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503 |
---|---|
한자 | 露日戰爭 |
영어의미역 | Rosso-Japan War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차철욱 |
[정의]
1904~1905년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부산 등에서 벌인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
[역사적 배경]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러시아를 비롯한 서방 세계는 일본 전력의 확대를 경계하였다. 러시아는 조선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일본과 가까운 부산항으로 군사적인 진출을 시도하였다. 1896년 5월 러시아 함대가 부산항에 입항하여 영도의 조차권을 요구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동양 함대 소속 군함 3척이 부산 영도에 상륙한 일도 있었다.
1898년 1월 21일에는 러시아 함대가 영도에 상륙하여 나무를 심기위한 토지 매수를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산항에서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갈등이 증대되고 있었다. 양국 사이의 물리적 마찰도 현실화되고 있었다. 1899년 7월 11일 광복동에 있던 경판정(京坂亭)이라는 일본 요리점에서 러시아 해군 병사와 일본인 기생 사이의 다툼이 있었다.
다음 날 일본 신문들은 러시아 병사의 폭행을 과대 보도하면서 양국 사이의 갈등이 심각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1899년 11월 5일 광복동 서양 요리점인 송천정(松川亭)에서 러시아 병사들 사이의 싸움이 일본인과 충돌로 이어졌다.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은 1899년 개항장 거류지 부지를 둘러싼 마산포 사건에서 잘 드러났다. 러시아의 남진과 이를 방어하려는 일본 사이의 대립은 이 무렵 항시 존재하고 있었다.
[경과]
1904년 2월 일본군이 만주 여순과 인천의 러시아 군대를 공격하면서 러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조선에 주둔한 조선주차대(朝鮮駐箚隊)는 해체되고 일본 천황 직속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편성되어 부산을 비롯한 서울, 원산 등 조선의 주요 지역에 배치되었다. 일본군은 군사적으로 필요한 영토를 강제 접수하고, 군사 시설을 만들었다. 부산 주변인 거제도, 진해만 일대에 포대를 비롯한 각종 군사 시설을 설치하였다.
조선인 토지의 접수 과정에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군은 1905년 1월 진해만 부근에 요새 포병대를 계획하고 축성단을 파견하여 저도와 가덕도에 포대 공사를 완료하였다. 이곳에는 1904년 11월부터 12월 사이 일본 본토에서 이전해 온 부대가 관리하였다. 가덕도에 포대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토지를 강제 수용하였다. 농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일본군은 1904년 11월 23일과 28일 가덕면과 천성면의 조선 군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해 버리기도 하였다.
1904년 10월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발트 해를 출발하자, 부산항 주변에서는 러시아 함대와 전투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진해만의 독자적인 지휘계통을 확보하기 위해 1905년 4월 21일 일본 유수(留守)의 제4 사단에 진해만 요새사령부의 편성을 명령하였다. 이 부대는 5월 7일 가덕도 외양포에 상륙하여 한국주차군사령관의 예하에서 요새 포병 대대를 운용하면서 진해만을 방어하였다. 5월 27일 대한 해협에서 러시아 함대와 일본 함대의 전투가 벌어지기까지 군사 훈련을 진행하였다. 외양포에 상륙한 부대는 러일 전쟁 후 마산을 거쳐 진해로 들어가 해군사령부로 성장하였다.
한편 러일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 함대는 부산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상선 만주리아호를 체포하고, 러시아 관계 전신국을 봉쇄하였다. 러일 전쟁이 시작되자 군수 물자 이동을 위해 경부선의 부설이 빨리 진행될 필요가 있었다. 1904년 12월 27일 부산 초량에서 서울 영등포 사이의 공사가 완공되고, 1905년 1월 1일 개통식을 거행하였다.
[결과]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부산항에는 독립수비대 1개 중대가 주둔하고 거류민의 보호를 담당하였지만, 한국주차군이 창설되자 부산수비대는 여기에 예속되었다. 이전에 주둔중인 제12사단 제38연대 제12중대는 3월 12일 새로 온 동 사단 후비보병 제45연대의 제2중대로 교체되었다. 부산항에는 앞서 언급한 수비대 외 보수정에 군용 전신선 수비의 헌병대가 주둔하였다. 러일 전쟁 후 부산항은 일본군의 배치가 증가하였다.
조선을 지배하는 일본의 권리를 방해할 세력이 사라지면서 정세가 안정되자 일본인 상인들의 조선 진출이 증가하였다. 부산의 일본인 인구는 러일 전쟁 직전 1만 명 미만에서 전쟁 이후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직전에는 2만 명을 넘어섰다. 전쟁의 위험이 없어졌고, 경부선 개통과 조선 내륙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상권이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의의와 평가]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정치적으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정치적 군사적 안정에 따라 일본인들의 조선 이주가 증가하였다. 부산의 일본인이 증가하고 부산항을 매개로 하는 무역량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부산의 일본인 지배가 안정되면서 식민지 지배를 위한 사회 간접 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