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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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鎭市場韓服商人-熱情 |
영어의미역 | Life and passion of the hanbok[traditional Korean dress] traders at Busanjin Market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진시장로 2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영숙 |
[부산진 시장 터줏대감 안동주단 김정덕 할머니가 들려주는 부산진 시장 이야기]
부산진 시장의 역사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의 문물을 일본으로 전파하는 조선 통신사가 지금의 자성대 공원에 위치한 영가대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내고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바로 부산진 시장의 시작이다. 이후 1913년 오일장으로 개장하면서 현재의 시장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벌써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부산진 시장과 함께한 세월]
김정덕(金貞德)[78세] 할머니는 스스로를 부산진 시장의 산증인이라고 말씀한다. 20대 초반, 처음 장사를 시작했던 ‘어린 새댁’은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는 할머니로 부산진 시장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올해로 장사 경력 58년이나 됐으니 부산진 시장의 터줏대감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것이 변하였다.
부산진 시장과 인연을 맺은 세월이 머지않아 6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60년이면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한 세월이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고,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할머니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할머니는 5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곳에서 주단 가게를 지키고 있다. 김정덕 할머니에게 부산진 시장은 일한 만큼 대가를 얻을 수 있는 고마운 장소이자 삶의 터전이다.
“진짜 내가 부산진 시장의 산증인이지. 1월 달에 시작했으니까. 올해 12월이면 만 58년 아이가. 대단하제? 그런 깐에 새댁이가 빨간 치마 입고 들어와 가지고 이제 나무 코트 입고 나가기가 늦었다 아니가. 늦었어….”
[소 한 마리 팔아서 시작한 장사]
할머니가 스물한 살 되던 해였다. 친정아버지가 소 한 마리 팔아서 이곳 부산진 시장에 가게 하나를 마련해 주셨다. 결혼 후 1년 만에 친정아버지와 함께 시댁을 다녀온 뒤였다. 시댁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에 있었는데, 누구나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시골은 살기가 더욱 팍팍했다. 시골에서 조그맣게 농사를 짓던 시댁 형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터. 할머니가 신행으로 시댁에 갔을 무렵 시댁은 없는 형편에 그나마 있던 집조차도 전쟁으로 인해 불타 버리고 없었다. 그렇게 시집보낸 막내딸을 데리고 시댁인 왜관을 함께 다녀온 친정아버지는 차마 막내딸을 그곳에 두고 올 수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부산 토박이로 원래 집은 지금의 남구 대연동이다. 할머니는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언니의 소개로 당시 부산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던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그때 할아버지는 남부경찰서 앞 보병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갓 결혼식을 올렸던 60년 전만 해도 결혼식을 올린 뒤 대부분 ‘해묵이’를 했다. 해묵이란 혼례식을 올린 뒤 해를 넘겨서 신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 시절은 대부분 1년씩 해를 묵혀 시댁으로 가는 것이 관례였다.
“우리 집은 원래 대연동이고 우리 시댁은 왜관, 왜관이야.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고. 내 나이 열아홉에 우리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어. 우리 남편은 그때 군에 와 있었거든. 남부서 앞 보병대에서 근무를 했는데, 우리 언니가 중매해 가지고 알게 된 거지. 우리 때만 해도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전부 해묵이를 했거든. 그때는 대부분 1년씩, 해를 묵혔어. 친정에서 1년 해를 넘기고 시댁으로 가는 거지.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연애하고 그런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결혼식 올리고 친정에서 1년 해를 넘기고 촌에 있는 우리 시댁으로 가니까. 6·25 사변[전쟁] 때 집이고 뭐고 전부 폭삭 다 불타 버린 거야.”
[부산에 터를 잡다]
왜관은 6·25 전쟁 당시 대구 비행장 사수를 위한 요지로, 왜관 철교 등은 낙동강 방어의 선봉이자 교두보였다. 이 때문에 6·25 전쟁 당시 왜관에서의 전투는 그 어느 곳보다 치열했다. 그 당시 할머니 시댁 식구들도 치열한 전쟁을 피해 잠시 대구 이남으로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집은 모두 불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주변 논밭에는 죽은 시체들만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6·25 때 집이 다 타 버리고 없으니까. 급한 대로 오두막집을 한 채 지었던 거라. 짚을 엮어 지붕 만드는 우리나라 초가집 말이야. 그때 우리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시댁이라고 가서 보니까. 기가 찼던 거야. 내가 열아홉 살에 결혼해 가지고 스무 살 섣달에 시댁으로 갔었거든. 지금도 그렇지만 시댁에서 3일 있다가 다시 친정으로 왔어. 그렇게 친정에 오니까. 우리 아버지가 우리 신랑을 앉혀 두고 그러는 거야. ‘조 서방, 거서[왜관] 살지 말고 부산 와서 자리 잡게나.”
그렇게 할머니는 스물한 살, 친정아버지께서 소 한 마리 팔아 마련해 주신 가게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소 한 마리가 무슨 대수일까 싶지만,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소는 집 안의 재산 목록 1호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위를 당시 조선방직에서 근무하던 할머니의 외삼촌에게 부탁하여 조선방직에 취직시켜 주었다. 그렇게 할머니의 아버지는 막내딸의 살 길을 열어 주었다. 전쟁과 가난으로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 전쟁으로 집조차 불타 버린 시댁에는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친정이라는 비빌 언덕이라도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때는 여기 조방에서 베를 짰거든. 조선방직 말이야. 거기 생산 부장이 우리 외삼촌이었어. 우리 아버지가 외삼촌에게 부탁해서 사위는 조선방직에 취직시켜 주셨지. 집은 문현동 동천강 옆에 제일 싼 집에 달세를 얻어 주셨고. 시댁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전쟁으로 집도 다 타 버렸으니 해 줄 형편이 안 됐지.”
[부끄럼 많던 어린 새댁]
부산진 시장에서 청춘을 다 보냈다는 할머니. 지금은 부산진 시장에서 한복의 원단이 되는 주단을 팔고 있지만 할머니는 원래 화장품을 팔았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부산진 시장에는 화장품 가게가 제법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변했다. 지금이야 거리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화장품 파는 가게일 정도로 그 숫자가 많이 늘어났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젊은 새색시가 처음 가게를 시작하는데 화장품 판매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모두 제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스물한 살 새댁에게, 그것도 처음 해 보는 장사가 만만할 리 없다. 처음 가게를 시작했을 때 할머니는 무척 부끄럼이 많았다고 한다. 부끄럼 탓에 손님이 와도 물건을 제대로 팔지 못했다. 물건을 팔기는커녕 아예 숨어 버리기 일쑤였다. 때로는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변 상인 분들이 할머니를 대신해 손님을 응대하고 화장품을 팔아 주기도 하였다.
“처음 장사 시작했을 때는 부끄러워서 손님이 와도 말도 못 하고 그랬어. 옆에 사람들이 대신 팔아 주기도 하고 그랬지. 손님 오면 다이[계산대] 뒤에 숨어 앉아 있고 그랬거든. 이렇게 세월이 가고 하니까. 요새는 늙어서 낯가죽도 두꺼워졌는지 손님이 안 와서 못 파네. 지금이야 워낙 장사가 안 돼서 모두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부산진 시장에 화장품 장사도 많았어.”
지금 돌이켜보면,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때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힘들게 인생과 마주하고 있었다. 화장품 장사를 시작하고 3년째 되던 해에 할머니는 화장품 장사를 그만두고 주단 장사를 시작하였다. 화장품 장사를 그만 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세월이 너무 흘러 당시 상황이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화장품 가게를 하면서 어느 정도 장사에 자신감이 생겼던 게 아닐까.
[할머니의 오빠]
할머니는 1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할머니 위로 오빠 하나와 언니 셋이 있었다. 할머니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오빠는 일제의 강제 징병을 피하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고 곧 바로 만주로 떠났다. 당시는 일제가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마구 내몰았던 시절이다. 군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만주로 떠난 오빠는 홀로 타국에서 힘겹게 2년을 버텨야 했다.
오빠가 만주에서 보낸 2년의 세월은 오빠에게도 가족에게도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무사히 견디고 오빠는 2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러한 노력조차도 오빠를 일제의 강제 징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하지는 못하였다. 만주에서 2년 만에 돌아온 오빠는 귀국과 동시에 일본군에 끌려갔다.
“하도 오래돼서 잘 모르겠네. 우리 오빠가 내가 일곱 살 때인가 여덟 살 때인가, 아무튼 그때쯤 일본에 끌려가서 전사했지. 왜정 때 끌려갔으니 얼마나 오래됐어. 오래됐지…. 우리 오빠가 왜정 때, 대학 졸업하고 일본군에 안 잡혀 가려고 만주로 갔어. 만주 갔다가 2년 만에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왜놈한테 잡혀 가지고 군에 끌려가 버렸지. 그렇게 군에 끌려가서 일본 히로시마 원폭 때 전사해 버렸어.”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거친 후라 딱히 어디랄 것 없이 온 나라가 초토화된 그즈음, 누구랄 것 없이 모두 사는 게 팍팍했다. 하지만 당시 할머니 집은 경제적으로 그나마 제법 여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지만 오빠를 대학에 보낼 정도로 살기가 괜찮은 편에 속하였다. 할머니의 어릴 적 기억 속 대연동 집은 무척이나 넓고 컸다.
“대연동, 지금 제일은행 자리 전체가 우리 집터야. 우리 아버지가 농사짓고 이랬는데도 잘 살았어. 그랬는데, 오빠가 일본에 끌려가서 원폭에 전사하고 나니까. 아버지가 크게 상심하셨지. 옛날에는 아들이 최고였지. 우리 같은 딸은 사람으로 안 쳤거든.”
아버지의 희망이고 집안의 기둥이었던 하나뿐인 오빠가 일본군에 끌려가 전사했다. 고이 기른 아들이 타국에서 허망하게 죽자 아버지는 망연자실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때 아버지에게 삶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렇게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아버지는 그 길로 모든 땅을 팔고 집을 나가 버렸다. 3년이 흐르고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할머니와 가족은 아버지가 집을 나간 3년 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족 누구도 그것을 궁금해 하거나 묻거나 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가 땅을 전부 팔아서 그 돈을 짊어지고는 집을 나가 버렸지.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는지는 우리도 몰라. 한 3년 만에 집에 들어오셨는데, 쌀 서 말 팔아 가지고 들어오셨더라고.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일흔여섯까지 살다가 돌아가셨어.”
[부산으로 이주한 시댁 식구]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 부끄러워 손님이 오면 숨어 버리곤 했던 새댁에게 가족이란 존재는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인 동시에 고단한 삶을 헤쳐 나가는 힘의 원천이었다. 할머니에게 가족은 내 남편, 내 자식만이 아니었다. 가난한 시골 농사꾼의 맏이로 태어났던 할머니의 남편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돌봐야만 하였다. 그런 처지의 남편과 결혼한 할머니 역시 시댁 식구들을 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시댁 식구도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었던 것이다.
생계를 위해 주단 장사를 시작한 후 가게가 제법 자리를 잡았을 때쯤 할머니는 시골에 있던 시댁 식구 모두를 부산으로 데리고 왔다. 그렇게 열 명이 넘는 대식구가 한 집에 모여 옹기종기 살았다. 모두가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3남 1녀의 큰아들이었던 남편이 동생들을 거두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아버님, 어머님, 시동생, 시누이 전부 촌에 살았거든. 근데 결국 못 살아가지고 전부 부산으로 내려왔지. 우리가 맏이니까. 처음에는 달세 집에서 살았지. 그때는 좋은 집이 어디 있었나. 전부 그렇게들 살았으니. 그래 달세 집에 살면서 돈이 좀 모이면 좀 더 큰 집 얻고. 또 돈이 쪼매 되면 쪼매 더 나은 집 얻고. 그렇게 방 서너 칸 얻을 돈이 되니까, 시댁 식구들 전부 다 데리고 부산에 온 거야. 그때는 식구가 참 많았지.”
[가족 뒷바라지]
할머니는 이곳 부산진 시장에서 남편과 주단 장사를 하며 조금씩 돈을 모았다. 그러면서 자식 넷과 시동생, 시누이를 공부시켰다. 할머니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쉴 틈이라고는 없었다. 오로지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왔다. 남들은 한 평생 고생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할머니 자신은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묵묵히 살아왔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리고 후회 없이 살았다.
“내가 여기 부산진 시장에서 비단 팔아서 시동생, 시누이 전부 공부시키고 다했지. 우짜겠노. 옛날에는 지금처럼 삭막하게 네가 잘 했네, 잘못 했네 그런 거 없었어. 어쨌든 여자가 시집을 가면 벌어서 이 식구들 모두 다독거려야 된다. 그렇게 생각했었거든. 요즘처럼 각박하게 따지고 그렇게 살지 않았어. 우리는 그때는 당연한 걸로 생각하고 살았지. 내가 이 식구들 다 먹여 살려야 된다, 그런 생각 가지고 살았지. 그래서 돈 벌어서 시동생, 시누이 키워 가지고 공부시키고, 또 동서들 집도 사주고 그랬어. 그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았어. 나뿐만 아니라 그때는 다 그렇게 살기도 했고….”
[하루하루 바쁜 나날]
처음 가게를 시작했을 무렵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장사하랴, 살림하랴, 아이들 키우랴, 매일 매일 힘든 하루였다. 하루 종일 가게를 비울 수 없었던 터라 식모를 데리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집안 일이 할머니의 손을 거쳐야만 하였다.
“우짜노. 식구는 많제, 식모가 있어야 된다 아이가. 요새 말로 왔다 갔다 하는 가사 도우미 아이가. 근데 그때는 그런 게 없고 먹고 자면서 집에 있어야 했거든. 식모를 데리고 있어도 식구가 많으니 일이 많지.”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대식구가 기나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김장 김치는 필수였다. 열 명이 넘는 식구가 겨울 내내 먹으려면 김장 김치로 배추 150포기 정도가 필요했다. 지금이야 굳이 밥이 아니어도 먹을 것으로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그때는 별다른 먹거리가 없었다. 그러니 쌀 한 가마니가 한 달을 못 갔다. 아침이면 밥솥 한 가득 밥을 해야 온 가족이 먹을 수 있었다.
“시부모님, 시동생 둘, 시누이 하나, 우리 아이 넷에 우리 부부까지 합치면 보통 열 몇은 됐지. 쌀 한 가마니로는 한 달도 못 갔어. 쌀 한 가마니 가지고 20일 먹고 나면 없어. 겨우 20일밖에 못 갔어. 겨울이면 김장 김치도 보통 150포기나 160포기는 담가야 돼. 그래야 그 식구가 설부터 정월달까지 먹는 거라. 그때는 요새처럼 먹을 게 이렇게 안 많았잖아. 김치랑 밥이랑 이래 먹었지. 그러니까 쌀 한 가마니로 딱 20일 먹으면 됐어. 그만큼 식구가 많았어. 밥도 한 솥 해야 온 식구가 다 먹을 수 있었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는 베]
할머니는 한평생 주단 장사를 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장사가 어찌 매일 기쁘고 웃을 일만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베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때면 장사의 고단함 정도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말 그대로 돈을 끌어 모으던 시절이었다. 가게 점원이 7명이나 되었지만 항상 밀려드는 손님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당시 하루 장사가 끝나면 가방에 돈이 수북이 쌓일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그때 부산진 시장은 오고가는 손님들로 활기가 넘쳤다. 할머니는 가끔 오고가는 손님이 뜸한 요즈음, 그때를 떠올리면 부산진 시장에도 그런 호시절이 있었던가 싶어진다.
“옛날에는 내가 장사를 참 잘했거든. 장사해서 하루에 1,000만 원도 팔고, 1,500만 원도 팔고, 1,700만 원도 팔고 했지. 보통 일곱 사람이 팔아도 베가 모자랐어. 그 당시만 해도 일하는 사람이 일곱이나 있었지. 글쎄, 그때가 내가 한 서른? 뭐 한 서른대여섯 그때부터 그렇게 많이 팔았으니까. 그때는 하루 장사가 끝나면 돈다발을 가방에 쑤셔 넣어 가지고 집에 가고 그랬어. 그러면 우리 남편이 식구들 모두 자면, 돈을 차곡차곡 간추려서 다음 날, 날 새면 은행에 가서 입금하고 그랬지. 그때는 부자였지.”
할머니는 부산진 시장에서 60년 가까운 세월 비단을 팔며 보냈지만 특별한 장사 노하우란 없다고 말씀한다. 굳이 자신의 장사 노하우를 말로 표현한다면 그저 성심성의껏, 그리고 정직하게 손님을 대하는 것뿐이란다.
“장사하는 데 특별한 기술이라고 할 게 뭐 있노. 그저 손님 오면 싸게 주고 잘해 주고. 장사라는 것이 딴 거 없잖아. 내가 이 비단 장사해서 자식들, 시동생들 공부시키고 장가보내고 다 했어. 아들 셋, 딸 하나 대학 다 보내고. 결혼할 때 집 한 칸씩 해 주고 그랬어. 우리 때는 자식을 키우는 것이 자식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하면 잘 키우는 줄 알았지. 그때는 장사가 만날 잘 될 줄 알았지. 장사도 잘 되고 하니, 자식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줬어. 그래서 우리 자식들은 어려운 거, 그런 거 전혀 모르고 자랐어. 세상에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지.”
[고개를 넘는 시어머니와 아이들]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거를 수는 없었다. 낮에는 시어머니가 장사하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모든 아이를 돌보았다. 당시 할머니가 살던 곳은 대연동이었다. 시어머니는 갓난쟁이 손주에게 엄마 젖을 물리려고 하루도 빠짐없이 대연동과 부산진 시장을 오고 갔다. 걷지 못하는 손자는 등에 업혀서, 조금 커서 걸을 수 있는 손자는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은 채 그렇게 대연동 고개를 매일같이 넘었다.
“우리가 여기서 장사를 하고 6~7년 만엔가 가족이 전부 합쳤어. 그때쯤 조금 큰 방을 얻었으니까. 처음에는 매일 우리 어머님이 대연동 거기서 여기까지 하나 업고, 하나 걸리고 그렇게 애기 젖 먹이러 여기까지 왔다 갔다 했지. 매일 걸어서 그렇게 했지. 대연동에서 여기 부산진 시장까지 걸으면 암만 못 해도 30, 40분은 걸렸지. 그걸 우리 어머님이 매일 한 거라. 갓난쟁이 젖은 물려야 하고, 나는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해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 어머님도 고생 참 많이 하셨지. 살림이야 밥해 주는 아이가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매일 갓난쟁이 업고 거기서 여기까지 하루에 한번 젖 먹이러 오셨으니. 그게 어데 보통 일이가.”
아이는 하루에 한 번 엄마 젖을 먹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장사하느라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암죽이 엄마 젖을 대신했다. 지금 시절이야 마트만 가면 온갖 종류의 분유가 진열장마다 빼곡히 진열되어 있어 무엇을 골라 먹여야 할지가 도리어 고민되는 시대다. 그렇지만 그 당시 분유는 귀한 것이었다. 귀한 분유를 대신한 것이 암죽이다. 곱게 간 쌀에 우유를 조금 섞은 것을 암죽이라고 했다.
“그렇게 젖 먹이고 가면, 옛날에는 쌀을 갈아 가지고 죽을 해 먹였거든. 그걸 암죽이라고 하는데, 쌀 갈고 거기에 우유 조금 타 가지고 먹이고는 했지. 낮에 젖 한 번 물리고, 저녁쯤에는 암죽 먹이고. 그리고 내가 가게 문 닫고 저녁에 집에 가면 다시 젖을 먹이는 거지. 예전에는 장사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또 아이들 거두어야 하니, 밤에도 제대로 못 잤어.”
그때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살던 대연동은 현대식 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은 우물에 가서 직접 길어 와야 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가게에서 손님 상대하느라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와도 편안히 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먼저 집안일을 대충 정리하고 나면 밤에는 근처 우물에 가서 다음 날 사용할 물을 길어 왔다.
“잘 시간이 없었지. 그때 우리가 대연동 고개에 살았는데, 요새처럼 수도가 있었어야지. 밤에는 새미에서 3시나 4시까지 물 따라야 했어. 물을 따라다가 집에 갖다 부어야 했거든. 우리 다 그렇게 살았다 아이가.”
[몰려드는 손님들]
옛날 부산진 시장 일대는 부산의 교통 중심지였다. 지금은 외곽으로 빠져나간 고속버스 터미널, 시외버스 터미널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부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조방’은 조선방직주식회사의 줄임말이다. 근대적 면방직 공장으로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조선방직도 이곳에 위치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그때만 해도 부산진 시장은 말 그대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표현이 제격이다. 항상 사람이 물 밀 듯이 밀려가고 밀려왔다. 시장 안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옛날에는 낮에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 놀고 있을 틈이 어딨노. 그때는 김밥 있제. 아침에 집에서 김밥을 싸오는 거라. 김치 좀 넣고 이래저래 조물조물 뭉쳐서 김밥 만들어서 가지고 장사하러 오는 거야. 장사하다가 배고프면 김밥 하나씩 먹어 가면서 그렇게 베 팔았지. 앉아 있을 시간 없었어. 계속 손님이 오니까. 손님 없을 적에 김밥 한 개씩 무가면서 그랬지. 요새 맨치로 이래 앉아서 밥 먹을 여 없어.”
아침부터 밀려드는 손님으로 앉아서 점심 먹을 시간은커녕 잠시 앉아서 쉴 틈도 없었다. 손님들은 부산은 물론 멀리 진주, 마산, 남해, 삼천포 등 경상남도 일대에서 몰려들었다. 이렇게 몰려드는 손님들로 부산진 시장은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매일 매일 바쁘고 분주했다. 각지에서 몰려든 손님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물건을 사기 위해 이 가게 저 가게를 분주하게 둘러보았다. 그 당시 부산진 시장은 활기로 넘쳐났다.
“옛날에는 여기 앞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었잖아. 그래서 손님이 참 많이 왔지. 경남 일대는 전부 다 왔었어. 어쨌든 이 시장에 와야 싸니까. 그때는 도매로도 많이 가져가고. 남해, 진주는 말할 것도 없고 경남 일대 사람들이 모두 이 시장으로 왔었지. 다들 대구 서문 시장 안 가고 이리로 왔어. 위치가 좋았잖아.”
매일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행복했다. 부산진 시장은 할머니에게 삶의 밑거름이고 터전이 되어 주었다. 비록 할머니는 부산진 시장에 앉아서 베를 팔고 있었지만 각지에서 몰려드는 손님들의 입을 통해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접할 수 있었다. 지금도 할머니는 그때를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 요즘 드문드문 지나가는 손님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게와 가게 사이로 난 좁다란 통로마다 손님들로 북적거렸던 그때가 떠오른다.
“옛날에는 아침 7시까지 여기 가게에 도착해야 했거든. 보통 5시에 일어나면 서너 시간 눈 코 뜰 새 없이 엄청 바빴어. 잠자는 시간은 많이 자야 세 시간 아니면 네 시간이지 뭐. 요새처럼 이래 팔자 좋게 밤새도록 잘 시간이 어딨노. 그리고 저녁에 가게 마치면 7시. 가게 문 닫고 집에 가면 벌써 7시 반이나 8시였어. 요새는 장사가 안 되니까 뭐 5시에도 가고 6시에도 가고 이라제. 옛날에는 7시까지도 손님이 있었으니까. 불이 다 꺼지도록 손님들이 계속 들어왔어.
[옛 명성을 뒤로하고]
아마도 부산진 시장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은 1986년 부산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일 것이다. 그 무렵 부산진 시장은 외제 물건으로 유명한 국제 시장과 더불어 부산 대형 시장의 쌍벽을 이루었다. 요즈음 부산진 시장을 찾는 고객 대부분은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다. 결혼식이 아니면 한복을 입을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평상복을 하러 오는 손님들도 참 많았다. 그때는 한복 종류도 굉장히 다양했다.
“그때는 참 재밌었지. 그럼, 참 재밌었어. 말도 못 하게 재밌었지. 그때는 돈이 들어오니까 힘든 줄도 몰랐지. 지금이야 이래 돈도 안 들어오고 놀고 있으니까 힘들지. 내가 살아 보니까 사람이 제일 불쌍한 게 일이 없고 노는 게 젤 힘들어. 일이 있을 적에는 힘이 안 들어. 진짜 좋았어. 옛날에 대연동에 있던 우리 집이 참 좋았어. 그래, 우리 큰아들이 공장한다고 나도 모르게 은행에 잽혀 먹어 가지고 헐값에 팔고 왔는데. 지금은 거가 평당에 1,200만 원, 우리 집이 한 140평[462.81㎡] 되거든. 차도 최고 좋고, 식구도 많고, 사람도 많고. 그래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얼마나 부자면 저런 집에 사노 그랬다. 그 정도로 부자로 살았는데, 고마 아들이 홀랑 홀랑 다 털어먹고. 고마 인제 사는 게 힘이 드네, 베도 안 팔리고….”
[우리 옷, 한복에 대한 남다른 애정]
지금은 혼수라고 해도 아주 간소하다. 예전에는 혼수 주문이 들어오면, 신랑과 신부 외에도 양쪽 혼주와 아버지 형제들, 이모, 고모, 숙모들이 다 같이 옷을 지어 입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맏이일 경우 형제들 한복을 새로 맞추어 주었다. 그때는 부산진 시장뿐만 아니라 부산진 시장 근처 한복 짓는 가게도 덩달아 호황이었다. 그때는 시어머니가 신부한테 해 주는 옷이 보통 기본으로 세 벌이었다. 기본은 치마, 저고리, 색동저고리 아니면 치마, 저고리, 두루마기였다. 많이 해 주는 사람은 신부 한 사람만 해도 저고리가 일곱 장, 치마가 다섯 벌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벌이면 끝이다. 15년 전, 아니 10년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럭저럭 먹고살 만큼은 장사가 되었다. 그러던 것이 10년 전쯤부터 차츰차츰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한복은 비싸고 사치라는 인식이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금은 혼수를 해도 신랑과 신부, 그리고 신랑, 신부 어머니 정도가 한복을 맞출 뿐이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우리 옷 한복이 이렇게까지 천덕꾸러기가 된 것인지 생각할 때마다 할머니는 가슴이 답답하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결혼식을 위해 한복을 맞추는 것은 필수 코스였다. 하지만 10년이 흐른 지금 한복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몇 년 전부터 한복 대여가 유행하면서 새로 한복을 맞추는 손님은 더욱 줄었다. 오고 가는 손님이 뜸해지면 할머니는 가끔씩 가게 구석에 누워서 새우잠을 청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해 본 일이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변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은 여름이면 에어컨, 겨울이면 난방이 되지만 그 시절에는 시장에 손님은 많았지만 제대로 된 냉난방 설비가 없었다. 여름에는 에어컨 대신 커다란 선풍기가 더위를 식혀 주었다. 요즘은 옷감이 워낙 좋아져서 전혀 그런 일이 없지만 당시에는 커다란 선풍기를 틀어 놓으면 화학 원단 때문에 눈이 따갑기도 했다. 항상 손님들로 북적거렸지만 특히 가을 혼수 시기가 되면 부산진 시장은 더욱 바빠졌다. 옛날에는 부모들이 시골에 많이 살다 보니 대부분 시골 농사가 끝나는 시기와 맞춰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근에는 주말이나 봄, 가을 혼수 시즌에 손님이 몰린다.
“15만 원짜리부터 층층이 있거든. 돈대로 해 준다. 그 집 형편대로 해 준다. 젤 좋은 것도 50, 60만 원 주면 돼. 밖에는 120, 130만 원 하는 거. 이 시장이 그만큼 좋은 시장이야. 진짜 좋은 시장이야. 사람들이 다들 참 좋아. 손님이 오면 최선을 다하려고 해. 나뿐이 아니고 전부 다 그래. 얼마나 감사하노. 우리가 이때까지 먹고 산 것도 다 손님이 와 주니 그런 거니. 내가 뭐 잘나 가지고 많이 팔고 그런 거 아니잖아. 그래서 항상 감사하게 여기고. 그래서 기도하지. 내한테 베 사간 사람이 잘 돼야 또 한 번이라도 더 와서 내 베 사 주고 그럴 거 아이가. 감사하게 여기고 살아야지.”
[황혼의 문턱에서]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한평생을 바쁘게, 또 열심히 살았다. 장사 수완도 좋았던 터라 주단 가게를 시작한 후 돈도 제법 모았다. 그러나 장사하느라 바빠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들에게 신경을 써 줄 형편이 못 되었다. 그때는 먹고사는 일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할머니도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남들처럼 아이들을 유명하다는 학원에도 보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자식들이 부모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식들이 좀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별 탈 없이 착하게 잘 자라 준 아이들이 할머니는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하다.
“사람 사는 것은 똑같잖아. 좋은 대학 보낼라고 서울에 학원 몇 달 보내고 했는데도 좋은 대학 못 갔어. 요새 아이들이나 옛날 아이들이나 다 똑같아. 옛날에는 우리가 이 장사한다고 내가 신경을 못 썼으니, 원망을 못하지. 일단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다 내가 해야 하니까. 이거 팔아서 내가 그 많은 식구들 다 먹여 살려야 하니까. 아이들 돌볼 여가가 없잖아. 내가 만약에 놀면 온 식구가 전부 벌이가 없는데. 식구가 얼마고. 그런 깐에 죽기 살기로 했지. 아이들 공부는 뒷전이었지. 언강 식구는 여럿이고, 그 자식들 곁에 엎어질 여가가 없는 거야.”
한때 할머니의 아들은 직접 원단 공장을 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아들이 한복 원단 공장을 시작한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평생 베를 파셨고, 아들은 기억나지도 않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등에 업혀 베를 팔던 엄마 젖을 먹으려고 부산진 시장을 드나들었다. 그 아이에게 베는 아주 친숙한 존재였으리라. 그리고 그 아이가 커서 원단 공장을 시작했다.
할머니의 아들은 처음 경상남도 진주서 원단 공장을 시작했지만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다시 공장을 열었지만 결국 손해만 보고 공장 문을 닫아야 했다. 원래 할머니는 주단 가게를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작년에 암 수술 받은 뒤로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며느리를 대신해 요즘 할머니는 다시 주단 가게로 출근한다. 곧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라 몸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할머니는 아직은 며느리를 대신해 가게를 지킬 여력은 남아 있다고 한다.
“베는 직접 다 떼가 하지. 옛날에는 우리 아들이 진주서 직접 공장을 했지. 그러다가 다 말아먹고. 중국 가서 손대는 바람에…. 옛날에는 우리 집에 사람 일곱이서 베를 팔았다 하면 얼마나 컸겠노. 우리 집에 기사가 둘이나 있었다 아이가. 근데 그것도 망해 물라카이 하루아침이더라. 최고까지 올라갔다가 지금 최하로 떨어져 있지. 인제 내가 바라보는 거는 우리 손자만 바라보는 거지. 밥은 안 먹고 살겠나. 작년에 우리 며느리가 암 수술을 했거든. 그래서 크게 신경을 쓰고 그러질 못해.”
원래 조선방직에 다녔던 할아버지는 그곳을 그만둔 후 줄곧 할머니와 함께 장사를 했다. 평생을 함께 장사했던 할아버지가 20년 전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지금까지 큰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큰아들하고 같이 산다. 큰며느리하고, 손자, 손녀. 우리 큰아들이 참 착하거든. 그래서 이 재산 다 털어먹었어도 내가 밉지가 않아. 우리 영감은 처음에는 조방 다니다가, 나중에는 내캉 같이 장사했지. 평생을 같이 장사했어. 그래, 할배 간 지는 20년 채 나. 일찍 갔어. 할배 가고 우리 아들들이 엄마만 있으니까. 그래도 그때는 장사를 잘해 가 돈이 좀 있었잖아. 그리고 엄마는 어쨌든 자식들한테 약하잖아. 그런 깐에 아들들이 쫓아다니면서 장사한다고 큰아들, 작은 아들이고 할 것 없이 아들 셋이서 장사한다고 들락거리니까 전부 다 날라 갔지. 그래 인제 남은 거는 빚만 남았어. 그래서 가도 오도 못 하고 이러고 있는 거야.”
[삶을 되돌아보며]
“내가 지금 돈은 없지만서도 그래도 내가 대통령 앞에 가도, 내가 진짜 열심히 살았으니까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어. 정말 열심히 살았어. 세금 내라 카는 대로 냈고, 거짓말 안 하고 남에 꺼 안 털어 먹고, 다믄 밥 한 숟가락이라도 배고픈 사람 오면 주고. 그래 열심히 살았으니까 당당하지. 그래,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누구 앞에 서도 기죽을 게 없어. 거짓말을 하고 그랬으면 죄책감이 들겠지만. 우리는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거는 전혀 없기 때문에, 어딜 가도 내가 당당하지. 내가 벌어가지고 일가친척들 내 힘닿는 대로 좋은 일 했고, 친구들도 내 힘닿는 대로 점심 한 그릇이라도 사서 갈라 먹고 그런 정신으로 살았지. 내가 뭐 돈 많이 벌어 가지고 자식 물려줘야지 뭐 그런 생각으로 살지는 않았기 때문에 당당해. 이렇게 살면서 돈 그거는 진짜 무서운 거거든. 남에 돈은 진짜로 무서운 거야. 내 돈은 내가 힘껏 벌어 놓으면 당당하지.”
할머니는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부끄러워 손님이 와도 이리저리 숨기 바빴다. 손님이 와도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무섭기까지 했다. 하나라도 더 팔아야 했지만 마음처럼 행동이 따라 주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던가. 가족과 먹고 살기 위해 장사를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가족의 생계가 이 가게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장사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가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할머니의 생활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한 평생 자신을 위해 좋은 옷, 좋은 신발을 사 본 적은 없다.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 돼. 그래서 후회는 없어. 그저 내 버는 대로 힘껏 살아왔으니까. 지금 죽어도 뭐 더 살고 싶은 것도 없고. 뭐 내 아직까지 이렇게 살면서 돈 벌인다고 메이커 신 한 번 안 사 봤고. 메이커 신발이고 가방이고 옷이고 뭐 그런데는 관심 없어. 그저 식구들 전부 어떡하면 고생 안 하고 살까. 그런 거 생각하고 살았지. 내 뭐 잘 입고 잘 쓰고, 뭐 메이커 찾는 그런 사람들 보면 진짜 그렇지. 메이커 그거 뭐하노. 전부 허영이지. 사람은 마음이 정직해야 해. 마음심이…. 그래 살고 있어.”
대가족을 건사하려면 자신을 위해 사치할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열 명이 넘는 대식구를 먹여 살리는 일이 어찌 쉬웠겠는가. 그래도 자신의 처지를 탓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에 비하면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했다. 장사를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돈도 벌어 봤고,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살아도 보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해서 마음이 편한 것이 아니라 진정 그렇다고 여긴다.
“우짜겠노. 내 팔잔데 뭐. 내가 이 집에 빚을 많이 져서 빚 갚는다고 그리 생각해. 그래 지금은 우리 손자, 손녀 믿고 안 사나. 밖에서는 백 몇십만 원 줘야 하는 옷, 여서는 40, 50만 원이면 해. 그 대신 이 시장은 많이 남가 먹고 이러진 않어. 대부분 다 그래. 15만 원부터 형편대로 해 주거든. 비싼 거 하면 뭐하노, 차라리 그 돈 아껴 가지고 사는 데 보태는 게 낫지.”
지금 우리 한복을 찾는 이는 드물다. 한복을 찾는다 해도 기껏해야 한 벌 정도 장만해서 사계절 내내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 전통 한복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계절용을 따로 맞춘다고 한다.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 나가야 되는데, 젊은 세대들이 우리 한복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너무 안타까워.”
50년을 매일같이 출근해 온 가게가 있고 옆에 가족이 있어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할머니는 “오늘 하루도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