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51
한자 加德島外洋浦-住民-敵産家屋生活記
영어의미역 The people of Gadeok Island Oeyang-po village who live in the enemy’s property estate
이칭/별칭 해방되고 고향도 되찾았지만……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장소 외양포 마을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지도보기

[적산 가옥, 낯설고도 친숙한]

좁고 긴 복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 퀴퀴한 다다미 냄새, 가파른 2층 계단, 검은색 함석지붕, 나무판자로 덧댄 외벽……, 주위의 집들에 비해 약간은 기괴한 이들 목조 2층집들을 우리는 ‘적산 가옥’이라 부른다. ‘적산(敵産)’의 사전적 의미는 ‘한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인]의 재산’이니, 우리에게 ‘적산 가옥(敵産家屋)’이란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 놓고 간 그들의 집이나 건물이 되겠다.

오랜 전통 도시 서울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구도심이나 소읍에서 지금도 흔히 볼 수 있어 적산 가옥은 낯설고도 친숙한 존재다. 특히 군산, 목포, 강경, 구룡포 등 일제 강점기에 도시로 성장한 전국의 주요 항구 도시들에는 예외 없이 적산 가옥이 밀집하여 마치 100년 전 쯤으로 돌아간 듯한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한반도의 관문이자 철저한 일본인의 도시 부산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일제 강점기 부산의 도심인 중구영도구·서구 일대에 즐비하였던 일본인들의 주택과 상점은 그동안 많이 철거되었으나, 현재도 다수가 남아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 풍광을 보여 준다. 또 부도심인 동구와 진구·연제구 일대에도 일본인들의 별장 및 산업 시설과 관련된 적산 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동구 수정동의 ‘부산 정란각(貞蘭閣)[등록 문화재 제330호]’, ‘부산 초량동 일식 가옥[일명 다나카 주택, 등록 문화재 제349호]’은 대표적 별장 건축물이다. 또 연제구 거제동연산동 일대에는 1930년대 동해 남부선 개통과 함께 철도국 직원들을 위한 연립형 관사가 다수 건축되어 현재까지 일부 남아 있다. 한편, 강서구 대저동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업 이민 정책에 따라 이주한 일본인 지주들의 대저택들이 멸실과 퇴락 속에서도 아직 41채나 현존하고 있다.

해방 후 적산 가옥은 그대로 미군정의 소유가 되어 대부분 일반인들에게 불하되었는데, 이를 둘러싸고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연히 해외에서 돌아온 전재민이나 독립 유공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기회주의자와 친일 모리배의 수중으로 흘러들어 투기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적산 가옥이란 그저 ‘주인 없는 떡’에 불과했고, 먼저 차지하면 임자였다. 대저동의 경우 인근의 소작인들이 이들 주택과 농지를 분배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황을 상세히 알기는 어렵다.

불하 이후 적산 가옥은 대부분 주거 기능을 유지하였지만, 일부는 식당, 사무실, 공장 등과 같은 용도로 활용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개보수를 겪었다. 또 주거용이라 하더라도 일본인의 생활 방식에 맞게 설계된 터라 우리 식으로의 구조 변경은 필수였다. 우선 방에 있는 다다미부터 걷어 내고 온돌을 깔았다. 또 우리 전통 가옥에는 없는 북쪽 현관을 막고 남쪽으로 다시 문을 내거나, 입식 부엌과 마루를 뜯어내 연탄아궁이를 놓기도 하였다. 겉모습만 ‘적산 가옥’일뿐, 속은 철저히 한국화가 진행된 것이다.

부산 최대의 섬 가덕도에도 대표적인 적산 가옥 마을이 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 외양포 마을이 그곳이다. 외양포 역시 일본인들이 물러나고 그 집과 땅에 우리네 이웃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고 살아왔지만, 이곳만의 독특한 사연이 있다. ‘적산 가옥이지만, 적산은 아니라’고 말하는 주민들의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적산이라기보다는, 우리 선조들이 살다가 일본군에게 쫓겨났다가, 해방되고 되찾은 거지예. 집이 다들 일본집이니까 적산 가옥이지만, 사실은 적산이 아니라. 우리도 선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커 가면서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지예. 전해들은 이야기.”

김일환[75], 허순옥[72], 김광복[68] 세 분이 전하는 외양포 적산 가옥의 사연은 먼 기억 저편을 더듬으며 시작되었다.

[외양포 마을의 내력]

외양포 마을은 원래 양천 허씨 집성촌이었다. 외양포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6세기 무렵이었고, 당시 약 80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한다. 지금은 외양포대항동 대항 마을 아래의 자연 마을이지만, 애초는 대항 마을보다 더 큰 마을이었다.

외양포 마을의 비극은 러일 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8월 3일 일본이 진해만을 탈취하여 ‘진해만요새사령부’를 설치하고, 부산·진해·마산·가덕도·지심도·저도·거제도 등 진해만과 그 이웃의 육지와 섬에 진해만 요새 중포병 대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04년 11월 27일 가덕도 외양포에 막사와 함께 포대 6문, 경포대 2문을 갖춘 포대 진지가 설치되었고, 1904년 12월 12일 진해만 요새 포병 대대 제2중대가 주둔하고, 12월 20일 중포병 대대가 이동해 왔다. 이 과정에서 기존 주민들에 대한 강제 이주가 이루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불법적 토지 점령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총칼을 앞세워 위협하는 일본군을 당할 수 없어 누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비워 주고 고개 너머 대항 마을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살던 집을 뜯어다 대항 마을에 재건하기도 하였다. 외양포 마을 주민 김일환 옹은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마을 철거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조부님이 6살 때 일본군이 들어와서 포진지를 만든다고 강제로 쫓아냈다 카데. 한 3년간 여유를 두고 1차, 2차 2번에 걸쳐서 철거를 했는데, 그래가 완전히 대항으로 철수가 되었지. 그때 한 집인가 두 집이 안 나가고 버티고 있으니까, 왜놈들이 불을 놓아 버렸다 이기라. 사람은 그대로 놔두고. 이주 보상 같은 것도 그때는 없었겠지.”

이듬해인 1905년 4월 21일에는 진해만요새사령부가 편성되어, 5월 7일 외양포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진해만 요새를 일본 연합 함대의 근거지로 하여 1905년 5월 27일~28일의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은 러시아 발틱 함대를 물리치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즉, 진해만 요새 덕분에 승기를 잡았으며, 그 한가운데 외양포의 사령부와 포병 대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진해만 요새 포병 대대는 포병대로 격하되고, 병력도 3분의 1로 축소되는 등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어서 1909년 8월 요새 사령부와 포병대가 가덕도에서 마산의 월영리로 이전하게 되면서, 외양포에는 포병 1개 중대만 배치되었다. 그리고 졸지에 마을을 뺏긴 주민들은 일제 강점기 내내 마을 주위에 얼씬거리지도 못하였다.

“여기 공사하는데 동원되어서 일하는 거 말고는 깔비[솔가리]도 하나 못 긁었다 카는데예. 긁다가 잡혀가고.”

당시 외양포 일본군 포진지의 위치는 마을 뒤편 대나무 숲 속이다. 그 입구에는 1936년 건립한 ‘사령부 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라는 비가 있어, 일본군 진해만요새사령부가 이곳 가덕도 외양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외부에서 쉽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구축된 포대 진지에는 포좌·탄약고·방음벽·창고·포측탄고(砲側彈庫)·대피소 등이 해방 후 70년이 흐른 지금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외양포에 주둔하였던 포병대의 규모와 일제의 침략상을 실감케 한다.

또한 일본군은 주민들을 쫓아내고 난 마을 빈터에 장병들의 주둔지를 건립하였는데, 입향조 이래로 형성된 산어귀의 집터를 버리고 원래 들판이었던 곳을 택함으로써 마을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켰다.

“[해방되고] 여기 [다시] 들어오니까, 왜놈들이 어찌나 나무를 잘 심어놨는지, 저 동네 앞에 나무가 아름드리 도구통[절구]보다 컸어요. 일본군이 들어오기 전에는 동네 주위의 산 중턱까지가 밭이었고, 나무가 없었거든요. 마을부터 저까지는[마을 동쪽 산 중턱] 비록 천수답이지만, 논이었어요. 그것도 지금은 모두 산이지만. 어쨌든 동네는 산 밑에 양쪽으로 있었고, 지금 마을이 있는 넓은 들이 모두 농경지였으니, 얼마나 농사짓기 좋았겠습니까?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서 들 복판에다 막사를 지은 거지요.”

현재의 마을이 된 장병들의 주둔지에는 관사, 막사, 창고, 무기고 등이 있어, 해방 후 고향을 되찾은 주민들이 지금도 일제 강점기의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빼앗긴 들판에 건설된 군부대 건물을 그 후손들이 되찾아서 쓰는 것이기에 ‘적산 가옥이지만 적산이 아니라’는 주민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다시 주민들의 차지가 되었는지, 살면서 어떤 변형을 겪었는지, 적산 가옥에 얽힌 외양포 주민들의 삶의 애환을 보다 자세히 들어보자.

[고개 넘어 외양포로 이사하던 날]

해방 후 외양포에 다시 들어온 세대는 일본군에 의해 외양포에서 쫓겨난 세대의 차세대, 즉 김일환 옹 세대의 부모들이었다. 당시 집안의 종가인 큰아들은 대항에 남고, 둘째·셋째 아들들이 옮겨 왔다.

“그때만 해도 집이 귀할 때니까, 저 너머[대항]에서 제비뽑기를 해가지고, 당신은 이 집, 당신은 저 집……, 그래가지고 이 마을이 형성이 됐습니다. 나는 어려서 제비뽑기하는 줄도 몰랐지. 일곱 살인데 뭐.”

되찾은 고향 마을의 적산 가옥을 둘러싼 점탈 경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대항의 마을 유지들은 외양포의 집들을 미리 조사한 뒤 약 30가구 정도의 입주 정원을 정하였다. 그리고 입주를 원하는 주민들의 신청을 받아 제비뽑기를 하여 가옥을 배정하였다. 창고·막사·관사 등 가옥들마다 수준 차이가 있어 가장 공평하게 이를 분배하기 위해서였다. 가옥은 적고 입주를 원하는 사람은 많다 보니,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관사는 2가구, 막사는 4가구 등 한 지붕 아래 다세대가 거주하는 공동 주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건물의 지붕을 보면 몇 가구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이는 적산 분배 후 저마다 다른 색깔로 지붕을 개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의 여생과 후대의 살림 밑천이 될 집을 제비뽑기로 결정하였다니, 혹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등의 불상사는 없었을까?

“어떤 어르신 한 분이 우리 집에서 안 나가고 버틴 적도 있지요. 적산은 자기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다, 그런 생각으로. 도회지는 종종 그런 일이 안 있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마을 의견을 수용해서, 따로 집이 한 채 마련되어서 나갔습니다.”

김일환 옹은 대항에서 외양포로 이사 오던 날은 환하게 기억한다. 해방이 되던 그해 9월, 혹은 10월 정도였던 것 같은데, 본격적인 이사에 앞서 먼저 겨울철을 대비하여 집집마다 온돌을 놓았고, 공동 주택이다 보니 칸막이를 지르는 일도 중요하였다. 그 후 10월·11월 등 이주 여건이 마련되는 대로 순차적으로 이주를 하였다. 온돌을 놓는 과정에 화재가 나 건물 한 동이 손실되는 일도 있었다.

“7살 때 부모랑 같이 집에 들어왔던 그 순간이 기억납니다. 내가 집 구조까지 다 아는데……, 전부 다다미방이고, 방 복판에는 화로가 있었지. 양옆에는 밥 해 먹는 부엌인데, 솥이 두 개 걸려 있고, 연기 나가는 굴뚝까지 다 있었어. 화장실은 뒷담에 있었는데, 수세식은 아니지만 집 안에서도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일식 가옥 특유의 건물 내 화장실이 ‘포대장 집’과 ‘소대장 집’에만 시설되어 있었다. 병사들의 숙소인 막사는 모두 옥외 화장실이었는데, 현재도 3군데 남아 있다. 옹의 집은 ‘포대장 집’이었고, ‘소대장 집’은 그 바로 아래다. 주민들은 둘을 각각 ‘대대장 집’, ‘중대장 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집에 거주했던 군인들의 직위도 정확히 모른 채 당시 마을 노인들이 그렇게 불렀기에 그런 줄 알았노라 한다.

“우리 집 앞은 지금으로 치면 보건소 같은 병원이었고, 요런 집은 막사고……, 다들 시설은 잘 되어가 있었어요. 저 밑에는 연무장이 있어서 검도하는 장비들이 다 갖춰져 있었고, 탄약고는 저기 제일 위 포구나무 밑이고. 탄이 엄청 많이 있었어요. 하나씩 싣고 댕기는 구루마[리어카] 같은 것도 다 되어가 있고.”

김일환 옹의 포대장 집과 막사 등 다른 집들은 얼마나 수준 차이가 있었을까?

“수준 차이가 완전 있지. 관사는 완전한 살림집인데……, 돌에다가 시멘트를 발라가지고 붕어 같은 것도 키우고, 석류나무도 있고, 참 멋지게 되어 있었어요.”

‘말집’이라 불렀던 마구간은 바닷가에 있었는데, 말이 두 필 매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일본군이 방치해 두고 그대로 철수한 것이다. 지금 차가 다니는 동네 큰길을 옛날에는 ‘말길’이라 하였다. 일본군 장교가 말을 타고 부대 내를 순시했던 듯 마을 구석구석뿐만 아니라 주위 산꼭대기까지 말길이 잘 나 있었다. 1m~2m 가까이 되었던 말길은 지프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시골길 치고는 잘 정비되어 있었는데, 새마을 운동 시기에 조금 넓혀서 리어카가 다닐 수 있도록 했을 뿐, 현재까지 그대로다. 산길은 통행이 없어 사라졌지만.

“일본 사람이 갈 때는 즈그들이 사용한 물건을 전신에[전부] 땅을 파고 묻어 놨는기라. 그릇캉[그릇이랑] 즈그 사용한 거 전신에 다. 그때는 나무 그릇이데, 사기도 있고. 밭 쪼면 전신에 묻어 나와.”

외양포 마을 주민 허순옥 할머니도 어린 시절 대항에서 외양포로 이사 올 때의 기억이 잠깐잠깐 난다. 농기구나 모기장 등 방치해 둔 것도 있고, 땅에 묻어 놓고 간 것도 많았다. 그때는 어려서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일본인들이 남긴 이러한 생활 도구도 모두 마을 어른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밭 역시 집과 같은 방식으로 추첨을 해서 분배하였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땅을 일구어 밭을 키웠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매일 개간해서 밭뙈기라도 넓히는 것이 일이었다.

“전부 개간한 겁니다. 처음 우리 할아버지들 입도했을 때 농경지 이뤄 놓은 걸 쫓겨나가면서 다 버리고 갔고, 왜놈들이 36년간 나무 심고 새로 만들어 놓은 거를 다시 해방 후에 우리가 들어와 가지고 다 개간하였다 아입니까. 그게 억울해서 못 나갔어요, 여기서.”

입향조 이래로 선대가 일궈 놓은 들판에 일본군은 막사를 짓고 큰길을 내었는데, 해방 후 그 후손들이 다시 막사와 길을 비켜 가능한 땅은 모두 밭으로 개간하여 삶을 이어 왔다.

[평생을 외양포에서 고기나 잡고 산다]

“대항국민학교 나와 가지고……, 고마 그대로 사는 거지. 평생을 마 고기만 잡고…….”

대항에서 태어나 7세에 외양포로 이주하고, 그 후 어떤 인생을 사셨는지 여쭈었더니 김일환 옹은 특별한 인생 유전은 없으신 듯 잠깐의 망설임 끝에 명쾌하게 답하신다. 멋쩍은 듯한 어르신의 말씀에 곁에 계시던 허순옥 할머니는 벌써 크게 웃으신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노부부인 만큼 한순간 한순간 삶의 변곡점이 없었겠냐마는, 갑자기 물어오니 이렇다 할 만한 사연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일까?

“부산에 한번 나가서 광복동에 조금 있다가 그냥 와버렸어. 조리사 조금 배우고 있다가, 고향이 그립고, 조금씩 봉급 받아봐야 신통치도 않고…….”

외양포가덕도에서 가장 큰 숭어 어장이다. 이곳에서 잡은 숭어는 옛날 임금님에게 진상할 만큼 품질이 좋다. 어르신 역시 20년 가까이 숭어 잡이 배를 탔다. 숭어가 많이 나서 밥 먹고 살 정도는 되었고, 딴 데 가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단 한 번의 외도뿐, 줄곧 외양포에서 바다만 바라보고 사셨을까? 대한민국 남자들에게는 의무적으로 고향을 떠나 있어야 할 기회가 한 차례씩 주어진다. 바로 군 입대다.

“그게, 또 물으면 [대답하기가] 그렇네…….”

어르신의 사연을 알고 계신 할머니는 또 한 번 크게 웃으신다.

“촌에 살아서 그런가, 우리 20대 때만 해도 제2 국민병 수첩이라고 있었는데, 그게 내한테는 하달이 안 되었어요. 우체부 잘못인가, 아무튼 내 친구들은 다 가고 나는 가고 싶어도 못 갔지요. 그렇게 해서 군 기피자가 되어 가지고, 5·16 후 재검을 하였다 아입니까? 3을종인가 받았어예. 마산에서 받았는데……, 그때 마 겁나데, 헌병들이 나와 가지고 기합 주고……, 그래가 66년 8월 19일 영장이 나왔어예.”

본의 아니게 한차례 군 기피 후 재검을 받고 영장이 다시 나왔을 때는 이미 결혼 후 첫아들이 두 살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월남전이 한창이었다. 옹은 이러한 집안 사정과 ‘삼가 독자(三家獨子)[아버지, 큰아버지, 본인]’라는 점을 내세워 부산지방병무청에 의뢰하여 군 복무 1년 연기 신청 서류를 만들었다. 당시는 가덕도가 의창군 관할이라, 준비한 서류에 의창군 병무계장의 사인을 받아서, 다시 천가동[현 가덕도동] 서기에게 도장을 받아 제출하면 1년 연기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1년 후 입대해도 의가사로 6개월만 군복무를 하면 되었다. 암담하던 앞날에 한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가 여름철 아입니까? 버스 안에서 바지에 떠~억 찡가가[찔러 넣고] 왔더마는 버스가 덜컹거리니까 빠져 버리고, 동사무소 갈라고 서류를 찾으니까 서류가 하나도 없는기라. 와이고……, 그래가지고 고마 기피를 해버렸지. 기피자가 된기라.”

이렇게 또 한 번 군 입대에 실패[?]하여 다시 군 기피자가 되고 말았다. 군 복무 동안의 확실한 정훈 교육 덕분에 군 기피자라면 마치 할리우드 영화 「도망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줄 알았더니, 공권력 역시 아날로그이던 시절에는 그렇지도 않았나보다.

“겁은 뭐, 안 났습니다. 여기서는 부산 시내 밖에 못 나가거든? 시내 나가도 한 번도 형사들이 나를 보고 신분증 제시해라 카는 사람이 없더라고예. 그래 마 잡히믄 가고 안 잡히믄 안 가고, 판단을 그리 해버렸지. 그래가 인자 세월을 보내다가 서른한 살에 보충병이 나와 가지고 1,020시간인가 근무섰어예. 여기 천가동 예비군 초소 같은 데서. 그래도 오래 살았어. 안 죽고 살고 있으니…….”

세 번째 만에 무사히 군역을 마친 어르신의 근무처는 천가동 예비군 초소. 결국 가덕도 내 출퇴근이었으니, 이번에도 역시 외양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할머니 친정도 외양포다. 외양포에서 자라서 외양포로 시집와 사는 사람은 현재 두 사람뿐인데, 그중 한 분이 할머니다. 우리네 어머니는 아무래도 자식 학교 보내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대항국민학교까지 한 20분 걸린다. 지금은 동네에 애기가 없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 걸어 댕겼지. 면 소재지 덕문중학교까지 12㎞를 걸어 다녔다. 배는 나중에 생겼고. 새벽에 밥 해가 먹여 놓으면 밤에 들어오고 그랬지.”

어르신이나 할머니 모두 이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심지어 군 복무 때도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되찾은 고향이지만, 가덕도에서도 가장 외진 곳인 외양포의 적산 가옥과 함께한 평생이 불편하고 힘들지는 않았을까?

“불편한 거는 말도 못하지예. 지금은 차가 댕기고 있지만, 새벽에 일어나 가지고 양파·마늘 이런 거를 전부 머리에 이고 산 너머 대항까지 가서 여객선으로 부산에 부쳐서 팔고…….”

“집은 개조를 해서, 온돌도 놓고 보일러도 놓고 해서 괜찮아예. 겉은 적산 가옥이지만, 안은 완전히 한국식으로 바꿔서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이래서 삶의 무게는 상대적이라고 하는가 보다. 아파트 현관에서 다섯 걸음 거리의 엘리베이터로 주차장까지 내려와 자동차를 타고 이곳까지 달려온 필자는 외양포뿐만 아니라, 지붕의 색깔로 내 집과 이웃집을 구별하는 이곳의 불편함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주민들은 괜찮다고 한다. 그래도 겨우 칸막이로 집을 구분하는데, 서로 간 소음으로 인한 불편함이나 불상사는 없었을까?

“그런 거는 서로 이해를 해야지. 그런 것도 이해 못하면……, 우리 집 옆에 내보다 더 어르신이 계셨거든. ‘이 사람아, ○○ 즈그 아부지, 싸우지 마라~’ 마 그 정도 하는 거지.”

이 정도의 이해심이라면 더 없이 화목한, 말 그대로 ‘공동체’였겠다.

“옛날엔 다 그랬지. 지금은 살기가 삭막하지만, 옛날에는 얼마나 정이 도타웠다고. 우리 어머니 계실 때는 나이 많은 사람들 다 우리 집에 와 가지고, 군불 뜨시게 넣어 놓으면 모여가 놀고…….”

그러나 외양포 주민들 역시 옛집이 좋아서 서너 집이 한 지붕을 인 채 해방 당시의 모습 그대로 살아온 것이 아니다. 고향 마을을 일본에게서 되찾았을 뿐, 마을의 집과 땅은 여전히 국방부 소유로 되어 있고, 주민들은 집세를 꼬박꼬박 내고 있다. 집의 내부 수리는 가능하지만, 외관을 고치거나 타 건물을 가설하거나 마을 길을 넓히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게 불편을 감수하고서 이제나저제나 불하될까 숨죽이며 기다려온 세월이 자그마치 70년이다.

“내 땅 같으면 이래가 있을 끼요? 다 새로 지었지.”

[외양포 할아버지, 할머니의 꿈]

해방 후 주민들의 땅으로 돌아온 듯 했던 외양포가 어떻게 다시 국방부의 소유가 되었을까? 외양포에 ‘징용배’를 타고 군인이 처음 나타났던 날을 옹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6·25 전쟁이 나고 해군이 들어왔더만요. 해군 소령이 내려서 이 산을 한번 슥 둘러보고는 고마 딱딱딱 팻말을 집집마다 갖다 붙이는기라. 그 이후부터는 해군이 사용하였다 아입니까.”

당시는 전시였으니까, 전쟁이 끝나면 주민들에게 불하될 것이라 믿고 기다렸다. 그러나 휴전 이후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1961년인지, 1962년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해군이 한 차례 측량을 하면서 나무도 많이 베어 갔다. 오랜 군부 통치에 억울해도 부당하다는 얘기도 못해 봤다. 본래 집 모양에 조그만 가건물이라도 더 잇대어 지으면 불법이라고 벌금 물리고 철거당하기 일쑤다. 이렇다보니, 공무원과의 실랑이도 여러 번이었다.

외양포 주민들은 그동안 관계 요로에 청원도 많이 하였다. 군부 통치가 끝나고 민주화 이후 한때 국방부와의 불하 논의가 진전된 적도 있었다. 해군 본부에서도 회신이 와서 서류를 갖추고 있는 중이니 조만간 처리가 될 것이라 하여 모두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정권 교체 와중에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불과 2~3년 전에도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몰려가 각처와 면담을 했지만,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젊은 사람은 마을을 다들 떠났다. 마을에 콩·고추 등 밭농사도 조금 하지만, 이는 소일거리일 뿐, 소득원이 되지는 못한다. 70대 이상은 젊은 시절 모아 놓은 재산을 까먹거나 자식들에게 조금씩 용돈을 받아 생활하고, 60대 이하는 그래도 죽으나 사나 바다에 그물을 친다. 그러나 이 역시 거의 습관일 뿐, 바다도 예전의 바다가 아니고, 어업 역시 예전의 어업이 아니다. 가덕도 어딜 가나 바다에 고기가 없다는 하소연이다.

부산광역시에서도 외양포에 대해 여러 가지 계획이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그러나 이 역시 관가에서 떠도는 소문일 뿐 현실화될 지는 미지수다. 실례로 교통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외양포에서부터 도로 공사를 시작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도 여러 해 전인데, 건의는 지속적으로 하고 있지만 언제 이루어질 지 요원한 상태다.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가덕도의 가장 뜨거운 화제 신공항 문제를 여쭈어 보았더니, 필자가 듣기로 가장 소박하고도 절실한 답변을 내놓는다.

“우리 주민들의 소원은 개발보다는 첫째로 내 땅이라도 한번 만들어 보는 겁니다. 이날까지 산 게 그거 바라고 살았는데, 이리 늙도록 여태 불하도 안 되고……, 대항 같으믄 입장을 말하겠지만, 우리는 내 땅이 아니니까 신공항이다 뭐시다 그거 넘어다 볼 거 있어요?”

누구에게나 고향은 소중하고 그리운 존재다. 그러나 이 궁벽하고도 기구한 어촌 마을의 노인들은 자신들의 한평생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고향을 선물하지 못한 것이 가장 한스럽다. 노인들의 마지막 말이 오래오래 가슴에 남아 곱씹어진다.

“아버지 우리는 집도 한 채 없습니까, 땅도 하나 없습니까? 아버지로서 이것이 얼마나 억울합니까? 내가 나이가 75세 할아버지가 됐는데, 만약 대항에 살았다면 내 재산 하나가 없었겠습니까? 집도 있고 땅도 있고 다 있을 낀데. 여기 있는 사람들도 못 나간 게 전부 부모들이 들어와 가지고 개간해 놓은 땅 언젠가는 불하되겠지, 그거 하나 생각하고 지금까지 산 거 아입니까? 옛날에 우리 선조들이 뺐긴 땅, 인제는 고마 나라에서 주민들한테 돌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