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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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鳴旨-全國-有名勢 |
영어의미역 | Myeongji salt is most sought after across the nation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병욱 |
[나라 안에서 소금 이득은 명지도가 제일이라]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은 낙동강 하구 삼각주의 최남단에 있다. 원래 경상남도 김해군이었는데, 1978년 부산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옛날에는 섬이라 ‘명지도(鳴旨島)’, 혹은 ‘명호도(鳴湖島)’라 하였다. 이는 큰 가뭄이나 큰비, 혹은 큰바람 등 천재지변이 있을 때 지천에 널린 갈대밭에서 북소리나 종소리가 울려 미리 알렸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섬에는 갈대 외에도 또 하나 전국적 유명세를 얻었던 특산물이 있었으니, 바로 ‘명지 소금’이다.
“남쪽에 큰 산록이 있어 채소와 땔감을 이루 다 취할 수 없고, 동쪽에 넓은 호수가 있어 물고기와 새우, 게와 조개 등을 이루 다 먹을 수 없다. 갈대가 있는 이점으로 광주리와 삿갓을 만들고, 배의 노를 저어서 소금을 실어 나르는데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맞물린다. 무릇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영남의 속담에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 좌도는 울산이요, 우도는 김해이다’라는 것이 있다.”
이는 19세기 초 천주교 탄압 시 김해로 유배를 왔던 이학규가 묘사한 당시 김해의 풍경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김해의 동쪽 낙동강 하구 지역으로, 어물(魚物)은 다 먹지 못할 만큼 풍부하고, 갈대로 광주리와 삿갓을 만들며, 소금 배의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맞물릴 지경으로 포구가 성황이라 한다. 낙동강 하구에서 생산되는 어물과 갈대, 그리고 소금은 이렇게 김해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소금이라 하겠다. 이 소금으로 인하여 경상 좌도의 울산과 함께 경상 우도의 김해는 영남 지역에서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풍요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낙동강 하구에서 최대의 소금 생산지는 다름 아닌 명지도였다.
낙동강 하구에는 명지도 이외에도 소금 생산지가 있었다. 당시 김해군 녹산면의송정리와 사암리에도 큰 염전이 있었으며, 신호도라는 작은 섬은 아예 전체가 염전이라 주민들도 모두 소금 생산으로 먹고 살았다. 흔히 낙동강 하구의 염전을 ‘명지·녹산 염전’이라 부른 것은 이처럼 명지도와 녹산면에 집중적으로 염전이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8년 이전 신호도는 김해군 명지면에 속하였기에, ‘명지·녹산 염전’은 편리하게 ‘명지 염전’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명지 염전이 위치한 삼각주는 낙동강이 운반한 토사들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토질은 주로 자갈·모래·진흙·점토 등이다. 이 때문에 염전과 부속 시설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래와 진흙을 삼각주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또 소금 생산을 위해서는 기온이 높고 건조하며 적당한 바람이 있어야 하는데, 낙동강 하구는 따뜻한 남해안 해풍의 영향으로 기온의 계절차가 적어 겨울철에도 염전에서 일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최고의 갈대 생산지로서 소금을 굽는 데 필요한 연료 역시 풍부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명지 소금의 성공 요인은 낙동강 수운을 이용한 편리한 운송에 있었다. 교통이 불편하였던 과거에는 소금의 생산뿐만 아니라 유통이 중요하였는데, 낙동강 하구의 명지 염전은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에 명지도에서 생산되는 소금 이득이 나라에서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황수(潢水)[낙동강]가 소백산에서 나와서 … 김해 동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사이의 물길이 400여 리다. 상주의 여러 고을들은 동으로 영해·평해의 바다까지 300~400리인데, 산길이 매우 험하여 비록 수레로 나르고 져서 나르더라도 동해의 소금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에 황수 좌우 연안의 고을들에서는 다 남방 소금을 먹게 되며, 남방 배가 북으로는 상주에 이르고 서로는 단성에 이르러서 소금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산같이 쌓이니 나라 안에 소금 이득이 영남만한 데가 없다. 명지도 한 곳만 해도 일 년에 구워 내는 소금이 수천만 석이므로 낙동포에 따로 염창 감사(鹽倉監司)를 두어 해마다 천만 석을 추스르고 해평·고현에서는 해마다 소금 만석을 소비하니 소금 이득이 나라 안에서 제일이란 것을 이로써 알 수 있다.”
낙동강 하구에서 올라간 소금 배는 북쪽으로는 상주, 서쪽으로는 단성에까지 이른다. 영남의 동북쪽 고을들은 동해에서 소금을 운송하기 어렵기 때문에 모두 낙동강에서 올라온 소금을 살 수밖에 없었다. 소금 값은 낙동강 상류로 올라갈수록 높아져 최고 5배 이상의 이익을 보았다. 이런 탓에 소금 생산량은 호남에 뒤지지만 소금으로 인한 이득은 명지 염전이 나라 안에서 제일이라는 것이다.
[소금꽃, 수탈의 역사 위에 피다]
명지도에서 언제부터 소금이 생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단,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김해 도호부에 염소가 두 곳이 있으며, 모두 부 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늦어도 여말 선초에는 명지도를 포함한 낙동강 하구 일대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염전이 크게 발전한 것은 조선 후기로, 영조 때 조선 정부가 흉년 구제를 위해 자염(煮鹽)을 제조한 것이 계기였다. 1731년(영조 7) 경기와 삼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박문수는 구휼미를 마련하기 위한 차원에서 국가가 나서서 소금을 생산하는 공염(公鹽) 제도를 명지도에서 시행할 것을 적극 건의하였고, 왕명으로 이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 결과 6개월 만에 공염 1만 8,000석을 얻었고, 이를 팔아 경기도 궁민(窮民)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였다 한다.
한시적 구급책이었던 명지도의 공염 제도는 1744년(영조 20) 산산창(蒜山倉)을 설치함으로써 항구적 사업이 되었다. 조선 정부는 우선 염민(鹽民)에게 쌀 1석을 대여해 주고 나중에 소금 2석을 받았으며, 이렇게 확보한 소금을 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다. 즉, 정부의 재정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명지도의 공염제를 주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소금 값과 쌀값이 비등하던 당시에 지급한 쌀보다 두 배나 많은 소금을 받았다는 것은 가난한 염민을 상대로 국가가 공공연한 고리 행위에 나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산산창의 운영을 둘러싸고도 끊임없이 부정이 저질러져 조선 정부는 이를 김해부에 일임하였다가 다시 경상도 감영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으나, 염민들에 대한 폐단은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방 관청이 영리 사업에 나서는 계기가 되어 진휼곡을 모은다는 원래의 목적은 거의 쇠퇴하고, 주로 관청의 경비와 관리들의 생활 수단을 위한 재원으로 변질되었다. 감영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공염을 운영하면서 일정 액수만을 감영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사염상(私鹽商)에게 넘기니 사염과 공염이 판매 경쟁을 하거나 염가 조작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사염 판매를 금하다 보니 백성들이 소금을 구하지 못하여 원성이 높아지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급기야 정조 대에는 명지도의 공염제를 혁파하라는 주장이 나오기에 이르렀는데, 이를 대체할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어 시행하지 못하였다가 1819년(순조 19) 상인들과 염민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철폐의 수순을 밟았다. 이로써 근 90년 이어져 온 명지도의 공염장은 사라졌다.
골칫거리이던 공염장이 폐지된 후에도 명지도 염민들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현재 명지동 영강 마을의 파출소 앞에 세워진 2개의 송덕비가 이를 생생히 보여 준다. 좌측의 1824년(순조 24)에 세워진 비석은 경상 감사 김상휴의 은덕을 기리는 송덕비이고, 우측은 1841년(헌종 7) 홍재철이 염민에게 베푼 은혜를 칭송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김상휴는 1822년 경상 감사로 왔으니, 이미 명지도 공염장이 혁파된 이후이다. 그런데도 계속되는 관의 횡포로부터 염민들을 보호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송덕비를 세웠으니, 명지도 염민을 착취하던 관습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감색들과 군인들이 염민들을 침범하지 말라는 내용도 있어, 염민들은 산산창의 관리들뿐만 아니라 수군청의 병사들에게도 소금을 빼앗겼음을 알 수 있다. 경상 감사 홍재철은 1840년 부임하여 염민들을 위해 땔감 값을 넉넉히 책정하여 내려주어 걱정 없이 제염하게 되었다고 한다. 태양 아래 염부의 땀과 눈물이 바싹 마를 때 즈음 그 정성에 감복한 하늘의 허락으로 비로소 피어난다 하였던 하얀 소금꽃. 명지도 소금꽃은 곧 수탈의 역사 위에 피어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명지도의 제염업은 여전히 번성하였다. 1907년 발표된 일본인들의 제염업 조사 결과를 보면, 명지도의 염전 수는 총 37개이며, 면적은 82만 1752.07㎡[82.86정]이고, 연간 생산량도 3만 7,287석에 이르렀다.
지금도 명지동의 지명 속에서는 염전의 명칭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평성 마을에는 문 초시 염전이라는 지명이 전해지는데, 이는 문 초시 과거에 합격한 자가 소유한 염전을 뜻하는 것이다. 하신 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홍 처사 염전과 박 진사 염전도 마찬가지로 소유자인 양반들의 성과 칭호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 지역에서 염전과 관계된 가장 많은 지명은 ‘가매[가마]’이다. 웃가매, 아랫가매, 땅가매, 건너가매, 동쪽가매, 서쪽가매, 북쪽가매 등 가매라는 지명은 수도 없이 많다. 이 지명은 소금을 굽는 가마가 있었던 위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염장에서 차지하는 가마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명지도의 소금은 가마에서 구워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 줌의 소금이 만들어지기까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금은 ‘자염(煮鹽)’이라 하는데, 해수(海水)를 끓여서 만들며, ‘전오염(煎熬鹽)’이라고도 하였다. 명지도에서도 이러한 전오제염법(煎熬製鹽法)을 따랐으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식의 영향도 받았다. 가마를 지필 때 사용하는 연료도 초창기에는 이 지역에서 흔한 갈대나 땔나무를 썼으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여 1930년대부터는 중국에서 들여온 유연탄과 갈탄을 쓰다가 광복 전후에는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무연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무연탄 등 대체 연료는 화력이 너무 좋아 소금 맛에 미묘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풍토에 맞추어 살아온 옛 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여기서도 본다.
그러나 연료보다 소금 맛에 더 영향을 준 것은 소금 생산 방식의 변화였다. 1907년 이래 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햇볕과 바람을 이용하여 채염하는 천일제염법(天日製鹽法)이 일본으로부터 전래되면서, 점차 우리의 전통 소금인 자염은 천일염에 우위를 내주고 말았다. 일제는 서울이라는 거대 시장을 낀 인천 일대에 대대적으로 천일염전을 개발하면서 국내 소금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였다. 그 결과 지금은 자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마치 천일염이 고유한 우리식 소금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자염은 천일염에 비해 짠맛이 덜한 대신 구수한 맛이 나고, 입자가 고우며, 칼슘을 비롯한 무기질이 풍부하여 품질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일손과 연료비가 많이 들어 생산 원가가 높았고, 이 때문에 천일염에게 가격에서, 또 공급 물량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명지도에서는 우리식 전오제염법만을 고집하였다. 구체적 제염 과정은 아래와 같았다.
명지도를 비롯한 낙동강 하구의 염전은 서해안과 달리 제방이 있는 유제 염전(有堤鹽田)이었다. 제방의 높이는 3m 정도였으니, 그리 높지는 않았다. 염전 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고, 그 둘레에는 바닷물이 유입될 수 있는 섯도랑이 있었다. 만조 시에 수문을 열면 이 섯도랑을 타고 바닷물이 들어왔다. 이때 염전 바닥의 모래가 해수를 잔뜩 머금게 되는 것이다.
염전의 중간 중간에는 바닷물을 정화시켜 짠물로 만드는 필터인 ‘섯’이 있다. 전라도의 섯에는 솔잎·솔가지 등이 필터의 재료로 사용되는 반면에, 이곳의 섯에는 왕모래·자갈이 들어가고 위에는 대나무로 짠 자리를 깔아 두었다. 이 지역 염전의 큰 특징은 섯 사이로 대나무 수관이 깔려 있어 섯에서 생산된 짠물이 자연스럽게 저장고까지 흘러 들어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조는 노동력의 절감에 큰 효과가 있었다. 제염업에서 제일 힘든 일이 섯등에서 만든 짠물을 가마까지 운반하는 노동이었다. 물지게를 진 채로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을 지나 멀리 염막까지 운송하는 일은 진땀 나는 일이다. 이런 수고를 없애는 수관의 설치는 낙동강 하구의 염전만이 가지는 장점이었다.
짠물을 만드는 과정[채함 작업]은 ‘판 띄우기 → 염전에 물 대기와 모래 말리기 → 밭 담기와 해수 붓기 → 묵 내기’로 전개된다. 판 띄우기는 작업의 첫째 과정으로 염전에 물을 대기 전에 하는 작업이다. 이때 소에 써레를 매달아 염전의 바닥을 긁고 다니고, ‘늘’이라는 나무판으로 흙을 부순다. 판을 띄우고 나면 백모래가 물을 잔뜩 빨아들일 때까지 바닷물을 대고, 그 뒤에는 햇볕에 말리는 작업을 한다.
다음은 염분이 달라붙은 모래를 모아서 섯 위에 올리는 일을 하는데 이를 ‘밭 담는다’고 한다. 밭 담기 작업은 한꺼번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므로 초등학생들까지도 이 작업에 동원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염전의 모래를 모아서 섯 근처까지 날랐다. 섯 위에 이 짠 모래를 올려 두고 바닷물을 부으면 아래에는 짠물이 나와서 수관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짠물을 만들고 나서 다시 섯 위의 모래는 염전 바닥에 뿌려서 재활용한다. 이처럼 모래를 운반하여 다시 뿌려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묵 내기’라 한다.
짠물을 만든 다음에는 끓이는 과정[전오 작업]을 거친다. 섯에서 빠져나와 짠물 구덕에 모여진 함수(鹹水)[간수]의 염도는 18~19도이다. 가마에서 짠물 끓이는 작업은 제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에 따라 소금의 품질과 양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2인 1조가 되어 12시간씩 일하며 하루 종일 가마의 끓이기 작업은 계속된다. 특이한 점은 앞가마 뒤에다 뒷가마를 붙여서 만들어 두었다는 사실이다. 연료를 아끼고 열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미리 뒷가마에 짠물을 담아 둬 앞가마로 오기 전에 온도를 높여 두는 지혜가 발휘되었다. 보통 4~5시간 짠물을 끓이면 소금이 만들어졌고, 하루에 생산되는 소금의 양은 7~8가마니였다고 한다.
[고딧줄 소리로 가던 소금 배]
이렇게 생산된 명지 소금은 앞서 말하였듯이 낙동강 수운을 통해 돛단배에 실려 멀리 경상북도 안동까지 올라갔고, 서쪽으로는 지리산 인근의 단성까지 전해졌다. 낙동강 수운을 이용하는 방식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로 인하여 급속히 성장하였으나, 한말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 신작로가 정비되면서 그 기능이 쇠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남의 중요한 교통로로서의 역할은 유지되어,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소금 배는 일종의 화물선인 ‘광선배(廣船)’여서 소금 100가마를 족히 실었다. 이들이 낙동강을 거슬러 내륙 지방을 오가는 데는 2개월 내지 6개월이 걸렸다. 낙동강이 결빙되는 1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는 선운이 중단되었고, 선운 도중 결빙기에 걸리면 가까운 포구에 정박하여 야적한 상태로 해빙을 기다려야 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실었기에 운행 도중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비상수단이 동원되어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람을 이용하여 운행하므로, 바람이 잦아들기라도 하면 삿대질을 하여 오르다가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고딧줄[삼줄을 엮어 만든 굵은 줄]을 매어 강가에서 배를 끌어당겨 가면서 오가야 하였다. 고딧줄을 당기는 고딧줄꾼은 배의 크기에 따라 적게는 2~3명, 많게는 6~7명이 필요하였다. 고딧줄을 지네발처럼 따로따로 걸어서 어깨에 얽어매고 배를 끌어당기며 부르는 노동요 ‘고딧줄꾼 소리’ 한 자락에 소금 배는 그렇게 구름에 달 가듯 낙동강 15만 7,090m[400리] 길을 거슬러 올랐다.
낙동강 하구에서 소금배가 출발하는 주요한 포구는 하단이었다. 그리고 소금이 유통되는 주요 집산지로는 대구를 중심으로 이남에는 사문·현풍·초계·창녕·양산·밀양·김해·의령·진주 등이 있고, 이북에는 성주·인동·선산·상주 등이 있었다. 이들 중간 기항지의 나루터에는 소금 객주들이 자리 잡고 소금 중개 교역을 하였으며, 함께 싣고 간 어물·젓갈·해초류 등이 그 지역의 곡물·과일·채소 등과 교환되었다. 즉, 소금과 해물을 싣고 간 소금 배가 내려오면서는 내륙의 토산품을 싣고 오는 방식이었다. 고령의 개포, 성주의 무릉리, 대구의 사문진, 인동의 왜관, 선산의 매정 및 상주의 낙동 나루터 등에서 특히 소금 거래가 왕성하였다. 이렇게 낙동강 선운을 통해 낙동강 인근 지역에서 주로 명지 소금이 소비되었지만, 경부선 개통 후에는 구포와 삼랑진에서 철도편에 실려 청도·유천·김천 방면으로도 운송·판매되었다.
[소금밭이 파밭으로]
한말까지 성행하였던 명지도의 염전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약 60%는 사라졌다. 이는 1930년대 시행된 낙동강 제방 공사 때문으로, 일제는 김해의 농토를 확장시키고자 서낙동강의 상·하단에 각각 대동 수문과 녹산 수문을 설치하였으나, 조류의 변경으로 명지 염전에는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게다가 수입염과 재제염이 밀려오고 서해안에서 생산된 천일염도 영남 지역까지 들어오면서 이곳의 소금 생산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염민들은 소금 생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광복과 6·25 전쟁 후 소금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일시적으로 부흥을 맞는 듯하였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였던가, 1959년 9월 태풍 사라는 염전을 모두 쓸어 갔다. 또 당시는 천일염이 과잉 생산되어 정부가 염전을 없애는 정책 기조를 강하게 밀고 가는 상황이었다. 이로써 수백 년을 이어 온 명지도 제염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염전은 하나 둘 경지로 개간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대규모 간척 사업이 벌어져 녹산과 신호도 사이의 바다를 매립하고 농토로 바꾸는 등 염전으로 가득하였던 섬은 육지가 되어 갔다. 1990년대는 송정리 앞바다에 간척 사업을 벌여 녹산 국가 산업 단지와 신호 일반 산업 단지 등 공단이 들어섰다.
현재 명지동의 옛 염전은 대부분 파밭으로 바뀌었고, 명지 파는 이곳의 특산물이 되었다. 소금기 머금은 모래밭 파가 맛이 뛰어나고 성장률도 높다. 한때 전국 파 생산의 70%를 웃돌았을 정도이니, 소금 대신 파가 명지의 명산물이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각종 개발 사업이 드넓은 파밭에도 불어닥치고 있으니, 그나마 염전을 추억하던 백모래는 또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 덧칠에 또 덧칠하는 시간의 캔버스라지만, 그 시절 염민들의 하얀 소금꽃을 우리는 이렇듯 쉽게 잊어도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