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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465
한자 敵産家屋
영어의미역 Enemy’s Hous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대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 - 해방으로 적산 발생
관련 지명 부산 - 부산광역시 중구지도보기

[정의]

1945년 8·15 광복 이전까지 부산광역시에 남겨진 일본인 소유의 주택.

[개설]

적산(敵産)이란 본래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의 재산’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그들이 남겨놓고 간 기업, 토지 그리고 주택을 비롯한 각종 부동산과 동산류를 적산이라고 불렀다. 적산 가옥은 이들 가운데 일본인이 소유하였던 주택을 일컫는다.

[전개 양상]

적산 가운데에서 가장 가치가 크고 중요한 것은 물론 기업이었다. 그러나 수적으로는 일본인이 살았던 주택인 적산 가옥이 더 많았다. 미군은 1945년 8월 한국에 진주하였지만 몇 달이 지난 1945년 12월 6일에야 귀속 재산에 대한 명확한 처리 방침을 정하였다. 그 이전까지 미군정은 일본인의 사유 재산도 인정한다는 등의 혼선을 보였다. 그 와중에서 기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고 매매가 쉬웠던 적산 가옥은 접수망에서 많이 벗어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과거 일본인과 연고를 가진 자와 군정 시대에 고관이나 관리를 지낸 사람들, 그리고 쫓겨 가는 일인들에게서 염가로 적산을 인수하여 한몫을 잡으려는 자들의 소행 때문이었다.

부산에서도 이러한 부류들의 파렴치하고 매국노적인 행태에 대한 보도가 많이 보이고 있다. 일본인으로부터 집과 가구 등의 재산을 매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위를 이용하여 적산 가옥을 가로채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경상남도 관재처장을 지낸 김정(金靖)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김정은 관재처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알짜배기 집을 불법 불하하였다가 적발되었다. 또 미군의 신뢰를 이용하여 통역관들이 적산 가옥에 살고 있던 사람을 쫓아내고 자신의 것으로 한 사례도 있다. 그리하여 항간에는 부산부내에 있는 크고 깨끗한 집들은 전부 일본 사람이 살고 있던 건물인데, 해방 이후 대개 세도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이 건물들을 점거하였다고 쑥덕거렸다.

미군정의 귀속 가옥에 대한 파악이 부실하여 정확한 통계를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부산에서 발간되었던 신문은 부산 시내 일인 가옥이 약 1만 4천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해방 직전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이 6만을 좀 넘는 상태였고, 일본인의 호당 인구가 4명을 좀 넘는 상태였음을 감안하면 무주택자와 상가 및 사무실 등을 함께 고려할 때 신빙성 있는 수치라고 판단된다.

이처럼 불안정한 혼란을 틈타 모리배들과 권력자들이 적산 가옥을 차지함에 따라 해방 후 갑자기 늘어난 귀환 동포와 6·25 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의 수용에 요긴하게 사용되었어야 할 적산 가옥은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1946년 초에 이미 10만여 명에 이르는 귀환 동포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지만 이들은 기아와 숙소 부족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6·25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각지에서 몰려들었지만 전재민들은 몸을 의지할 집이 없어 방치한 방공호 등에서 지내야 했다.

귀속 재산은 1947년부터 조금씩 불하되기 시작했는데, 가옥은 조기 불하 대상의 하나였다. 가옥의 불하 시 귀속 가옥에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우선권이 주어졌다. 우선권 때문에 불법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적산 가옥의 점유 권리 매매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1949년 3월 정부는 남한 전체에서 문서 위조와 사기 행위로 소유권을 조작한 적산 가옥 3,000여 건을 적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불법 소유 적산 가옥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현황]

부산의 적산 가옥들은 당연히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지역에 주로 분포하였다. 일본인들만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광복동, 동광동, 부평동, 신창동, 대교동, 충무동, 보수동 등의 지역에 적산 가옥들이 많았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적산 가옥들은 지붕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수리되어 원형을 많이 잃었다. 지붕을 보고 일본인이 살았던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주택만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과거의 건물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는 동래 별장, 정란각, 대청동 부산 주교관, 수정동 일본 가옥[일맥문화재단 소속], 한성은행, 백산기념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의 건축 양식을 아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부산 최초의 개인 종합 병원인 초량동의 백제병원을 비롯하여 초량, 수정동, 부민동, 좌천동, 영주동 등에도 골목골목 적산 가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광동의 인쇄 골목 인근 그리고 남항 부둣가에서도 낡은 적산 가옥들이 있으며, 자갈치 시장남포동의 건어물 시장은 적산 가옥의 전시장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역사적 시간에 비하면 일본식 건축물은 거의 대부분 너무나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전국에서 일본인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부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산 가옥은 근대화와 한국 전쟁 및 이후의 급속한 공업화의 과정에서 도시 계획 개념의 세례도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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