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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484
한자 京釜線敷設
영어의미역 Construction of the Gyeongbu [Seoul-Busan] Railroad Line
분야 역사/근현대,지리/인문 지리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경부철도주식회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1년 8월연표보기 - 공사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04년 12월 27일연표보기 - 공사 종결
발생|시작 장소 영등포역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 1가
종결 장소 부산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4가 일대지도보기

[정의]

1901~1904년 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도가 일본에 의해 건설된 사건.

[개설]

경부선 부설은 일제의 조선 진출을 위한 기반 사업으로 1901년 8월 20일 영등포에서, 9월 21일 부산에서 일본 자본인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고 1905년 1월 1일 개통되었다.

[역사적 배경]

철도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엽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 대한 자본 수출의 대상이며 그들의 상품 수출과 원료 수탈의 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의 철도 부설도 열강들의 침탈 대상이 되었다. 일본의 경부선 부설은 1880년대부터 한국 침략론의 등장과 함께 구상되어 청일 전쟁기에 구체적인 실행을 보았다. 일본의 철도 부설 구상은 동북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의 철도 지배 경쟁과 시점을 같이 하고 있다. 1891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기공하고 영국이 이에 대항해 경봉(京奉) 철도를 착공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양국 세력 대립이 철도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간파한 일본은 경부 철도를 먼저 장악함으로써 일본의 세력 범위를 한반도까지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과]

일본의 경부선 부설 구상은 1894년 8월 20일 ‘조일 잠정 합동’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잠정적으로 경부선과 경인선을 양도받게 되었다. 그러나 경인선 부설권이 미국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에게 넘어가면서 일본은 경부선 부설권 획득을 위해 계속적으로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1898년 9월 ‘경부 철도 합동(京釜鐵道合同)’ 체결로 경부선 부설권이 일본에 정식으로 양도되었다. 일본은 경부선 부설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노선을 답사하였고 5차례 걸친 조사를 통해 노선을 결정하였다. 노선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제적인 측면과 경쟁 철도의 출현을 피하는 의미에서 서울에서 충청도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노선으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한국 철도 정책을 군사적 경제적 측면에서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철도 자본을 조달하기 위해 1896년 7월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경부선 부설을 위한 155명의 발기인을 모집하고 발기 위원 8명을 선출하여 발기인총회를 통해 회사 설립을 준비해 갔다. 1900년 10월 총회에서 가정관이 의결되고 인수 주수가 확정되면서 1901년 6월 자본금 2500만 원으로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정식 설립되었다. 자본금 조달은 일본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경부철도주식회사 간부들이 애국 공채를 파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2500만 원의 방대한 자본을 외채 도입 없이 달성할 수 있었다. 회사는 1906년 6월 30일 해산하여 국유화되었다.

철도 부설 공사는 발주자와 시공자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초기 시공에는 한국의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대한운수회사·부산토목합자회사·대한경부철도역부회사 등이 경부철도주식회사와 청부 계약을 맺고 경부선 부설에 참여하였다. 경부철도회사가 일본의 토건업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토건 회사에 청부를 준 것은 한국 정부 고관대작을 회유하고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을 완화시켜 철도 용지와 철도 노동자를 쉽게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면서 한국 토건 회사들의 자본 부족과 기술 낙후를 구실로 1년 만에 계약을 철회하고 점차 일본 토건 회사에 청부가 돌아갔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 국가 권력이 경부선과 경의선의 속성 건설을 주도하자 한국 회사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이후 일본 토건업에 종속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철도 부지를 무상으로 광점하려하였으나, 한국 정부와 민중의 반발에 부딪혀 그 결과 한국 정부의 양해 아래 공사에 필요한 용지를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수용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부산에 필요한 철도 용지를 초량 52만 8000㎡[16만평, 그 중 26만 4000㎡[8만 평]은 해면 매립 예정], 부산진 69만 3000㎡[21만 평]을 요구하였으나 한국 정부에서는 초량 정거장 16만 5000㎡[5만 평], 부산진 9만 9000㎡[3만평]으로 축소하였고 이것으로 합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토지 수용이 강압적으로 행해지면서 연선 주민들과의 충돌은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부산에서는 부산진과 초량 정거장에 편입된 민호의 훼파 문제를 둘러싸고 충돌이 발생하였다.

경부선 부설 기공식은 1901년 8월 20일 영등포에서, 9월 21일에는 종점인 초량 구관에서 거행되었다. 부산 기공식에는 이재완(李載完), 철도원 총재 심상훈, 동래 감리, 미국·영국·독일·청나라 각국 영사 등 300여 명이 참가하였다. 공사는 서울에서는 9월부터 시작되었고, 부산은 10월에 초량~구포 구간에서 착수되었다.

공사가 착수되면서 경부선의 종점이 된 초량과 부산 일본 전관 거류지 쪽을 연결하는 문제가 시급하게 되었다. 일본 전관 거류지 측은 부산에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일본 전관 거류지와 초량이 떨어져 있고 교통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초량~부산 간 철도 연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일 간 합의에 어긋나는 일로 결국 초량~부산 간 도로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1902년 12월 말 공사를 시작해 1903년 3월 준공을 하였다. 1908년 3월 부산역이 신설되기 전까지 이 길을 통해 우마차로 화물이 운송되었다.

1904년 12월 27일 서울 영등포에서 부산 초량 간 구간이 완성되었고, 1905년 1월 1일 영등포~초량 간 영업이 개시되었다. 5월 25일에는 서울 남대문 정거장[현 서울역] 광장에서 개통 기념식이 열렸다. 이로써 경부선 부설 공사는 종료되었다. 러일 전쟁 이후 조선에서 권력을 장악한 일본은 1905년 1월 경부선이 개통 후 1905년 말부터 초량~부산 간 철도 연장 공사를 시작하였다. 1908년 3월 부산역 부지와 임시 부산역을 완성하였고 1908년 4월 1일부터 초량~부산 간 영업이 시작되었다. 1908년 4월 18일에 초량역장이 폐지되고 부산역장이 겸직하게 되면서 경부선의 종점은 초량역이 아닌 부산역이 된 것이다. 1910년 10월 31일 영선산 착평 공사와 매축 공사로 조성된 부지에 부산역사를 건설해 이곳으로 역사를 이전하였다.

[결과]

경부선 부설로 서울과 부산을 잇고, 1905년 9월 11일에는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을 매개로 하여 경부 철도와 일본 철도를 연결하는 연대 운수가 개시되면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투가 용이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 10일에는 경부 철도와 군용 철도인 경의선[서울 용산~신의주간]의 연락 운행이 시작되었고, 11월 11일에는 군용 철도 마산포선이 개통되어 영업을 개시함으로써 군용 철도 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본에 의한 경부선 철도 부설은 한국의 주권을 유린하고 한국인들의 철도 건설 운동을 압살하는 과정이었다. 또 한국인들의 토지와 노동력 등 생산 수단을 강탈하여 한일 간의 민족 모순을 격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로 인해 철도 연선 주민들과 의병들은 일본군의 포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국권이 상실되는 날까지 반철도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경부선 부설은 단순히 일본의 민간 자본이 해외 투자의 일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일반 민중이 국가 권력과 자본가가 주도하는 ‘애국 공채적 자본 모집’에 열성적으로 결집한 국가적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이는 일본의 국가와 국민이 한국의 침략과 지배를 위해 어떻게 결집해 갔는지를 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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