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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402
한자 李東仁
영어음역 Yi Dongin
이칭/별칭 아사노 토진[淺野東仁·朝野東仁]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 6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인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교인
성별
대표경력 통리기무아문 참모관
활동 시기/일시 1879년~1881년 -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개화파 승려로 활동
몰년 시기/일시 1881년 5월연표보기 - 사망
활동지 동본원사 부산별원 -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 6지도보기

[정의]

개항기에 동본원사 부산별원오쿠무라 엔신과 교류하였던 개화파 승려.

[개설]

이동인(李東仁)[?~1881]의 출생 연도와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소속에 대해서도 불명확한 점이 많다. 그동안 이동인이 부산 출신으로 범어사, 혹은 봉원사의 승려였다는 등의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으나, 지리적인 여건 등을 고려해 볼 때에 개항 당시 이동인의 소속은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의 『조선 포교 일지』[1877]에 기술되어 있는 통도사가 유력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일본식 이름인 아사노 토진[淺野東仁·朝野東仁]’으로 불리었다.

[활동 사항]

1. 일본 밀항

1879년 이동인은 개화파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정세를 시찰하기 위해 밀항을 모색하였고, 6월 초 동본원사 부산별원의 일본인 승려 오쿠무라 엔신을 만나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동인오쿠무라 엔신을 만나러 동본원사 부산별원을 처음 방문한 것은 1878년 6월 2일이었다. 오쿠무라 엔신의 『조선 포교 일지』에는 1879년 6월 ‘동인 일본 만유 사정(東仁日本漫遊事情)’이라는 제목 아래 이동인의 일본 밀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본의) 본산 사무소에서 한국 포교 등에 관한 회의를 하고 잠시 사무를 보고 나니 8월 중순이 되었다. 이때 포교 시찰을 위해 교육과 녹사(敎育課錄事) 와다[和田圓什]씨와 한어(韓語) 학생 금색양인(金色良忍)이 출장하게 되어 같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한국 승려 동인(東仁)이 일본에 들어가려고 부산별원에 머물러 있었다. 와다씨에게 상담하여 동인을 본산에 보내기로 하였다. 동인은 원래 승려인데, 항상 나라와 호법(護法)을 걱정하는 신경가(神經家)였다. 최근 조선국의 국운이 쇠퇴하고 종교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 있는데, 이에 혁명당 박영효, 김옥균 등이 국가의 쇠퇴한 운명에 분개하여 크게 쇄신하려고 하였다.

동인 또한 뜻을 같이하였으므로 박영효, 김옥균이 동인을 불러들여 중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열국의 공법(公法) 등을 알기 위해 우리 종문에 귀의하여 일본에 건너가려고 하였다. 동인은 박영효로부터 받은 순금봉(純金棒) 4개[길이 2촌 여, 둘레 1촌 여]를 나에게 보여주며 이것으로 여비로 써 달라며 건네주었다. 이에 와다씨 및 총영사관 마에다[前田獻吉]씨와 상의하여 본산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것은 한국 개혁당이 일본에 건너가는 최초의 시도였다. 동인이 일본에 도착하여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2. 동본원사 승려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

이와 같이 이동인오쿠무라 엔신의 주선으로 총영사, 동본원사의 협력 아래 1879년 9월 상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의 동본원사에 도착하였다. 다음 해 4월 득도식을 마치고 도쿄의 아사쿠사별원[淺草別院]에서 기숙하였는데, 도일 이후에는 일본어를 습득하고 동본원사의 승려가 되어 일본 국내 정세는 물론 국제 정세 등에 대해서도 학습하고 있었다. 1880년 9월 도쿄에 온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과 만나, 이동인은 일본 정부 측의 의뢰를 받아 일본인으로 변장하는 과감한 행동과 술책을 펼치며, 친청(親淸) 체제를 청산하고 일본과 손을 잡고 개국해야 한다는 일본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열성적으로 설득하였다.

귀국 후에 김홍집은 이동인을 민영익(閔泳翊)에게 천거하였고, 민영익을 통해 고종을 알현하여 일본 등의 국제 정세를 상주하였다. 이후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참모관이 되었으며, 미국과 체결할 조약의 초안 작성을 담당하는 등 일약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 과정에서 이동인은 왕의 밀명을 받아 청의 주일 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을 위한 알선을 부탁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조선 포교 일지』에는 1880년 10월경부터 동본원사 원산별원을 중심으로 유대치(劉大致), 이동인, 무불(無不) 등에 대한 기사가 거의 매일 등장하여 매우 급박한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하고 있다.

3. 죽음

그런데 이동인은 출발에 앞서, 가까운 시일에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보낼 것이며, 일본 육군의 교관을 초빙하고 공채를 발행하여 무기를 조달할 것이라는 것과, 통상(通商)·이용(理用)·교린(交隣) 등의 분장 업무와 인원 배치 등을 정부의 공식 발표에 앞서 하나부사[花房] 공사에게 상세히 알려 주었다. 김홍집의 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자기가 천거하여 승려의 신분으로 국왕을 알현하는 등의 출세 가도에 오르게 되었으나, 이후부터는 민영익이나 김옥균 편에 서서 일을 진행하는 한편, 경솔하게도 국가의 기밀을 발설하고 일을 성급히 추진하는 등 믿을 수 없는 자로 비춰졌을 것이다. 게다가 한미 수교와 한영 수교를 둘러싸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고 있던 이동인을 위험인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 같다. 결국 1881년 신사유람단 파견에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던 이동인은 출발 직전 5월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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