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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신도시를 바라보는 토박이의 갈등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70
한자 鼎冠新都市-葛藤
영어의미역 The conflict of a Busan native who watch the Jeonggwan New Town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윤정

[나의 살던 고향은]

고향 마을 언덕에 한옥을 짓고 있는 A씨를 만난 것은 7월로 넘어가는 햇살이 제법 덥게 느껴지던 때였다. 신도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울을 오르내리며 배운 기술로 혼자서 한옥을 짓고 있는 A씨에게 고향 정관은 어떤 곳이었을까?

“정관요? 정말 말 그대로 꽃 피는 산골이었어요. 울긋불긋 꽃 대궐, 그 말이 딱 맞았어요. 그때는 들판에, 산에 꽃이 정말 많았습니다. 진달래, 철쭉, 복사꽃, 산벚꽃, 마 그런 꽃들이 봄 되면 온 산을 덮는데, 그야말로 꽃동네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관 출신 문인이자 전 면장 B씨의 글에서도 정관의 옛 이야기 속에는 꽃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유년 시절, 참꽃을 다발로 꺾어 와 빈 병이나 작은 단지에 꽂았다. 참꽃을 많이 따 먹어 붉다가 시퍼래진 입술과 혀, 또 참꽃 술이나 주스를 담근다고 꽃잎을 딴 추억이 사진첩으로 가슴 한쪽에 있다. 또래 계집애에게 아름 참꽃을 바친 머슴애도 적잖으니 참꽃이 우리 가슴을 곱게 물들인 게 틀림없다.

정관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꽃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다.

담홍색 산복사꽃은 야산에 많고 잠자리 날개같이 엷은 줄딸기 연홍 꽃은 달산, 방곡, 상곡, 임곡 뒷산과 병산골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호젓한 담색 다래꽃과 으아리 꽃을 빼닮은 으름덩굴꽃은 줄딸기가 자라는 인근에서 더러 볼 수 있다.’

해가 갈수록 어린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는 B씨는 정관의 자랑거리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정관이 고향인 사람은 이곳이 당연히 좋겠지만 신도시 입주민들은 아직 잘 모를 겁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 서너 가지로 말할 수 있겠는데, 아마 세월이 가면 새로 온 사람들도 내 말을 수긍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관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곳이라서 어느 마을에서 바라봐도 눈과 가슴이 다 시원하고, 공기가 싱그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산골바람과 바닷바람이 늘 불어 와서 탁한 공기가 머물 수가 없지요. 또 옛날부터 물이 좋아서 참새미[참샘]나 약수가 들어간 이름이 여러 마을에 있고 병천이 마을 사이로 흘러 운치도 꽤 있었습니다. 그리고 옛날부터 정관 사람들은 심성이 어질고 올곧고 정이 많다고 했습니다. 산 좋고 물도 좋고 거기다 인심까지 좋으니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안 하겠습니까?”

[정관이라는 이름의 유래]

정관이라는 이름은 소두방재[聳岩嶺]에서 유래하였는데, 소두방재는 정관령(鼎冠嶺)이라고도 하였다. 소두방재정관읍 사람들이 동래(東萊)로 내왕하는 유일한 관문이라는 점에서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1914년 3월 군과 면의 행정 구역 개정 때 이곳의 이름을 정관면[현 정관읍]으로 정하였다.

소두방이라는 이름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소두방을 이 지역 말인 ‘솥뚜껑’으로 보는 것이다. 소두방재라고 한 것은 재[嶺] 근처에 있는 매바우가 꼭 소두방처럼 생겼기 때문에, 솥 정(鼎), 갓 관(冠) 자를 써서 정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매바우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소두방처럼 생기지 않고, 큰 바위가 산처럼 솟아 있다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솟아 있는 바위[聳岩]라 하여 솟은 바위를 이곳 방언으로 솟은방우→ 솟은바우→ 소든방우, 소두방이라 했다는 것이다. 즉 이곳 말로 소두[聳] 방우[岩]인데, 방우가 방으로 줄어서 소두방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두방의 참뜻은 솟은 바위이지 솥뚜껑[鼎冠]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현재 정관이라는 이름은 소두방을 솥뚜껑으로 해석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게 정설이다. 정관면이라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 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1914년 동래군 정관면이 되었다가 1973년 동래군이 폐지되면서 양산군 정관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94년 12월 기장군이 다시 설치되면서 정관면기장군 정관면으로 개편되었고, 1995년 기장군이 부산직할시에 편입되면서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이 되었다. 2015년 9월 23일 정관면에서 정관읍으로 승격하였다.

정관읍은 동쪽으로 장안읍과 서쪽으로 철마면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남쪽으로 일광면, 북쪽으로 양산시 웅상읍과 접한다. 지형은 동부에 달음산용천산(湧川山)의 지맥이 뻗고, 서부에 백운산(白雲山)철마산(鐵馬山), 남부에 천마산(天馬山)과 달음산, 북부에 용천산이 둘러싼 분지로, 이 분지의 중앙을 좌광천(佐光川)이 동류하다 동해로 흘러든다.

정관읍은 농경지 6.70㎢를 포함하여 총면적 38.22㎢로, 예림리[예림 마을, 서편 마을], 달산리[독점 마을, 달산 마을, 강변 마을, 대전 마을], 방곡리[방곡 마을, 덕산 마을], 매학리[매곡 마을, 상곡 마을], 용수리[가동 마을, 덕전 마을, 평전 마을, 산막 마을], 모전리[양수 마을], 병산리, 두명리[부명 마을, 두전 마을], 월평리, 임곡리 등 10개 법정리와 17개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인 2008년 11월 정관면 전체 인구는 4,988명, 1,899가구였지만 정관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가 생겨 2013년 8월 현재 인구는 약 4만 2,000명이다.

[여기가 진짜 정관이지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관은 좌광천 주변에 평야가 분포한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정관면면사무소가 방곡리 덕산 마을에 있었으며, 부산과 울산을 잇는 국도와 정관면의 서단을 연결하는 도로가 면사무소 앞을 지났다. 그래서 방곡리 덕산 마을은 신도시가 개발되기 전 정관의 중심지였다. 덕산 마을이 고향인 B씨는 이렇게 추억한다.

“덕산 마을이 옛날부터 면 소재지였어요. 어원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는데 옛날에는 덕산을 면사, 면사걸이라고 했어요. 아마 면 소재지가 있어서 그렇지 싶은데, 면사라고 해 가지고 저는 면사 살았으니까 힘이 좀 약해도 면사 바깥 마을 아이들은 우리를 겁을 냈습니다. 제가 덩치가 이래 작아도 면 소재지에서 홈그라운드 이점 살려 가지고 큰소리치고 다녔지요. 하여튼 덕산이 면 소재지로서 아름다운 곳이었고 중심이었습니다. 군에는 군수가 제일 높고 면에는 면장이 제일 높죠. 면장이 면 소재지 마을에 사니까 면장님 집에도 한 번씩 놀러도 가고 하니까 우리는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꿀릴 이유가 없었지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정관에서 나는 거는 뭐 전부 다 덕산으로 모였지요. 행정이니, 상업이니, 사람이니, 여러 가지가 다 모였습니다. 면사소무소가 거기 있을 때까지는 그런 식이었지요. 1990년대 후반까지는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

옆에 앉아 있던 C씨가 말을 거든다.

“면사무소 앞 여기가 옛날에는 제일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버스 정거장 이름도 여기가 정관인 겁니다. 진짜 정관이 여기지요. 옛날에는 정관에 들어오거나 정관을 나가려면 모두 이 길 아니면 못 지나갔습니다.”

아직도 덕산 마을은 이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정관의 중심, 진짜 정관으로 남아 있었다.

[신도시, 개발의 바람]

정관에 도시 계획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경상남도 양산군 지역에 속하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관에서 사업을 하는 D씨는 정관 도시 계획의 연원에 대해 들려주었다.

“1988년도인가 1989년도 사이에 정관이 양산에 속해 있을 때 34만 평[1.12㎢]이 도시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정관에 34만 평만 그때 도시 계획을 하다가, 1990년대 초인가 부산으로 편입되었어요. 편입되면서 그 도시 계획이 중지가 돼 버리더라고요. 그것만 그대로 됐으면 토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상당히 괜찮았지요. 그래 됐으면 어마어마했지요. 우리는 그러길 바랐는데. 근데 우리가 그걸 생각을 안 하고 그때 우리가 교육 문제가 상당히 어려웠어요. 우리가 부산으로 학교를 못 갔어요. 중학교에 가려면 주소를 옮겨 가지고 전학을 시켰지요. 중학교를 못 가니까 교육이 문제라서 부산시로 편입돼야 교육을 잘 받는다 해서 부산으로 편입하는 걸 찬성을 했었지요. 그때 투표를 했어요. 비밀 투표로 육십 몇 프론가 칠십 몇 프론가 나와서 우리가 부산시로 편입되었지요.”

양산군에 속할 당시, 정관에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1개교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려면 주소지를 옮기고 전학을 가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는데, 이것이 정관 사람들이 부산으로 편입되기를 원했던 중요한 이유였다.

“그때 부산으로 편입될 때도 도시 계획 지역으로 흡수됐어요. 요즘은 도시 계획으로 묶어 놓고 개발을 안 하면 2년이면 2년에 폐지되고 다시 재수립되는데, 그땐 그런 게 없었어요. 그때는 우리가 말을 듣기로 10년이란 말을 들었는데 10년 동안 변화가 없었어요. 근데 부산시가 어느 날 갑자기 정관에 신도시를 만든다는 말이 들리더라고요. 처음엔 안 된다 반대를 많이 했지요. 정부에서 강제로 추진시켰는데 그때 당시에 도시 계획을 안 할 거라 했지요. 우리나라 경제가 나빠져 가지고 IMF가 오고 그러니까, 또 도시 개발 계획이 자꾸 미뤄지니까 우리가 어렵다 아닙니까? 도시 계획을 계획만 해 놓고 안 하니까 사유 재산을 팔려고 해도 누가 사지도 않고.그게 상당한 기간이 지났어요. 10년 넘게 지났을 거예요.”

부산으로 편입되면서 그대로 도시 계획 지역으로 흡수되었지만 당시 주민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도시 계획 지역으로 묶여 있으면서 오랫동안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자 매매도 끊긴 데다 IMF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과 맞물려 이중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땅을 팔려고 해도 안 팔리고 살림도 어렵고 그러다 보니까 가계 빚이 상당히 많을 거 아닙니까. 그래 가지고 당시 국회 의원 김○○ 씨하고 정관 유지들이 만나서 사석에서 중론을 모아 가지고 우리 빨리 개발해 달라고 하자, 이렇게 된 거지요. 그래 가지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서 우리가 도시 계획 해 달라고 데모하러 부산시에 두세 번 갔다 아닙니까.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지정받은 게 1997년이니까 그때가 아마 1995~1996년도쯤 될 겁니다. 우리가 신도시 빨리 해달라고 데모하러 갔어요. 우리가 우리 무덤을 팠지 사실은.”

농사를 짓느라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하고 이자율만 높아 살림이 어려워지자 정관 주민들이 도시 개발을 해 달라고 부산시에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D씨의 얼굴 한 구석에 아쉬움의 그림자가 잠깐 스친다.

“그때는 빚이 많은 사람은 상당히 많았어요. 또 어째 보면 도시 계획을 안 했다면, 보상을 안 받았다면 논밭 날린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그러다 IMF가 돼 가지고 이자율이 보통 11% 하다가 12%, 13% 넘어서 15%로 올라갈 시기에 보상을 받았거든요. 그래 가지고 보상 받아서 빚을 다들 많이 갚았다 아닙니까. 보상이 작게 나와도 안 받을 수가 없는 거지요. 일단은 이자는 늘어나고 그걸 해결해야 하니까.”

신도시 개발을 자청했던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후회를 보이다가 곧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논밭을 잃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라며,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D씨의 모습에서 그간 얼마나 스스로를 달래어 왔는지 희미하게나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보상이 작게 나와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 속에서 아직까지도 만족스럽지 못한 보상에 대한 섭섭함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도시 개발과 소외된 제척지]

신도시 개발이 시작되면서 보상 문제와 관련하여 정관 주민들 사이에, 또 정관 주민들과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이에 많은 갈등이 발생하였다. 보상 문제와 관련한 갈등에 대해 C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도시 개발 계획, 그게 우리가 살던 곳이 변화되는 거니까 변화를 그렇게 찬성할 수는 없는데, 뭐 그렇게 그냥 변화를 받아들이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신도시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처음에는 개발이 불투명해 놓으니까 반대하는 사람도 좀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의견 조정이 좀 힘들었습니다. 특히 보상 관계로 해서, 도시 계획 하는데 아시다시피 보상이, 현실 보상이 안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실 보상이 안 된 경우는 반대를 좀 했지요. 현실 보상이 안 된 경우가 많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된 경우도 있고, 대체로 중심 쪽에 땅 가진 사람은 현실 보상이 안 됐고 변두리 쪽 땅은 또 현실 보상이 된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었습니다.”

현실가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주민들을 중심으로 개발에 대한 반대도 있었으며, 이로 인해 대한주택공사와 주민들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갈등이 존재했다고 한다. 특히 현실 가격을 고려하지 않고 싼 값에 주민들의 땅을 매입한 대한주택공사가 택지 개발 후 많은 차익을 남기고 땅을 되팔았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은, 아직도 대한주택공사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D, B, E씨의 말에서는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당시 양산군 시절 34만 평[1.12㎢]에 도시 계획 하는 걸 좀 지각 있는 사람들은 요거만 하자고 했지요. 또 일부 사람들은 모르고 마 그냥 택지 개발 하면 보상 많이 주겠지 하고 그랬지요. 실제적으로 보상이 저래 나오는 거 같으면 적극 반대를 했지요. 우리 땅 안 줬지요.”

“이게 인자 대한주택공사가 정부 기관 아입니까? 거기에 뒤에 누가 있나 하면 중앙토지수용위원회라는 게 있어요. 이 사람들은 법에 이의 제기를 하면 받아들이지를 안 해요. 무조건 기각해 버리지요. 거기에 공탁을 걸어 버리면 끝이에요. 소송 걸어도 이게 안 된단 말입니다. 중앙에 땅을 가지고 있는데, 근데 과거에는 땅을 살 때 전부다 공시 지가로 계약을 했다 아닙니까. 실제로 산 대로 계약을 했으면 그 보상이 나올 건데 전부 다 공시지가로 신고를 해 버리니까 공시 지가가 형편없는데 보상이 나오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신도시 제일 요지에 땅을 갖고 있었는데, 저도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원망스럽지요. 우리 땅은 중심 상업 지역인데 거기는 150에서 200만 원 정도 받았는데, 그때는 그 주위의 다른 땅하고 비슷하게 보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공직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요. 공직에만 안 있었으면 요즘 많이 하는 말로 결사 반대를 할 건데, 제가 공직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요. 어쩌겠습니까. 우리 부모님이 그 땅이 너무 좋다고 그 땅을 다른 땅의 5배를 주고 샀었는데, 만약 그걸로 변두리 땅을 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는 것도 있는가 보지요. 매학리 경로당 옆 땅도 우리 땅이었습니다. 우리 땅이 천 몇백 평 됐어요. 마 지나간 이야기니까 웃으면서 하지요.”

“당시에 평당 60만 원씩 하던 땅을 25~30만 원에 수용했어요. 강제로 수용했지요. 그러고서는 택지 개발해 가지고 그게 요새는 상가 자리가 돼서, 평당 1,000만 원씩 가요. 당시에 보상가가 워낙 낮아서 반대를 많이 했어요.”

토지 보상 문제가 불거지자, 특히 정관을 관통하는 도로가 지나가던 중심지 덕산 마을 주민들은 개발을 찬성하던 입장을 번복하게 되었다고 C씨와 F씨는 말한다.

“덕산 마을 안쪽은 제척지로 개발에서 빠졌지요. 첨에는 인자 택지 개발에 포함시킬까 안 시킬까 물어 보니 임대로 하께 이렇게 했어요. 근데 그때 당시에는 여기가 우리 정관에서 최고 중심지니까, 당시에 땅값이 400만 원 했어요, 근데 500만 원 준다 했으니, 그래 가지고 한다 했다가 안 한다고 했어요. 군에서 시에서 정부 택지개발에 마을을 넣을까 말까 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넣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주공[대한주택공사] 쪽에서는 좋다고 빼 버렸지요. 결국은 주민들의 요구에 의해서 빠진 게 돼 버렸지요.”

“보상가를 너무 작게 주니까 우리가 반대를 했어요. 그러니까 대한주택공사도 얼씨구나 좋다고 여기를 뺀 거죠. 자기들도 논밭을 싸게 넣는 게 낫지 비싼 우리 땅을 넣고 싶었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빠진 거죠.”

덕산 마을은 원래 신도시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낮은 보상가 때문에 주민들이 반대하면서 계획에서 제외되었다. 주민들은 신도시 계획을 수립한 건설교통부와 지방 자치 단체가 공권력으로 자신들의 땅을 신도시 개발 계획에 포함시키려 했던 것, 그리고 대한주택공사의 현실보다 낮은 보상 가 책정과 개발 후의 폭리 등에 대해서 반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반대해서 제척지가 된 것에 대해서도,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당시 대한주택공사에서는 주민들의 반대를 오히려 반겼다고 믿고 있다.

신도시 개발과 함께 이러한 갈등을 겪으면서 정관이라는 곳에 조상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현재 덕산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 개발 지역 내 이주지를 신청해 새로운 마을을 형성해서 살고 있는 사람,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 간 사람, 정관을 떠난 사람 등등 각각 다른 삶의 터전에서 생활하고 있다. D씨는 정관 토박이들의 이주지인 구연동 마을에 대해서 말한다.

“정관 택지 개발 120만 평[3.97㎢]에 포함된 가구가 한 280가구 정도 되었지요. 근데 전체 도시 계획을 해 보니까 여기 집 짓고 살겠나 해서 사실 많이 떠났어요. 사실 인자 대한주택공사서 택지 개발을 하면은 이주지를 줍니다. 이주지를 주는데 그때 이주지 신청한 사람이 한 150가구도 신청을 안 했을 겁니다. 다 떠나 버리고 반 정도만 남았지요. 그중에 선이주지를 신청한 사람이 68명, 그래 가지고 지금 현재 우리 구연동 마을이 되었지요. 옛날에 살던 사람들이 인자 선이주지 받아 가지고 지금 현재 마을을 형성해 가지고 살고 있지예. 여기가 전에는 농지였는데 우리가 이주지를 받아 가지고 그 지역에다가 주택지를 만들어서, 거기 사는 사람 68명이 모여서 마을 이름을 인자 구연동 마을이라고 새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제척지가 된 덕산 마을에 남은 사람들이나 구연동 마을로 이주한 사람들, 아파트로 이사한 사람들 모두 살기가 그리 녹록지는 않다고 G씨는 말한다.

“우리 옛날 원주민들도 옛날부터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괜찮아요. 근데 상업을 안 하고 보상만 받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대부분이 어렵죠. 보상을 한 10억이나 7억 이상 받은 사람은 좀 괜찮습니다. 근데 그 이하로 받은 사람들은 빚 좀 갚고 이러고 나면 한 5억 가지고 집 한 채 짓고 그래 사니까, 집 짓는 데 2~3억 들어가 버리고 그러면 살기가 어렵죠. 그래서 또 떠나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형편이 어려워진 사람도 많고 그렇습니다. 그 이상 받은 사람들은 살기가 괜찮고 상업을 하던 사람들도 어느 정도 괜찮고, 아마 의견이 분분할 겁니다. 각자 개인에 따라서 사정도 다르고 뭐 그러니까요. 상업도 장사도 해 본 사람이 하지 농사짓던 사람이, 특히 연세가 그때 당시 50대 중후반부터는 더 어렵지요, 젊은 사람들은 좀 낫지만, 어쩔 수 없이 옛말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몇 사람이 상업으로 전환했다가 안 돼 가지고 결국 적응 못하고 실패를 많이 했지요. 보이지 않는 문제점이 상당히 많아요.”

[새로운 중심과 주변화 된 덕산 마을]

구 중심지였던 덕산 마을을 통과하는 2차선의 도로를 따라 상점들이 늘어선 풍경은 마치 시골 어느 읍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빌딩 숲과 직선 도로로 이어진 신도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두 지역이 보여 주는 차이는, 4차선의 넓은 직선 도로와 2차선의 좁은 도로, 빌딩 숲과 나지막한 옛날 집들뿐만 아니라 도로를 따라 늘어선 상점들의 간판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도시 지역의 간판들이 최첨단 LED 조명을 사용하여 저마다 현란한 빛을 발하며 고객들을 유혹하는 데 반해, 덕산 마을은 아직도 페인트칠을 한 상점 간판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심지어는 녹이 슬거나 업종이 바뀌었음에도 간판을 교체하지 않고 예전 간판 그대로 달고 있는 모습도 이채롭다.

업종 또한 이제는 신도시 지역이나 부산의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간판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일 양복점, 대하 비디오, 제일 떡방앗간, 남광 식육점, 정영숙 미용실, 구두 맞춤 수선 등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새롭게 이름을 바꾼 업종들이 아직도 과거의 이름으로 손님들을 부르고 있다. 도로를 따라 걷던 필자는 잠시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덕산 마을에 대한 감상은 과거를 추억하는 외지인의 시선일 뿐,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바탕을 둔 정서는 아니다. H씨는 덕산 마을 도로 변에 있는 상가들은 상권이 죽어서 예전에 비해 장사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상권이 죽다 보니까 점포를 내놔도 점포가 안 나갑니다. 배달 장사는 들어와도 사실상 다른 장사는 잘 안 돼요. 저 뒷집 족발집도 장사가 안 돼 가지고 이사 가고 피잣집이 들어왔어요. 실질적으로 유동 인구가 없다 보니까 여기를 기점으로 배달하려는 장사는 들어옵니다. 세가 싸니까, 여기 앉아 가지고 배달만 하면 되니까. 근데 그 점포로 먹고 살려는 사람들은 사실상 잘 안 들어올라고 하더라고요. 여기도 이발소 같은 게 들어오면 남자들한테는 참 좋을 텐데. 머리 깎는 값이 신도시는 상당히 비싸서, 1만 2,000원입니다. 시내는 8,000원인데. 미장원이 있기는 있는데, 수염이 많은 우리는 주로 이발소를 가야 돼서.”

그뿐만 아니라 D씨와 I씨에 따르면, 신도시 건설은 덕산 마을 사람들에게 생각지도 않은 걱정거리를 안겨다 주었다.

“강폭을 넓히고 주변을 낮추어야 되는데 강폭을 좁게 하면서 주변을 높였거든요. 그래서 여기가 저지대가 돼 버렸어요. 비가 많이 오면 덕산 마을 자체가 침수된다고요. 2011년엔가 10가군가 침수가 됐어요. 토목 공사를 하면 경사면이 비스듬히 내려가도록 해야 되니까, 내려가다 갑자기 팍 낮추지는 못 한다 아닙니까. 전체적으로 비스듬히 하다 보니까 저 예림에서부터 택지 개발하는 데까지 높이가 너무 높아졌습니다. 비가 한 번 오면 정관의 모든 물이 좌광천 저리로 모여들거든요. 그래서 강폭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이의 제기를 많이 했었어요. 강폭이 좁다고. 근데 자기들은 100년 만에 오는 거를 예상해서 공사를 한다 하더라고요. 100년이 아니라 설령 600년이라도 많이 오면 큰일 나거든요. 강폭이 많이 좁아요. 요즘은 1,000㎜씩도 오는데. 덕산 마을 같은 경우는 살기가 참 어려워졌지요.”

“신도시 택지 개발을 하면서 저쪽 지역의 땅을 높였어요. 그래서 이쪽이 낮아졌어요. 비가 오면 물들이 전부 좌광천으로 모이는데, 만약에 폭우가 쏟아지면 이쪽이 잠길지도 몰라요. 주민들 죽이면서 신도시 만들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말을 어데 듣습니까?”

택지 개발 공사를 하면서 신도시 쪽의 땅을 높이고 강폭을 좁게 만드는 바람에 덕산 마을은 상대적으로 저지대가 되고 침수의 위험을 떠안게 되었다. 덕산 마을 주민들은 이에 대한 우려와 함께 위험하다는 자신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한주택공사를 비판한다.

[후회, 그리고 선망과 질시]

시간이 지나면서 개발이 이루어진 신도시 쪽이 정관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고 과거의 중심지였던 덕산 마을이 주변화 되는 모습을 보이자, 마을 주민들 생각도 다양하게 변화하게 된다.

“보상을 해도 시세에 맞게 해 줘야지, 무조건 주는 대로 받아라 그렇게는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빼 달라고 했지요. 잘 빠졌어요.”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현실 가를 고려해서 보상해야지요. 저는 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J씨나 K씨처럼 마을 주민 대부분은, 신도시 계획에서 빠진 것에 대해 당연한 선택이었으며 잘한 일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L씨처럼 극소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나이 드신 분들이 반대를 해서 그렇지 우리 아저씨 같은 경우는 그게 낫다고 했지요. 그런데 어른들이 반대하시니까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도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요.”

덕산 마을 출신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상곡리 출신 E씨를 통해서였다. 그를 통해 덕산 마을 사람들이 2006년에 다시 신도시 계획에 포함시켜 달라고 건의를 했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 자녀 세대와 부모 세대 간에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결국 부모 세대 의견에 따라 신도시 계획에서 빠졌는데, 2006년에 다시 포함시켜 달라고 건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산이 이미 편성되어서 안 된다고 거절당했지요. 결국 미래를 못 내다 본 거지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볼 때 덕산 마을 사람들의 내면에는, 마을을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한 선택에 대한 후회가 어느 정도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도시 계획에 포함시켜 달라는 2006년의 마을 요청이 관련 기관으로부터 거절당하자,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소외당했다는 피해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들이 선택을 번복한 것과 거절당한 것을 외부인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식도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신들의 후회를 외부인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은 마을 주민들의 자존심으로 보였다.

신도시 지역에 대한 덕산 마을 사람들의 또 다른 의식은 J씨나 M씨, C씨 말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사람들하고 차들이 너무 많아요. 더 이상 이사 안 왔으면 좋겠어요. 시끄러워서 싫어요.”

“상가에 들어와서 장사가 안 돼서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던데요. 자릿세가 비싸서. 평당 1,000만 원이라는데.”

“공원하고 녹지는 많이 조성되어 있는데, 상대적으로 나무가 적어요. 몰라, 지금 나무들이 자라면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저렇게 개발되면 안 돼요. 상가 주변에 주차장이 없는데.”

덕산 마을 주민들은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교통이 편해지고 대형 마트인 홈플러스와 공원이 많이 생겨서 좋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도시 지역의 인구 증가에 대한 불만과 함께 신도시 쪽 상가도 장사가 잘 안 된다, 공간 조성에 문제가 있다는 둥 신도시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이 사실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장사가 안 돼서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아니며, 정관 신도시 지역은 다른 신도시 지역들보다 공원과 녹지 비율이 높고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으며, 각 건물마다 주차장이 있기 때문이다. 신도시 지역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선은, 주민들의 신도시 지역에 대한 질시의 감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대부분의 덕산 마을 주민들이 신도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정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주민들 대부분은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생긴 혜택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지역 자체에 대해서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시 신도시 개발에 포함되고자 신청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질시의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의식의 일면을 읽어 낼 수 있다.

“저쪽은 저렇게 발전했는데, 여기도 발전하면 좋지요. 기대는 안 하지만 그래도 10년쯤 지나면 발전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좀 더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기도 깔끔하게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덕산 마을이 어떻게 변화되었으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상권이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I씨의 대답이나, 저쪽의 발전과 비교하면서 여기도 저쪽처럼 발전하고 깔끔하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말들에서, 마을 사람들 내면에 저쪽 신도시를 선망하는 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도시 개발을 둘러싸고, 덕산 마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후회와 함께 선망과 질시의 이중적인 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토박이와 이주민, 갈등과 어울림]

신도시 개발은 정관의 도시 경관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신도시 개발과 함께 3~4년 사이 급속한 인구 유입은 토박이들과 이주민들의 섞임 과정에서 또 다른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신도시 개발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일부 신도시 쪽 아파트로 이주한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관 토박이들은 덕산 마을이나 선이주지로 지정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구연 마을에 거주한다. 토박이들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은 정관의 큰 행사를 진행하거나 현안 문제 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D씨는 말한다.

“면에 주민자치위원회, 체육회 같은 여러 단체가 있는데 체육회에서는 1년에 한 번 면민 체육 대회를 엽니다. 주민들하고 여러 단체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토박이들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다 있어요. 이런 행사는 주민들의 화합을 이끌려고 하는 건데 그런 일을 하려면 예산도 많이 들어가요. 그런데 새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협조를 잘 안 하거든요. 그런 반면 권리는 많이 주장합니다. 그리고 정관 주민들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작년에 면민 체육 대회를 할 때 00아파트에서 한 200명 나오셨거든요. 다른 아파트에 비하면 그나마 많이 나온 편이지요. 그렇게 나와 어울리는 사람들은 서로 알게 되고 화합이 되는데, 00아파트 인구가 적어도 1,500명 정도는 될 텐데, 그 가운데 200명밖에 안 나오니까 그 다수 나머지 사람들은 정관에 대해서 모른다 아닙니까? 못 나오신 분들도 이유야 있겠지만 나와야 어울리지요. 그렇게 어울려 봐야 정관이 좋구나 하고 느끼지요. 사실 정관이 공기도 맑고 살기도 좋습니다. 좌광천 강변도 있고 살기는 좋은데, 저희들 같은 경우는 편리성은 상당히 좋아졌는데 많은 사람이 살다 보니까 서로 부대끼고 그러지요. 원래 살던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게 토박이라는 정신 그런 거거든요. 어디나 다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텃세라고 하거든요. 그거는 인정을 안 하면 안 되는데.”

신도시 개발이 이루어졌지만 정관에서는 여전히 면민 체육 대회나 경로잔치 같은 면 단위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새로 이주한 신도시 지역 사람들은 행사 참여에는 소극적이지만 권리 주장에는 적극적이라는 점 등이 토박이들이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알아가려는 노력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 이주민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또한 정관의 현안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토박이들과 이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나타난다. 토박이들은 특정 이주민들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토박이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부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이주민들의 이러한 태도는 토박이들을 무시하는 태도이며, 그 태도 저변에는 정관의 주인이 이주민 자신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전에 정관 신도시에 사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한 사람은 대학 교수를 했던 사람이라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 생각을 이해를 못 해요. 우리가 너거한테 뭐 꿀릴 게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지 일을 처리할 때 독단적으로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우리가 뭐라고 말하면 텃세 부린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 사람들은 이 지역이 정관 신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인이지 왜 너거가 주인이고, 우리가 너거한테 꿀릴 거 뭐가 있노 그런 식이거든요. 우리가 텃세를 부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조상 대대로 몇십 년 여기서 살고 정관을 잘 알고 정관 정서도 잘 아는데, 이사 와서 얼마 안 지났지 않습니까? 그래도 4~5년 살아 보고 주민들이 너거가 잘못했다, 너거가 정관에 이래 이래야 되지, 오자마자 너거가 그래 밖에 못 하나 식으로, 너거 필요 없어, 그렇게 하면 안 돼죠.

그 사람들은 어떤 일을 누가 처리하는가를 주도권 싸움처럼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게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가 고향이니까 봉사하고 그러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지역 실정을 그분은 잘 모르더라고요. 알려고 좀 해야 되는데. 내가 어떤 지역에 이사를 가면 그 지역 사람들하고 친하려고 해야 되는 거 아입니까? 이 사람은 그걸 모르는 거라 이기지요. 신도시기 때문에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신도시 주민이 주인이지 너거가 아니지 않느냐는 식이더라고요.

정관 정서를 무시하고 하니까, 사실 뭐 학력이나 학벌은 떨어지는 거 아는데 그렇다고 그분들이 경제적으로나 이런 거는 별 차이가 없잖아요. 그런데 촌놈들, 이런 식으로 자꾸 하니까 우리는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지요. 그런 느낌이 들면 여기 사람들도 지가 배웠으면 배웠지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우리 사회가 학벌이 많이 좌우를 해서 그런지 대학 교수 출신인 분은 여기서도 내가 대학 교순데 하고 대접받을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러면 안 되지요.

외부 사람들과 친해 보려고 나도 주민자치회에서 운영하는 강습에 나가 봤거든요, 그렇게 아예 나쁜 사람이 어데 있습니까. 우리도 오면 잘 오셨습니다. 우리 정관이 좋다 해야 좋지. 내 사는 곳이 좋지 지금 여 아파트도 그렇다 아닙니까. 자기 사는 아파트가 좋다 한다 아닙니까? 여기도 저 같은 경우에는 주민들과 화합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자연 마을 사람들인 우리는 아파트 사람들이라도 송전선로 관계로 접해 보니 좋은 분도 있고 아닌 분도 있더라 말입니다. 같이 지내고 속내를 아니까 친숙한데 여기에 자연 마을에 대해 전연 모르는 사람들은 무조건 우리가 거칠다, 이런 사람도 있어요. 개별 사람의 문젠데 다 같은 정관 읍민이지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어떻고 자연 마을 사람들이 어떻고. 그런 거는 말하고 싶어도 자제를 하고 그래야 하는데, 쉽게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어서 문제지요.”

C씨의 말처럼 정관을 둘러싼 토박이들과 이주민들 사이의 가장 큰 갈등 원인은 장소에 대한 생각 차이로 보인다. 토박이들은 정관이 신도시 개발에 의해 변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관의 역사, 정관의 정서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도시가 들어섰지만 그것은 여전히 정관이라는 지역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고, 그래서 과거의 역사와 문화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도시로 이주해서 들어온 사람들 역시 정관 주민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달리 토박이들이 보기에 이주민들은, 정관이 신도시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역사와 문화가 지속되어야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만들어 가는 도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장소에 대한 생각 차이가 현안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토박이들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을 부추긴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C씨와 G씨처럼 ‘정관 사람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해 토박이들을 범주화함으로써, 이주민들과 자신들을 구분 짓기도 한다.

“원래 정관 사람들이 온순하고 사람이 좋아요. 참 순해요. 물론 의견이 안 맞을 때는 때로 싸움은 하지요. 그래도 원래 순하니까 너무 그렇지는 않아요. 대체로 정관 사람들은 사이가 좋지요. 지금 현재 보았을 때는 신도시가 된 데에 크게 불만이 있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체로 만족하는 거 같아요. 일부 사람들이 보상 문제로 약간 재산이 없어 가지고 그렇지요. 그냥 농사 몇 마지기 짓고 아무 걱정 없이 살던 사람들이 보상을 쪼매 받다 보니까 떠나야 되고, 그래서 정관을 나가는 사람, 살림이 어려워진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경우에 속이 안 상하겠습니까?”

“이주지 신청하신 분들이 대체적으로 68명 중에 몇 분은 제끼더라도 정관에서 과거에 활동도 많이 하고 했던 사람들이니까 모여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이해하고 자연 마을에 있다가 여기 새로 모였다 아닙니까. 우리가 관계를 잘해 가지고 서로 의논이 좋으니까 선이주를 신청했다가 팔고 나간 분도 있는데, 그분들도 후회를 하지요. 그렇게 먼지 나고 해서 집 지어서 살겠나 그랬는데 그런 거는 별로 없고, 땅값도 오르고 마을 사람들도 분위기 좋게 사니까, 면민 체육 대회 때 우리 마을에 와서 밥도 묵고 많이 해요. 대접을 해 드리고 하니까 우리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의논 좋게 살고 상당히 모범적으로 행동하고 또 부녀회도 잘 돕고 하니까, 또 사실은 우리가 고향에서 요 안에서 치자면 객지잖아요, 객이라는 게 모여 가지고 의논 좋게 사니까 이사 가신 분들도 괜히 갔다고 생각하고 여길 찾아오지예. 지금은 상당히 좋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는 신도시를 만들기 전이 좋았다고 말하는 M씨 같은 사람들도 있다.

“저 같은 경우는 또 향수가 조금은 있어요. 옛날에 농사지을 때 그때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때 살아온 사람들은 서로 정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토박이들은 이러한 갈등의 이야기 끝에 항상 어울림을 강조한다. 정관이 살기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서는 이주민들과 화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B씨와 D씨의 말처럼 토박이들이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분위기 화합하고 그러는 건 토박이들이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가 안 하면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하겠습니까? 어떻게든 주인이 끌어안아야 되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상 차릴 수 없잖아요. 우리가 상을 차려 줘야지 만나는 자리가 되고 하지.”

“다 같이 정관 주민들이잖아요. 같이 어울려 살아야지요. 우리도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고, 외부에서 온 사람들도 우리를 인정해 주어야지요. 그래야 안 잘 살겠습니까? 조금씩 양보하고 노력하다 보면 안 좋아지겠습니까? 양쪽 다 잘 되자고 하는 일인데 그것만 알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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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지***** 텃세는 열등의식에서 발현한 것입니다.
시골이장이나 글 쓴이 모두 같은 심리입니다.
흔히 말하는 열등감 컴플렉스(inferiority complex)는 치유가 어렵고, 특히 지적 열등감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2018.07.04
후*** 얼마 전, 경운기로 장의차 길을 막고 돈을 뜯은 어느 시골이장의 행패를 언론에서 보셨겠지요.
어설픈 논리와 글솜씨로, 특정인을 공개적으로 일방 매도하는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요?
2018.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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