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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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鳴旨- |
영어의미역 | Myeongji Salt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특산물/특산물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류승훈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일대에서 1950년대까지 자염 방식으로 생산된 소금.
[개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명지도의 소금 이득이 나라 안에서 제일”이라고 할 정도로 명지 소금은 영남 일대에서 최고로 유명한 소금이었다. 명지도는 낙동강 하구에 있는 섬으로 염전을 조성할 수 있는 최적의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다. 해안가를 따라서 모래밭이 펼쳐져 있으며, 땔감을 사용할 수 있는 갈대들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또한, 경상도 전역에 걸쳐 있는 낙동강 줄기를 따라서 소금을 싣고 유통함으로써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연원 및 변천]
명지도에서 언제부터 소금이 생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소금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1731년(영조 7) 삼남 지방에 흉년이 들자 진곡 확보를 위한 명목으로 명지도에 공염장이 설치되었으며, 명지도 염민들의 반발로 폐기될 때까지 90여 년간 운영되었다. 공염장 폐지 이후에도 명지 소금은 영남의 대표적 소금으로 1950년대까지 이어져 왔으나, 정부의 천일염 장려 정책과 태풍 사라(Sarah)[1959년 9월]의 피해로 점차 소멸하였다.
[제조(생산) 방법 및 특징]
조선 후기 이후로 명지도의 염전은 제방이 있는 유제 염전이었으며, 줄곧 자염(煮鹽)을 생산해 왔다. 자염은 바닷물의 염도를 높여서 제조한 짠물을 화력에 의하여 끓여서 생산하는 방식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식 전오염(煎熬鹽) 생산 방식을 수용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명지 소금의 채함(採鹹) 과정[짠물을 생산하는 과정]은 판 띄우기[농기구로 염전 바닥을 갈아엎는 작업], 염전에 물 대기와 모래 말리기, 밭 담기[햇볕에 말린 모래를 섯등에 올리는 작업]와 해수 붓기, 묵 내기[섯등의 모래를 다시 염전 바닥에 뿌리는 작업]의 순으로 전개되었다. 다음으로 가마에서 짠물을 끓이는 전오(煎熬) 과정은 짠물 모으기, 짠물 끓이기, 소금 저장하기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현황(관련 사업 포함)]
대한 제국 당시 간행된 『염업 조사』에서는 명지면의 염전 수가 총 37개이며, 염전 면적은 82.6정(町), 생산량은 3만 7287석(石)으로 기록하고 있다. 명지도의 염전은 해안가를 따라서 해척 마을, 평성 마을, 중신 마을, 하신 마을, 진목 마을, 중리 마을, 조동 마을, 동리 마을, 조서 마을, 진동 마을 등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1950년대 이후 점차 사라진 염전 자리는 현재 대부분 파밭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