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영화 간판쟁이가 그린 그림의 뒷이야기-부산 최후의 영화 간판쟁이 권오경 선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42
한자 映畵看板-釜山最後-映畵看板-權五敬先生
영어의미역 The background story of paintings told by Gwon Ogyeong, the last sign painter in the history of Busan cinema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동길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시설 부산 극장 - 부산광역시 중구 비프광장로 36[남포동 5가 18]지도보기

[그 시절의 기억 속으로]

생각난다. 열 살 이전에 들락거렸던 영주동의 천보 극장. 그리고 초량 대도 극장. 둘 다 중심에서 벗어난 변두리 극장이었고 2류, 3류 극장이었다. 화면은 자주 끊겼고 실내는 퀴퀴했다. 그러나 관객은 늘 붐볐고, 영화의 말미는 언제나 감동적이었다. 감동의 여운은 길고 짙어 막이 내려도 쉬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또 생각난다.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던 영화 선전 차량. 앞이 뾰족하고 바퀴가 세 개였던 삼륜차였는지 아니면 지프차였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세계에서 최고로 잘생겼다는 남자 알랭 들롱이 주연한 영화나 이태리 갱 영화 간판을 부착한 차량이 확성기 소리와 함께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하던 또래들과 선전차 꽁무니를 따라다니곤 했다.

선전차를 운행하는 극장은 형편이 나은 극장이었다. 초량 극장이 그랬고 초량 농산물 시장 곁 중앙 극장이 그랬다. 동시 상영 천보·대도 극장과는 달리 한 편만 상영하던 중급 극장이었다. 영주동에 살던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가기에는 거리가 멀었고 입장료도 부담스러웠다. 그들 영화 선전차를 따라다니긴 했지만 내가 가는 극장은 예외 없이 천보 극장이었고 대도 극장이었다. 두 극장은 지금도 눈에 훤하다. 어디에 있었는지, 극장 구조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도 다 기억난다. 다행히 천보 극장은 아직 건물이 남아 있어 나의 기억을 증명해 줄 수 있지 싶다. 기억을 더듬어 보기에 앞서 극장 구조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 안에 똬리를 튼 기억들이 하나하나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열 살 이전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기분이다. 아, 그 시절이여.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가는 기억의 힘이여.

[극장 미술실 문은 비밀의 눈]

천보 극장은 건물 모서리가 둥글었다. 운치가 있었다. 건물 바깥에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가 있었고 양쪽으로 열어젖히는 출입문이 있었다. 출입문은 평소 한쪽만 열어 두다가, 영화가 끝나고 관객이 몰려나오면 양쪽을 다 열었다. 텔레비전이 대중화되지 않고 라디오조차 귀한 시절이라 새 프로가 상영되는 날은 출입문이 미어터졌다.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로비가 나왔고 정면이 실내 출입문이었다. ‘ㄷ’ 자로 생긴 로비 양끝에도 출입문이 있었으니 실내 출입문은 모두 셋인 셈이었다. 로비 왼쪽 끝에는 남녀 공용 화장실이 있었고, 오른쪽 끝은 영화 간판을 그리는 미술실이었다. 정면 실내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왼편에 임검석이 있었다. 영화가 불온하거나 불량한지 검열하는 경찰관이 앉던 특별석이었다. 일반 좌석은 딱딱했으며 앞뒤 간격이 촘촘했다. 한 영화가 끝나고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막간에 열어 두는 환기창에선 햇살이 긴 칼처럼 실내를 쑤셨다. 땅콩 캐러멜 따위를 파는 점원 아이 목소리가 좌석을 누비고 다녔다.

미술실 문은 어떤 때는 열려 있었고 어떤 때는 닫혀 있었다. 열려 있을 때나 닫혀 있을 때나 외부인은 접근이 금지된 곳이라 접근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활짝 열려 있는 날에는 운 좋게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미술실은 보기 전에 먼저 맡아졌다. 눈보다 코가 먼저 반응했던 것이다. 그림에 시선이 닿기 전에 페인트 냄새, 시너 냄새가 먼저 코에 닿았다. 내 기억 속 극장 미술실은 언제나 냄새가 먼저였고 그 다음이 그림이었다.

운이 더 좋은 날은 그림을 그리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주로 관객이 뜸한 시간이나 간판을 바꿔 다는 날이었다. 그림은 총천연색이었다. 화려했다. 어린 마음에도 있어 보였다. 붓이 가득 담긴 통도 여럿 보였다. 페인트가 묻은 작업복과 손등, 그마저도 있어 보였다. 점 한 점 찍을 때마다 얼굴이 주인공을 닮아 가는 게 그저 신기했다. 신의 손이 따로 없었다. 주인공이 화면을 박차고 튀어나올 것 같은 생생함! 아마 그 영향이었던 것 같다. 열 살 전후로 내 낙서의 주인공이 하나같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건. 성웅 이순신(李舜臣) 역을 맡았던 김진규를 자주 그렸고, 협객 장동휘나 박노식도 자주 그렸다. 화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그 시절 영화 간판을 그리는 사람만큼은 은근히 동경했고 궁금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부에 있었지요. 돈이 없다 보니 대학은 못 갔어요. 군대 제대하고 나서도 그림에는 미련이 컸지요. 영화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간판에 끌려 무작정 미술실을 찾아갔어요. 살아가면서 돈도 중요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꼭 해 봐야겠다는 마음이었지요. 미술부장이 50대였는데 영화배우 숀 코네리 스틸 사진을 한 장 주면서 연필로 데생을 해 오라 하더라고요. 밤새도록 데생해 그 다음 날 가져갔더니 일해 보라고 그래요. 처음에는 월급도 받지 않고 열심히 일했지요.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전직 극장 미술부장 권오경 선생의 면담은 어렵게 이루어졌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 생업이 빠듯해서 날을 잡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권 선생은 영화판에서 수제 간판이 사라지면서 타의로 극장을 간판을 그만둔 이래 지금껏 인테리어, 주로 아파트 실내 인테리어 일을 하고 있다. 업소는 부산진구 연지동에 들어설 시민 공원 정문에서 어린이 대공원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다. 친환경 건축 자재를 사용하는 아파트 리모델링 전문 토털 인테리어를 표방한다.

[남포동 왕자 극장에서 영화 간판 입문]

권오경 선생이 인테리어를 시작한 해는 2003년. 그해 극장 미술부장을 그만두면서 피치 못하게 생업을 바꾼 것이다. 극장 있을 때보다는 수입이 훨씬 낫다고 한다. 권 선생이 극장을 그만둔 것은 순전히 타의였지만, 극장주가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둔 게 아니었으니 타의라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떠밀렸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복합 상영을 위주로 하는 멀티플렉스(multiplex) 체제로 극장이 전환되고 실사 출력과 스틸 사진이 간판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극장 미술부의 입지가 좁아졌고, 급기야는 그가 섰던 한 뼘 땅마저 내주게 된 것이다.

권 선생이 인테리어 업종으로 전환한 것은 극장 간판업과 무관하지 않다. 그림 구도를 잡는 디자인이며 간판용 합판을 자르고 오리고 덧대는 일 모두가 인테리어업과 연관이 있는 까닭이다. 극장 간판할 때도 라이온스 행사 같은 걸 하면 무대 장치를 만들어 주었다. 극장 간판을 그리던 동료들 역시 업종 전환은 큰 틀에서는 엇비슷했다. 조선소에서 선박 페인트칠을 하거나 순수 미술로 나가거나 했다. 그도 순수 미술을 병행한다. 부산 미술 대전에 입선했으며, 극장 간판하던 동료끼리 이월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월 두 번째 일요일에 야외 스케치를 나간다.

권 선생이 처음 영화 간판을 그린 곳은 부산 남포동의 왕자 극장이었다. 군대를 갓 제대하고 24세 풋풋한 젊은 시절이었다. 월급도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신이 났고, 곧 재능을 인정받아 월급 조로 틈틈이 용돈을 받았다. 운이 좋아 이직하는 선배의 빈자리를 곧 꿰찼다. 이후 제일 극장과 삼성 극장, 삼일 극장을 거쳐 부산 극장 미술부장으로 남포동에 컴백했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이었다. 미술부장은 미술부 책임자를 떠나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다. 어떤 간판을 내거느냐에 따라 관객 수가 좌우되던 시절이었기에 미술부장은 극장에서 절대적이었다. 그러기에 경험 많고 노련한 50대 중반이 미술부장을 맡는 게 관례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십도 안 된 새파란 젊은이가 미술부장을 맡은 건 일대 사건이었다.

[인생 황금기를 극장 간판과 함께]

권오경 선생이 미술부장을 맡은 곳은 더구나 남포동이었고, 부산 최고를 자처하는 일류 개봉관이었다. 지금은 부산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해운대 일대가 부산 영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만 해도 부산 영화의 중심지는 단연 남포동이었다. 초창기 부산 국제 영화제가 열린 곳도 남포동이었으며 영화의 거리, 피프(PIFF) 광장이 조성된 곳도 남포동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포동 극장은 대개가 고급이었다. 무대며 좌석 등등 모든 게 고급스러웠고, 덩달아 입장료도 동시 상영 극장에 비해 두세 배는 비쌌다. 당연히 영화 간판도 고급이었다. 자주 보수하고 자주 교체해 말끔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인공 얼굴을 실감 나게 그렸다. 주인공 얼굴을 얼마나 닮게 그리느냐가 일류와 이류를 판가름하는 잣대였다.

아무튼 스물세 살에 영화 간판에 입문해 서른아홉 살에 남포동 일류 극장 미술부 책임자가 되고, 거기서 마흔다섯 살까지 있었으니 만 21년을 극장 간판과 함께한 생애였다. 무엇보다 인생의 황금기랄 수 있는 청장년기를 극장 간판과 함께했다. 극장 이야기가 나오고 극장 간판 이야기가 나오면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그린 간판요? 천 점은 더 되지요. 일주일에 서너 편 그릴 때도 있고, 다른 극장 간판도 많이 그렸지요. 그만두기 서너 해 전부턴 복합 극장과 소극장이 늘어나면서 일주일에 열 편 가까이 그렸어요. 복합 극장이라서 영화관이 많으니 영화 편 수도 엄청 늘어난 거죠. 그리고 초창기 극장은 간판이 대형이라서 몇 개 못 그리지만, 소극장은 간판이 작으니 하루에 한 편 그리는 건 예사였지요. 일은 엄청 많았지만 그것도 손에 익으니 달인처럼 막 그리게 되더라고요. 하하.”

간판 이야기가 나오자 권오경 선생은 인테리어 사무실 안쪽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온다. 제목은 『부산 영화 100년』. 한국영화자료원 홍영철 소장이 2001년에 펴낸 영화 자료집이다. 사진과 자료를 중심으로 부산 첫 극장 행좌와 송정좌부산항 지도에 나타나는 1903년(고종 40)부터 부산 영화 자료를 집대성한 책이다. 책에는 초창기부터 현대까지 부산 소재 극장들 사진이 일목요연하게 실려 있다. 권 선생은 몇 개의 사진을 가리키며 사진 속 간판이 모두 자기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권 선생이 가리키는 간판은 그가 미술부장으로 재직하던 부산 극장 것들이다. 그가 그린 간판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다이하드」 시리즈 등이다. 모두 명절 대목을 노린 흥행작이라 간판 크기가 초대형이었다.

영화의 역사는 ‘부산 영화 100년’이라는 책 제목에서 보듯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렇다면 영화 간판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영화사와 궤를 같이했는지 궁금했다. 책에 실린 부산 초창기의 극장 사진과 거기에 보이는 영화 간판을 살펴보면 간판의 역사에 대강이나마 접근하지 싶었다. 책에 실린 사진 가운데 초창기 극장은 부산좌(釜山座)[1907~1923], 보래관(寶來館)[1914~1937], 행관(幸館)[1915~1930]이었다. 세 극장 모두 2층 건물 외벽에 간판을 내걸었다. 이로 미루어 영화 간판의 역사는 영화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공 눈썹 하나 길이가 1m나 돼]

간판의 크기는 극장마다 달랐다. 극장 건물 크기가 다 달랐기 때문이다. 부산 극장의 경우 간판의 크기는 가로 16m, 높이 8m 50㎝였다. 주인공 눈썹 하나 길이가 1m나 되는 대형이었다. 명절 대목이 되면 특수를 노려 초대형으로 만드는데, 합판을 위로 잇대고 옆으로 덧대는 방식이었다. ‘ㄱ’ 자 극장 건물을 간판이 빙 두른 적도 있었다. 보통의 간판은 9등분으로 나눠져 있어 등분된 하나하나에 그림을 그려 짜 맞추면 하나의 큰 그림이 되었다. 그림을 다 맞추고 난 뒤 손이 닿지 않는 곳의 보완은 낚싯대같은 긴 작대기 끝에 페인트 붓을 매달아서 했다.

소극장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일일이 데생할 시간이 부족해 환등기를 사용하곤 했다. 권 선생의 경우 재정이 열악해 환등기를 사지는 못하고 자체 제작해 썼다. 연탄난로 같은 통을 잘라 양 끝에 돋보기 유리를 단 환등기였다. 통 안에 스틸 사진을 집어넣고 빛을 비추면 간판에 그림이 투영됐다. 투영된 그림 그대로 그리면 되었으니 이전보다 훨씬 수월했고 빨랐다. 보통은 얼굴만 비추고 몸통은 대충대충 그렸다. 몸통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지만 얼굴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환등기를 통하면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최고 20m로 확대할 수 있었다. 이대근이 한복 입고 춤추는 장면을 그린 21m 「호걸 춘풍」 극장 간판도 그런 방식으로 무난하게 그렸다. 걸리는 시간은 대형 같은 경우는 이틀, 급하면 하루 만에도 그렸다.

극장 간판에서 미술부장이 하는 일은 간단하면서도 중요했다. 간판 하나를 그리는 데 있어서 미술부장이 하는 일은 아주 제한적이다. 밑그림은 아랫사람이 다 그리고 부장은 바깥에서 시간을 죽친다. 권 선생 표현대로 ‘술 먹고 논다’. 그러다가 완성하기 직전, 그러니까 간판을 올리기 직전에 들어와 한두 군데 점을 찍고 선을 긋는 게 전부다. 화룡 정점인 셈이다. 그런데 그 점 몇 점, 선 몇 선이 영화 간판 수준을 좌우하고 극장 수준을 좌우한다. 점과 선 몇 개로 주인공 얼굴이 주인공 얼굴로 보인다. 생생하게 살아난다. 희한하다. 그러기에 미술부장 자리는 감히 넘보지 못하는 자리였다.

미술실은 극장마다 다 있었다. 극장 지하나 복도 끝에 미술실이라 크게 써 두고 작업했다. 다른 물감은 안 쓰고 페인트만 썼다. 안료도 같이 썼는데 색깔을 강하게 하는 첨가제였다. 일반 물감과 비교해 페인트가 질은 떨어졌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그림은 귀신같이 잘들 그렸다. 여러 페인트를 섞어 색도 다양하게 냈다. 영화가 자주 바뀌니 간판도 자주 바뀌었다. 간판을 다 그려 놓은 상태에서 영화사와 극장 사이에 이견이 생겨 프로가 갑자기 바뀌면 밤샘을 하기도 했다.

[미술부장 밑에 차석, 그리고 조수 둘]

간판이 자주 바뀌긴 했지만 대작 같은 경우는 관객이 많아 한 달을 걸어 두는 경우도 있었다. 한 달을 걸어 둬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수시로 간판을 보수했으며 차기작을 준비해야 했다. 간판 종류도 많았다. 옥외 전면 대형 간판이 있었고 측면 간판이 있었으며, 가로세로 4~5m짜리의 실내 로비 간판도 있었다. 길거리에 붙이는 선전 간판도 미술실 소관이었다. 1990년대 소극장 붐이 일었을 때는 소극장도 간판을 다 달았으므로 간판 수요가 엄청났다. 소극장이라고 해서 아무 소극장 간판을 그려 주는 건 아니었고 부산 극장 산하 부산 극장 1·2·3관, 연흥 극장, 자갈치 극장, 그리고 뒤에는 제일 극장을 부산 극장이 인수하면서 제일 극장 간판까지 그렸다.

극장에서 간판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았다. 권 선생은 60~70%라고 단언했다. 방송이나 신문이 대중화되지 않았기에 홍보 수단은 극장 간판과 포스터뿐이었다. 영화를 보러 남포동에 나왔다가 가장 근사한 간판을 건 극장으로 들어가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간판을 잘 그려야 일류 극장이라 했고, 그런 면에서 부산 극장은 선두 그룹이었다. 사실 이류 극장은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동시 상영을 했으니 간판을 일류보다 더 만들어야 했고, 자주 바뀌었으니 급하게 그려야 했다. 개봉관 차석 하던 사람이 부장으로 있던 이유도 있었다. 보수라든지 근무 여건도 떨어졌다.

미술부는 통상 네 명 정도로 꾸려졌다. 바깥에서는 ‘간판쟁이’라고 일률적으로 불렀지만 엄연히 직급이 있었고, 직급마다 호칭이 있었다. 부장이 있고 차석이 있고 조수가 둘이었다. 조수는 고참과 신참으로 구분됐다. 그림에 소질은 있는데 직장이 없어 미술부 언저리에서 어정거리다가, 또는 아는 사람 소개로 들어와서 조수 생활을 시작했다. 역할은 철저하게 분담했다. 처음 들어오면 시너를 부어 페인트 붓 빠는 일부터 했다. 붓은 제일 작은 1호부터 12호까지 있었다. 여자는 없었다. 부산 극장에서 1년 근무하다가 결혼을 이유로 그만둔 젊은 아가씨가 있었는데, 부산의 극장 미술부 역사에서 여자는 그게 전부였다. 말투 거칠고, 야근에 사다리 작업까지 해야 하는 간판쟁이 일은 여자가 하기엔 힘들었을 것이다.

지나간 간판을 지우고 보수하는 일, 부장이 막 쓰고 넘겨준 팔레트를 깨끗하게 씻어 내는 일, 페인트 안 굳게 뚜껑 닫고 정리 정돈하는 일 모두가 조수가 하는 일이었다. 권 선생이 잡일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글씨를 쓰고 얼굴을 그렸을 때는 입문한 지 6~7년이 지나서였다. 고참 조수는 밑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전체적인 그림은 차석이 다 그렸다. 차석이 그려 놓으면 부장이 와서 중요한 포인트 몇 군데를 손보는 식이었다. 간판을 건물 외벽에 올리는 일은 같이했다.

[100만 원 받으면 부장 50, 나머진 25, 15, 10]

보수는 나름대로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미술실에 가령 100만 원이 할당되면 부장 50만 원, 차석 25만 원, 고참 조수 15만 원, 신참 10만 원 식이었다. 권오경 선생 앞에는 모두 그런 식이었다. 많이 하면 많이 받는 도급이었다. 권 선생이 부장을 맡을 무렵 비로소 월급제로 바뀌었다. 4대 보험도 되었다. 한창 잘나갈 때 부장 월급으로 200만 원을 받았다. 극장 전무 월급이 210만 원 했으니 일반 직원 중에선 미술부장 월급이 가장 셌다. 버는 것은 많았지만 직원들 건사하느라 쓰는 것도 많았다. 극장 뒤편 고갈비집이나 자갈치 곰장어집이 단골집이었다.

부산에 극장이 많을 때는 40~50군데나 되었다. 남포동서면에 밀집해 있었고 한 사람이 소극장을 몇 군데 하기도 했다. 극장 수입은 방화와 외화가 달랐다. 국산 영화는 영화사 50%, 극장 50%였고 외화는 영화사 60%, 극장주 40%였다. 미술부 수당은 영화사에서 지불했다. 영화사 광고비 명목으로 간판 얼마, 포스터 얼마 그런 식으로 책정했다. 명절 대목 대작 같은 경우엔 간판을 크게 달았다. 영화사에서 추가 재료비 외에 술값을 별도로 주기도 했다. 간판을 초대형으로 그리면 관객도 많이 들고 비용은 전적으로 영화사가 부담했으니 극장도 좋아했다. 산하 소극장 간판을 그려 주면 거기선 재료비 명목으로 돈이 나와 미술부원들과 나눠 가졌다. 짭짤했다.

진급은 어떻게 했을까. 일정한 틀이 있는 건 아니었다. 윗사람이 다른 데로 가거나 그만둬 빈자리가 생기면 진급했고, 극장을 옮기면서 진급해 가기도 했다. 미술부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선배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중요한 기술은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고, 소질이 있다 싶으면 밀어내려고 했다. 그래서 기술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은 극장을 옮겼다. 당시는 일류인 개봉관과 이류 극장 구분이 확연했다. 일류 극장 차석으로 있다가 이류 극장 부장으로 가는 게 일반적인 추세였다. 부산에서 마산, 창원, 진주 소재 극장 부장으로 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류 극장 부장이 되면 거기서 평생 근무하다 퇴직하거나 일류 극장 부장으로 옮겼다. 권오경 선생의 경우는 후자였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범일동 이류 극장에서 남포동 일류 극장 미술부장으로 왔을 때 권 선생 나이는 39살. 파격이었고 금의환향이었다. 부산 극장은 부산 최초로 복합 영화관을 도입한 극장이었다. 부산 극장 연제민 사장 안목이 그만큼 앞섰다. 연 사장은 특히 멀티플렉스 실사 출력과 스틸 사진이 일반화됐을 때도 손으로 그리는 영화 간판을 선호해 마지막까지 수제 간판을 고수한 극장주다. 그 덕분에 권 선생은 맨 마지막까지 극장가에서 버틸 수 있었고, 부산 최후의 영화 간판쟁이라는 호칭을 달게 되었다.

[2003년 부산 국제 영화제 때 미술부장 그만둬]

이제 부산 최후의 영화 간판쟁이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짚고 넘어가자. 권 선생이 부산 극장에서 마지막 간판을 그리고 물러난 때는 2003년 부산 국제 영화제가 끝날 무렵이었다. 제8회 부산 국제 영화제는 그해 10월 2일부터 10월 10일까지 열렸으니 권 선생은 2003년 10월에 퇴직했고, 이후 부산 극장에서는 수제 간판이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영화 「친구」 촬영지로 유명했던 범일동 삼일 극장[1944~2006년], 보림 극장[1955~2007년], 삼성 극장[1959~2011년]은 부산 극장이 수제 간판을 내린 후에도 여전히 수제 간판을 올려 두고 있었다. 그러면 가장 최근 문을 닫은 삼성 극장의 미술부장을 부산 최후의 간판쟁이로 봐야 하지 않을까. 권 선생 얘기를 좀 더 들어 보자.

부산 극장 이후로 부산 변두리 몇 군데에서 손 간판을 내건 동시 상영 극장은 있었지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어요. 극장은 극장인데 간판이 바뀌지 않았고 바뀌더라도 제목만 바뀌는 식이었지요. 간판을 몇 년 동안 그대로 쓴 곳도 있었어요. 영화도 상영을 하다 안 하다 그랬지요. 영화 촬영을 위해 새 간판을 거는 정도였지요. 그런 극장, 그런 간판을 정통적인 의미의 극장이나 간판으로 보긴 힘들지 않을까요?”

부산 최후의 간판쟁이를 언급하는 권 선생의 어조엔 자부심 같은 게 묻어 있었다. 20년 세월을 몸담았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었고, 한 세계에서 일가를 이룬 달인의 자부심이었다. 자부심으로 내뻗은 돌주먹은 묵직했다. 하지만 눈물기 같은 것도 감지됐다. 인생의 황금기를 바친 직업이 흔적만 남고 송두리째 사라졌다는 서운함이 왜 없겠는가. 자괴감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건 곧 그들의 사라짐이기도 했다.

모두가 현장을 떠난 지금, 소식이 두절된 사람이 많다. 어찌어찌 전화번호를 알아 연락해도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다행히 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 소장의 주선으로 권 선생과 연락되면서 지난 시대 부산을 대표했던 영화 간판쟁이의 세계와 역사에 부분적으로나마 다가갈 수 있었다. 더 다행인 것은 권 선생이 현장에 있었을 당시 극장 미술 협회가 있어 친목을 유지했고, 지금도 연락하고 있다는 전언이었다. 체계적으로 조망하면 부산 영화 간판의 세계와 역사를 제대로 복원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음은 권 선생 재직 당시 부산 영화 간판을 대표하던 사람들의 면면이다. 부산 극장 정운봉, 부영 극장 이국희, 역시 부영 극장 석수철, 대양 극장 전병곤, 국도 극장 장지하, 왕자 극장 유용하. 이 중 몇 사람은 사망했고, 나머지는 60대 후반이거나 70대 중·후반이다. 한평생 그림에 미쳐, 페인트 휘발유 냄새에 미쳐 자신의 인생을 휘발시킨 사람들이다. 생존해 있는 간판쟁이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온 이력을 꼼꼼히 듣고 남기는 일을 통해 휘발되어 사라져 가는 것들의 복원이 비로소 가능하리라. 복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라져 가는 것들의 꼬투리라도 붙잡아 둘 수 있으리라. 그러면 잘된 간판은 어떤 간판일까.

“영화 간판이 비록 상업 그림이지만 깊이가 있고 울림이 있는 간판이 있어요. 극장 외벽에 올려놓고 보면 빨려 들어가는 그림이 있는 거죠. 얼굴에도 입체감이 있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요. 글씨도 자연스럽고 디자인이 좋아요. 쳐다보고 있노라면 ‘아!’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와요.”

나름대로 연구도 많이 했다. 연구라 해서 대단한 건 아니었다. 본인이 그려서 극장에 올린 간판을 유심히 살펴보는 게 연구였다. 간판을 올려놓고 보면 부족한 게 꼭 보였다. 빛이 위에서 떨어지는데 코밑 그림자가 없는 게 눈에 들어왔고, 원색을 써야 할 자리에 둔탁한 색을 쓴 게 보였다. 부족한 점을 기억해 뒀다가 다음 간판을 그릴 때 반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새로워졌고 하루하루 깊어졌다. 권 선생이 올린 간판 가운데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와 지우지 않고 보관해 둔 간판은 없을까. 간판 크기가 워낙 대형이다 보니 사진으로나마 남겨 둔 작품이 몇 점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죽을 때까지 지우는 것, 그것이 간판쟁이의 숙명]

“그런 건 없어요. 간판쟁이들은 거의가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빨리 지우고 싶어 하죠. 어딘가 부족한 점이 한둘은 꼭 보이기 때문에 같은 간판이 오래 붙어 있기를 바라진 않죠. 대개가 작품을 만들겠다 해서 애착을 갖고 그린 게 아니라 일이기 때문에 그렸으니까요. 죽을 때까지 지우는 것, 그게 간판쟁이 일이고 숙명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 그림을 스스로 지우는 게 간판쟁이의 숙명이다. 어쩌면 그러면서 달관의 자세를 터득하는지도 모르겠다. 태풍이 지나간 뒤 차분히 가라앉은 온화를 1980년대 범일동 보림 극장 나이 든 미술부장의 표정에서 읽는다. 2000년대 초반 사진으로 만난 삼일 극장 박해봉 미술부장 표정도 그러했다. 1944년생 박해봉 부장의 경우 스물 무렵 극장 간판에 입문, 부산·천일·동아 극장 등을 거쳐 삼일 극장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40년 세월 동안 극장 간판을 그렸다.

그가 천일 극장에 있던 1972년께 그린 「밤」이란 영화 간판은 지금도 이야깃거리다. 가로 5m, 세로 4m의 간판 화면 전체를 새카맣게 칠하고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창문을 그렸다. 상업 미술에 순수 미술 색깔을 입힌, 일종의 실험이었고 도전이었다. 극장주는 이게 뭐냐며 당장 교체하라고 지시했지만 박 부장은 자신이 해석한 「밤」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은퇴를 몇 년 앞두고 디자인 회사를 차려 놀이터나 아파트 벽화 그리는 일을 했다.

권 선생은 부산 간판쟁이 가운데 전설적인 인물을 부산 극장의 대선배 정운봉 선생으로 꼽는다. 그가 그린 간판 역시 ‘아!’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지금은 60대 후반으로 그림 그리는 일은 접고 교회 장로 일을 본다. 비록 영화 간판을 그렸지만 순수 미술처럼 대단했다. 재료나 붓 같은 것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그렸다. 마음이 자유자재 그 자체였다. 페인트가 색색이 뒤섞여 잡색이 나오면 거기 맞춰 그림을 뽑아냈고, 붓이 닳으면 붓이 닳은 대로 그림을 뽑아냈다.

길거리 맥주 광고판이 드물던 시절, 그가 손으로 직접 그린 부산진역의 가로 30m, 높이 20m 뢰벤 브로이 맥주 간판은 지금도 아는 사람은 알아준다. 맥주잔에 넘치는 거품은 커다란 붓으로 그렸는데도 사진보다 더 사진 같았다. 질감이 부드러운 사진은 평면으로 보이지만 페인트 큰 붓으로 그린 그림은 거칠기에 입체감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었고, 그 장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 뢰벤 브로이 맥주 광고판이었다.

[간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주인공 얼굴]

영화 간판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는 주인공 얼굴이었다. 얼굴이 닮지 않으면 미술부장을 맡을 수 없었다. 영화배우 송강호가 나오는 영화 같으면 송강호 얼굴을 먼저 크게 깔고 다음에 조연, 그 다음에 배경을 그려 넣었다. 옷차림이나 동작은 대충 그려도 되지만 얼굴은 그럴 수 없었다. 부장 자격이 있고 없고는 주인공 얼굴로 판가름 났다. 무슨 영화를 볼까 극장을 기웃거리는 예비 관객을 극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 그건 전적으로 간판이었고 주인공 얼굴이었다. 주인공 얼굴을 책임지는 미술부장 월급이 셀 수밖에 없었다.

미술부장이란 자리는 당시만 해도 평생직장이었다. 극장에 한 번 소속되면 운명 공동체적 삶을 살았다. 돈 문제 같은 걸로 극장주와 사이가 틀어지면 몰라도 문제가 없는 한 내치지 않고 함께 갔다. 극장 미술 협회가 있어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처지에 이 사람 내쫓고 저 사람 쓰고 할 형국이 아니었다. 극장 미술 협회는 전국적인 친목 모임이었다. 봄가을 체육 대회를 가졌고 가족 야유회도 가졌다. 서울·경기와 대구·영남, 부산 회원끼리 자주 모였다. 부산 회원은 30~40명 정도였다.

한국 영화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역사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영화의 역사가 유구히 이어지는 만큼 영화 간판의 역사도 그러리란 믿음은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 믿음에 의문을 가진 이가 과연 얼마나 됐을까. 그러나 천만 관객을 예사로 돌파하던 한국 영화의 중흥기에 영화 간판은 서서히 종지부를 향해 갔다. 영화의 르네상스가 영화 간판에는 독침이 된 것이다. 소규모 극장이 늘어나면서 영화 간판 수요가 늘어났고,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실사 출력이었고 대형 스틸 사진이었다.

단언컨대 영화 간판에 종지부를 찍은 주범은 복합 극장이었다. 멀티플렉스였다. 외식 시설을 갖춘 한 공간 안에 여러 극장을 두어, 관객들의 프로 선택권과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는 선진화된 영화 감상 공간으로서 손색이 없는 멀티플렉스가 영화 간판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1990년대 대형 극장은 경쟁하듯 멀티플렉스 체제로 전환했고, 2000년대에 들어 정점을 찍었다. 1993년 부산 극장이 부산 최초로 복합 영화관 3관을 개관했고, 대영 시네마가 1999년에 5개 관을 개관했다. 2000년에는 그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 시네시티 부산 5개 관, CGV 12개 관, 대한 시네마 4개 관이 잇달아 개관됐다. 2001년에는 롯데 시네마가 11개 관을 개관하는 등 복합 영화관이 부산 극장가를 일으켜 세웠다.

[대중문화 아이콘 멀티플렉스의 두 얼굴]

영화 산업사에서 멀티플렉스의 등장은 일대 사건이었다. 멀티플렉스는 영화를 주도적인 대중 문화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멀티플렉스가 순기능만을 제공하진 않았다. 멀티플렉스가 창출해 낸 스크린 수는 영화 배급의 규모를 크게 만들었지만, 다양한 영화를 골라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배반했다. 하나의 멀티플렉스가 보유하고 있는 열 개의 스크린 가운데 서너 개의 스크린에서 같은 영화를 상영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고, 현재도 그렇다.

“극장이 복합 극장으로 바뀌면서 영화판이 엉망이 됐죠. 영화를 하루 할 때도 있었고, 오전 오후 영화가 다를 때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손으로 간판을 그리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는 거예요. 한마디로 영화의 룰이 깨지고 영화 간판의 룰이 깨진 거죠. 그때부터 간판 대신 사진을 대량으로 붙이고 실사 출력이 나오고 그랬지요.”

멀티플렉스가 보편화되면서 수제 영화 간판은 손쉽고 저렴한 컴퓨터 실사 출력에 밀려났다. 한 번의 출력으로 원하는 사이즈와 원하는 매수를 선택하게 되면서 극장마다 자기 색깔을 내던 수제 간판은 추억 속 풍경 내지는 유물이 되었다. 내가 열 살 무렵 영화 간판을 올려다보며 영화의 내용을 상상하고,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상하던 그 설렘 역시 기억의 풍경 속으로 사라졌다. 손으로 그린 수제 간판은 맑은 공기처럼 몸 깊숙이 순환하면서 어린 시절 나를 정화시키던 문화적 혜택이었기에 사라져 간 간판에 대한 아쉬움은 크다. 현장에서 직접 간판을 20년 넘게 그렸던 전직 미술부장 권오경 선생은 오죽할까.

“저 같은 경우는 영화 간판이 제 오랜 직업이었는데 없어져서 한동안 대단히 서운했지요.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별로 그런 건 없어요. 요즘 세상은 늘 생기고 늘 없어지니 더욱 그렇고요. 다시 태어나면 영화 간판 대신 다른 직업을 해 보고 싶습니다. 순수 미술을 하고 싶어요. 돈 때문에 그리는 그림 말고 자기 혼이 담긴 예술을 하고 싶어요.”

송두리째 사라진 직업에 대한 아쉬움, 돈이 없어 미대에 가지 못한 아쉬움이 겹쳐 울적한 심사가 읽힌다. 그러면서 권 선생은 영화판을 떠나 홀가분하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레코드판이 새로 등장하듯 영화 간판도 새로 등장하지는 않을까. 오랜 세월 몸담은 사람으로서 기대감을 내비칠 만도 한데 권 선생은 딱 잘라 말한다. 노인들 상대로 문을 연 서울 소재 실버 극장에서 수제 간판을 내건다는 소문은 들었다면서도 미래 진단은 부정적이다. 우선은 세상을 뜬 간판쟁이가 많다. 스트레스로 인한 과음과 지나친 흡연으로 일찍 세상을 버린 이가 많은 것이다. 권 선생 말을 더 들어 보자.

[부산 영화 간판 100년, 한줄기 희망은 권오경 선생]

“영화 간판은 순수 미술과 달리 장인처럼 갈고닦는 기술이지요. 페인트 성질도 알아야 하고요. 맑은 날은 페인트가 빨리 마르고 비가 오는 날은 시너를 많이 타야 해요. 바람 부는 날은 그림이 잘 안 되고요. 그런 걸 다 터득해야 하는데 그건 그림 잘 그린다고 알아지는 게 아니지요. 어쩌다 순수 미술 하는 분이 미술실에 들렀다 호기심에 자기가 한번 그려 보겠다며 붓을 들곤 했는데, 열이면 열 실패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인물 잘 그린다고 손꼽히는 작가도 완성을 못합니다. 유화 물감 하고 페인트가 달라서 그렇기도 하고, 특히 인물은 닮게 그리는 게 생명인데 그분들은 닮게 그리는 연습이 안 됐잖아요. 서양화는 일부러 똑같이 안 그리거나 추상적으로 그리니까요.”

권 선생은 지금 인테리어 일을 하는 틈틈이 순수 미술을 하고 있다. 공모전에 자주 출품했으며 앞서 이야기한 대로 부산 미술 대전에서 입선도 했다. 권 선생이 카톡에 올린 사진 열한 점은 모두 미술 작품이다. 자화상 하나를 빼면 모두 바다 또는 소나무를 소재로 했다. 작품이 풍기는 기품이 예사롭지 않다. 선 하나, 면 하나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극장에서 간판이 사라지면서 간판쟁이 직업마저 사라진 게 권 선생 입장에선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내가 영화 간판 그리는 일을 싫어했다. 기장 일광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만나 8년 연애하고 결혼한 아내는 영화 간판 그리는 일을 처음부터 탐탁찮게 생각했다. 간판을 그만두고 공무원 같은 걸 하길 바랐다. 남편이 일하는 극장에 영화는 보러 와도 간판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그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꺼내지만 당시는 섭섭했을 법도 하다.

“그런 건 없어요. 집사람은 원체 그림에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역시 달관한 어조다. 20년 세월 한 우물을 판 달인의 어조다. 부산 영화 출범은 1903년. 앞서 살펴보았던 대로 영화 간판의 역사 역시 그때부터 시작한 걸로 봐도 무방하다면, 그리고 권오경 선생이 마지막 간판을 그리고 부산 극장을 그만뒀던 2003년을 부산 영화 간판의 마지막 해로 보는 것을 수긍한다면 부산 영화 간판의 역사는 꼭 100년이 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이즈음, 100년 동안 부산 극장가를 풍미했던 영화 간판은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영화 간판 제작 과정을 담아 둔 동영상은 물론이고 소품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페인트 범벅, 구겨진 옷차림으로 붓이 닳도록 그렸던 간판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렸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많은 사람들이 타계했고 많은 이들이 나이 들어 건강을 잃어 가고 있다. 소식이 두절된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직은 희망이 있다. 우리가 붙들 희망 하나가 바로 미술부장 권오경 선생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