인기 가수의 극장 쇼와 단체 관람관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삼일 극장은 2001년에 개봉했던 영화 「친구」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영화 「친구」에서처럼 당시만 해도 시험이 끝나면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곤 했었다. 중·고등학생들은 주로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명화를 단체 관람했다. 범일동에 자리한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은 그 시절 서면 인근 학교 학생들의 단체 영화 관람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중년들이라면 단체 영화 관람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당시 극장은 1층과 2층으로 나뉘었는데 단체 관람을 하는 학생들은 2층에서, 일반 관람객은 1층에서 동시에 영화를 관람했다. 사춘기 청소년들은 학교를 벗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들떠 있었다.

“옛날에는 학교에서 와서 단체 관람도 하고 했지요. 그때는 극장이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있었거든요. 학생들은 2층으로 보내고, 일반 사람들은 1층으로 넣어요. 학생들하고 일반인들을 서로 섞지는 않았어요. 그러니 학생들 단체는 언제든지 2층으로 올려 보냈죠.”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은 이춘해씨나 다른 중년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시험 기간이 끝나면 으레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하기도 했는데, 다음 날 꼭 들려오던 소리가 xx학교와 한판 붙었다는 얘기였지요. 영화 「친구」처럼 그때 부산 애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출처: 중년의 추억[http://cafe.empas.com/thwndgks456], 한탄강 님]

[고단한 삶에 깃든 동시 상영의 추억]

1970년대 값비싼 텔레비전을 가진 집은 몇 되지 않았다. 가난했던 노동자들은 지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극장으로 몰렸다. 때로는 영화 한 편이 하루 종일 공장에서 땀 흘리며 일한 그들에게 달콤한 휴식이 되어 주었다. 극장의 좁고 낡은 의자에 기대어 영화를 보는 동안만은 그들도 고단한 하루를 잊을 수 있었다. 극장을 찾는 사람들은 공장 노동자뿐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국제고무, 삼화고무 등등 공장 노동자들도 많았지만 하꼬방에 사는 사람들 중에 실업자도 굉장히 많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전부 다 공장에 일하러 다닌 게 아니고, 실업자가 많아서 노가다를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고. 그러니 어디 갈 곳이 어딨어요. 돈은 없지요. 그러니까 몇 백 원 주면 하루 종일 극장에서 죽치고 있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가니 얼마나 좋아요. 여기가 번화가여서 그런 게 아니고 저 위에 집들이 전부 하꼬방이었고, 또 공장이 많이 있어서 사람들이 들끓었던 거죠. 지금은 공장이 없으니까 사람이 없어요.”

[극장 포스터와 간판에 얽힌 추억들]

당시 극장 포스터와 간판은 영화를 홍보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특히 극장 포스터는 넓고 좁은 골목을 가리지 않고 조금의 공간이라도 허락되는 담벼락이면 경쟁하듯 붙어 있었다. 한때 골목을 점령했던 영화 포스터는 이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춘해씨의 말에 따르면, 당시 영화 포스터 한 장을 붙이면 영화표 한 장을 공짜로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영화 포스터를 붙이는 아이들에게 싼값에 영화표를 사서 원래 영화표보다 저렴하게 팔았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너도나도 영화표를 사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지금은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이 잘나가던 시절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범곡 교차로[교통부 사거리]에 조그만 가게를 열고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보림 극장이 있었기에 그 또한 먹고 살면서 자식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극장 포스터 있잖아요. 지금도 붙이고 하지만, 극장 포스터 같은 거 붙이고 하면 초대권 같은 걸 한 장씩 줬어요. 포스터 50장이면 표가 50장이에요. 그러면 30장 정도는 주고 20장 정도는 남겨서 나한테 가져오는 거죠. 그러면 그때 극장비가 500원이니까 내가 그걸 한 200원 주고 사는 거예요. 가들 점심값인 거죠. 200원 주고 사서 나는 한 300원 주고 파는 거예요. 그러면 극장비보다 200원 싸죠. 그러니까 서로 사러 오는 거죠. 내가 회사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그런 거 해서 여기서 자리 잡고 애들 공부시키고, 지금까지 이 바닥에 계속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이 바닥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극장 간판 그림에 청춘을 바쳤다는 삼일 극장 박해봉씨는 ‘내가 신성일 얼굴만 100점 넘게 그려 봤어. 인물을 그릴 때는 눈빛이 가장 중요한데, 신성일이나 남궁원, 최무룡 같은 미남 배우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그리기도 쉽고, 닮기도 많이 닮아. 반면 추송웅 같은 독특한 얼굴은 참 그리기가 난감해’라고 회고한다.[「평생 배우 얼굴 그렸지만 내 작품 못 남겼네……」-박태우, 『부산 일보』, 2011년 6월 7일] 지금처럼 인터넷 영화평도, 영화 소개 프로그램도 없던 시절 극장의 간판은 영화 흥행을 좌지우지했다.

“고딩 3년간 학교 가는 길이면 무조건 이 길을 지나가야 했던 것이죠. 코스도 보림 극장을 지나 삼성 극장, 삼일 극장을 지나야 하는 기가 막힌 ‘순례지’였습니다. 아침 학교 가는 길이면 그때 유행하던 ‘빨간 영화’의 목록은 그냥 외워졌습니다. 그 길에 데레사여고 학생들이 지나가면 수줍던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차타레 부인」, 「젖소 부인」, 「개인 교사」, 「뽕」, 「빨간 앵두」, 「어우동」……. 제목만 들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영화의 포스터들은 끊임없이 나붙었습니다. 볼 수 없는 영화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출처: 중년의 추억[http://cafe.empas.com/thwndgks456], 한탄강 님]

그나마 극장 쇼와 동시 상영관으로 어렵게 명맥을 유지해 오던 삼일 극장, 삼성 극장, 보림 극장도 1990년대 이후로 차례로 문을 닫았다. 삼일 극장은 2006년 동구 범일동 철길 건널목 입체 교차로 진입로 공사를 위해 철거되었다. 삼성 극장 역시 2011년 중앙로 교통 흐름 개선을 위해 시작된 도로 확장 공사 구간에 있어 철거 대상이 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보림 극장 건물에는 극장이 문을 닫은 후 맥도날드를 거쳐 현재는 마트가 영업 중이다. 현재 보림 극장은 사라졌지만 보림 극장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버스 정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공장이 사라지면서 사람도 없어지고 그러니 극장 찾는 사람도 없어지고, 또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극장도 없어지는 거지요. 사람 안 오는데 극장 돌리고 앉아 있어 보면 뭐하겠어요. 지금은 여기 인구가 옛날의 삼분의 일도 안 돼요. 옛날에 1,000명 다닌 거 같으면 요즘은 100명도 안 되죠. 옛날에는 여기 장사 자리 나오면 서로 하려고 했는데, 요즘은 장사도 안 돼요. 여기 삼일, 삼성 극장 없어진 지는 몇 년 안 됐어요. 보림 극장은 1997년에 없어졌죠. 보림 극장은 문을 닫고 나서 한동안은 다른 사람이 인수해서 몇 년 댄스홀 잘했어요. 그때는 나이 든 사람들 2,000원 주고 들어가면 하루 종일 춤추면서 놀고, 안에서는 가락국수도 팔고 하니까, 그렇게 하루 종일 놀다가 집에 가는 거지요. 그것도 그렇게 몇 년 잘되다가 안 되니까 치아뿌고 지금은 슈퍼를 하는데, 슈퍼 그것도 잘 안 되나 봐요.”

이춘해씨의 추억도 이쯤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추억의 범일동 극장 트리오, 명성 자자하던 그 극장들은 이제 영화의 도시 부산에서 개발에 밀려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비록 건물은 사라졌지만 그 이름과 추억만은 ‘보림 극장’이라는 버스 정류장 이름처럼 우리에게 남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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