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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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運臺溫泉-經驗- |
영어의미역 | The people who experienced Haeundae Hot Spring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가연 |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천, 솔바람이 솔솔 부는 바닷가]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겨울 초입. 아직 몸과 마음이 다가오는 겨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따뜻한 무언가를 찾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는 상상을 한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한겨울, 꽁꽁 언 몸을 뜨거운 온천물로 적실 때 그 짜릿하면서도 노곤한 기분에 우리들은 절로 콧노래가 나오며 살아 있는 보람을 느낀다. 일상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것도 온천을 찾는 보람이며 여행자들이 여행 중 피로를 풀기 위하여 제일 먼저 찾는 것도 뜨끈뜨끈한 온천이다.
필자 또한 거의 매주 해운대 온천에서 목욕을 한다. 물론 집이 가깝다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유명세 때문인지 정말로 물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 다른 목욕탕과는 달리 목욕을 하고 나오면 굉장히 개운하다. 특히 피부가 보들보들해지고 머릿결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부산에는 예전부터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온천이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동래 온천이고, 다른 하나는 해운대 온천이다. 그런데 이 두 군데 온천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동래 온천에는 다리를 다친 학이 물속에 앉아 있다 다리를 고쳐 날아갔는데, 그걸 지켜본 할머니 한 분이 똑같이 다리를 물속에 담가 두었더니 아픈 다리가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해운대 온천에는 신라 진성 여왕이 천연두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는데 해운대 구남골에 피접(避接)[앓는 사람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요양함]을 나와 온천욕을 즐겼더니 천연두가 씻은 듯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모두 두 온천의 효능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해운대 온천은 유명한 관광지인 해운대 바닷가를 끼고 있어서 전국의 관광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한여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 6월 중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해운대 온천장 곳곳에는 시원한[?] 온천을 찾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온천은 겨울 장사라고 하지만 해운대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해운대 온천은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해운대 온천, 과연 그들은 이곳에서 어떤 추억을 품고 떠날까? 자, 지금부터 별로 특별하지 않은, 온천욕이라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해운대 온천이 걸어온 길]
신라 진성 여왕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해운대 온천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근대식 온천으로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건너온 뒤부터였다. 원래 현 해운대구청을 중심으로 한 구남 초원 일대에 자연 온천수가 솟아나고 있어 온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여기에 일본인들이 1907년을 전후로 근대식 온천을 뚫으면서 해운대 온천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전에 이미 해운대에는 한말에 송병준과 박영효와 같은 세력가들의 별장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과 질 좋은 온천을 겸비한 휴양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1917년 당시 최고의 문인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해운대 온천에서 목욕을 한 후 그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맑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에 신체를 잠그고 앉은 맛은 참 비길 데가 없다. 얼른얼른하는 화강석 위에 앉아 말끔하니 전신을 씻고 나서 백설(白雪) 같고 양모 같은 수건으로 몸을 씻고 백사(白沙) 청송(靑松)으로 솔솔 불어오는 청풍(淸風)을 쐬면, 육신의 진구(塵垢)만 아니라 정신의 진구(塵垢)까지 씻어지는 것 같다.”
실제 이광수가 해운대 온천을 경험하였던 때에는 해운루라는 일본인들이 개발한 근대식 여관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1917년 당시 해운루는 해운대를 대표하는 온천 여관으로서 2층 건물에 객실 20개, 실내에 모래찜질, 온천 폭포, 별관의 대욕탕 등의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그러나 해운대 온천은 부산의 또 다른 유명 온천인 동래 온천보다 늦게 개발되었고 시설 또한 미흡한 실정이었다.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1930년대 전반까지 온천 시설은 미비하였다. 비록 노천에 규모가 큰 특설 풀(Pool)과 같은 것이 있었으나, 공중 욕탕 시설들은 잘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특히 여관 안의 목욕 시설인 내탕이 없었던 것이 동래 온천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욕탕의 재료 또한 동래 온천은 자연석인데 반하여, 해운대 온천은 인조석을 사용하고 있었고 전체적인 규모에서 동래 온천의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해운대 온천은 1934년 7월 동해 남부선이 개통되어 해운대가 완전히 부산의 일일생활권에 편입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었고, 이 무렵에 지금의 부산시립미술관 자리 근처에 해운대 골프장 또한 완성되어 이용객들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해운대 개발의 선두 주자였던 해운대온천합자회사는 1935년에 온천 여관, 일명 온천 풀이라고 불렀던 대온천 풀과 납량대, 오락실, 6,611.57㎡ 규모의 정원, 대규모 공중 욕탕 등을 각각 건설하였다. 이때 만든 6,611.57㎡ 규모의 정원은 1980년 해운대구청을 신축할 때 일부를 개조하였는데, 현재까지 그 원형이 해운대구청 내에 연못으로 남아 있어 설비 당시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특히 해운대 공중 욕탕은 최신식 욕탕 시설을 갖춘 2층 건물로, 요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1934년 9월 송도각이라는 온천 여관이 세워졌고, 이어 1935년 철도국에서 세운 국제 호텔이 지금의 해운대구청 뒤 SK 텔레콤 일대에 건설되었다.
따라서 1935년 이후에 가서야 해운대에는 최소한 해운대온천합자회사에서 운영한 해운대 온천 호텔과 대온천 풀장 및 공중 욕탕, 철도 호텔, 해운각, 송도각 등의 여관과 골프장이 갖추어진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일본의 황족과 조선 총독 우가키 및 미나미 등이 방문할 정도로 유명한 휴양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 해운대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해운대 해수욕장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군부대가 들어서고 민간인 통제 구역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1963년 일반 시만의 품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 전국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로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해운대 해수욕장의 발전과 더불어 해운대 온천의 명성도 전국적으로 높아만 갔다.
[피부병에는 해운대 온천]
1910년대의 춘원뿐만 아니라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도 해운대에서 온천욕을 하고 바닷가에 나가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해운대 온천 지구에 있는 수많은 온천 가운데 글자 자체에서 바로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청풍’을 상호명으로 하고 있는 곳이 있다. 해변에서 호텔 단지를 지나 달맞이길 쪽으로 가다 보면 고가 차도 왼편에 ‘청풍 온천탕’이라는 곳이 보인다. 해운대의 거의 모든 온천이 그러하듯이 여기도 숙박 시설을 겸하고 있다. 그래서 청풍장, 청풍탕, 청풍 온천 원탕 등 불리는 이름도 여러 가지다.
1990년대쯤 내부 수리를 하였을 법한 약간은 촌스러운 인테리어, 그 흔한 음료수 파는 아주머니도 없는 소박한 온천탕. 하지만 그런 모습들이 오히려 동네 목욕탕처럼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은 여유로움과 한적함 때문에 해운대 온천을 좀 아는 사람들은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실제로 이 목욕탕에는 해운대 토박이들도 많고 외지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찾는 사람들도 꽤 보인다. ‘청풍’이라는 이름에서 약간의 왜색을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온천도 일제 강점기에 개발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곳이었다.
“여기는 왜정 시대 때 개발됐어요. 굉장히 오래됐지요. 물 하나는 여기가 끝내줍니다. 다른 곳은 보일러실이 있는데 여기는 없어요. 원탕을 바로 끌어다 쓰니까 보일러실이 필요가 없는 거라. 그런데 이 원탕이 너무 뜨거워. 그래서 원탕을 끌어서 옥상으로 올려 가지고 한 번 식혀서 쓰고 있어요. 안 그러면 물에 들어가지도 못 해.” 이곳에서 30년 넘게 세신사로 일하고 계신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청풍장에도 다른 목욕탕과 같이 열탕과 온탕, 냉탕이 있다. 온탕은 식힌 물이고 열탕은 원탕을 바로 받아 놓은 곳이라고 하였다. 열탕의 온도를 대강 가늠하기 위하여 겁도 없이 무릎까지 탕에 넣었다가 깜짝 놀랐다. 다른 어떤 목욕탕의 열탕보다도 훨씬 물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세신사 아주머니는 이건 옛날보다 덜 뜨거운 거라고 말씀하신다. 옛날에는 이 물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계란을 물 안에 넣어 삶아서 손님들께 팔았을 정도였으니.
“내가 며칠 전에 크게 체했거든요. 가슴이 답답해 죽겠는 거라. 근데 저기 열탕에서 온천물을 받아서 한 대접 마시고 나니까 쑥 내려가 버리데. 신기하지요? 그뿐인가? 나도 이제 환갑인데, 나이가 드니까 손목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더라고. 일이 조금 벅차. 그런데 이 물에 들어가 있으면 다 낫는다 아닙니까. 이 온천물이 아픈데 딱 달라붙어서 콕콕 마사지해 주는 느낌이라 기분도 좋고, 혈액 순환에도 좋고, 신경통에도 좋고, 안 좋은 데가 없다.” 아주머니는 여기서 일하면서 잔병치레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게 다 물이 좋아서라고 말한다. 실제 해운대 온천의 성분표를 보면 류머티즘, 신경통, 창상, 요통, 근육통, 만성 위장염 등에 효능이 있다고 하니 아주머니의 말씀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나와서 달달한 바나나 우유를 입에 물고 선풍기에 머리를 말리며 옆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던 찰나, 한 아주머니가 필자에게 관심을 보이시며 옛 추억을 말한다. 현재 59세인 이 아주머니는 거의 30년 가까이 해운대 온천을 이용하고 있다. 지금은 해운대에 살고 있어서 매주 온천을 이용하지만 중간에 한 10년 정도 부산진구 서면 근처에서 살 때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온천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 아주머니가 해운대 온천을 다니게 된 이유가 흥미를 끌었다.
“1985년에 내가 셋째를 가졌는데, 그전에는 피부병이라는 것을 한 번도 안 걸려 봤어요. 근데 셋째 임신하고 5개월쯤 지나서부터 온몸이 가렵고 벌겋게 두드러기처럼 일어나는 거라. 가려워서 밤에 잠도 못 자고 임신을 해 놓으니까 약을 먹을 수도 없고. 또 피부과 약이 워낙 독하다고들 하니까 연고도 못 바르겠더라고. 그렇게 한 3일을 고생하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 신랑이 어디서 들었다면서 해운대 온천에 가면 피부병이 싹 낫는다고 하는 거라. 해운대 온천도 여러 군데가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 신랑이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물어봤나봐. 어디가 제일 좋은지. 그래서 온 곳이 이 청풍장이에요.”
아주머니는 임신 중에 피부병을 앓게 되었는데 약을 먹을 수가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천으로 향하였다. 솔직히 처음엔 온천물이 무슨 효험이 있을까 생각하였는데, 남편이 그냥 온천에서 목욕 한번 하고 온다고 생각하자면서 아주머니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당시 집이 연제구 연산동에 있어서 해운대까지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였다. 없는 살림에 임신한 아내 온천욕 시켜 주겠다고 평소에는 절대 타지 않는 택시를 타고 온천을 갈 정도였으니 아주머니는 살아오면서 다른 것도 물론 고마운 것이 많지만, 그때 남편이 보여 준 배려는 정말 고마웠다고 활짝 웃으면서 말씀하신다.
“그렇게 이 온천에 왔는데 처음에는 온천이라고 해도 동네 목욕탕처럼 작고 허름하더라고. 지금도 이 청풍장은 여기의 다른 온천보다 작잖아요. 그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어쨌든 옷을 벗고 탕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보기에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엄청나게 뜨겁겠구나 하는 걸 알겠더라고. 그래서 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탕 옆에 앉아서 물을 몸에 발랐어요. 바가지에 물을 퍼서 조금씩 바르고, 마르면 또 바르고 그렇게 근 한 시간을 물을 바르고 있었다고. 물이 워낙 뜨거우니까 물을 바로 덮어쓰지도 못하고 쪼매 식혀서 덮어쓰고. 그 당시에 탕에 계란을 삶고 있었어요. 물이 얼마나 뜨거우면 계란이 다 익겠어.
그렇게 목욕을 하루 하고 나니까 피부병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더라니까. 신기하죠? 이 상태면 몇 번 다니면 완전히 다 나을 것 같은 거라. 그래서 평일에 혼자 버스 타고 여기로 왔지. 신랑이랑 오고 나서 혼자 한 세 번 정도 더 왔을 겁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피부병이 싹 다 없어져 버렸다 아닙니꺼, 깨끗하게. 여기 함 봐 보소. 보이지예? 피부 진짜 좋지요? 이게 다 온천 덕분인거라요.”
아주머니의 피부는 아직 30대 초반인 필자의 피부보다 더 매끈하였다. 온천 덕분인 것일까? 해운대 온천이 피부에 좋다고 하던데 빈말이 아니었던가 보다.
[온천은 가족과 함께]
유달리 해운대 온천에는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많다. 좋은 것은 서로 나누어야 하기 때문일까? 어릴 때 가족과 함께 해운대 온천을 다녔던 박민주[26] 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저는 어릴 때 일광에서 살았는데, 가족들과 일요일마다 항상 해운대 온천으로 목욕을 갔어요. 목욕을 다하고 아버지가 저를 먼저 씻겨서 밖으로 보내면, 먼저 옷 갈아입고 해운대 시장에 가서 군것질하고 그랬어요. 그 당시 일광[기장군 일광면]에는 패스트 푸드점이 하나도 없었는데, 온천 건너편에 패스트 푸드 가게가 있어서 주로 햄버거 같은 것을 사 먹곤 했어요.
더 재미있었던 것은 우리 집에 차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온천을 하러 매주 일광에서 시외버스 타고 가거나, 아니면 기차 타고 가거나 했어요. 그래서 어릴 적 기억에 해운대 온천은 먼 곳이었어요. 그렇게 가족들이 목욕을 하고 나오면, 지금 세이브 존[리베라 백화점] 근처에 경양식집이 있었는데, 매주 일요일 목욕을 끝내고 점심은 그 집에서 먹었어요. 부모님과 여동생, 제가 매주 빠지지 않고 돈가스를 먹으러 갔어요. 그때 정말 즐거웠는데…….”
해운대 온천 근처에서 자라온 유지은[32] 씨, 그도 어릴 적에는 가족과 함께 온천을 다니곤 하였다. 어릴 때는 가족 모두 같은 온천을 다니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많이 하였는데,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동생이 서울로 일하러 가고 나서는 안타깝지만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온천을 갈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선호하는 온천탕이 엄마와 달라서 이제는 각자 편한 곳을 찾아서 목욕을 한다.
“저는 서울 온천을 주로 이용하는데 엄마는 해운대 온천 센터를 이용하세요. 거기 물이 뜨겁고 더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너무 뜨겁고 사람이 많아서 별로였어요. 그래서 한적한 곳을 찾다가 서울 온천으로 가게 되었지요. 그래도 어릴 때 가족들과 함께하였던 온천의 추억은 잊을 수가 없어요. 가족들과는 할매탕[현 해운대 온천 센터]을 주로 갔거든요. 온천을 하고 나와서 해운대 시장에서 장도 보고, 가끔은 외식도 하고……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추억들이네요.”
일요일마다 가족들과 함께 목욕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 그때는 왜 알지 못하였을까?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억지로 엄마의 손에 이끌려 목욕을 갔다. 엄마는 껍데기를 다 벗겨 놓을 기세로 온몸이 시뻘게질 때까지 때수건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렇게 자식들을 다 씻겨서 내보내고 우유 하나씩을 손에 쥐어 주고 나서야 당신의 몸을 씻으시지만, 힘이 다 빠져서 대충 씻는 둥 마는 둥이다. 어릴 때 그런 엄마의 손길이 너무 아파 목욕 가는 것이 싫었지만 지금은 그런 엄마의 손길이 그리울 뿐이다. 특히 온천은 동네 목욕탕과는 달리 조금은 특별한 곳이기에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가족과 더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곳일 터이다.
[할매탕의 추억]
해운대에서 제일 유명한 온천을 꼽으라고 하면 지금 해운대 온천 센터, 옛 할매탕을 들 수 있다. 해운대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온천을 온 사람들은 지금도 해운대 온천 센터를 이용한다. 시설을 새로 하면서 깨끗해진 것도 있지만, 여기가 해운대 온천 지구에서 제일 오래된 온천이고, 물이 가장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우동 경로당에서 만난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해운대 기로회(耆老會)의 어르신들 또한 예전부터 할매탕을 주로 이용해 왔다고.
“일본 사람이 처음 할매탕을 시작했는데, 원래 이 사람이 재송동에서 과수원을 했다 카데. 그런데 어떻게 여기 온천이 개발되니까 여기 와서 대중탕을 시작한 거라. 과수원에서부터 밑에서 일하던 정 아무개라는 사람도 같이 온천으로 와서 일을 하다가 해방되고 나서 그 온천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고. 요 근처에서는 그렇게들 알고 있어요.” 1935년 공중 욕탕으로 시작한 할매탕에는 부산 사람들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유명한 곳이었다. 명절 때만 되면 어느 목욕탕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할매탕에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큰맘 먹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해운대 지역에는 원탕이 있는 곳이 몇 군데 없다. 지금의 해운대 온천 센터[할매탕], 해운대 온천 호텔, 청풍장 등이 원탕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다. 대부분의 온천 시설은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부산시설공단에서 관리하는 양탕장에서 물을 끌어서 쓰고 있다. 양탕장이 송도탕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송도탕도 거의 원탕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한다. 처음 양탕장에서 온천물을 끌어올릴 때는 70도 이상 되는데, 각 영업소로 송수관을 통해 보내면서 물이 많이 식어 버린다. 그래서 원탕이 없는 곳은 보일러실을 마련하여 물이 식으면 온도를 높여 공급하고 있다.
그런데 할매탕은 원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탕의 물이 다른 곳보다 훨씬 뜨겁다. 물론 보일러실 또한 필요가 없다. 오히려 65도 정도의 온천물을 한 번 식혀서 탕에 보내야 할 정도이다. 한번은 전국의 나병 환자들이 여기에 다 몰려와서 영업을 하지 못할 뻔하였던 적도 있다고 하니 그 효능 또한 말로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열 몇 살 때부터 목욕을 할매탕으로 갔거든. 거기는 울산서도 대구서도 다 왔다고, 그 목욕탕에서 병 고칠라고. 땅 밑에서 솟아나는 물이 너무 뜨거웠어. 피부 가렵던 게 온천물에 하고 나면 다 나았어요. 요즘도 4~5일 만에 한 번씩 할매탕에 목욕 간다. 사람이 많아도 거기가 너르고 물도 좋고 해서 간다고. 근데 요즘에는 너무 더워서 못 간 지 한 달도 넘었네. 우리는 온천 하는 버릇이 돼서 뜨거운 데 들어갔다 나왔다 해야 시원하다. 옛날 할매탕은 뜨거운 탕 하나뿐이었어, 쪼매난 냉탕 하나 있고. 거기 들어가면 들어갈 때는 뜨거워서 따끔따끔 하고 그랬는데, 들어가서 앉아 있으면 시원해.”
염분이 많아서 비누가 잘 풀리지 않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온천을 하고 나면 비누칠을 하고 났을 때보다 더 피부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온천을 하고 나서 일부러 수건으로 몸을 닦지 않고 자연 건조시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약용이기 때문에 물기를 닦아내 버리면 그만큼 효능이 떨어진다고.
[일제 강점기, 온천 개발이 시작되다]
해운대 기로회를 방문하여 해운대에서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평생 해운대에 살아오시면서 해운대의 흥망성쇠를 지켜 본 어르신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동래 온천하고 해운대 온천하고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거라. 그런데 해운대 온천이 피부병에 좋다고 소문이 나니까 옛날에 나병 환자들이 전국에서 몰려왔다고. 그리고 고관들이 말이야, 동래에 오면 꼭 해운대에 오는 거라. 그래서 해운대 사람들이 죽을 판인기라, 접대한다고. 일본놈들이 온천을 개발하였지만 우리 어릴 때는 돈이 없어서 온천 목욕도 자주 못했다고 목욕 값이 비싸서. 그래서 요 주위에 살고 있어도 우리는 잘 못 했다고.”
“일제 시대 주로 대중들이 가는 데는 할매탕이었어. 그때는 할매탕이라는 상호명이 아니지. 거기는 영업용 대중탕으로, 왜놈들이 만들었어. 그 외에 돈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은 여관을 겸해서 했던 곳이고. 거기 대중탕에 가면 남탕, 여탕이 나눠져 있는데, 돈 받는 사람이 가운데 딱 앉아 있고 그 사람을 기준으로 남탕, 여탕 갈려져 있었다고.” 지금은 온천보다 해수욕장이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온천이 너무 유명해서 전국에서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전부 해운대에 휴양을 하러 왔었다. 그래서 해운대 사람들은 그 사람들 접대한다고 고생깨나 하였다고 한다.
부산 사람들이 좀 많이 찾아왔으면 하였지만 당시 전차는 부산에서 동래까지밖에 운행을 하지 않았다. 동해 남부선이 개통되고 난 후에야 경상북도 경주를 가는 길에 해운대에서 1박을 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거의 일본인 위주로 재편되어 있던 온천 지대도 일제 말기가 되면 한국 사람 여관이 서너 개 있었다고 한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본인들만 찾던 해운대 온천에 한국인 입욕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광복 전까지 해운대 온천은 조선인 자연 부락과는 철저하게 분리된 딴 세상이었다.
본격적으로 해운대가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광복이 되고 전쟁이 나고부터였다. 미군 부대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발전이 조금 되었다. 부대 종업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상대로 한 여러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해운대 토박이로서 쓴소리도 가감 없이 말씀하시는 어르신들, 이 또한 해운대에 대한 애정의 표현 방식이리라.
“여기는 일본놈들 유랑 지역밖에 안 됐어. 해운대는 유원지밖에 안 됐던 거라. 그래서 해운대에는 학자 같은 사람들이 안 나는 거라. 다 일본 사람 밑에 빌붙어서 일하던 사람들이 많았지. 여기 가까운 동래나 기장, 울산 같은 데 보면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났습니까? 그런데 해운대는 아무도 없어. 나도 해운대에서 80년을 살았지만 인물다운 인물이 없어. 전부 일본 사람 밑에 있다가 적산(敵産) 받아서 부자 된 사람들만 몇몇 있고, 해운대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라. 큰 인물도 없고. 그래서 좀 부끄러운 게 있어. 그건 우리 선조들이 잘못한 거야.”
일본인들에 의해 해운대 온천은 개발되었지만, 그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거의 한국 사람들이었다. 상업적으로 개발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붙어서 살던 조선인들이 많았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광복 이후 적산을 불하받아 직접 온천 운영을 하거나, 아니면 팔거나 하였다. 그런 모습을 지켜봐 오신 어르신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랑할 만한 인물이 한 명도 없다는 어르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옛날에는 해운대 바다보다 온천이 더 유명했는데, 요즘은 해수욕장이 더 유명하잖아. 광복 전에는 수영 비행장 앞에 해수욕장이 유명했다. 거기는 1킬로를 들어가도 물이 가슴팍 정도밖에 안 된다. 안전하고 얼마나 좋았다고. 왜놈도 수영에 내려서 과수원 길을 지나서 그 해수욕장에서 놀았다고. 백사장도 넓고 파도도 별로 없고 요즘 말하는 이안류(離岸流)[한두 시간 정도의 짧은 기간에 매우 빠른 속도로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흐르는 좁은 표면 해류]라고 하는 것도 없었어. 일본 사람들이 거기 바글바글했다고. 골프장도 거기 있었고 얼마나 좋았다고.”
온천을 하고 은빛 모래 잔잔한 백사장을 거니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였을 터, 해운대 백사장의 은빛 모래에 대하여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지금의 해운대 해수욕장보다 더 좋은 곳이 있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바로 지금의 부산시립미술관 앞 옛 수영 비행장 근처가 전부 백사장이었고, 그 백사장은 해운대 해수욕장보다 훨씬 넓고 물도 얕아서 놀기 좋았다는 말씀이다. 일본인들이 만든 골프장도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유원지로서는 최고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랬던 해수욕장이 대동아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수영 비행장의 확장 공사로 망가져 버렸다고 한다. 실제 기로회의 어르신 중에는 비행장 확장 공사에 동원되신 분도 있었다. “당시 소화 농원이라고 있었는데, 사과나무가 한창 많이 열릴 때 대동아 전쟁이 발생해서 비행장 늘린다고 사과나무 뽑는 데 동원됐어.”
[사또 할배의 말이 다 진짜였어]
광복 이후 해운대 일대는 일제가 개발해 놓은 몇몇 관광 시설을 제외하고는 전부 논밭이었다. 해운대가 고향이고 지금은 해운대의 한 온천에서 주차 관리를 하시는 분의 말씀을 들어 보자. “이 근처는 전부 논이었어요. 내가 한 열 살 때쯤이었을 거라. 전쟁 나고 얼마 안 됐을 때니까. 한겨울에 친구들하고 꽁꽁 언 논에서 썰매 타고 놀다가 손발이 시리면, 옆에 도랑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도랑에 발을 녹여 가면서 놀았어. 신기하게도 한겨울에 뜨거운 물이 나왔거든. 그게 온천이지.”
그렇게 온천수가 논 가까이에서 흐르고 있었는데도 그 당시에 부모님께서는 그것이 돈이 될 줄 몰랐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뿐만이랴. 해운대구 우동 노인정에서 만난 83세의 할머니는 ‘사또 할배’ 얘기를 재미있게 꺼내 놓으신다.
“내가 해방되고 열두 살 때 일본에서 들어와서 울 아버지 고향 여기에 살고 있었어. 우리 동네에 사또 할배라고 유명한 할배가 하나 있었다고. 그런데 그 할배가 그냥 할배가 아니야. 왜 사또 할배라고 하냐면, 허리춤에 뭐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거든, 도포 입고 갓 쓰고. 그래서 주변에서 다 사또 할배라 불렀는데, 이 할배가 하는 일이 새벽에 담배꽁초 주우러 해운대역전에 나가는 거였어.
나가면서 그 할아버지가 일본말로, ‘다이요우가 노보루 마에 하야쿠 오키레[해 뜨기 전에 빨리 일어나라]’라고 말하고 지나간다고. 그라고 지나가면 우리가 일어났는데, 하여튼 그 할배가 참 말이 맞는 게, 한 번은 지금 해운대역전에서 큰 소리로 ‘앞으로 여기 해운대는 사람들이 버글버글 밀려 들어오는 곳이 될 것이다’ 막 이래 고함을 질러. 나도 그걸 들었거든. 내 나이가 80이 넘었는데도 지금도 생생하다. 하루 종일 그 앞에서 그러고 있는 거라.
그런데 그 할배 말이 맞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할배가 앞을 좀 보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 그때 여기 땅을 좀 사 놨으면 부자 되지 않았겠나. 근데 그때는 논밭밖에 없었고 운촌에는 고기 잡아먹고 사는 데 해운대가 이렇게 발전할 줄 아무도 몰랐지. 온천이 있어도 거기는 우리하고 별로 상관없는 곳이라고 생각했거든. 거기는 돈 있는 사람들만 가는 데였다고. 우리는 온천에서 놀 줄도 몰랐고.”
사또 할배의 예언대로 2013년의 해운대는 1년 내낸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가 되었다.
[변화의 바람과 해운대 온천]
어르신들이 기억하고 있는 해운대 온천의 풍경은 어떠할까? 단편적인 기억의 파편들이지만, 그 옛날 해운대 온천장의 풍경을 한번 감상해 보자.
“지근 해운대구청 자리에는 옛날에 풀장이 있었고 목욕도 했지. 구청 주변에는 할매탕뿐만이 아니라 국일관하고 경찰지서도 있었고, 재생 의원이라고 있었고. 나는 일본에서 나서 열두 살에 들어왔어. 우리 아버지 고향이 여기라서 우동에 정착한 거지. 여기 우동은 다 논이고 밭이었고 초가집도 몇 집 없었어. 지금 스펀지 있는 자리가 물구덩이였거든. 물이 무릎까지 빠지는 논이었어. 스펀지 건너편에 해운대 감리교회 쪽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고. 우리 어릴 때는 해운대 바다에 모래사장이 너무너무 반짝반짝하는 은빛이었고 깨끗해서 너무너무 좋았다. 그런데 저만치 변했네. 수영 비행장도 없어져 버리고 골프장도 없어져 버리고…….”
해운대구 우동 노인정의 회장 어르신, 올해 80세이신 어르신은 예전에 해운대에 있었던 여관들의 상호를 쉼 없이 말씀하신다.
“옛날에 목욕탕이 있던 저기는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송도각[송도탕] 정문 앞에 온천수가 흘렀다고. 해운대 온천은 거기서 송수관을 끌어서 한 거라. 그 당시만 해도 미진장 호텔, 청풍장, 송도각, 제일탕 그렇게 있었어. 1970년에만 해도 호텔이 몇 개 없었다고. 수정각, 미진장, 건너편에 송도각, 제일 호텔이 있었고, 국제 호텔에서 물이 나왔고, 할매탕에서 물이 나왔고. 해운대구청은 온천 풀장이라. 처음 시초가 그랬어. 지금이야 하도 많으니까. 옛날에는 그것뿐이지 뭐.
그때만 해도 계란이 반숙 되어서 나왔거든, 송도각 들어가는 입구에 보면 물이 나왔는데, 거기에 계란을 넣어 놓으면 반숙이 되어 나왔다고. 그러고 할매탕에는 옛날에는 들어가지도 못 했어, 뜨거워서. 되게 나이 많은 할배들만 들어갔다 나오지, 우리는 못 들어갔다고. 지금 할매탕에 가서 뜨거운 물이라고 내놓는데 별로 안 뜨거워.
지금은 아마 청풍장이 제일 뜨거울 끼라. 요즘은 온천물을 퍼서 물을 섞을 것 같아. 지금도 그렇게 뜨거우면 아무도 안 들어가겠지. 국제 호텔은 아직도 목욕한다고 하더라. 목욕탕만 물을 사용하는 거면 문제가 없는데, 여관이야 호텔이야 전부 온천수를 끌어다 쓰니까 물이 안 모자라겠나. 나중에 물을 너무 많이 빼 써서 땅이 꺼져 버리는 거 아닐까.”
할아버지께서 제대를 하고 보니까 백운장이라는 여관이 세워져 있었는데,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으로 주로 백운장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해운대 온천과 해수욕장은 전국적인 신혼여행지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지금보다 오히려 그때가 여관도 많고 장사도 더 잘됐던 것 같다고.
뭐든 세월 따라 가는 거라고 하지만, 해운대 온천을 얘기할 때 모든 어르신들이 공통으로 지금보다 옛날의 해운대 온천이 더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지금 해운대는 너무 복잡하고 난개발이 되어서 마음 놓고 편히 쉴 곳이 없지만, 예전에는 따뜻한 온천도 하고, 솔바람도 맞고, 은빛 모래사장을 밟으면서 추억을 만들 수 있었던 곳이었다고. 온천 장사도 오히려 그때가 더 잘됐고, 사람들의 친절과 인정이 넘쳐나던 곳이 이 해운대였다.
지금도 여름이면 전국에서 수백만의 관광객이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온천으로 몰려온다. 그들은 해운대에서 어떤 추억을 만들고 돌아갈까?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해운대의 외관은 많이 변하였지만, 온천물의 효능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온천 욕장 또한 시설을 정비해서 쾌적하게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늘었다. 한여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운대로 피서를 오는 이 때, 시원한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긴 후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한번 담가 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여행의 피로가 싹 가실 것이다. 해운대를 방문하는 모든 분들에게 온천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