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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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鳴旨鹽田 |
영어의미역 | Myeongji Salt Pon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
시대 | 조선/조선,현대/현대 |
집필자 | 류승훈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명지도(鳴旨島)에 있던 염전.
[개설]
옛날에는 소금이 화력(火力)으로 끓여서 생산하는 자염(煮鹽)이었으므로 무엇보다 많은 땔감이 필요하였다. 명지도에는 땔감으로 사용되는 갈대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명지 염전에서는 생산한 소금을 배에 실어 낙동강을 따라 영남 지방의 곳곳에 운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점 때문에 소금 상인들은 명지 염전의 소금을 낙동강 상류로 운반하여 상당한 이득을 남길 수 있었다. 정약용(丁若鏞)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명지도의 소금 이득이 나라 안에서 제일”이라고 하였다. 명지도에는 제염업이 크게 발전하여 해안가에 수많은 염전이 분포되어 있었다. 지금도 명지도에서는 문초시 염전, 홍처사 염전, 박진사 염전 등 염전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구한 말 명지도의 동쪽과 서쪽, 남쪽 해안가에 골고루 염전이 분포되어 있었다. 구한말에 발간된 『염업 조사(鹽業調査)』에는 “명지면의 염전 수는 총 37개이며, 염전 면적은 82.86정(町), 생산량은 37,287석(石)”으로 기록하였다. 명지면에서 염전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자연 마을은 동리[9개]이고, 두 번째가 평성[7개], 그 다음이 진목[6개]이다. 염전 면적으로 볼 때는 18.34정을 보유하고 있는 평성이 제일 크고, 다음이 15.73정의 동리이다. 염전의 평균 면적은 2.24정이며, 1정당 생산량은 약 450석이다.
[변천]
낙동강 하구의 명지도에서 언제부터 소금이 생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소금이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1731년(영조 7) 삼남 지방에 흉년이 들자 진곡을 확보하기 위한 명목으로 명지도에서 제염 사업을 벌이자는 논의가 박문수(朴文秀)에 의해 시작되었다. 영조(英祖)는 공염(公鹽) 제조가 영구적이 아니라 흉년에 대비한 일시적 시책이라는 점 때문에 찬성하였다. 1733년(영조9) 12월 박문수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명지도 공염장에서 소금 2만 석을 제조하였다.
진곡의 충당 방식은 염민(鹽民)들에게 쌀 1석을 나누어 주고 소금 2석을 받아 다시 쌀 2석으로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 정부가 상당히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재정 확보를 할 수 있게 되자, 처음 취지와 달리 공염 제도를 계속 시행하였다. 1745년(영조 21) 명지도의 공염을 관장하는 산산창(蒜山倉)이 설치되었고, 김해부에서 공염장의 운영을 맡게 되면서 점차 본래의 목적이 퇴색되고 관의 운영 재원으로 변질되었다. 명지도 염민들의 반발이 계속되는 등 말썽이 끊이지 않자, 전 경상 감사였던 김로경(金魯敬)의 제안으로 1819년(순조 19) 명지도의 공염장이 폐지되었다.
공염장이 폐지된 이후에도 명지 염전은 영남의 대표적 소금 산지로서 역할을 계속 하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명지 염전의 상당수가 사라졌다. 명지 염전은 해안가를 따라서 분포되어 있었는데, 1933년 시작된 제방 공사로 인하여 많은 염전이 없어졌다. 명지 염전은 1950년대까지 자염(煮鹽)을 생산하다가 태풍 사라호의 피해를 입어 1960년대에는 생산이 중단되었다.
[위치]
명지 염전은 명지도의 해안가를 따라서 해척 마을, 평성 마을, 중신 마을, 하신 마을, 진목 마을, 중리 마을, 조동 마을, 동리 마을, 조서 마을, 진동 마을 등에 분포되어 있었다.
[의의와 평가]
명지 염전은 영남의 대표적 염전으로 경상도 주민들은 대부분 명지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을 이용하였다. 조선 정부가 진곡(賑穀)을 확보할 명목으로 명지도에 공염장을 설치한 것은 낙동강으로 소금을 운반하고 판매하여 많은 이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