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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23
한자 釜山近代産業-主軸-女性勞動者
영어의미역 Female workers for footwear, the principal item for the modern industry of Busan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용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0~1980년대
관련 기관/단체 진양고무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
관련 기관/단체 동양고무 - 부산광역시 부신진구 당감동

[정의]

1970~1980년대 부산 경제의 중추였던 신발 공장에서 근무한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

[조윤자의 외출]

주말 저녁 모처럼 조윤자는 친구들은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부산진구 초읍동에 사는 조윤자는 1955년 3월 11일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좌삼리에서 태어났다. 전후의 우리나라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소말리아보다도 못한 상황이었다지만, 그녀가 나고 자란 마을은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그녀가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 새마을 운동이 제법 진행된 1970년대 후반까지도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하루에 겨우 한 번 다니는 버스를 타려 해도 한참을 걸어 나가야 겨우 탈 수가 있는 그런 시골 마을이었다.

조윤자는 5녀 1남 중 장녀다. 당시 시골 마을 사정이 다들 거기서 거기였지만, 그녀는 장녀인 탓에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다. 당연히 고등학교에는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겨우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조윤자는 이웃 마을 총각과 결혼을 했다. 물론 어려운 형편 때문에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결혼 생활이 시작됐다. 그래도 10여 년 후 뒤늦은 결혼식을 올려 하얀 면사포는 써봤다. 합동결혼식이었지만 그날 조윤자는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약속 장소인 당감 시장 안의 한 아귀찜 집에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친구 한윤희[59]가 반갑게 조윤자를 맞이했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고 인사말을 나누는 도중에 또 다른 친구 박현숙[58]도 도착했다. 세 사람은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오랜 친구 사이다. 고향도 자라온 환경도 모두 달랐지만 셋은 진한 우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 그녀들이 처음 만난 곳, 지금처럼 친한 친구로 맺어준 곳, 그곳은 다름 아닌 신발 공장이었다.

1960~1980년대 수출 입국 한국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것은 부산의 신발 산업이었다. 부산 신발 산업의 기반이 다져진 것은 6·25 전쟁 이후부터였다. 전쟁 직후 피란민 등으로 풍부해진 부산 지역의 노동력이 신발 산업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부산 지역은 신발 산업에 적합한 기후 조건과 항구를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이 생산 기지를 한국으로 넘겨준 것도 부산이 신발 산업 입지의 최적지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 지역에는 해방 이후 말표태화고무[1945년], 왕자표국제고무[1949년], 범표삼화고무[1952년], 기차표동양고무[1953년] 등 이른바 1세대 신발[고무신] 공장들이 연이어 창업했다. 1949년 양태진(梁泰振)이 설립한 국제화학은 1950년대 후반에 이미 100개가 넘는 생산 라인을 갖추었고, 그의 아들 양정모(梁正模)는 1970년대 사상 공단에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상사를 재창업해 ‘프로스펙스’ 브랜드로 경쟁력을 갖췄으며, 양규모도 신발 업계에 뛰어들어 부암동에 진양화학을 세웠다. 1940~1950년대 부산 지역 재계를 주름잡던 김지태(金智泰) 역시 신발 산업에 진출하여 ‘범표’ 삼화고무를 창업하고, 1952년 범천동 일대에 대규모 공장을 세웠다. 동양고무는 1953년 현수명(玄修明)이 설립했으며, 아들 현승훈이 화승그룹으로 발전시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들 신발 공장들은 최고 근무 인원이 1만 5천 명을 넘을 정도로 부산 신발의 대표적인 간판 기업이었다.

부산의 신발 산업은 1960년대부터 싼 임금을 기반으로 당시 세계 신발 산업을 선도하던 선진국 일본과 본격적인 경쟁을 시작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에 납품하면서 신발 산업은 수출 산업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외화 획득이 가능한 산업으로 인정되어 정부에서 갖가지 특혜를 받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주문 물량이 대폭 증가하면서 대부분의 업체들이 생산 라인을 늘리고 공장을 크게 확장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발 1세대에 이어 경영 수업을 쌓은 2세대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나이키(Nike)’, ‘리복(Reebok)’ 등의 주문 생산이 시작되는 등 부산 신발 산업은 본격적인 도약기를 맞이했다.

바로 그 1970년대 부산의 신발 공장에서 조윤자와 친구들이 처음 만난 것이다. 당시 부산에는 서면 일대를 중심으로 부산진구부암동에 진양고무, 당감동에 동양고무, 가야동태화고무, 범천동삼화고무, 전포동대양고무와 보생고무, 동구범일동국제화학 등 대규모 신발 공장들이 몰려 있었다.

[신혼의 단꿈도 잠시, 부산으로 나오다]

조윤자보다 여섯 살이 많았던 그녀의 남편은 진안 시골 마을에서 이발 일을 했다. 마을에서 유일했던 이발소에는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20대 혈기 왕성한 남편은 시골에서 이발을 하며 지내는 생활을 무척이나 갑갑해 했다. 조윤자가 갓 스무 살이 되던 1974년 가을 첫 딸이 태어났다. 그 해엔 조윤자의 막내 동생이 태어난 해이기도 했다. 조윤자와 엄마가 같이 몸을 푼 것이다. 남편은 늘 시골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남편이 마음을 잡을 줄 알았지만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했고, 옆에서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조윤자는 늘 불안했다. 조윤자 자신은 그냥 시골집에서 아이 키우며 사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신혼이니까.

1976년이 다 저물어갈 무렵 아이의 큰엄마 언니, 그러니까 남편 형수의 언니 되는 사람이 동생을 만나기 위해 진안 시골 마을에 잠시 다녀간 일이 있었다. 그때 그가 남편에게 부산에는 대규모 신발 공장이 많은데 워낙 일감이 많아 늘 일손이 모자란다며, 신발 공장의 보수도 제법 괜찮고, 없는 사람 벌어먹고 살기엔 그만이라고, 지나가는 듯 말을 건넸다. 평소 시골에서 이발 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남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부산행을 결심했다.

남편은 일단 조윤자와 딸을 시골에 남겨둔 채 홀로 부산으로 떠났다. 가족이 모두 부산에 나가 살려면 방도 얻어야 했고, 무엇보다 시골에서만 살아온 남편에게 도시 생활은 일종의 모험이었기에 우선 혼자만 부산으로 떠난 것이다. 부산으로 떠난 남편은 부암동 진양고무에 취업했다. 거처는 공장 근처에 있던 형수 언니네 집에서 하숙을 하기로 했다. 당시 조윤자는 홑몸이 아니었다. 뱃속에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서너 달을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1977년 3월, 23살의 조윤자는 4살배기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낯선 부산 땅을 처음 밟았다. 남편이 부산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자 조윤자에게 부산으로 오라고 한 것이다. 조윤자 가족은 남편의 일터인 진양고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암동당감동의 딱 경계가 되는 언덕배기 동네에 달셋방[월세방]을 얻었다. 당시 그 동네에는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신발 공장에 일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진양고무 외에도 동네 근처에는 동양고무, 삼화고무, 국제화학, 태화고무 등 대형 신발 공장이 몰려 있었다. 중간 중간에 연지동 럭키화학 공장에 나가는 사람들도 제법 살았다.

동네에는 집이라고 해봐야 소위 하꼬방이 대부분이었다. 한 집에 보통 서너 가구가 들어와 사는데, 다들 손바닥만한 방 한 칸에 간이 부엌이 달린 방에서 월세를 내고 아이 두세 명씩을 데리고 살았다. 그래서 조그마한 집이라도 한 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하꼬방을 세놓아 제법 재미를 보던 시절이었다. 조윤자 가족이 얻은 월세방도 물론 전형적인 단칸방짜리 하꼬방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그 동네 사람들 중 태반이 신발 공장에 일하러 전라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낯설기만 하던 부산 생활에 적응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 해 여름, 둘째가 태어났다. 사내아이였다. 당시 진양고무에서 받은 남편의 월급은 4만 5천원 내외였다. 물론 잔업을 많이 했던 달은 여기서 약간 더 받기도 했다. 조윤자 가족의 부산 생활은 차츰 안정이 되어 갔다.

[신발 공장에 들어가다]

둘째 아이가 막 걸음마를 땔 무렵 조윤자는 신발 공장에 취직을 했다. 남편이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남편에게 심장병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조윤자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남편이, 또 동네 사람들이 죄다 신발 공장에 다녔기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신발 공장에 취직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다니던 진양고무에 취직해 일했는데, 이내 동양고무로 자리를 옮겼다. 남편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사실에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동양고무로 자리를 옮긴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시골에서 동생 금자가 부산으로 왔다. 신발 공장에는 10대의 나이 어린 여공들이 제법 많았다. 여공들을 위해 마련된 기숙사 같은 것은 없었다. 대부분 친척집에 얹혀살거나, 친척이 없으면 공장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어린 여공들은 별도로 공장 내 학생 반에 편성되어 오후 5시가 되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야간 학교를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공장 인근의 동평여자상업고등학교[현 부산미용고등학교]나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현 계성정보고등학교]에 많이 다녔고, 조금 멀지만 부산진여자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여공도 있었다. 학생 반 여공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남아 있는 성인 여공들이 동생들이 하던 일을 대신해서 작업을 마무리 했다. 학교를 가야 하기 때문에 학생 반 여공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있던 잔업에도 당연히 제외됐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를 얼마 못 다닌 조윤자는 어린 여공들처럼 자신도 야간 학교라도 다니고 싶었으나 결혼까지 한 입장이라 학생 반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학생 반 여공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금자는 낮에는 신발 공장인 사상 국제상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를 다녔다. 당시 국제상사에서 일하는 학생 반 여공들은 주로 구포여자상업고등학교[현 부산백양고등학교]에 많이 갔는데, 금자도 구포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조윤자 집에서 함께 살던 금자가 따로 살림을 차리고 나가면서, 그 아래 동생 영자와 경자, 그리고 조카 경희가 부산으로 나와 조윤자 집에 식구가 늘었다. 시골의 엄마를 대신해서 조윤자가 동생들을 맡아 키운 셈이다. 잠시였지만 심지어 조카마저도 말이다. 조윤자는 살던 곳 인근에 방 2칸짜리 집을 새로 얻었다. 다 큰 동생들과 함께 사는 것이 단칸방 가지고는 도저히 감당이 안됐기 때문이다.

[한윤희와 박현숙을 만나다]

오후 5시면 일을 마치고 학교로 가는 어린 여공들을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봤던 건 조윤자만이 아니었다. 같은 생산 라인에서 일하던 그녀의 단짝 한윤희도 마찬가지였다. 한윤희는 부산진구 당감동 화승 아파트가 생길 때부터 지금까지 그곳에서 줄곧 살고 있다. 이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그 자리에는 동양고무[화승] 공장이 있었다. 한윤희에게 동양고무는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한윤희가 태어난 곳은 서구 아미동의 옛날 화장장 자리에 있던 작은 아파트 바로 아래였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집 인근에서 연탄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서 집에 여유가 있는 편이었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자랐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연탄 공장 운영이 여의치 않게 되면서,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녀가 열 살 언저리에 연탄 공장의 문을 닫았다. 식구들은 인근 부민동으로, 또 부평동으로 여러 번 이사를 다녀야 했다.

어릴 때는 주변의 친구들보다 상대적으로 잘 살았던 그녀였지만,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학교도 중학교밖에 나오질 못했다. 당연히 고등학교까지, 또 대학까지도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였다.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워도 너무 부러웠다.

한윤희가 줄곧 살았던 서구 일대를 벗어난 건 결혼과 함께 당감동으로 시집을 오면서 부터다. 그때가 1978년으로 24살 한창 예쁠 나이였다. 하지만 달콤한 신혼을 즐길 여유가 그녀에겐 없었다. 남편 역시 여유 있는 집안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결혼 후 먹고사는 문제에 시달리다 보니 그녀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한윤희는 신발 공장에 나가기로 했다. 당시 그녀의 신혼살림이 있던 당감동, 부암동 일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신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녀의 남편 역시 신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신발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한윤희는 집 바로 앞에 있던 동양고무에 다녔다. 회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그녀는 동양고무에서만 줄곧 일했다.

진양고무를 그만두고 동양고무에 들어간 조윤자는 그 곳에서 동갑내기 한윤희를 처음 만났다. 그때가 1978년 가을이었다. 박현숙을 만난 것 역시도 그해 동양고무에서다. 조윤자와 한윤희보다 한 살 아래인 박현숙의 고향은 전라남도 나주다. 고향 나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박현숙는 중학교를 마치고 인근의 큰 도시 광주에 돈을 벌러 나갔다. 그녀는 호남 굴지의 면방직 회사인 일신방직에 취직했다.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적금을 부어가며 약간의 돈도 모았다.

1977년 22살 되던 해에 결혼을 한 박현숙는 다니던 방직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고향 나주로 돌아왔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부부는 나주에서 화장품 판매 대리점을 차렸다. 하지만 고향에서 화장품 판매 대리점을 차린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당시의 나주는 작은 도시였기에, 생각만큼 화장품이 팔리지 않았다. 재고는 쌓여 가고 경제적 어려움은 점점 심해졌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떠났다. 고향 사람들 중에 부산에 가서 신발 공장에 취직한 사람이 여럿 있었기에 남편도 부산의 신발 공장으로 일을 하러 나간 것이다. 고향에서 혼자 화장품 대리점을 꾸려 나가던 박현숙은 결국 개업하고 채 반년을 못 버티고는 화장품 대리점을 정리했다. 남편이 부산으로 떠난 이후 1년 가까이 부부가 떨어져 살다가, 주변 정리를 마친 박현숙도 결국에는 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신발 공장에 취직을 했다.

[신발 공장의 하루 일과]

동양고무의 출근 시간은 7시 50분까지였다. 다른 공장들도 비슷했다. 조윤자는 매일 아침 걸어서 출근했다. 공장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출근길은 빠른 걸음으로 20~30분 정도면 충분했다. 노동자들이 출근 후 간단한 작업 준비를 하고 나면 8시 정각부터 오전 작업이 시작되었다. 오전 작업이 시작되면 점심시간까지 노동자들이 쉬는 시간은 없었다.

12시부터 시작되는 점심시간이 되면 공장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구내식당이 노동자들로 넘쳐 났다. 매달 초 회사에서 식권을 지급 받았는데, 그 값은 월급에 다 포함되어 있었다. 구내식당 밥은 제법 괜찮게 나왔다. 배고픈 시절이었으니 무엇인들 맛이 없었겠냐만, 힘들게 일하고 나서 먹는 밥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하지만 12시 40분부터 오후 작업이 시작되기 때문에 서둘러 식사를 해야 했다.

그래도 오후 작업은 4시부터 10분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 10분 동안 동료들과 약간의 수다를 떠는 것이 조윤자와 친구들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노동자들은 더러는 그늘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요즘처럼 점심시간이나 휴식 시간에 공장 한쪽에서 공을 찬다거나 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는 없었다. 단 10분의 휴식 시간이지만 하던 작업을 미처 마치지 못했다면 정리를 하고 난 후에야 쉴 수가 있었다. 생산 라인을 오래 멈출 수 없어 휴식 시간은 매우 철저했다. 노동자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각 라인의 작업반장이 대신 그 작업을 수행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작업반장은 모든 공정을 소화할 수 있어야 했다.

퇴근 시간은 오후 6시 30분이었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면 당연히 퇴근을 하고 집에 가야 하지만, 한 달에 절반 이상은 제시간에 퇴근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잔업 때문이었다. 잔업은 보통 저녁 9시까지 하는데, 그래도 잔업 수당이 150%가 나왔기 때문에 대부분 군말 없이 묵묵히 잔업에 임했다. 주문 물량이 갑자기 증가하거나 수출 선적이 임박하거나 할 때면 철야 작업도 수시로 했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철야 작업을 했다. 철야 작업은 보통 다음날 새벽 5시까지 했다. 철야 작업이 있는 날이라 하더라도 출근 시간은 아침 7시 50분까지였다.

조윤자는 항상 출근하기 전에 밥을 지어 놓고 집을 나섰다. 철야 작업이 있는 날은 새벽 5시에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 밥을 해 놓고 다시 공장에 출근했다. 아직 나이 어린 조윤자의 아이들은 엄마가 아침에 밥을 해 놓지 않으면 굶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동생과 남편이 집에 있었지만, 동생이나 남편은 밥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조윤자는 집에서 밥을 해 놓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해서 공장 구내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아침밥도 회사에서 식권이 지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철야 작업을 한 후 잠 한숨 못자고 출근해서는 또다시 고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한 켤레의 신발이 완성되기까지는 노동자들의 손을 무려 424번을 거쳐야 했다. 노동자들이 신발을 만드는 공정을 보면, 우선 남자들이 신발 갑피를 원단에서 프레스 기계로 찍어냈다. 공장 내에서 큰 사고는 그리 많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을 잃는 사고는 심심찮게 일어났다. 그만큼 위험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프레스 작업은 남자들이 전담했다. 신발 밑창 등에 사용할 고무 가루를 배합하는 일 역시 남자들이 전담했다. 왜냐하면 작업장 안은 고열과 역한 고무 냄새, 그리고 가루가 날리는 등 작업 환경이 매우 열악해서 여공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생산 라인의 여공들이 했던 주요 작업을 보면, 제일 먼저 재단된 갑피에 나이키나 리복 등의 상표와 문양을 미싱[재봉틀] 또는 나염하는 작업을 한다. 이렇게 상표를 부착한 갑피를 신발을 만드는 틀[골]에 씌운 후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 먼지를 제거하는 선처리를 한 다음, 신발 앞코의 모양을 잘 잡은 후 갑피와 밑창에 본드 칠을 하고 건조시키는 작업을 2~3회 반복한다. 이 작업 역시 접착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 후 갑피와 밑창을 접착하여 조립하고 굵은 실로 박음질을 한 다음 고열로 압축을 하면 주요 공정은 끝이 난다. 이제 골에서 조립한 신발을 빼내서 안창을 끼우고 코 부분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종이를 끼워 넣고 신발 끈을 끼우고 포장을 하면 신발 한 켤레가 완성이 된다.

운동화의 대명사격인 ‘나이키’라는 브랜드의 첫 제품이 출시된 것이 1971년이었다. 1970년대 나이키는 부산 지역 신발 공장에 하청[OEM]을 주어 제품을 생산했다. 나이키의 하청을 받은 신발 공장들은 이후 20여 년간 호황을 누렸고, 한때는 전 세계 나이키 운동화의 90%가 부산에서 만들어졌다. 따지고 보면 나이키가 거대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노동자들의 섬세한 일솜씨 덕에 우수한 품질의 제품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즉 부산 지역 신발 공장의 여공들이 나이키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셈이다. 리복 등 여타의 유명 브랜드 역시 나이키와 마찬가지로 부산의 여공들 손을 거쳐 세계로 나갔다.

[공장 내 작업 환경과 여공들]

여공들은 취직할 때 회사에서 지정한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다. 신발 공장의 특성상 고무와 본드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공장에는 환기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또한 공장 내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양호실도 갖춰져 있었다. 경력이 오래된 여공들이야 공장의 작업 환경이 익숙하다고는 하겠지만 신참은 낯설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들 금세 적응해 나갔다.

여공들에게 작업 환경보다 더 두려운 존재는 관리자들이었다. 작업반장은 같은 노동자였으나 회사 측의 입장을 대변하기 일쑤였다. 드러내 놓고 하는 공장 내 폭력은 거의 없었으나 욕설 등의 폭언은 비일비재했다. 요즘 같으면 성희롱에 해당할 말들도 서슴없이 나왔다. 다들 쉬쉬하고 넘어갔으나 여공들의 몸에 손을 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여공들끼리는 잘 지냈다. 지역 차별이 극심하던 시절이라 호남 출신인 조윤자나 박현숙은 지역 차별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크게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공장에 타 지역 출신 사람들, 특히 호남에서 온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남 사람이 없으면 공장이 안 돌아갈 정도로 호남 출신이 여공들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오히려 부산 사람이 소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장에는 대체로 중학교 정도를 마치고 온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공들이 많았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공장에 온 겨우 열서너 살의 어린 여공들도 제법 있었다. 어린 여공들은 비교적 작업이 수월한 미싱 파트에서 주로 일했는데, 조윤자의 조카도 14살에 고향 진안을 떠나 부산의 신발 공장에 취업했다. 공장에 젊은 미혼 여공들이 워낙에 많다 보니 장가 못간 남자들이 짝을 찾는다며 신발 공장에 취직해 들어오는 코미디 같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또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여공들도 많았기 때문에 공장에는 결혼 소식이 끊이질 않았다.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결혼식에 하객으로 간다거나 축의금을 따로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개는 같은 생산 라인의 동료가 결혼을 하면 십시일반해서 축의금을 건넸는데, 보통 이천 원 정도씩 걷어서 냈다. 그래도 결혼식을 올리는 여공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많은 여공들이 결혼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합동결혼식을 치러 줬다. 조윤자가 하얀 면사포를 쓴 것도 바로 동양고무 사내 합동결혼식에서였다.

아무래도 여자들이 많다 보니 여공들끼리 계도 많이 했다. 주로 금반지 계를 많이 했는데, 대부분 다달이 1~2개씩은 꼬박꼬박 곗돈을 부었다. 요즘처럼 사내에 별다른 모임이 없던 시절이라 계를 하며 친목도 다졌다.

당시는 노동자의 놀이 문화나 여가 활동이 별로 없었다. 퇴근 후 동료들끼리 소주 한 잔 마시러 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1970년대는 그런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한 번씩은 마음 맞는 동료들과 통닭을 먹으러 서면에 나갈 때는 있었다. 정말 어쩌다 한 번씩 말이다. 처녀 총각들은 가까이 있던 삼일, 삼성, 보림 극장에 영화를 보러 나가는 일도 가끔씩 있었다.

여유가 없기는 공장 측도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회사 창립 기념일이 되면 직원 체육 대회 등의 행사를 많이 하지만 당시는 그런 것이 없었다. 다만 직원들에게 ‘축, 동양고무주식회사 창립 기념’이라 적힌 수건 한 장씩은 거르지 않고 꼭 나눠 줬다.

특이한건 때때로 공장에서 돼지고기를 전 직원들에게 나눠 줬던 일이다. 고기를 타오는 날은 맛있게 고기반찬을 먹는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조윤자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빨랐다.

[아이 낳아 키우고 집안일 도맡아 하고]

당시 신발 공장에 일하던 사람들 중 다수는 미혼의 젊은 여공들이었다. 결혼을 한 여공들도 많았지만 임신해서 배가 나온 여공을 공장에서 보는 경우는 없었다. 출산 휴가의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여공이 임신을 하게 되면 바로 일을 그만두고 퇴사했다. 하지만 퇴사한 여공들 상당수가 출산 후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 재취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윤희도 아이를 가진 후 퇴사했다가 몇 년 후 동양고무에 다시 취업했다. 둘째 딸의 돌이 지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1984년이었다. 조윤자는 아이들을 모두 낳고 난 후 공장에 들어왔기 때문에 중간에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퇴직한 경우는 없었다. 그건 박현숙도 마찬가지였다.

부모가 신발 공장에 일하러 가고 나면 집에 남은 아이들은 지들끼리 모여 놀았다. 예닐곱 살 먹은 누나가 동생을 보고, 윗집 아이가 아랫집 아이를 봐주고 하는 식이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공장 안에 탁아 시설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부모들은 집에 남겨둔 아이들이 걱정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겨진 아이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조윤자 이웃에 살던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은 일도 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공장에서 퇴근을 하고 나서야 제 아이가 죽은 소식을 듣고는 실신을 했다. 조윤자의 둘째 아이도 당감동 복개천 다리에서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구해 줘서 천만다행이었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아이들끼리 싸움도 많이 했다. 주변에 싸움을 말리거나 중재해 줄 어른이 없으니 싸우다 다치기 일쑤였다. 보호자 없이 놀다가 다친 아이는 더 많았다. 박현숙는 연년생인 아들과 딸이 있다. 큰 아이인 아들은 이웃집 아이와 싸우다 돌로 머리를 찍어 몇 바늘을 꿰매기도 했다. 퇴근하고 나서 그 소식을 들은 박현숙은 다친 아이와 부모를 찾아가 빌고 또 빌었다. 작은 아이는 국민학교를 7년 동안 다녔는데, 오빠가 학교에 가면서 매일 동생을 데리고 다닌 터라 입학도 하기 전에 오빠를 따라 1년간 학교를 다닌 것이다. 때로는 교실까지 오빠를 따라 들어갔지만 대개는 운동장이나 학교 곳곳에서 놀다가 쉬는 시간 종이 치면 교실로 달려가서 오빠랑 놀았다.

그나마 다행인건 일요일에는 출근하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웬만해선 일요일은 잔업도 철야도 하지 않고 쉬었다. 요즘처럼 토요일을 쉬지는 않았다. 격주로 나누어 한 주는 평일과 똑같이 근무했고, 한 주는 오전만 작업하고 퇴근했다. 조윤자는 일요일마다 그간 밀린 집안일을 하기 바빴다. 세탁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식구들의 일주일치 빨래를 한꺼번에 하고 나면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일요일이라고 해서 쉴 여유가 없었고, 어쩌면 평일에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해야만 했다.

[명절과 월급날]

명절은 더 바빴다. 고향에는 추석과 설 고작 일 년에 두 번밖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절이 되면 회사에서는 통근 버스를 이용해 직원들의 고향 길을 도왔는데, 호남 출신이 많아서 대부분의 버스가 호남 각 지역에 배정되어 특별 운행을 했다. 특별 운행 버스에는 노동자 본인뿐 아니라 식구들이 함께 타고 고향으로 갈 수 있었다. 조윤자 식구들도 이 버스를 타고 고향에 갔다. 명절 보너스 받은 돈으로 산 선물을 한 아름 들고서 말이다.

명절을 쇠고 난 후에는 이직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각 신발 공장들마다 보수와 대우에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신발 공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았지만 보너스와 연휴 등 노동자 입장에서는 명절이 이직을 위한 절호의 기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명절에 운행되던 특별 운행 버스도 명절 후 이직을 최소화하려는 공장 측의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워낙에 일손이 달리던 시절이라 공장 관리자들은 이직자가 생기면 인원 충원에 골머리를 앓았다. 관리자의 최대 임무는 무엇보다 결근자, 나아가 이직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관리자들은 무단결근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노동자의 집에까지 찾아가 데려오기도 했다. 실제로 조윤자와 같은 작업 라인에서 일하던 한 여공이 출근을 하지 않아 관리자가 여공의 집에 찾아갔다가 둘이 서로 눈이 맞아 대낮부터 바람이 나는 일도 있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조윤자는 매달 10일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은 아이들 자장면 사 먹이는 날, 바로 동양고무 월급날이었다. 그런데 아이들보다 남편이 자장면을 더 기다리고 반겼다. 때때로 중국집 배달이 늦어지면 남편은 곧잘 화를 냈다. 아이들은 이러다 행여 자장면을 못 먹게 되지나 않을지 아빠 눈치를 살피느라 신경이 곤두섰다. 가끔은 자장면 대신 통닭을 사 먹기도 했다. 덤으로 끼워 넣어 준 네다섯 조각의 닭똥집을 서로 차지하려고 아이들은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싸웠다.

1970년대 후반 조윤자가 진양고무에 처음 취직해서 받았던 월급은 4만 원 남짓이었다. 월급은 갑근세, 주민세, 의료 보험, 재형저축 등의 각종 공제를 한 후 누런색 월급봉투에 담아서 지급했다. 생활비와 아이들 학교 보내는데 돈을 쓰고 나면 저축은 엄두를 못 냈다. 내 집 마련의 꿈은 그야말로 꿈이었다.

조윤자가 동양고무로 옮긴 후에도 1980년대 중반까지 월급은 그다지 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오르다가 1987년 6월 민주 항쟁과 뒤이은 노동자 대투쟁 이후 크게 올랐다. 1990년을 전후한 무렵 조윤자의 월급이 60만 원 정도였으니, 이전에 비한다면 엄청난 임금 상승이었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는 상여금도 제법 많이 받았다. 설과 추석 명절 보너스, 4월 춘계 보너스, 연말 김장 보너스 각 150%씩 총 600%의 상여금을 받았다.

이전에 비해 임금은 크게 상승되었지만 공장 내의 노동 여건은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윤자는 1980년대 후반 파업에 참여해 이틀 정도 작업 거부를 한 경험이 있지만 노동 운동에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회사와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 그건 한윤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윤자와 한윤희의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었던 터라 한참 돈이 필요한 시기였다. 아이들이 우선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적어도 아이들을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을 시켜야 했다.

요즘처럼 회사에서 자녀들의 학비를 별도로 지원해 주지는 않았지만,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학자금 대출의 형태로 학비 지원을 했다. 학비가 제법 목돈이었기 때문에 사내 학자금 통장을 개설해 회사에서 대출을 받고, 이를 매달 급여에서 공제해 갚아 가는 방식이었다. 학업 성적이 우수한 노동자의 자녀에게는 사내 장학금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물론 장학금을 받는 경우가 흔치는 않았다. 그래서 사내 장학금을 2번이나 받은 아들 자랑을 할 때면 박현숙의 어깨가 한없이 우쭐해진다.

[신발 공장 문을 닫다]

부산 지역 신발 공장들이 최고 생산 실적을 보였던 1986년에 국제상사가 1만 5,700명의 종업원을 보유한 것을 비롯해 동양고무 1만 2,650명, 삼화고무 9,200명, 태화고무 8,600명, 진양고무 7,000명 등 5대 업체가 모두 5만 4,000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동양고무를 거쳐 풍영화성 전무 출신의 신발 전문가였던 김병춘이 설립한 세원노무현 후원자로 알려진 박연차가 설립한 태광실업 또한 비록 후발 주자였지만 5대 업체에 버금가는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부산의 신발 산업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과 같은 저생산성의 운명을 맞게 되어 뚜렷한 하락세를 나타냈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 1980년대 후반기에 노동 운동과 임금 인상 압력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삼화, 진양, 태화, 동양 등 대규모 회사들이 도산했고,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국제상사도 생산 라인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92년 정부에서 발표한 ‘신발 산업 합리화’ 조치는 부산의 신발 산업을 정리의 대상으로 인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탈(脫) 부산 러시를 이룬 부산 신발은 중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로 생산 기지를 대거 이전했다. 이로써 부산 신발은 30여 년간의 세계 1위의 명성을 뒤로 하고 중국 등 후발국에 그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다.

부산 신발의 몰락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부산신발은 나이키 등의 하청 업체로서 주문 생산만 할 줄 알았지 세계적인 브랜드화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대형 신발 회사들이 프로스펙스, 르까프 등 독자 브랜드를 가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브랜드들이 물량을 대폭 줄이거나 아예 동남아 등지로 하청 업체를 교체해 버린 것이었다.

부산 지역의 5대 신발 공장에 다니는 인원만 하더라도 5~6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는데, 5대 업체가 한꺼번에 줄도산하면서 상황이 한순간에 급변했다. 노동자들이 연일 시위하며 공장의 폐업을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윤자와 친구들이 일하고 있던 동양고무에서의 노동 쟁의는 노동자 대투쟁 때보다 공장이 폐업을 결정한 이후에 더 많이 발생했다. 하지만 공장 문을 닫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공장이 폐업을 결정하자 누구는 운전을 배우러 다닌다 하고, 누구는 가게를 차린다 하며 다들 제 살길 찾아 나섰다. 그러는 사이에도 한쪽에서는 폐업을 막고자 연일 시위를 했다. 특히 폐업 결정 얼마 전에 작업반장이 되었던 박현숙는 노조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결국 동양고무 공장은 문을 닫았다. 1970년대 말부터 폐업을 할 때까지 줄곧 동양고무에서 일했던 조윤자는 공장이 폐업할 때 회사로부터 퇴직금과 약간의 위로금을 받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작은 규모의 다른 신발 공장에 취업을 했다. 한윤희의 남편은 그때 운전을 배워 택시를 몰았다. 때문에 그녀는 한동안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반면 조윤자와 마찬가지로 박현숙의 남편도 몸이 아파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박현숙 역시도 돈을 벌기 위해 또 다른 신발 공장에 들어갔다. 조윤자와 함께 일하던 여공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후로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래도 한윤희와 박현숙은 지금까지 서로 연락하며 절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여전한 신발 공장 여공 조윤자]

부산 신발 산업의 몰락은 곧 부산 경제마저 후퇴시켰다. 뒤늦게나마 부산광역시 등이 신발 산업 육성을 위한 각종 계획을 수립하고 지원에 나선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부산 신발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된다. 5대 업체의 몰락 이후 국내에서 노동 집약적 산업인 신발이 도저히 경쟁력을 갖출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대형 업체들을 중심으로 해외 이전을 본격화했다. 대표적인 기업이 태광실업과 세원이다.

태광세원 등의 2세대 신발 업체가 동남아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부산에는 성호실업, 트바스 등 이른바 3세대 신발 업체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소위 OEM 체제를 벗어나 르까프와 프로스펙스처럼 트렉스타, 비트로 등의 독자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출현시켜 새로운 중흥기를 모색하고 있는데, 일반 운동화 주문 생산보다는 등산화, 테니스화, 사이클화 등을 자체 개발하여 특수화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5대 업체가 도산하고 태광세원 등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1990년대 이후 부산에는 중소 규모의 신발 업체들만 남게 되었다. 주로 사상 공단 감전동 일대에 중소형 신발 공장이 많았다.

조윤자와 친구들은 1992년 무렵 당감동에 위치한 삼원사라는 신발 공장에서 일했다. 르까프, 휠라 등의 브랜드를 주문 생산하는 종업원 150명 정도의 소규모 공장이었는데 제법 잘 돌아갔다. 그런데 큰 공장은 생산 라인에서 정해진 한 가지 작업만 하면 됐지만 작은 공장은 여러 가지 작업을 모두 소화해야 했다. 그래서 동양고무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작업 강도가 세졌음에도 오히려 급여는 더 작았다. 그 때문에 큰 공장에 비해 이직률이 높았다. 조윤자도 여러 번 회사를 옮겼다.

조윤자와 한윤희는 이제 환갑이 다 된 나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신발 공장에 나가 일을 한다. 자식들이 모두 장성해서 결혼을 했고, 이제는 내 집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별로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은 일하는 것이 집에서 그냥 쉬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지금 다니는 공장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페이스, 콜○ 등의 아웃 도어 브랜드를 생산하고 있다. 공장에는 동남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법 있지만 인력난이 매우 심하다. 아마도 조윤자와 한윤희가 부산 신발의 마지막 세대가 될 듯하다. 지금 그녀들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만 봐도 대부분이 50~60대의 할머니 노동자들이다.

박현숙는 얼마 전에 오랫동안 준비한 자신의 신발 가게를 개업했다. 그녀도 작년까지 계속해서 신발 공장에 다니면서 일했다. 요즘은 유명 브랜드의 제품이 아니면 잘 팔리지 않지만 박현숙는 중간 도매를 거치지 않고 공장에서 바로 신발을 떼어 오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삼는다. 물론 중국에서 생산된 초저가 신발도 취급을 한다. 당연히 품질이 형편없다.

친구들과 만난 박현숙는 일회용도 아니고 어떻게 저런 신발을 만들어 팔 생각을 하냐며, 우리가 만들었던 신발의 품질은 정말 세계 최고라 자부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조윤자와 한윤희도 옆에서 맞장구치며 거든다. 사십 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들이 만든 신발은 과연 몇 켤레나 될까.

[참고문헌]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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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1 띄어쓰기 수정 해방 이후말표태화고무 -> 해방 이후 말표태화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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