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동본원사 부산별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625
한자 東本願寺釜山別院
영어의미역 Busan Branch Temple of Dongbonwonsa Temple
이칭/별칭 진종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 6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인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찰|별원
양식 팔작지붕[대웅전]
정면칸수 7칸
측면칸수 3칸
소유자 대각사
관리자 대각사
건립 시기/일시 1877년 11월 5일연표보기 - 본원사 출장소로 창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959년 11월 23일연표보기 - 화재로 전소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9년연표보기 - 재건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77년 - 부산자선교사 설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78년 12월 - 본원사 출장소를 대곡파 부산별원으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78년 - 한어학사 설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97년 - 사립 유치원 설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98년 - 일본부인회 조직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02년 - 본산으로부터 독립 경영
현 소재지 대각사 -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 6지도보기
원소재지 동본원사 부산별원 - 부산 서정 1정목 8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에 있던 개항기 일본 진종 대곡파 본원사의 별원.

[위치]

동본원사 부산별원(東本願寺釜山別院)의 건립 당시 주소는 부산 서정 1정목 8번지로, 현재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 6번지대각사(大覺寺) 위치이다.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의 『조선 포교 일지』에 따르면, 1877년(고종 14) 당시 거류지는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거류민의 대부분이 동관 쪽에 살아 비어 있던 서관의 양국 대사 응접소 3동 중 한 동을 빌렸다고 한다. 그 후 가메야마 리헤이타[龜山理平太] 이사관으로부터 영구 차용의 인가를 받았다.

[변천]

1877년 11월 5일에 창립된 동본원사 부산별원은 일본 진종 대곡파 본원사(眞宗大谷派本願寺) 소속이다. 부산항 개항 후 1877년 9월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진종 대곡파가 조선에의 포교를 시작할 때, 임진왜란 직전 정탐을 목적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오쿠무라 죠신[奧村淨信]의 후예 오쿠무라 엔신을 부산에 파견하였다. 오쿠무라 엔신은 관리관에게 부탁하여 참판관(參判官) 관사를 빌려 본원사 출장소(本願寺出張所)라 칭하고 조선 포교에 착수하였으며, 1878년(고종 15) 12월에 대곡파 부산별원(大谷派釜山別院)으로 개칭하였다.

동본원사 부산별원은 개설 시부터 문화적 침략주의를 분명히 드러내어, 일본인 거류민들에게 조선어를 교습시키기 위한 한어학사(韓語學舍)[1878]를 부설하고, 사립 유치원[1897], 일본부인회[1898] 등을 설립·운영하였다. 특히 빈민 구휼을 목적으로 설립한 부산자선교사(釜山慈善敎社)[1877]는 1904년(고종 41) 봉공부(奉公部)를 두어 러일 전쟁 출정 군인의 가족 구호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사찰의 경영에 있어서는 창립 이래 본산(本山)[교토의 동본원사]의 보조를 받았으나, 1902년(고종 39)부터 신도들의 희사금, 화장장 이용료 및 임대 수입 등으로 독립 경영을 하였다. 1912년 당시 주임 승려는 대행돈혜(大幸頓慧)이며, 신도 호수(戶數)는 1930년까지 일본인 550호, 조선인 50호의 수준을 유지하였으나, 1931년 조사에서는 일본인 3,690호, 조선인 82호로 큰 변화를 보였다. 해방 후 경남불교종무원으로 사용되다가 현재의 대각사가 되었는데, 6·25 전쟁 시기와 1959년 11월 23일에 큰 화재를 입은 것을 1969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시에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형태]

동본원사 부산별원의 지적은 총 3,200㎡이며, 건평은 본당 173㎡, 고리(庫裡)[부엌] 190㎡, 유치원 119㎡, 종당(鐘堂) 13㎡, 납골당 18㎡, 물치(物置)[창고] 61㎡, 기타 271㎡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는 화쟁교단(和諍敎團)의 중심 사찰인 대각사로 바뀌었는데, 재건된 대각사 대웅전은 정면 7칸에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기단의 재질은 콘크리트이다. 사찰 한 켠에 자리한 범종은 동본원사 부산별원 시절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1890년(고종 27) 주종 당시 시주하였던 부산 지역 일본인 재력가 다수의 명단이 각인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동본원사 부산별원은 일본 불교의 조선 포교 효시로서, 당시 부산에서 신도 수가 가장 많았던 대표적인 일본인 사찰이다. 그러나 조선 포교 출발은 다분히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 교토의 동본원사가 오쿠무라 엔신을 조선에 파견한 것은 내무 대신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외무대신 데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등이 동본원사 관장(管長)에게 서한을 보내 포교를 종용한 데 따른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본원사 부산별원은 당시 조선의 조야 인사들과 일본 정부를 이어 주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