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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대천 마을 공동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44
한자 -大川-共同體-
영어의미역 The people of the Daecheon Village Community who are dreaming of Utopia.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철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9년 1월 - 북구 덕천동에 공동육아협동조합 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9년 10월 3일 - 쿵쿵어린이집 개원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4월 -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에서 화명동으로 공동육아협동조합 이전
소재지 대천 마을 공동체 -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대천 마을에서 화명 2동으로]

대천 마을은 양달, 음달, 용동이라는 3개 집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03년 7월 1일부터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 2동으로 되면서 사라진 옛 명칭이다. ‘애기소의 전설’을 지닌 대천(大川)이라는 커다란 내가 마을 한복판을 흐르고, 뒤쪽으로는 금정산 줄기의 화산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 가에는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다. 마을과 낙동강 사이에는 구포에서 양산에 이르는 국도가 지나고 있다.

이곳에는 병자호란 직후 파평 윤씨가 자리 잡은 뒤 창원 정씨, 안동 권씨 등 몇 개의 씨족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마을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들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으로는 주민 자치 회의체인 대동계가 있다. 정월 대보름날 정기 총회가 열리며, 마을의 살림을 결산하고 마을 중요 사업을 결정하였다. 오늘날에는 형식적인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마을 한복판에 고당 할미를 모신 당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정월 대보름날 제사를 올리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임천재라는 서재 겸 서당이 있었는데, 마을 공유 재산으로 마을의 교육 기관이었다. 마을의 오래된 전통은 오늘날 거의 제 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는 1908년 설립된 사립화명학교 출신인 양봉근, 윤경 등이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 지역의 대표 인물인 객주 장우석은 마을 앞 낙동강변을 개간하여 농토[백포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구포은행, 구포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마을 청년들은 대천청년회를 조직하고, 마을 회관을 세우고 야학을 만들었다. 농민 문고를 창설하고 두레를 재건하여 운영하면서 마을 공동체를 이끌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마을 공동체 운동이 1930년대 일본이 벌인 농촌 진흥 운동에 흡수되기는 하였으나, 마을 공동체 운동은 계속되었다. 광복 후인 1961년에는 대천 지역 개발 위원회[개발계]가 조직되어 마을 발전 기금을 적립하고 마을 기업을 만들었는데, 기와, 벽돌 공장 설립이 대표적이다. 또 수리계를 모아 마을 양수장을 만들고 용수로를 놓아 가뭄에도 풍년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개발 위원회는 비료 창고, 분뇨 탱크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 목욕탕과 이발소까지 지어 운영하였다.

전통적인 공동체의 맥을 이어오던 대천 마을은 1970년대부터 변화를 겪게 되었다. 화명 정수장, 북부산 전력소 등 공공시설이 마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1985년 낙동강 가 백포원이 화명 쓰레기 매립장으로 사용되었다. 마을 남서쪽에 연립 주택 단지가 들어서고 가락등을 허물고 우신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서면서 점차 전통적인 마을의 흔적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마을 공동체는 명맥만 유지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던 마을 회관은 경로당으로 쓰였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동제는 나이든 어른들만 모이는 형식적인 의례로 변하였다.

대천 마을에는 1990년대 후반부터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었다. 화명 3지구 택지 개발과 지하철 2호선 개통으로 도시그린, 코오롱, 벽산, 경남 등 고층 아파트가 대천 마을을 에워싸고 들어섰다. 그런 만큼 외부에서 새로이 이주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2013년 8월말 현재 화명 2동에는 2만 36명이 살고 있다. 대천 마을은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사람과 새로운 택지 개발과 함께 이주해 온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현장이 되었다.

[대천 마을에 삶터를 마련한 사람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이귀원씨가 대천 마을에 공동육아협동조합을 이전한 것은 2003년 4월이었다. 대학에서 시간 강사를 하던 이귀원씨가 대천 마을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아기를 잘 키워보려는 소망에서 시작되었다. 이귀원씨를 비롯해 공동 육아에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조합을 만든 것은 1999년 1월이었고, 아이들의 보금자리는 북구 덕천동 낙동고등학교 근처였다. 그 해 10월 3일 11명의 아이와 두 명의 교사로 ‘쿵쿵어린이집’을 시작했다. 그는 조합에서 조합장을 맡고 있었다. 11명으로 출발한 아이들이 25명으로 늘어나자 66.1㎡[20평] 남짓한 터전이 비좁게 여겨졌다. 그리고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방과 후 수업도 진행해야 했다.

“공간이 협소했고, 좀 낡은 집이라 지저분했어. 바퀴벌레는 예사고, 지네가 출몰하기도 했어. 여름에는 아주 습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아이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집이었지. 물론 무엇보다도 협소하고 그래서, 조합원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를 원했지. 두 번 터전을 이전하는 위원회를 만들었어. 첫 번째는 사상구·북구 전역을 뺑뺑이를 돌아봤는데 실패했고, 두 번째 터전이전위원회를 만들었을 때는 상당히 절박했어. 더 이상 여기서는 희망이 없다 해가지고, 그래서 어쨌든 쫓아다녔지.”

협소한 공간, 불결한 환경, 아이들의 증가, 취학 아동의 증가에 따른 방과 후 학교 운영 등으로 새로운 터전을 찾는 것이 시급하였다. 여기저기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화명동에 살고 있던 중학교 후배에게 대천 마을에 조합이 이사할 만한 집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후배에게 부담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그 후배의 오래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옛날 집이라 평수는 넓었으나 오래되고 낡아 새로 집을 짓기로 결심하였다.

조합원들이 집을 짓기 위해 2억 원의 출자금을 모았다. 후배는 이 돈으로 3층 건물을 짓고, 조합이 1, 2층을 사용했다. 1층에는 어린이집을 만들고 2층에는 방과 후 학교를 만들어서 이전하게 되었다. 어린이집을 이전하기 위해서는 일대 모험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2억 원이라는 출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조합원은 출자금을 두 배로 늘리고, 그만큼의 빚도 안고 무리한 도전을 하였다. 조합장인 이귀원씨가 그동안 조합을 이끌면서 다져온 신뢰와 조합원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어린이집이 이전함과 동시에 각지에 흩어져 살던 조합원들은 한두 가구를 제외하고 모두 마을로 집결하였다.

“한 가구를 제외하고 전원, 20여 가구가 화명동으로 이사를 왔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갖게 되었지. 그래 가지고 이사를 한번 하니까 어쨌든 간에 힘을 모아서 큰일을 해낸 거 아닌가, 그러고 나니까 사람들의 기운이 굉장히 높아졌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지역 사회 활동들을 하게 되었지.”

조합원들 대부분이 대천 마을에서 새 터전을 만드는 데 적극 참여하였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목표가 실현된 것이다. 마을로 이사한 조합원들은 마을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의욕을 불태웠다. 어린이날 마을 한마당을 열고, 이것을 확대해 마을 단오 잔치로 전환하여 마을 행사로 만들었다. 여름 방학 때에는 여름 학교를 열어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대천천에서 페트병으로 뗏목을 만들어 타기도 하였다. 어린이집에서는 방과 후 교육 활동을 만들어 마을 아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여름 방학이면 동사무소 공간을 빌려서 여름 학교를 운영하였다. 여름 학교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옛이야기 들려주기, 빛 그림 상영하기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진행했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어 마을 도서관을 만들게 되었다. 어린이집만의 활동이 아닌 진정한 마을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활동들을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인 사람들은 마을 공동체에 대해서 학습 모임도 진행하고, 더 적극적으로 마을 활동을 했다. 일을 벌이다 보니 조합원으로서 해야 할 업무 이외의 일들이 너무 많았다. 축구를 하는 모임에서는 부산 시내 축구 시합에 나가는 등 활동이 많아지면서 힘들어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면서 점차 공동육아협동조합은 고유의 역할만으로 활동을 제한하고, 맨발동무도서관, 마을 학교 등 다양한 형태로 활동이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공동육아협동조합 활동과 마을의 필요]

이귀원씨가 공동육아협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것은 우연이었다. 어느 날 보육 교사 출신의 선생님으로부터 공동 육아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전화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귀원씨는 1995년 35살의 늦은 나이에 멋진 부인을 만나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또래와 비교하면 늦은 나이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그가 살던 곳은 부산광역시 북구 모라동이었다. 주택지이기는 하지만 자동차들과 섞여 있는 곳이었다. 시간 강사라는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조건과 다소 진보적인 사고방식으로 일정 부분 육아를 담당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알다시피, 시간 강사니까 육아에서 나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고, 그러니까 아이들 나들이를 시켜야 되잖아. 유모차에 태워서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없는 거라. 집을 나서 보니까. 모라 살 때였지. 그러니까 아스팔트 도로밖에 형성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러다가 공동 육아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매력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아이들을 매일 나들이를 하게 한다는 것이었지. 그 전에 나도 생활을 해야 하니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는데, 그 어린이집은 나들이 개념이 없으니까, 애들을 하루 종일 가두어 놓잖아. 그 점이 늘 안타깝고 그랬지.”

스스로 육아를 하는 과정에서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뭔지에 대해 고민했다. 자유롭게 나들이를 할 수 있는 어린이집이 필요했고, 또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무렵 부산에서 공동 육아 활동은 한 군데서 하고 있었다. 거의 첫걸음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귀원씨에게 마을은 아이들을 위해서도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아이들에게 살기 좋은 장소로서 마을이 필요하였고, 마을과 공동 육아 활동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였다. 그래서 공동 육아에 대한 제안에 승낙을 하고 준비 모임에 참여하였다. 이때가 1999년 1월경이었다. 공동 육아를 하겠다고 참여한 사람은 10여 명이었다. 교육, 재정, 홍보 등으로 역할을 나누어 준비를 했다. 이귀원씨는 조합장을 맡아 어린이집을 마련하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있었다. 공동 육아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어린이집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반드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한 여름 뜨거운 햇살을 맞아가면서 터전을 구하러 다닌다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준비할 때 나는 뭐 중요한 역할을 했지…… 나는 그렇지, 아무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좀 있었으니까 여유가 있는데, 직장을 다니지 않는 아짐매들하고 같이 터전을 구하러 다니는 일이 나의 역할이었지. 거의 대부분 맞벌이였지. 직장을 다니지 않는 분이 계셨고, 미술 학원을 경영하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아무래도 직장 생활 하는 분보다 조금 시간 여유가 있었지. 그렇게 뛰어다녔지.”

이귀원씨는 남들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다는 조건을 이유로, 조합장을 맡아 터전을 구하는 데 열심이었다. 물론 다른 부모들은 대부분 어머니들이었다. 다른 아주머니랑 같이 터전을 구했다. 겨우 덕천동 낙동고등학교 주변에 터전을 마련하고 쿵쿵어린이집이라는 공동육아협동조합을 시작하게 되었다. 집을 구하는 데 필요한 경비는 가구당 출자금 200만 원씩 해서 2,000만 원으로 충당하였다. 물론 조합을 운영하기 위한 경비, 교사 급여와 각종 운영비는 또 개별적으로 각 가구가 분담해야 했다.

[공동육아협동조합에서 공동체 운영 방식을 배운다]

공동육아협동조합 운영에는 부모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교사들이 교육에만 집중하고 전념할 수 있도록, 부모들은 재정, 회계, 청소 등 교육 외적인 운영과 관련한 것들을 담당해야 했다. 조합은 부모와 부모, 부모와 교사, 부모와 학생들이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운영되었다. 이런 이유로 갈등도 많았다.

“어떤 엄마의 경우에는 아빠가 멀리 떨어져 있어. 공동 육아는 엄마와 아빠가 함께 참여해야 하는데, 다른 아빠는 대단히 적극적인데, 부부가 협력해서 해 나갈 때 부러움을 느낄 수도 있고, 그런데 또 뭔가 서운함을 느끼기도 하는 거지, 이렇게 참여가 잘 안 되고 있다든지 하면, 그런 문제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개별 가구들의 사정은 다 다른데, 그런 것들을 얼마나 배려해 주는지의 문제도 있고, 그런 과정에서 똑같이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고 그러면 어쨌든…….”

공동 육아의 이념은 공동으로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어느 누구도 열외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동일한 조건으로 참여하지 못할 경우 거기에서 오는 소외감이나 서운함이 있게 마련이었다. 위 사례에서도 아빠가 떨어져 살면서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강하지 못해 서로의 관계에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부모와 교사 사이에서도 갈등의 요소는 많았다. 교사들의 교육 행위에 대해서 부모들이 못마땅해 하는 경우에는 교사들이 위축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갈등의 핵심은 아이들을 매개한 부모들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파리 대왕」이라는 소설처럼 아이들 세계도 때로는 약육강식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서로 때리고, 어떤 놈은 애들을 휘어잡고, 늘 터지는 놈은 늘 터지고……. 이러면 그 부모가 마음이 상하는 거지.”

아이들 세계에서 나올 수 있는 권력 관계가 부모들의 배려에 의해 해소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애들이 다 그렇지 뭐’ 하는 식이면 피해 보는 아이의 부모는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협동조합 운영에서 가장 힘든 것은 갈등과 다양한 의견이 대립할 때 통일된 방안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조합장을 맡은 이귀원씨는 조합원 가운데서도 나이가 많은 편이라는 점 때문에 나름의 권위를 인정받고는 있었지만 충돌하는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조합의 규칙은 새로운 조합원이 들어올 때마다 서로 의문이 제기되면 토론을 통해 설득시키든지, 아니면 수정해야 했다. 같은 이야기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한참 전에 마무리된 의견이 다시 안건으로 상정되어 논의해야만 했다. 과거에 정리되었다고 새로운 조합원이 제기하는 안건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예전에 마무리되었다고 강요하지 않고 다시 얘기를 해야만 했다.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 ‘예전에 했어, 다 이렇게 한 거야.’ 이런 식으로 윽박지르지 않고 다시 얘기를 하는 거지. 그런 과정에서 처음에 회의를 할 때 밤을 샌단 말이지. 처음 몇 년 동안은 워낙 많은 일들이 벌어지니까 밤 2, 3시까지 간단 말이지. 그러면 엄마들은 그래도 괜찮은데, 아빠들은 못 견디는 거라. ‘회의를 왜 이렇게 하느냐, 회의 시간을 정해서 하자’ 그렇게 이야기하지. 자기들이 다니는 회사에서의 회의 문화와 다르니까 어쨌든 간에 쉽게 다수결로 결정을 안 하고 겉돌잖아. 뭐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삼천포로 빠졌다가.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 그렇게 하여튼, 회의를 굉장히 많이 하지. 우스갯소리로 아이가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회의’라고 할 만큼, 늘 아빠 회의 간다, 엄마 회의 간다. 회의를 많이 하고 길게 하고. 쉽게 다수결에 호소하지 않고 되도록 설득하는 방식으로 하지. 최종적으로 안 되면 다수결로 한다던가 하지만…….”

조합 운영이 회의로 시작해 회의로 끝난다고 할 정도로 회의가 많았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회의’라고 할 정도였을까. 하지만 조합원들이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다수결이라는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모두가 합의를 볼 수 있을 때까지 긴 시간 토론하는 방식을 도입해, 운영에서 공동체 구성원을 배제시키지 않는다는 중요한 원리를 체득하게 만들었다.

한번은 갈등이 너무 격화되어 엄마들 사이에서 심각한 기류가 흘렀던 적도 있었다. 공동 육아는 각자가 모여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어느 특정인이 주도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까 친소 관계가 형성되고, 어울리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되었다. 그 가운데 약간 강성인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상대적으로 열세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게 되면서 서로 갈등이 생긴 것이다. 괜스레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고, 상처를 받기도 하였다. 하루는 엄마들끼리 해운대에서 방을 하나 잡고 밤새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해운대 가서 밤새 이야기를 한 거지. 그래 가지고 돌아가면서 그동안 자기가 상처 받았던 것, 마음 상했던 것, 그런데 얘기를 해보니까 다 있는 거라. 거기서 대성통곡을 하고 왔다고 그러데.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사이의 관계 문제가 한순간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나, 푸닥거리지. 푸닥거리를 한번 하고 나니까 그나마 풀렸잖아. 맺혔던 게 풀렸으니까…… 그때가 가장 큰 위기였지.”

이처럼 공동체 활동은 육아라는 핵심적인 문제 외에도 서로의 관계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엄마들이 밤새워 대성통곡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재구축하면서 공동체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이러한 초기 갈등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면서 대천 마을로 어린이집을 옮길 수 있는 힘이 만들어졌다.

[마을 주민들과 갈등]

2003년 4월 이귀원씨 후배 집을 새로 짓고 어린이집을 이전한 뒤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마을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이방인들의 등장을 반가워하지만은 않았다. 이귀원씨는 이 마을로 들어온 이후로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마을 역사를 찾아내고, 마을 당산제에도 매년 참석하여 술도 올리면서 같은 마을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이귀원씨 같지는 않았다.

“어린이집 앞 큰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평상을 만들려고, 꼭 우리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마을 주민들이 쉴 수 있는 평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옆집 사람이 반대해서 공사를 하다가 중지를 했지.”

어린이집이 있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이집 옆에 평상을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면서 주위 사람들의 생활을 불편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어린이집 주변에 평상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보려는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과 어린이집이 함께하는 것이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조합원들이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것을 순수하게만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강했다.

“어쨌든 점차 마을로 나가게 되니까 마을에서 영향력을 넓혀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을 못마땅해 하는 거야. 얘네들이 어쨌든 저거들끼리 노는 놈들인데, 이놈들이 약간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것 같아 보이고, 그런 놈들이 마을을 치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기왕에 있던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서, 요 공간[대천마을학교]에 들어올 때도,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지금 마을 학교에 들어올 때. 관변 단체들이 많이 있잖은가배…… 그런 쪽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지. 그런 거라든가. 직접적으로 부딪혔던 것은, 요 공간을 우리 마을 학교하고 맨발동무도서관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회의 자리에서 강하게 이의 제기를 하면서 반대를 했지.”

조합원들의 활동을 정치적인 색깔로 받아들이는 풍조가 있었다. 아무래도 공동 육아를 하는 사람들은 다소 이념적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생각보다 마을이라는 한 공간에서 기존의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원했다. 이러한 갈등은 마을 주민과 조합원들 사이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을 내 활동에 대해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졌다. 특히 2004년 KTX 사갱 공사 반대 싸움을 할 때였는데, 정치적 이념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싸우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귀원씨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 싸움에 동참하였고, 마을 사람으로서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마을 공동체 운동과 대천마을학교]

어린이집에서는 미취학 아동에 대한 공동 육아와 초등학생의 방과 후 학습이 중심이었다. 특히 초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학교를 마치고 나면 곧바로 어린이집에 와서 방과 후 활동을 하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모들은 교사들에 대한 불만이 많아졌다. 초등학교 1학년이 하는 방과 후 놀이나 6학년이 하는 놀이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주변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교 수업에 알맞은 학습을 하고 있었다. 영어 학원에도 다니고 수학도 배우고 있는데 조합원 아이들은 방과 후 놀이로 녹초가 되어 돌아오면 숙제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기 바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걱정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어린이집에서 학년에 맞게 프로그램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교사들에게도 요구하나, 그게 쉬운 일인가.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학습에 대한 부담감을 부모들이 느끼는 거지. 공부도 좀 시켜야 되는데, 만날 놀이만 하고. 방과 후 활동이 몸으로 하는 활동이라, 힘들 수도 있지. 집에 들어오면 밥 먹고 쓰러져 자고, 숙제도 제대로 못해 가고. 고학년이 되면 숙제도 늘어나게 되고, 그런 데에 대한 부담…… 아이들의 경우에도, 관계가 확장되어 나가는 거지. 옛날에는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놀면 좋았는데, 인제 반 친구도 생기고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들이 많아지면서, 어쨌든 고학년이 되어서까지 방과 후 학교를 다니는 것에 대해서 힘들어하는 애들이 늘어났지. 여전히 좋아하는 애들도 있는가 하면…… 하여튼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인해서 고학년 문제를 둘러싸고 4년에 걸쳐서 논란을 벌였던 것 같아.”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가 확대되고,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아이들의 학습을 위한 욕구가 생기면서 새로운 대안을 위해 고민하게 되었다.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초등학교 고학년 문제를 둘러싸고 조합원들 사이에서 의견이 오갔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고,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었다.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여러 가지 결정이 시도되었다가 다시 번복되기도 하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마을 학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방과 후 학교는 4학년으로 졸업하고 고학년이나 중학생이 되면 조합원·비조합원 관계없이 마을의 아이들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마을 학교를 만들었다.

“애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거지. 이전에 방과 후는 생활 공동체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 마치면 바로 거기로 가서 노는 생활 공동체지. 여기는 요일별로, 시간별로 프로그램을 배치해 놓으면 아이들이 선택을 하게 한 거지.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여러 가지로 배우고 싶은 게 많았어. 그래서 초등 고학년, 청소년들의 방과 후 교육 기관, 주민들을 위한 평생 교육 기관을 설립해 보자 해서 20가구가량이 100만 원씩 기부를 해 줬고, 2,000만 원을 모아서 2008년 초에 마을 학교를 만들었지.”

방과 후 학교가 생활 공동체라면, 마을 학교는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는 프로그램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면 누구나 학교에 다닐 자격이 있다. 어린이집만으로는 제한이 많던 마을 공동체 활동이 점차 가능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참여할 수 있는 평생 교육 기관으로 운영하였다. 조합원들이 설립 비용을 부담하여 마을 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마을 학교는 기존 어린이집과 달리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였다.

이귀원씨는 마을 학교에서 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음악, 미술, 영어, 수학 등 기존 방과 후 학교와 연속성도 지니면서 새로운 학습 욕구를 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하였다. 아이들이 선택하는 프로그램 형식이었기 때문에 학교의 교육 목적을 달성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생태 활동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넣고 싶어 숲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나 아이들이 신청을 하지 않아 결국 못했다. 때때로 아이들의 특성에 맞게 프로그램을 변형할 수밖에 없었다. 미술 활동에 아이들이 지원하지 않아 만화 그리기로 바꾸니까 아이들이 만족하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활동이 무엇인지를 찾고 고민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마을 학교의 운영은 운영 위원회가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이귀원씨는 학교 교장을 맡아 운영을 책임지지만, 의사 결정은 위원회와 함께 논의하였다. 마을 학교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 중에는 아무래도 방과 후 학교를 거친 아이들이 많았다. 반면 방과 후 졸업생이 아닌 마을 아이들이 마을 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경우는 여름 야영 캠프나 여행 학교에 많았다.

“여름에 야영 캠프를 한다거나 여행 학교를 한다거나…… 의도는 아이들이 스스로 여행 계획을 세우게 하려는 거지. 제주도 자전거 여행이라든가, 꼭 제주도가 아니라도 낙동강 자전거 여행을 한다거나, 주말 프로그램이나 방학 프로그램에는 참여가 많아. 그런데 반해 일상적인 프로그램에는 참여도가 상당히 낮지. 홍보의 취약함도 있겠으나, 방과 후 생활이 워낙 학원 중심으로 짜여져 있으니까, 방과 후에 마을 학교에 올 겨를이 없는 거지. 골머리를 앓는 데 반해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어. 교육에 관한 의식이 꽤 높은 사람도, 영어나 수학 중 하나 정도는 학원에 보내야 된다고 생각해.”

마을 학교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한 마을 학교가 아이들이 지니는 욕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였다. 현실적으로 부모들이 우려하는 학업 능력 향상을 위한 요구에는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실제로 마을 학교에서 영어나 수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영어와 수학을 프로그램으로 운영하였지만 학생들이 선택하지 않아 없어졌다. 마을 학교가 할 수 있는 부분과 부모와 학생의 학습 욕구 해결이라는 문제와는 약간의 괴리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반면 어른들의 마을 학교 참여는 학생들과 달라 참여율이 높았다. 어른 프로그램은 동아리 활동과 교육 프로그램으로 나뉜다. 동아리 가운데는 기타라든지 가야금이라든지 손 글씨 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운영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간에 마을 학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 역할은 마을의 다양한 문화 공간들, 마을의 필요한 단체들을 만들어내는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예컨대 음악 프로그램이 진행되면 마을 분들이 밴드 동아리를 구성해서 자기들의 음악 공간을 만들어 나가게 하는 거지.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고, 기타 동아리는 마을 축제가 있을 때 공연하는 정도고, 예컨대 바느질 동아리도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바느질 카페를 만들든가 공방을 만들도록 유도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효과가 잘 나타나지는 않지.”

이귀원씨는 마을 학교를 운영하면서 마을과 동아리 활동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위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밴드 동아리로 하여금 마을 축제 때 공연을 하게 하기도 하고, 바느질 동아리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만들어 나가도록 독려하고 있다. 즉 마을 학교에서 일정하게 씨앗을 뿌려주면 그 열매는 스스로가 만들어 가도록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고 한다. 마을 학교에서 진행된 프로그램이 마을 바깥으로 확장되어 나가고, 독립된 형태로 진행되기를 바라는데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 가운데 성과라면 ‘금요 밥상’이라는 마을 밥집을 한 달에 한 번씩 운영한 것으로, 이귀원씨는 이 사례에 희망을 걸고 있다.

“금요 밥상이라 해가지고 한 달에 한 번씩 마을에 요리사를 고용해서 70명 정도 밥을 먹곤 했었어. 다 마을 분들. 5,000원씩 돈을 받고, 재료값과 수고비를 지불하지. 마을 밥상을 한 2년 정도 하다가 최근에 그만뒀는데, 금요 밥상을 하던 분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으로 마을 밥집을 만들기로 했어. 글쎄 그것이 마을 학교에서 추진한 사업 가운데 마을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지.”

요리사를 고용하고 밥값을 받아 운영한 금요 밥상이 그동안 마을 학교가 운영한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협동조합으로 마을 밥집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정도이다. 특히 이 사업은 마을 학교가 공동체 운동을 실천해 오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 속으로 가장 가까이 들어갈 수 있는 운영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을 공동체라는 유토피아를 향해서]

이귀원씨는 마을 사람이 되기 위해 개인적으로 마을의 역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을의 역사가 담겨 있는 공간, 즉 마을 당산이라든가, 재실이 있었던 공간이라든가, 마을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장소를 찾아 표지판을 세우기도 하였다. 스스로 마을에 애착을 느끼고 있다. 마을 어르신을 찾아다니고 자료를 수집한다. 할머니를 찾아 경로당에도 자주 들르곤 한다. 지나다니면서 마을 어른들을 만나면 어린이 마냥 인사도 꼬박꼬박 잘한다. 식당에서 만나는 주인들과는 오랫동안 사귄 친구처럼 정답게 인사를 나눈다. 마을에 적응해 가고자 하는 이귀원씨의 다양한 노력들이다.

이 마을에 들어온 지 10여 년이 지났다. 본인이 앞으로 만들고 싶은 마을에 대해 들어보았다. 우선 여러 가구들이 함께 집을 지어서 공동 주택을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어 한다. 마을 사람들이 같이 집을 짓고, 같이 사는 꿈을 꾼다.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가 그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다. 이를 매개로 그는 마을을 공화국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런 생애 사이클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런 마을, 조산원부터 시작해서 장례 문화까지 이 동네에서 모두 충족할 수 있는 공동체를 갖췄으면 해. 옛날 마을들은 다 그렇게 했던 것 아닌가배. 협동과 자치를 실현해 보는 거지. 그냥 꿈이지 뭐. 그런 과정에서 그렇다고 해서, 그걸 내가 정말 내 평생의 과제로 삼아서 했던 게 아니라, 그냥 인연 닿아서 되면 그리하고…… 현재로서는 경제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갈 건가, 그 부분에서 당장 하고자 하는 것은 마을 밥집, 마을 반찬 가게, 더 신경 쓰는 것은 도시 농업, 마을 가까이에 도시 농업 공동체 같은 거야. 텃밭을 마련해서, 나도 인제 뭐 노인이 되어가고 있으니, 뭔가 내 노후도 조그마하게 농사나 좀 지으면서 마을 사람들하고 재미있게 살아야 되겠기도 하고. 도시 농업이 또 우리 사회에서 절박하게 필요하기도 하니까, 도시 텃밭 공동체를 같이 하다 보면, 마을 사람들과 재미있는 것도 도모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그런 과정에서 땅을 얻어야 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마을 안에서 출생에서 죽음까지 필요한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공동체를 구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귀원씨에게 공동체 활동을 해 오면서 자신이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의 활동에서 가장 혜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큰아이를 보면서 느끼는 점을 물었다.

“내가 공동 육아를 안 하고 키웠으면 어땠을까 싶어. 안사람은 대단히 규범적이지. 나는 사실 규범적이라기보다 이념적이고. 나나 안사람이나 그렇게 같이 아이를 기르지 않았으면 애를 꽤 좀 잡았을 거야.”

본인이나 부인이 규범적인 사람이고, 게다가 본인은 더욱 이념적이기 때문에 둘 다 자식들을 괴롭혔을 것이라 한다. 공동육아협동조합 활동을 할 때에는 자신은 아이들한테 화를 내는 경우가 많고, 강하게 비도덕적인 아이들을 제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공동체 활동을 통해 본인의 이러한 규범적이고 이념적인 교육 방침이 바뀔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아이는 대단히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고, 올 여름 방학에도 거의 집에 붙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활을 설계하였다고 한다. 농가에서 농사일을 거들기도 하고, 귀농 청년 캠프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만나서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다니기도 한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공동 육아 덕분이라고 이귀원씨는 생각하고 있다.

이귀원씨는 공동 육아를 확대된 가족으로 생각하고 활동한 것처럼, 대천 마을 사람들도 확대된 가족 관계를 맺어나가면서 ‘이 마을에 살기를 참 잘했다’, ‘이 마을에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이 마을 사람이라는 귀속 의식을 강하게 느끼면서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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