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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장 건설을 반대한 아미동 조선 사람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67
한자 火葬場建設-反對-峨嵋洞朝鮮-
영어의미역 The Ami-dong people who opposed the establishment of a crematorium
분야 생활·민속/생활,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 히가시혼간지 부산 포교소 화장장, 아미산으로 이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7년 12월 - 부영 화장장, 아미동 건립 결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1월 - 아미동 주민들, 반대 운동 정민 대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2월 - 아미동 주민들, 조선 총독부에 진정서 제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3월 - 화장장 부지 재논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5월 - 화장장 건설 공사 착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12월연표보기 - 아미동 화장장 준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7년 - 아미동 화장장 이전

[일제 강점기 소외된 조선인 마을]

조선 시대 변방의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부산은 일본인에 의해 탄생한 도시다. 개항 이후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은 전관 거류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도시를 만들어 나갔다. 도로망을 계획하고 관공서를 배치했으며 병원과 상점을 열었다. 해안을 매축하고 전차를 운행하여 시가지를 확장하여 나갔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부산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인도 이주해 왔다. 혹은 장사에 나서기도 하고 혹은 매축 공사에 참여하는 등 열심히 날품을 팔았지만 경제적으로 늘 열악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일본인과 달리 점점 시가지를 벗어나 도시 외곽에 거주하게 되었다. 주로 지금의 중구 영주동, 서구 대신동·초장동·아미동, 동구 수정동·초량동 등 변두리 지역이었다.

부산의 도시 개발을 위해 일본인이 시행한 각종 시설은 조선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시가지 곳곳을 가로지르며 정비된 도로도 조선인 마을까지는 닿지 않았다. 조선인 지역은 지대가 높은 곳이 많아 상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으며, 대개는 우물물을 마셨고, 여름철이면 분뇨 문제가 당국의 큰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위생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보니 전염병에 노출되기도 쉬웠다.

1920년대 지역 개발 열기가 전 조선을 휩쓰는 가운데 부산에서도 도시 개발을 위한 각종 계획이 세워졌다. 그러한 가운데 여러 분야에서 공공사업을 부영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는데, 화장장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공공적 성질의 시설인 만큼 부산부에서는 화장장을 부영으로 운영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장소는 아미산 산록으로 결정했는데, 이곳에는 주로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화장장 건설은 조선 사람을 무시한 처사]

1928년 전기 사업의 부영화(府營化) 문제로 부산 전 시가가 떠들썩할 때 서쪽의 변두리 작은 마을 아미동에서는 화장장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항의로 시끌시끌하였다. 마을에 화장장이 들어온다는 것이 문제였다. 화장장과 같이 누구나 꺼려하는 시설을 건립한다고 했을 때 인근 주민들이 거세게 반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명령하는 대로 오늘은 살고 있지만 내일은 살지 않겠다. 부산의 화장장을 마을 한가운데로 가져온다는 역인(役人)의 안건을 작년에는 부결했으면서 금년에는 부협 의원 대다수로 가결하였으니 무슨 일인지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부협 의원에 대한 불신임안을 부산 부민 대회를 열어 결의하고 싶다. 마을 가운데에 있는 화장장을 깊은 곳으로 이전하는 것은 괜찮지만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마을 한가운데로 이전한다는 것은 전혀 올바른 지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11만 부산 부민 대표]

더욱이 조선인이 잘 사용하지도 않는 화장장을 주민의 대다수가 조선인인 마을에 둔다는 것은 주민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당시 화장장 건립 문제를 두고 일간지 『동아 일보』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인가(人家)가 조밀한 곳으로 화장장을 끌어 온 당국자들의 심사를 이해할 수 없는 바이니 이는 참 졸렬한 처치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안(案)을 세운 부윤은 어떠한 사람이며 그에 대하여 찬의를 표한 부협 의원들은 과연 어떠한 종류의 사람들이며 그 허가를 준 도지사는 어떠한 생각의 소유자인가? 부산 부윤이 일본 사람이오 부협 의원 30명 중의 27명이 일본 사람이오 또 도지사가 일본 사람이다. 그런데 곡정(谷町)[다니마치, 일제 강점기 아미동 지명]은 순전한 조선 사람 거주 구역이다. 또 습관상으로 조선 사람은 화장을 행하지 아니하여 1년 동안에 3, 4명에 지나지 못하는 터이다. 이러한 모든 점을 합하여 보면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을 멸시한 결과 이와 같은 행동이 감히 나오게 되었다.”

[부산에 화장장이 설치되다]

개항 이후 부산으로 건너오는 일본인은 해마다 증가하였고, 정착하려는 일본인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영구’를 기약하게 되었다. 신사를 세워 각자의 향신(鄕神)을 합사하였고, 사찰과 교회를 설치하여 안녕과 행복을 기도하였다. 일본인이 늘어나면서 사망자 수도 증가하였고, 1892년에는 전관 거류지 인근 복병산일본인 공동묘지도 마련하였다.

일본인의 장법(葬法)은 화장이다. 그러나 매장이 전통인 조선에는 화장장 설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화장장은 조선 전역 일본인 사회의 중대한 문제로 제기되었고, 곳곳에서 화장장 설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산에서는 오카모토[岡本] 모씨 외에 몇몇이 공동으로 보수천 입구, 대정 공원(大正公園) 서남쪽 연안에 소규모지만 화장장을 건조하였다.

화장장 부근은 전답으로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세가 남향인 데다 바다와 가까워 장래 부산의 시가로 발달할 중요한 지역인 것으로 보였다. 인체를 소각하는 장소로 오랫동안 사용할 수는 없었는데, 하늘도 이를 알았던 것인가. 어느 날 밤의 거센 폭풍과 격랑이 화장장을 파괴하면서 화장장으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못하였다.

그 즈음 동본원사(東本願寺)부산포교소에서 화장장을 경영하려는 기도가 있었다. 포교소의 신청에 따라 인가와 떨어져 있고 잘 보이지 않는 장소에 화장장을 건조한다는 조건으로 허락되었다. 이에 따라 1904년 사병산(四屛山) 산록인 대신리 298번지에 화장장이 신설되었다. 포교소에서는 1906년 11월 1,500엔을 들여 납골당 건설에도 착수했고, 이듬해 7월에 완공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부산 수비대 영소(營所)를 보수천 상류에 건설하게 되었다. 화장장에서 나는 연기와 냄새가 병사들에게 크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침저녁으로 화장장을 보아야 하는 것은 병사들에게 괴로운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화장장은 1909년 아미산 산록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전 부지는 1906년 복병산으로부터 이전한 일본인 공동묘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미산 골짜기를 우회하여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간 곳에 자리 잡은 부지는 원래부터 잘 보이지 않는 장소였을 뿐 아니라 부근에는 큰길도 지나지 않고 인가도 거의 없었다. 규모는 작다고 하더라도 화장장 부지로는 꽤 적당한 장소였던 것으로 주민들은 기억한다.

[콜레라가 유행하던 시절]

국권 피탈로 전관 거류지 제도가 철폐된 이후 조선인과 일본인은 구덕산에서 아미산에 이르는 부산 서부 지역 전답과 임야를 개척하며 시가지를 만들어 갔다. 국권 피탈 직후 아미동 부근에는 약간의 조선인 가옥과 군데군데 일본인 주택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시가지가 점점 확대되면서 이로부터 밀려난 조선인들이 아미산 산록에 모여 살게 되었다. 특히 일본인 공동묘지를 거쳐 암남으로 통하는 도로가 다시 만들어지고, 이후에 하단 도로가 정비되면서 산록 주변으로 조선인 부락이 형성되었다.

1920년 9월에서 10월로 넘어갈 즈음 부산 일대에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사망자는 화장장으로 옮겨졌는데, 아미동 사람들은 운반되는 관구(棺柩)를 매일 적게는 10여 관, 많을 때는 수십 관을 보아야 했다. 게다가 화장장 규모가 협소하고 그 설비가 불완전하여 도착하는 시체는 자연히 화장장 앞뜰에 쌓였는데, 어떻게도 처리할 방법이 없어 결국에는 지상에 널어 두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패하고 문드러진 시체에서 생긴 구더기가 관에서 기어 나오는 광경을 본 주민들은 혐오감과 함께 극도의 공포심을 참을 수 없었다. 썩어 가는 시체 냄새는 살을 태우는 연기에 더하여져 서쪽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을 타고 멀리 아미동토성동, 초장동, 부민동 인가로까지 날아갔는데, 주민들은 그 악취를 감당하지 못하였다.

특히 아미동 부근에 사는 조선인은 밤낮으로 시체가 운반되는 광경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맹렬한 콜레라 바이러스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분개한 아미동 주민들은 시체 진입을 막으면서 오랜 시간 대치하였고, 집회를 열어 화장장 폐지를 서둘러 요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주민들은 부산 부윤인 혼다 스네키치[本田常吉]에게 서면을 제출해 화장장의 폐단을 지적하는 한편 화장장 이전을 간절히 요구하였다.

혼다 부윤은 하시기 슈우헤이[橋木秀平] 경찰서장과 함께 아미동 주민들을 위로하고 사체를 소각할 수 있도록 조정에 나섰다. 화장장은 공공시설인 만큼 공영으로 할 것이며, 아미동 주민의 이익을 고려하여 그 장소도 반드시 다른 적당한 곳을 골라 이전시킨다는 것이 당시 혼다 부윤의 공약이었다.

[부영 화장장 건립 계획]

부산부 내에는 아미동 외에 부산진영도에 민간이 경영하는 화장장이 있었다. 그러나 설비가 매우 조악하여 이용하는 일본인의 불평이 많았고, 조선인도 화장의 잔혹스러움 등을 제기하면서 설비 개선이 시급하였다. 공공적 성질을 가지는 시설인 만큼 부영으로 한다는 것은 이미 결정된 부산부의 방침이었다. 하지만 예산과 장소 문제로 사업은 용이하게 진척되지 못하였다.

부산부가 수행해 나가야 할 시설들을 순서대로 해결해 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정체될 뿐으로 쓸데없이 노력만 낭비하는 것이다. 이후에는 가능한 것부터 해결하여 문제를 새롭게 할 방침이다. 화장장의 경우도 어쨌든 부영으로 할 것이므로 먼 장래에는 어떻게 되든 우선은 해결할 수 있는 것부터 해결할 생각이다.”[고니시[小西菉] 부산 부윤]

1924년 12월 부협의회에서는 화장장부영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실지 답사를 진행하였다. 예산 문제로 진척되지 않던 사업은 1926년 초 예산이 책정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서부 부산의 어느 지점에서 적당하게 선정하는 것으로 대략적인 위치도 결정되었다. 아미동 화장장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자동차가 드나들 도로를 만든다는 계획도 세웠다.

부영 화장장이 시가지의 일부인 아미동 2가 서쪽 고지를 예정 부지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느 일본인과의 교섭으로 토지 매수 수속도 대략 마무리 지었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아미동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하며, 사법관까지 연서한 진정서를 부산부청에 제출하였다.

“근래 우리 부산부 당국에 화장장을 공영으로 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듣고 우리들은 은근히 기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1920년 혼다 부윤의 공약에 따라 불완전한 현재의 화장장이 법규의 제한에 적합한 곳으로 이전되며, 또한 적법한 시설을 추가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부산 부윤은 혼다에서 고니시를 거쳐 이즈미자키 사부로[泉崎三郞]로 바뀌어 있었다.

“혼다 부윤의 공약은 부윤이 교체되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종래 화장장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아미산 산록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시가지 일부인 곡정 2정목, 도로와 인가에 가까운 고지로 끌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인근 주민들이 깊은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 이 점입니다. 마치 포도주를 줄 것처럼 공약을 하고는 도리어 인진(茵陳)을 주는 것과 뭐가 다른 것입니까. 이는 단지 공약 위반에 대한 불신을 공시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신부(新付) 황민을 대우하는 데에 잔인하고 냉혹한 처사가 아닌가요.”

화장장 건설 부지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부산부에서는 지역민의 반대 의견을 듣고만 있을 뿐 이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의견도 발표하지 않았다. 단지 묵묵히 행정의 진척에만 노력하였다. 이 정도의 반대 운동쯤이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달리 이전할 만한 적당한 후보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고, 그곳에서도 반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지금의 시설을 개선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다. 특별히 이것은 최신의 무연 무취(無煙無臭) 장치이므로 최후의 단행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려 중이다.”

“장래 부산부의 대세로 보아 곡정이 가장 적당한 곳으로 생각된다. 시대의 진화에 따라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화장장을 무연 무취의 신식 장치로 개축한다는 것은 총독부 경무국의 의사에도 합치될 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이 발달된 지금 죽은 사람을 태우는 데 무슨 느낌이 있으며 종래 화장법에 비하면 훨씬 진보된 것이니 사람 사람의 불안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지 않느냐.”[이즈미자키 부산 부윤]

[아미동, 화장장 부지로 결정되다]

“부협의회 결의로 종래의 화장장인 곡정 뒤편 산록은 교통이 불편하다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이번에는 화장장을 곡정 한가운데로 이전키로 결정하였다.”

화장장이 처음 들어선 1900년 무렵 아미동에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으나 이후 많은 사람이 이주하여 1920년대 후반에는 1,000여 호의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이르렀다. 주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고는 하나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공간으로, 조선인 마을 중에서도 특히 열악하여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빈민 지대로 여겨졌다.

이러한 아미동에는 이미 화장장이 있을 뿐 아니라 인근에 공동묘지까지 있었던 탓일까. 관계 당국에서는 애초부터 아미동을 가장 강력한 화장장 부지로 염두에 두고 논의를 진전시켜 왔다. 화장장이라는 다소 ‘불쾌’한 시설은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시가지 내에 두는 것은 곤란하지만, 시가지로부터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어야 이용하는 데 큰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인구를 다수 포옹하는 미래를 서부 지방이 다분히 가지고 있는 이상 현재의 장소에서 멀지 않는 장소를 가장 좋은 장소로 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완전한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면 좋으므로, 한편으로 말하면 교통을 묘지에 접근시킬 것, 인구가 비교적 주밀한 장소 및 수리가 편리할 것 등이 필요하다.”

기존 화장장의 위치는 도로에서 떨어진 산 중턱이다 보니 이용하는 데에 불편함이 많았다. 부산부로서는 공공시설로 운영한다는 근본 취지에서 그 불편함을 제거하기 위한 약간의 위치 수정은 필요하였다.

“종래 화장장인 곡정 뒤쪽의 산록은 교통이 불편하지만 지금의 예정지는 도로를 개착할 필요가 없고 자동차의 통행도 자유로우며 부지를 기부할 사람도 있다. 이 화장장이 완성되는 날에는 이전에 길 가운데서 행하는 장례 등은 폐지하고 자동차로 관을 옮겨 송제(送祭)를 마친 후 바로 다비소로 들어가 중유 소각(重油燒却)을 행하게 되므로 잠시만 기다리면 뼈를 수습해 갈 수 있어 편리하다.”

화장장 설치를 반대하는 아미동 주민들은 신식 설비를 설치하는 것으로 설득할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어디까지나 일본인에게 편리한 설비일 뿐이었다.

“화장도 무연 무취의 완전한 장치를 만드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화장장은 장제장(葬祭場)을 겸한 신식의 설계로, 휴게장(休憩場) 등을 포함한 자못 문화적인 공장 설계가 대략 완료되어 있다.”

1926년 9월에 정식으로 입안된 부영 화장장 설치안은 1927년 12월 23일 부협의회에서 무기명 투표에 붙여져 20여 명의 출석 의원 중 3명을 제외한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화장장 건설의 방향과 위치, 설계 등 모든 부분에 대한 찬성이었다. 1928년 1월 21일, 이 결과 그대로 시행하라는 경상남도지사의 허가도 떨어졌다.

주민들의 반대로 재논의가 되기도 하였지만 애초 예정된 위치에 화장장과 장제장을 병설한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곳은 현재의 화장장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장소로, 도랑에서도 가깝고 도로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울산경찰서 서장이었던 일본인 고지마[小島孝]의 소유지 2,644.63㎡[800평]를 매수해서 신설 화장장에 충당한다는 계획이었다.

[화장장 이전 반대의 봉화가 오르다]

부영 화장장 부지가 최종적으로 아미동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부 지역 주민들은 화장장이전저지위원회를 꾸리며 맹렬한 반대 운동에 돌입하였다.

“화장장 취체 규칙의 정신을 유린하고 있으며, 설령 무연 무취의 장치에 의한 예외가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부산과 같이 더 적당한 위치를 구할 수 있는 곳에서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번에 결정된 위치는 서부 전차의 연장과 함께 부산부의 주택 지구로 발전될 운명을 가진 곳입니다. 부산부의 팽창·발달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부당한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1928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반대 운동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있던 화장장도 이전해 달라며 요구한 세월이 10여 년인데, 오히려 더 가까운 곳에 새 화장장을 만든다고 하니 가슴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다. 주민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는 부산부의 태도에 보다 강력한 대응이 필요해 보였다.

1월 16일 오전 11시 반 아미동 방면 440명의 조선인 대표 정주서(鄭周瑞)와 정지훈(鄭志薰) 등 16명은 부산부청으로 야마우치[山內] 이사관을 방문해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앞서 이미 와다 쥰[和田純] 경상남도지사와 오카모토[岡本] 경찰서장에게도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화장장이 처음 설치될 당시에 우리 곡정은 불과 10여 호를 헤아리는 후미진 곳으로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화장장이 허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 해마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점차 화장장으로 접근하고 있는 지금, 인구의 수도 늘어나 1,000여 명을 헤아리기에 이르렀습니다. 관련 법규에서도 묘지 혹은 화장장의 경우는 도로, 철도, 하천, 수류(水流), 수원(水源), 마시는 우물물 등과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시가지로 접근시키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곡정 주민들은 협상을 거듭하여 화장장의 위치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도록 할 것입니다.”

무연 무취의 시설을 갖춘 신설 화장장은 인근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주지 않을 것이라 얘기하지만, 죽음을 가까이에서 접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꺼려하는 주민들에게 그러한 ‘신식’ 시설에 큰 의미가 부여될 리 없었다.

“삶을 즐기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세간의 자연스러운 정서입니다. 죽은 사람을 태우는 화장장을 시가지에서 벗어난 곳에서 반대로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죽은 사람의 관과 유골을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은 도저히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누구라고 수긍할 것입니다.”

대체할 만한 장소도 나름 고민하여 제시해 보았다.

“만약 적당한 위치가 없을 때는 아래쪽 임시 도로의 산월교(山月橋)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계곡으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뒤쪽 산등성이를 선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책일 것이라고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부협 의원 2, 3명이 실지를 조사도 했다고 하는데, 누구라도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지점을 부지로 결정한 것은 전연 민중의 의향에 반하는 폭거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아미동은 지대가 높아서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개울가의 우물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데, 가까이에 화장장이 있다는 것은 위생상으로도 좋을 리 없다는 것이 주민들의 한결같은 이야기였다.

이렇게 주민들은 진정서를 통해 아미동의 실정을 전달하며 화장장을 설치하지 말아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하지만 부 당국에서는 이미 부협의회가 거의 만장일치로 가결된 사안이므로 지금 다시 변경하기는 어렵고, 화장장은 연기도 없고 냄새도 없도록 설비를 완비할 것이므로 위생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정민 대회(町民大會)를 개최하다]

화장장 설치를 반대하는 아미동 주민들이 1월 25일 오전 9시 신설 현장에 모였다. 임시 회장 정훈(鄭薰)의 개회 인사로 시작된 이날 정민 대회에는 500여 명의 주민들이 참가하였다. 주민들은 화장장 이전을 끝까지 저지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대회에 임하였고, 3시간 남짓 계속된 진지한 논의 끝에 앞으로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운동 방향을 결의하였다.

1. 조선 총독에게 위치 변경의 청원서를 제출할 것

1. 화장장 공사를 저지할 것

1. 현장에 있는 서당을 보류할 것

1. 각 관계 관청으로 정민 전부 출두하여 청원할 것

1. 현재의 화장장 배척의 건

정민 대회가 종료된 후에는 바로 화장장이전저지위원회가 열려 이후의 방책을 심도 깊게 논의하였다. 결의문은 바로 위원을 보내 직접 조선 총독에게 제출하며 진정하기로 하였다. 혹 그 기간 중에 당국에서 공사에 착수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이후 반대 운동을 진행해 나가는 데 큰 지장이 될 수 있으니 필사적으로 저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날 정민 대회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이소무라[磯村武經] 등 일본인도 참여하였다. 아미동에 거주하면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던 이소무라는 아미동 주민들과 보조를 같이하며 화장장 설치에 반대의 뜻을 표명하고 나섰다. 하지만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한계 때문이었는지 다소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며 아미동 주민들에게도 신중하게 신사적으로 행동할 것을 충고하기도 하였다.

“사람으로서 가장 싫어하는 화장장을 인가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은 그 설비가 아무리 진보하여 무연 무취라고는 하더라도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힘이 다하는 한 법이 허락하는 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그런데 듣자 하니 조선인 측에서는 끝까지 초지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대회를 열고 결의문을 만들어 총독에게도 진정하는 것 같다. 그 의기가 매우 왕성하다 하지만 직접 행동으로 호소하는 것과 같이 필요 이상으로 분투하는 일에는 충분히 신중했으면 한다.”

당국의 입장은 확고하였다. 반대 운동을 일으킨 주민들의 심사를 납득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만을 되풀이해 밝힐 뿐이었다.

“형식상으로 부산부 협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찬성한 안건이며 부이사자의 원안을 수정해서 결의한 것이다. 그 결의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 내에서는 부협의회 혹은 도 평의회를 결의 기관으로 하라는 논의가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이번 결의에 대해서 감독관청으로서 반대하지 못하고 인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 문제를 부산부 협의회에 자문을 요청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전에 부협의회에 상정되었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을 텐데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왜 당시에 부협의회로 적당한 조처를 하지 않았던 것인지….”[나가토부[長富] 부산부 위생과장]

[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다]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아미동 주민들의 맹렬한 반대 운동은 두 달 남짓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부산부는 원안대로 관철한다는 입장만 고수하였고 주민들은 ‘여론을 무시한 전정적(專政的)인 태도’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부산부를 상대로 한 진정이 수용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주민들은 답답한 마음에 직접 조선 총독에게 진정하기로 하였다. 정주손(鄭周孫)과 이소무라 등은 1,500여 명의 주민이 연서한 「화장장 신설 허가 취소 청원서」를 1928년 2월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조선 총독과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郞] 정무총감 앞으로 제출하였다.

“화장장을 신설할 ‘목적지’를 관찰하면 동쪽으로는 큰 도로와 직면해 있고 남쪽으로는 인가가 조밀한 주택지 및 시가와 작은 계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 떨어진 거리는 가까운 곳은 침을 뱉으면 서로 닿을 수 있을 정도이고 먼 곳도 40~50간을 넘지 않습니다. 서북쪽으로 이웃한 곳에는 4채의 가옥에 현재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창문을 열면 ‘목적지’를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토지를 골라서 화장장을 신설한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상식이 있고 양심이 있는 자라면 필시 화장장을 바라보는 일이나 혹은 사체를 태우는 기미가 아침저녁으로 부근의 주민에게 심한 불쾌감을 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화장장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인근 주민들에게 단지 심리적인 시름과 관망에 의한 불쾌감을 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혹 전염병이 유행하여 사망한 사람들이 화장장으로 옮겨질 때면 병균이 전염되지나 않을까 공포스러운 마음도 떨칠 수 없었다.

“어느 날 문득 콜레라라도 유행하게 되면 예년과 같이 인근의 주민들에게 공황을 야기하는 일이 없다고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콜레라는 거의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유행한 전례가 많습니다. 만약 파리나 모기의 오물로 옮겨지거나 바람을 타고 화장장 밖의 민가로 흘러들거나 혹은 사람이나 가축에 묻어 시가 사이로 흩어져 병독이 전파되는 일이 있다면 그 위험은 과연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지만 부산부에서는 화장장을 관망하면서 느끼는 불쾌감은 잠깐일 뿐이라고 하였다. 화장장의 외관은 예쁘게 치장할 것이기에 시가 한가운데에 두어도 큰 무리는 없으며, 물론 연기와 냄새도 전혀 내지 않는 시설로 만들 것이기에 위생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화장장은 시체를 소각하는 장소이므로 인간의 시름과 고뇌로 울적한 곳입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것을 보더라도 슬픈 마음이 들면서 가슴이 아픈데, 하물며 이것을 우리 집 뜰 앞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목격하는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설비로 냄새와 연기를 희박하게 할 수는 있다고 하지만 모든 시체를 연소한 기운이 공간에 흩어지고 바람에 날려 사람의 감각 기관에 느껴지게 하는 것까지 전혀 없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진심으로 화장장이 부산부에서 결정한 곳에 신설되는 것을 기피하며 전전(前前) 부윤의 공약이 실행되기를 바랍니다. 부산 서부 시가의 주민에 대해서도 인격적 대우를 해 주어 영성의 질곡과 쇠망에서 사전에 구해 주기를 경남도지사와 부산부 당국에 바라마지 않습니다.”

조선 총독 앞으로 제출하는 진정서를 이케가미 정무총감에게 전달한 위원은 부산부 협의회에 재협의하도록 하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다시 오라는 정무총감의 회답을 받을 수 있었다. 부산으로 돌아온 위원들은 우선 화장장 설치 건에 대한 인가권을 가지고 있는 미즈구치[水口] 신임 경상남도지사를 방문하여 정무총감의 뜻을 전달하고 화장장 인가 취소를 간곡하게 청원하였다. 부산 부윤과의 교섭도 시작하였다. 더불어 부민 대회를 개최해 화장장 설치에 대한 반대 기세를 높이기로 결의하였다.

[화장장 부지에 대한 재논의]

총독부로 낸 진정서가 효력을 발휘한 것인가. 원안대로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고수하던 부산부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28년 3월 16일 오후 5시 남포동 모처에서는 화장장 문제에 관한 부산부 협의회 간담회가 열렸다. 어쩐 일인지 이날 협의회에는 조선인 측 의원은 제외된 채 일본인 의원들만 참석하였다.

간담회에서는 원안을 고수하자는 측과 수정을 가해야 한다는 측 두 파로 나뉜 의원들 간에 열띤 논쟁의 벌어졌다. 논의 끝에 예정된 부지가 좁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붙여 보다 깊은 곳까지 부지를 연장하되 가장 마지막 부분에 화장장을 설치하는 것으로 절충되었다. 새로운 장소를 다시 물색할 수는 없지만 마을로부터는 최대한 거리를 두겠다는 의도였다. 그렇게 하면 주민들에게 미치는 폐해는 줄일 수 있을 것이라 덧붙이며.

1. 현재 화장장 이전 부지를 확장하여 서쪽 골짜기 쪽으로 향한 토치를 매수할 것 (단 화장장 이전은 예산 범위 내에서 행할 것).

1. 바로 이 방침으로 부이사자의 승인을 구할 것(확장 부지는 오쿠로 유키치[大黑酉吉]씨가 책임지고 매수의 임무를 맡을 것).

[화장장 부지 확장은 말장난?]

부산부 협의회 간담회에서 화장장 이전 부지를 보다 깊은 곳으로 확장한다고 하자 아미동 주민들은 일단은 반기면서 반대 운동을 중단하고 결과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후 들리는 얘기는 주민들의 기대와는 다른 듯하였다. 화장장 이전 부지를 뒤쪽으로 확장한다는 것이 실은 기존에 예정된 위치에서 겨우 2, 3간 뒤쪽으로 옮기는 것일 뿐, 어디까지나 기존에 정했던 부지 내에 설치한다는 것이 당국의 의향이라는 것이다.

“부 당국의 연장 해석이 다소 차이가 나는 점이 있어 580평[1,917.36㎡]의 부지에 인접한 토지를 약 200평[661.16㎡]을 매수하여 15간 연장함에 불과한 것이 판명되자 지역 주민들은 불과 15간 들어가는 것은 민의를 용인한 것이 아니라 하였다. 3월 26일 부청을 방문한 대표자들은 이에 대해 간절히 진정하였다. 변경 담을 지지한 일본인 의원들은 의외의 해석 차이에 크게 놀랄 정도였다.”

그 즈음 새로 취임한 구와하라[桑原] 부산 부윤에게 화장장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이즈미 부윤이 남겨 놓은 화장장 문제를 구와하라 부윤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아미동 주민뿐만 아니라 부산 부민 전체가 주시하였다.

“장소가 절대로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때 1927년도 예산에도 계상되었고, 또한 장소 및 시설 등에 대하여도 부협의회에 자문되어 이미 합법적으로 되었으므로 본 부윤이 자발적으로 변경하기는 곤란하다.”

여러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구와하라 부윤의 속내는 지금까지의 경과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산부 수장의 자세를 보건대 화장장 문제를 대하는 당국의 입장은 미루어 짐작이 된다. 과연 아미동 주민들의 반대 운동은 어떠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당국에서는 ‘재논의’ ‘수정’ 등의 문구로 그저 비난의 화살만을 무마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화장장 건설 공사 착수]

1928년 봄도 깊어 5월 말. 우여곡절을 거듭하던 화장장 문제도 그 끝을 보였다. 아미동 주민들의 거센 반대 운동에 더 이상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 어려웠던 부산부가 한 발 물러서는 ‘양보’의 미덕으로 ‘타협’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간 화장장 설치 절대 불가의 기치를 높였던 주민들의 요구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결론이었다. 그것도 토지 매수에 필요한 비용 등 추가되는 공사비 약 1만 2,000엔은 지역 주민이 기부하는 조건이라고 하니 과연….

어떻든 ‘타협’은 성립되었다. 부산부에서는 기존에 예정했던 화장장 부지에는 장제장을 설치하고 화장장은 분리해 예정한 위치보다 약 140~150간가량 오지로 들여 설치한다는 수정 확정안을 작성하였다. 지금의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2가 천주교 아파트 자리다. 애초 예정된 화장장 위치이자 장제장이 있었던 곳에는 지금 아미 치안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수정안은 30명 부협 의원에게 서면으로 전달되었고, 30명 부협 의원 중 28명이 찬성하는 것으로 가결·통과되었다. 이로써 화장장 건설 공사가 재개되었다. 공사는 일신기업회사에 의뢰하였고, 바로 감독과 기사를 초빙하여 공사에 착수하게 하였다.

부산부영 화장장은 1928년 12월 20일 화장로 2기를 완성하는 것으로 준공되었다. 당시 화장장 부지는 3,200㎡[968평] 3합, 건물은 449.59㎡[136평] 6합이었다. 화장 시설은 발명자인 일신기업회사가 특허를 가지고 있던 무연 무취의 화장로 2기 설비로, 1시간 내외 완전 소각이 가능한 것이었다. 부산부에서 호언장담해 오던 화장로의 무연 무취 성능은 기대 이상으로 좋아서 지켜보던 경찰관도 경탄의 말을 뱉을 정도였다고 한다. 첫 화부(火夫)로는 일신기업회사 종업원 기요미즈 요지로[淸水要次郞]가 고용되었다.

[화장장과 더불어 살았던 삶]

아미동 화장장은 매일 4명 이상의 장사를 치를 정도로 매우 번잡하였다. 2기의 화장로로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는데, 1930년대 중반에는 이미 1년에 1,600건 이상 장사를 지냈다. 조선인 가운데에도 화장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1939년에는 화장자의 약 3분의 2가 조선인일 정도였다. 이에 따른 불편함이 늘어나면서 화장로를 증설하고 통행 도로를 확장해야 한다는 요구는 이후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화장장이 건립된 후 아미동에는 날마다 장례 행렬이 줄을 이었다. 화장장을 가득 메운 곡소리가 끊임없이 들렸고, 사체를 태우는 악취가 온 마을에 풍겼다. 화장장 연기가 아미산 골짜기를 뒤덮었고, 떠나는 자를 위해 제물로 차려졌던 음식은 까치들을 불러 모았다. 그 때문인지 지금의 서구 아미동사하구 괴정동을 이어 주는 천마산과 아미산 사이의 고개를 ‘까치 고개’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도시화의 바람을 타고 살아 보기 위해 부산이라는 ‘근대 도시’로 이주해 왔지만 정작 ‘근대 도시’의 혜택은 전혀 받지 못한 채 변두리에서 살아야 했던 아미동 사람들. 일본인이 슬그머니 밀어 놓은 화장장은 단순한 혐오 시설이기 이전에 그들의 소외된 삶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더불어 살면서도 절대로 같아질 수 없었던 삶.

하지만 정민 대회 등을 통해서 보여 준 그들의 행동은 비록 화장장 이전이라는 궁극적인 목적까지는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당국의 일방적인 행정력에 제동을 걸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켜 나갔다. 그것이 화장장과 장제장을 분리하고 화장장의 위치를 조금이나마 옮겨 낸 것처럼 결코 크지 않은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실질적인 변화는 조금씩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내내 아미동 사람들과 함께했던 화장장은 광복 후까지 사용되다가 1957년 진구 당감동, 지금의 개성고등학교 자리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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